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95)
* * *
한때 위대한 제국의 황성이 있던 자리였으나, 지금은 유적지이자 유원지인 이곳에는 국립 박물관이 위치해 있었다.
그 박물관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과 그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인이 몰려 들어가자, 안에서 초로의 사내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어서 오시게. 한 삼 년만인가?”
“예. 탐라로 출국하기 직전에 뵙고 처음이지요.”
“시간 참 빠르군. 아 참, 올해 정교수가 되었다지?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어르신도 올 겨울에 환갑이시지요? 환갑연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허허, 바쁠 텐데 굳이 그럴 거야 있겠나. 그저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나 싶을 뿐이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노인과 중년인은 과거 사제지간이었으니, 중년인이 박사 과정을 밟을 때 노인이 지도 교수였었다.
“자, 다들 집중하세요.”
중년인 우단 교수가 말하자, 두리번거리고 있던 젊은이들, 우한대학교 역사학과 학생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 계신 분은 내 스승이시자 이곳 박물관의 관장님이신 자오찌엔 박사님이십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짝짝짝.
“하하, 반갑습니다. 이렇게 장차 이 나라 역사학계를 이끌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자오 관장은 손자뻘인 젊은이들을 둘러보며 환하게 웃었다.
예전, 그러니까 우단 교수의 학생 시절만 해도, 정치경제적인 혼란으로 인해 역사학계의 맥이 거의 단절되었다.
그런 암흑기를 지나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학생들 수십 명을 한꺼번에 마주하자, 자오 박사로서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도의 수가 늘어난 것도 그렇고, 그것이 그의 나라가 안정과 힘을 되찾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에도 그랬다.
“다들 알겠지만, 여기 응천 박물관이 있는 곳은 본래 명나라 황성이 있던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여러 분이 딛고 있는 이곳은 과거 동야의 관청이 있었지요.”
자오 관장의 말에 학생들이 모두 시선을 내려 그들의 발 아래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박물관 건물이 옛 동야의 관청사는 아니었다. 그곳은 과거 명나라 황성이 불타 무너지면서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좀 아쉽지요? 박물관이야 다른 데 지어도 되니, 이곳은 유적터로 두거나, 동야의 청사를 복원해 두었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사실, 이 박물관은 본래 응천시의 청사였고, 시청사를 건설할 때만해도 여기가 동야가 서 있던 곳임은 미처 알지 못했지요.”
자오 관장이 말하자, 문득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에 관장이 무슨 일이냐 묻자, 그가 사뭇 날카로운 눈매로 물었다.
“제가 어디서 듣기로, 고려가 그 청사를 지어 준다면서 황성터의 유물을 쓸어 갔다던데 사실입니까?”
“……?”
학생의 물음에 자오 박사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우 교수를 바라보았다.
우 교수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이다가 관장을 대신해 말문을 열었다.
“이 건물이 고려의 지원으로 세워졌고, 고려의 건설사가 설계한 것도 맞지만, 엄연히 나라에서 세운 것입니다. 고려인 몇몇이 현장에 있긴 했겠지만, 그들이 여기서 유물을 가져갔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래도 고려인이 있었다면, 유물 한 점이라도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 아닙니까?”
“……처음에는 유물을 쓸어 갔냐고 묻더니, 이제는 한 점이라도 빼돌렸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겁니까?”
우 교수는 여전히 황당한 중에 조금 화가 나서 되물었다.
“고려인들이 중국에서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간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건물의 건설에 고려가 개입되어 있다면, 그 틈을 타서 고려인들이 뭔가 훔쳐 갔을 가능성이 있었겠다 싶어 질문한 것뿐입니다. 얼마 전에도 송나라 시대의 보물이 고려로 밀반입될 뻔하다가 걸리지 않았습니까. 요즘도 그러는데, 과거에는 더 심했겠지요.”
“…….”
우 교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건 남학생의 반론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고려로 중국의 보물이 넘어갈 뻔했던 일이 있긴 했지만, 그건 중국인 도굴꾼 집단이 외국에 팔아넘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범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있을지언정, 고려가 중국의 것을 훔쳐 갔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다만, 우 교수가 말문이 막힌 이유는, 일단 그 남학생의 말속에 스며들어 있는 고려에 대한 배척이 너무 깊어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그의 입을 강하게 막은 것은, 그 남학생의 발언에 동조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남학생에게 더 반박하면, 배신자 내지 매국노로 낙인찍힐 것 같은 분위기가 그를 막막하게 만든 것이었다.
다행히, 제자의 곤란함을 눈치챈 자오 교수가 나서서 대신 말문을 열었다.
“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다만, 다행인 건 당시에 응천시는 쑨 총통의 세력권에 속해 안정되었던 곳이라, 고려라 해도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지요.”
자오 관장의 말에 학생들이 반색하였다.
고려로 유물이 흘러들어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보다는 간접적으로 쑨 총통을 찬양하는 듯한 의미가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하하, 그러니 더는 괜한 걱정은 말고, 박물관에 있는 여러 유물들을 살펴보세요. 과거 고려에 비해 우수하면 우수하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많은 유물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후, 학생들은 박물관 직원들을 따라 삼삼오오 박물관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역사학과 학생들답게 유물에 관심이 높았으니, 곳곳에서 유물을 보고 감탄하거나 그 유물에 대해 논의하는 말들이 흘러 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명대 황실이 운영한 회사들을 통칭하는 천건사(天建社)의 문양이 박혀 있는 유물들 중 세력(世曆) 기원년에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은 인기가 좋았다.
천건사가 만든 물건들은 수백 년 뒤에 보아도 그 만듦새가, 당대 문물을 이끌었다는 고려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위대할 수도 있었던 중국의 발목을 잡아 쓰러뜨렸고, 이후에도 수백 년에 걸쳐 경쟁하고 있는 고려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자 열등감이 만든 정신적 피로감이 천건사 문양이 박힌 유물들을 보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좀 더 유연해지게.”
“…….”
멀리서 학생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보다가 2층의 관장실로 향한 두 사제가 마주 앉았다.
자오 관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먼저 말하였고, 우 교수는 좋지 않은 안색을 감추지 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려에 대한 우리네 여론이 좋지 않은 게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인가.”
“하지만, 요즘 여론 흘러가는 모양이 정상적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까 그 학생도 우국학단이라는 단체 소속입니다. 어깨에 걸린 견장을 보면 알 수 있죠. 매일 교내에서 다른 나라나 민족을 비난하고, 쑨 총통을 찬양하는 발언만 일삼는 녀석들입니다. 어린 학생들뿐만 아니라, 신문과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들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정부에서 학회에 공문을 보냈는데, 과거 고려가 명나라를 침공한 것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노림수가 뻔한 것이었지요. 애초에 고려가 명나라를 침공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고려는 당시 명나라의 내전에서 연왕의 편에 선 것에 불과하고, 사실상 승전했음에도 땅 한 조각 얻어가지 않았는데, 침공이라고 표현한 것부터가 의도를 비춘 것이지요.”
“뭐, 당시 고려가 연왕의 편에 선 것뿐이라고 하기에는 이후 동양의 역사가 크게 달라진 걸 생각하면 다소 부족하지 않나.”
“제 말이 그런 학문적인 해석이나, 의미의 차이가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우 교수가 답답한 양 토로하자, 자오 관장이 담배 한 대를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우,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잘 아네. 나도 얼마 전에 공문을 받은 게 있었네. 이곳에 전시된 유물 중에서 천건사 유물의 설명을 수정하라는 것이었네. 그 물건들이 실상은 고려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천건사는 고려산임을 감추기 위해 문양만 밖은 것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삭제하라는 것이었지.”
“하아…….”
“좀 흥미롭기도 하더군. 어느새 박물관 표지판에서 그런 내용을 빼면 국민들이 천건사의 실상을 알지 못할 정도로 달라진 역사가 자리 잡았나 싶어서 말이야.”
“그럴 겁니다. 쑨 총통이 집권한 뒤로는 특히 그랬지요.”
사실 쑨 총통 이전에도 천건사의 실상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교육 과정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본격적인 역사 연구에서는 그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대략 10년 전부터 역사학계에까지 검은 손길이 뻗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심하자는 말일세. 소나기가 오면 피해야지 싸워서는 아니 되는 법이야. 특히 자네는 탐라에서 유학하지 않았나. 자칫하다가…….”
자오 관장은 뒷말을 아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는 뻔했다.
현재 쑨 총통은 핏물로 대지를 적셔 정권을 잡은 후, 대국재건이라는 기치를 내걸어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희생양이 필요한 건 당연한 바, 벌써부터 외국의 간첩을 잡았다는 소식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물론, 그 간첩 혐의자가 정말 간첩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에 대한 소식은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취급하지 않았고, 우물쩍하는 사이에 다른 사건이 터져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지곤 하는 게 반복될 뿐이었다.
막말로, 탐라 유학파인 우 교수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고려의 학우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유학 이후에도 고려에 여러 번 방문했으니, 그 정황을 간첩 행위로 조작하는 건 정권 차원에서는 여반장일 것이다.
“역사학도로서 요즘이 정말 괴롭습니다. 대체 사람들은 역사에서 배우는 게 그리도 없단 말입니까. 갑술화의 이후부터 중국이 사방의 포위를 풀기 위해 수없이 싸웠지만, 뭐라도 성과를 얻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평화적으로 교류하는 시기에 번영할 수 있었지요. 아니, 포위망은 차치하고 고려 하나만 두고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고려와 싸워서 득이 된 적이 있기는 합니까?”
“…….”
“성영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실지(失地)의 천자로 역사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남을 뻔했던 그가 중국 역사 통틀어 최고의 황제 중 하나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평화와 교류에 힘을 기울인 덕이 아닙니까.”
“요새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더군. 고려에게 아부해서 살아남은 굴욕의 대명사처럼 쓰는 자들도 많아.”
“하아…….”
우 교수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다시 크게 내쉬었다.
자오 관장의 말은 그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역시나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고려의 물산에 이름표만 바꿔 단 천건사의 물건을 두고 중국 문명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자들이 정작 천건사를 세운 성영제를 폄하하는 걸 보면 제대로 된 머리를 가진 자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성영제가 천건사를 세운 건 사실상 패전한 전쟁에서 고려와 비밀 조약을 맺고, 그 조약에 따라 상당량의 고려의 물산을 수입해야 할 처지에 놓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미봉책이었다.
하나, 시작은 그처럼 미미하고 부끄러웠을지언정, 얼마 지나지 않아 천건사는 명나라 황실의 최대 기반이 되어 주었다.
또, 그렇게 모인 자본을 통해 성영제는 명나라의 근대화 내지, 고려 따라 하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고, 이후 역사 변천을 생각해 볼 때, 하마터면 근대화에서 완전히 낙오될 뻔했던 중국을 구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기에 역사는 성영제를 두고, 비록 실지한 황제이긴 하나, 패망의 위기에 처한 명나라를 재건하는 걸 넘어 중흥으로 이끈 명군으로 칭송해 왔다.
그러니 당금의 정치들이 단지 성영제가 고려와 친했음을 두고 중화의 긍지를 버린 반역자 취급하는 걸 보면, 역사학자인 그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저는 쑨 총통도 결국은 역사의 쓰디쓴 교훈이 다시 새기는 결과만 만들 거라 생각합니다. 명 성영제 시절부터 큰 경우만 따져도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된…….”
“자네는 우리가 고려와 싸우면 질 것이라 생각하나?”
“싸우기도 전에 질 거라 생각합니다.”
“싸우기 전에?”
“예, 고려는 굳이 무기를 들어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원화만 찍어 내면 대신 싸워 줄 나라들이 수두룩하니까요.”
“기축통화를 가지고 있다고 그걸 함부로 찍어 내지는 못할 걸세.”
“그야 그렇지요. 제 말은 원화를 통해 더욱 극대화된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쑨 총통의 라디오 연설에서는 세상 전체와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군대가 있다고 자랑하던데.”
“그냥 비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과한 비유지요.”
“재작년에 고려의 집권당이 바뀌면서 오래된 동맹도 흔들거린다고도 들었네만.”
“고려의 집권당이 바뀐 게 어디 한두 번입니까? 고려의 체제가 견고해진 건 오래된 동맹만큼이나 오래되었고, 집권당의 교체는 내부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는 있어도 외교적인 변화로는 두드러지지 않을 겁니다. 특히 오래된 동맹은 더욱 그렇지요.”
‘오래된 동맹’이란 갑술화의 이후 고려를 중심으로 대중국의 포위망을 형성한 외교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동맹도 결속력도 변모하였고, 그 동맹 소속 국가들의 면모도 변하였다.
하나,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동맹 자체는 그 이름처럼 오래도록 지속되고 있었고, 그 동맹에 도전했던 중국을 늘 좌절하게 만들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땅이 크고 인구가 많은 건 교역과 교류만으로도 강국의 위상을 떨칠 수 있다는 뜻인데, 어찌 그걸 가지고 전쟁을 도모할 생각만 하는 건지…….”
우 교수가 마지막으로 한탄을 하는데, 문득 자오 관장의 의미심장한 말이 그의 귀에 박혔다.
“자네는 언제부터 그렇게 패배주의자가 되었나?”
“……?”
“아니면, 누구 말대로 물들어서 온 겐가?”
“……!”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우 교수였지만, 그의 스승이 차가운 시선으로 던지는 말의 의미를 깨닫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네 말은 구구절절 옳지. 하나, 세상은 이성으로만 움직이는 건 아닐세. 때로는 옳지도 않고, 근거가 부족해도 밀고 나갈 수 있는 게 인간 세상이야. 특히, 국가의 명령이라면 그렇지.”
국가의 명령이라는 말이 우 교수로 하여금 속내로 비명을 지르게 하였다.
“……그 국가의 명령은 누가 내리는 겁니까?”
“국가지, 무엇이겠나. 역사학자라면 언제까지 300년 묶은 바다 귀신에게 짓눌려 살아야 하는지 울부짖는 국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거라 보네만?”
300년 전에는 그와 자오 관장의 국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비아냥부터, 역사학자가 무당이냐는 비꼼을 지나, 그 바다 귀신이 명나라의 재건을 적잖이 도왔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까지 무수한 답들이 우 교수의 머릿속에 연달아 지나갔지만, 그는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존경해마지 않던 스승님까지 팽배하는 국가주의에 매몰되었다는 걸 깨닫자, 그저 우울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자네를 예의주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그러니 정말 조심하게.”
마지막으로 들린 스승의 충고에서 조심하라는 말이 결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들리진 않았다.
서력 1711년, 세력 311년.
중국은 다시금 고려와 오래된 동맹을 향해 군기를 들어올렸다.
2년에 걸쳐 총동원된 규모만 600만에 이르는 거대한 중국의 군대는 찰나의 승기를 잡기도 했지만, 고려가 본격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연패에 빠져 버렸으니, 결국 당대의 정권은 무너졌고, 중국은 또다시 혼란기에 빠졌다.
역사적으로는…… 흔한 일이었고, 뻔한 이야기였다.
* * *
300여 년 뒤에는 어디선가 바다 귀신쯤으로 불릴 탐라공이 탐라로 귀환한 건 6월 말이었다.
도중에 왕도를 방문하느라 쓴 삼 일과 항해 기간을 제외하면, 이십 일 정도 중국의 땅에 머문 셈이었다.
귀국 직후 탐라공은 순보를 통해 종전을 선언하였으니, 그 내용이 호외로 발간되는 날, 탐라섬은 온통 만세소리로 가득했다.
다만, 그다음 정규 순보에 전사자의 목록이 실리면서 애도의 분위기가 짙게 깔렸으니, 파병의 규모에 비해 희생자가 적다곤 하나, 그럼에도 그 절대적인 수가 작은 건 아니었기에 여기저기서 곡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슬픔에 젖은 분위기는 군의 귀환 즈음에서는 다시 변하였으니, 애도하는 중에도 탐라 조정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참전 군병들의 개선을 환영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실제로 종전 선언 후 2주 정도 지난 뒤에 1차로 귀환한 군병들을 시작으로 거의 한 달 동안 탐라섬은 축제의 장으로 변모하였다.
비단 탐라섬에 호구가 있는 군병뿐만 아니라, 남면 출신 군병들은 물론, 왜국의 고용병들까지 여러 번에 걸쳐 탐라섬을 거쳤고, 그들 모두를 위해 개선 행사를 치러 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흥겹기만 한 시간이 지나고 나자, 서서히 다른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많은 군자를 소모하고 많은 군병들이 희생되었는데, 정작 탐라국이 얻은 건 별로 없다는 지적이 조금씩 들린 것이었다.
특히, 사롱의 단주이자 탐라공의 외척인 최종도가 순보에 그 점을 지적하는 투고를 하면서 제법 논란이 일었다.
고려의 위상을 높였고, 고려의 강역을 보다 확실하게 규정하는 등의 성과가 있긴 하나, 명명백백한 탐라국의 이득은 보이지 않으니, 군병들의 희생과 백성들의 노력이 허무하지 않느냐는 그 비판은, 탐라공의 높은 위상 탓에 오히려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동조자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불러다 때려 줄까요?”
“허허.”
“진심이에요. 아주 며칠 기절시켜 놓을 수도 있어요.”
“무서운 말은 그만하고, 이리 좀 가까이 와 보시오.”
몽주는 침상 위 푹신한 이부자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 안겨 오는 앵도를 끌어안았다.
“내가 내 입으로 밝히지 않아도 언제고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그때까지만 참으시오.”
“그래도 그렇지. 어찌 감히 공을 함부로 평하나요?”
“지금은 모르니까 그럴 수도 있는 법이오. 그리고 그런 자들보다 안 그런 자들이 훨씬 더 많으니, 괘념치 마시오.”
“다른 이는 몰라도 종도 이 녀석은…….”
“어허, 처사촌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몽주는 앵도의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앵도의 콧바람이나, 그녀의 손끝이 그의 턱과 뺨을 매만지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평화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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