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398)
* * *
“형님, 잘 계신지 모르겠소? 거기서도 쇠를 만지고 계시오? 나도 곧 거기로 갈 것 같은데, 그곳에도 같이 낚시할 데가 있소?”
“…….”
단 위에 놓인 유골함을 어루만지며 넋두리를 하듯 말을 흘리는 노인은 몽주의 아비 해민이었다.
어느새 팔순이 멀지 않은 나이이자, 화극이 세상을 떠난 나이를 넘긴 그는 화극의 기일만 되면 새삼 인생의 후미임을 절감하는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해민에게 있어 화극은 거의 유일한 친구이자 서로 형님 아우님 하는 사이였다.
탐라공의 아비인 탓에 절로 높아진 위상은 해민으로 하여금 편히 친구를 둘 수 없게 만들었는데, 사실 몽주도 잘 몰랐지만, 해민이 아내 주이와 함께 탐라섬을 떠나 한양부에서 오래 머물렀던 것은 비단 사원을 창건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몽주의 부모라는 위치가 부담스럽고 편하지 않아 떠나 있던 것이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화극만은 유일하게 말을 편히 할 수 있는 사이였다.
화극이 원래 상대의 지위에 위축되는 성격도 아니었고, 화극 본인의 위상 또한 탐라공 바로 다음 격이었으니, 해민과도 서로 ‘만만한’ 사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화극의 말년에 해민은 그와 함께 낚시를 하고, 산책을 하는 등 더욱 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그만큼 화극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슬픔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몽주가 천몽 속에서 얻은 몸의 주인인 몽린의 아비일 뿐이라지만, 수십 년 간의 천몽 속 삶을 영위하면서 아버지라 여긴 탓일까.
현대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아버지가 된 해민의 말이 씨가 될까 저어하여 입을 열고자 하였는데, 그 전에 아들 강중이 먼저 해민의 손을 붙잡으며 말하였다.
“할아버지, 그런 말씀은 마세요. 화극 어른도 굳이 얼른 오라 재촉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허어, 이런……. 내가 네 앞에서 몹쓸 말을 꺼냈구나.”
해민은 촉촉한 눈매를 훔치곤 손자를 향해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긴 미소를 보였다.
유교적인 제례가 정착되기 전인 당대에서 제사는 조선 이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조상신의 축원을 기리는 행위로서의 제사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었지만, 16세기 중반 이후에나 어느 정도 자리가 잡을 주자가례의 풍습과는 거리가 먼 시절의 제사가 현대와 같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불교의 영향이 크다는 점이었다.
특별하고 부유한 가문이든, 평범하거나 가난한 가문이든, 당대 고려의 제사는 기본적으로 불교 사원에서 진행하거나, 특별한 경우에는 승려들을 초빙하여 대신 행사를 진행하게 하였다.
또, 제사의 주도 또한 남녀에 구별이 없고, 장남 차남의 구분도 의미가 없었으며, 일가친척이 아닌 이의 참석 또한 흔히 있는 일이었으니, 이 시대의 제사는 제례이기 전에 추모식에 가까웠다.
기본적으로 절에서 준비를 하고, 그에 대한 대가는 공양의 형식으로 각자가 지불하였으니, 사실 상조업(相助業)이 바로 당대 일반적인 사원의 주요 수익원이기도 했다.
이는 탐라공 이후 ‘돈놀이’를 비롯하여 심히 세속적인 사업이 불가능해진 탐라국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는 면이었으니, 몽주는 규제와 더불어 탐라국의 사원이 제사와 납골의 일을 통해 사원 유지를 위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어지간한 사원마다 납골과 제사를 전담하는 불당과 승려들을 두게 되었고, 사업의 번창을 위해, 즉 고객(?) 유치를 위해 관련 편의 시설과 공간도 마련하고자 하였으니, 사원의 근처에 따로 추모객들이 쉴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탐라국의 제사는 어찌 보면 소풍 내지 사원 나들이나 다름없었고, 화극의 제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비단 몽주가 아니더라도, 화극 본인과 그의 가문은 얼마든지 화려하고, 거창하게 제사 행사를 치를 능력과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화극의 성품이 그렇지 않음은 물론, 탐라공조차도 화려한 예식을 삼가는 터라, 다른 자들이 부와 권력을 뽐낼 수 있는 풍토가 자리를 잡긴 힘들었다.
하여, 화극의 제사는 그의 납골이 있는 사원인 승송사(僧訟寺)에서 그곳의 주지가 직접 나와 경을 외는 소리 속에서 소박하게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화극의 유골함 앞에 모여 추모와 회고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때, 몽건이가 유골함이 올라 있는 단에 새겨진 글귀를 읽었다.
“나만큼이나 행운과 기적을 얻으며 산 자가 있을까”
화극의 제사가 소박하다곤 하지만, 그래도 화극의 유골함은 다른 백성들과는 구분되는 특권을 얻었는데, 대리석으로 된 단 위에 화극을 상징하는 강철의 손이 유골함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단에 새겨진 글귀는 화극이 숨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토한 말들 중 하나였다.
“이건 아마 지금 탐라 백성들이라면, 모든 이들이 자신의 유언으로 남길 만한 말일 겁니다.”
몽건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가 같이 유골함을 바라보며 말을 받은 자는 홍길도였다.
봉왕청장의 일을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온 그는 현재 내관대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렇지요. 누가 아니 그렇겠습니까.”
몽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다가 시선을 돌려 그의 형과 시선이 마주하자 빙그레 웃었다.
모른 척하였지만, 몽주로서는 그 시선들이 다소 민망했다.
그가 이제껏 한 일이 과대평가된 것 같아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비밀을 숨긴 채 본연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믿는 자들의 칭송과 아직 남아 있는 기대감에 대한 민망함이었다.
어쨌거나 몽주도 그 단에 새겨진 화극의 유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화극이 말한 행운과 기적이 무엇을,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짐작하기에도 뻔했지만, 화극이 직접 대놓고 밝히기도 했었다. 그가 남긴 유언은 단에 새겨진 것만이 아니었으니까.
원래도 말이 다소 많은 편인 화극이 유언이라고 줄여 말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유언은 아직 의식이 분명하고, 어느 정도 거동도 가능한 시절에 자기가 유언을 남기겠노라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 죄다 모아 놓고 공표하듯 말한 것이기도 했으니…….
* * *
“이제야 하는 이야긴데, 사실 내가 탐라공을 처음 본 건 신돈의 집 앞이 아니야. 그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거든. 내가 죽은 정첨 그 친구에게 진 빚이 있어, 그의 여식이 혼인한다기에 혹시나 좀 모자란 놈이면 뒤에서 은근히 밀어줄 요량이었지. 근데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꽤 괜찮은 놈인 거야. 그래서 뒤에서 살펴 주기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키워야겠다 마음을 먹었지. 그런데 신돈의 집 앞에서 떡하니 만났어. 심지어 먼저 나를 찾아 만나길 청하기도 했어. 이야, 이게 무슨 인연인가 싶어, 조카사위라고 친근하게 굴면서 가까이서 살폈지. 그러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어. 신돈은 물론이고, 포은 선생이나 요동공과도 이미 친분이 있었으니, 내가 그간 헛으로 살폈구나 싶었던 게야.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깨달았지. 내가 행운과 기적을 얻으며 살게 되었구나 하고 말이야. 아니 그런가? 나만큼이나 가까이서 오랫동안 경험하고, 목격하며 산 사람이 또 있어? 끌끌!”
유언의 장은 수다의 장이었고, 화극의 단독 무대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주된 소재는 결국 탐라공과 함께한 삶이었다.
명나라에 사신단으로 갔던 이야기, 황해에서 수장될 뻔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온갖 기물을 만들어 내고, 무기를 개발하면서 겪었던 고됨과 그것을 이겨 낸 끝에 얻은 희열에 대한 이야기들을 거쳐 통무총리로서 명나라와의 전쟁을 이끌어 승리한 이야기까지.
그의 이야기가 끝이 없는 것처럼 그가 경험한 행운과 기적 또한 그만큼 많았다.
“탐라공이 나보다 많이 젊어서 정말 다행이야. 앞으로도 수십 년간은 탐라국이 더욱 발전할 것이고, 그만큼 탐라국의 뿌리도 더욱 튼튼해지겠지. 물론 내 아들들의 대부로서도 크게 안도되고 말이야.”
늦은 밤에 유언식(?)을 마친 후, 화극이 탐라공에게 청하여 따로 독대하였을 때, 그가 메마른 손으로 탐라공의 손을 굳게 쥐면서 말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함세.”
몽주는 그게 아들들을 부탁하는 말인 것 같아 먼저 그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말하였었다. 한창 유언이랍시고 말을 뱉을 때는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그게 꽤 힘든 일이었는지 한층 초췌해진 그에게 서둘러 휴식을 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소소한 것 말고.”
하나, 화극의 부탁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너무 믿지 말게. 사람이든 제도든 기물이든. 자네에 의해 많이 바뀌고 완전히 바뀐 것 같아도, 이제 고작 30년이 지났을 뿐이네. 반동이라 하지 않던가? 화포가 빵 터지면, 포탄이 앞으로 휙 날아가도 포신은 뒤로 밀리는 법이지. 뭐, 그래,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래도 노파심에 한 번 더 말함세. 너무 믿고 맡겨 두지 말게. 나처럼 자리보전하기 전까지는 자네가 죄다 해 먹으란 말일세.”
아마도 당시 명나라와의 전쟁 이후, 총동원령을 성공적으로 견뎌 낸 탐라국 체제에 대한 믿음이 보다 강해진 몽주가 그 전까지 탐라 조정을 통해 완전히 장악하고, 관할하던 몇몇 권한들을 대신들이나 지방 수령에게 이전하는 일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사실 몽주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권력을 놓는 건 아니었다.
지방 군수과 시장에게 치안청과 소방청의 운영을 맡기고, 대신들이 ‘전결’할 수 있는 예산의 규모를 적당한 수준까지 올리고자 하는 정도였다.
이는 나날이 방대해져 가는 탐라국의 규모를 탐라공이, 그리고 탐라섬에 있는 조정에서 모두 감당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예산의 편성과 주요 인사권은 여전히 탐라 조정에서 주도하거나 승인해 줘야 하는 터라, 권한의 위임이 권력의 누수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 보였는데, 그것마저 화극에게는 불안한 요소로 보인 듯했다.
그래도 화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걱정 말고 마음 편히 하십시오. 계속 행운과 기적을 이어 가겠습니다.’
적어도 몽주의 마음이 다소 해이해질 수도 있는 시점에서 경각심을 조금이나마 일깨워 준 것만으로도 화극의 당부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하기야 완벽한 ‘시스템’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특히 인간이 한 발이라도 걸치고 있다면 더더욱.
그의 말마따나 ‘화약’이 터진 지 고작 30년밖에 안 된 지금은 여전히 뒤로 물러나려는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언제나 그 점을 경계해야 함이 마땅했다.
몽주는 화극의 유골함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그의 당부를 되새겼다.
‘잘해 보겠습니다. 훗날 다시 뵈…… 아…….’
죽어서 다시 볼 때 부끄럽지 않겠노라 다짐하려던 몽주는 순간 머쓱해졌다.
탐라공 석몽린이 죽어도 몽주는 죽는 게 아니었으니, 저승에서 몽주가 화극을 다시 보는 게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설령 만난다고 해도, 몽주가 몽린이 아님을 깨달은 화극에게 세상을 속였다며 혼쭐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았다.
‘아니, 그 전에 내세가 진정 있으려나.’
“와아…….”
그렇게 몽주가 화극을 두고 연신 생각을 이어 가며 쓸데없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 문득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몇몇 소년 소녀들이 모여 어딘가를 바라보며 감탄을, 큰 소리가 나는 걸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움을 표시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
아마 승송사에 납골된 다른 유족들의 아이들로 보이는 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놀라워하는 방향에는 강중이가 있었다.
그리고 강중의 곁에는 까치 두 마리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마리는 그의 손등에, 다른 한 마리는 그의 오른 어깨에 앉아 있었다.
“허어, 몇 번 보긴 했습니다만, 볼 때마다 신기하군요. 이상하게 사람은 당연하고 동물마저도 조카를 많이 따릅니다. 저 까치는 체구는 작아도 맹금이라 사람을 경계함은 물론, 때로는 공격하기도 하는데 말이죠.”
몽건이 형의 곁에 서서 감탄하니, 몽주도 동감하였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아직 아이인터라 동물들이 경계하지 않는다 여겼을 뿐이었는데, 이제 강중이 청년이 되었음에도 저런 신기한 광경을 종종 연출하니, 대체 뭔가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기운이 있다면, 조카의 기운은 친밀함일 겁니다. 그것도 아주 강한 기운이겠지요. 사람들 중에서도 별 이유 없이 마냥 좋고, 친해지고 싶은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조카는 그런 이들 중에서도 으뜸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무슨 문제일까 싶었지만, 몽주가 보기에 강중의 ‘기운’은 그런 수준을 넘은 것 같았다.
그가 부모인 터라, 어차피 그 친밀함이 극에 이르러 체감하지는 못하지만, 종종 강중의 주변에 사람들이 꾀고 따르는 걸 보면 신기함을 넘어 사뭇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강중이가 19살 때였던가. 홀로 함주의 누이를 찾아갔다 오겠노라 하기에 호위군병 겸 짐꾼 하나와 여비만 주고 어찌하나 두고 본 적이 있었다.
물론 한 무리의 정예 군병들로 하여금 몰래 그 뒤를 쫓아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였다.
한데, 불과 열흘 만에 그 군병들이 침울하게 돌아와, 공자를 놓쳤다며 죄를 청하니, 몽주와 앵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 크게 군병들을 풀어 강중의 행방을 찾았는데, 나흘 후에 강중의 편지가 공택에 닿았다.
서둘러 펼친 그 편지에 담긴 강중의 사정이란…….
[……하여, 이자들이 아버님의 위명에 놀라 서로 경쟁하듯 죄를 밝히고 벌을 청하니, 소자가 고심 끝에 형벌로 다스리기보다는 죄를 씻을 기회를 주는 게 낫다 감히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궁구하니, 이자들이 전에 행패를 부렸다는 경산시에 한창 저수지 공사가 진행 중이라 들었고, 그들에게 그 저수지 공사를 돕도록 하여 조금이나마 죄를 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데, 이들을 그냥 두고 떠나려니 도리가 아닌 듯하여, 소자도 얼마간 이곳에 남아…….]동래시에서 우연히 조우한 왈짜패들을 보고, 그들을 타일러(?) 개과천선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은 그들이 쉽게 승복한 걸 두고, 자신이 탐라공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아버지 탐라공의 위명 덕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몽주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탐라공이라는 이름이 높다고 해도, 왈짜패가 쉽게 사죄를 청할까.
그럴 거면 애초에 탐라국에 살면서 왈짜 짓거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탐라공의 자식임을 알고 납치나 협박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니, 강중이 한 그 일은 거의 순전히 그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봐야 했다.
“……외관부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
강중이 다분히 근처 아이들을 위해 까치들을 희롱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지난 에피소드를 떠올리던 몽주가 문득 아우에게 말을 건넸다.
“외관부요? 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조카의 기운이 사람과의 관계에 이로우니, 외관부도 썩 어울리지 않습니까.”
아우의 조언도 있고 해서, 강중에게 차차 후계자로서의 삶에 대해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아들은 그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단지 후계자로 임하여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만 있기는 싫다며, 관리로서 일을 하며 실력을 키우고 싶다고 한 후에 외관부에 임하는 걸 청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편인 듯한데.”
“그렇습니까. 하나…….”
“강중이의 특별한 면 덕분에 사람들이 그에게 모두 잘해 주니, 어쩌면 그런 호의가 기본인 것처럼 여기게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외교에서는 절대로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게 호의인 법이고.”
“음, 그렇다면 오히려 외관부가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만?”
“……?”
“기왕이면 명나라를 전담하게 하고요. 어차피 세상 모두가 조카에게 호의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실 거라면, 탐라나 고려에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외국, 특히 명나라 정도는 되어야 그럴 가능성이 있겠지요.”
“음…….”
아우의 말마따나 역으로 생각하니, 그게 오히려 장차 강중이를 위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당금 동아시아의 외교 질서는 7년 전과는 판이해졌으니, 그 대표적인 상징이 대사관이었다.
지난날, 왜국과 처음으로 대사를 교환하여 전례를 만든 몽주는 갑술화의 이후, 연나라와 대사를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 나라들에 연이어 대사를 파견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명나라 응천부에도 1년 반 전에 대사관을 열었다.
물론, 명나라는 대사 교환의 협정을 맺고도, 그 내용을 곡해하여 탐라의 대사를 마치 상주 사신처럼 여기고, 정작 명나라의 대사는 탐라에 파견하지 않고 있었다.
결코 동등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수작이긴 한데, 몽주의 입장에서는 얄미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솔직히 이득이면 이득이지,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스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대사를 한쪽만 파견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손해일까.
그저 명나라에 파견된 대사와 관리들이 명나라 등쌀에 피곤해지는 것만이 걱정일 따름이었다.
그러니 만약 강중이에게 세상을 결코 호의로만 대할 수 없음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명나라만큼 적합한 곳도 없을 것이었다.
물론, 탐라공의 아들이자 후계자임을 감안할 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안전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바로 결정할 수는 없었지만, 한번 고려해 봄 직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몽주는 문득 화극이 그에게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으니, 그것이 절로 실소를 짓게 만들었다.
“너무 믿지 말라…… 나도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해야 하겠군. 후후.”
어쩌면 어른이 된 입장에서 후계자나 젊은 친우에게 해 줄 수밖에 없는 조언 중에 하나가 그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실소를 짓는데, 문득 아우가 그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겼다. 하여 그를 쳐다보니, 몽건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비서원 관리가 서성이면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몽주는 그를 손짓하여 부르며 한 시진 안에 돌아갈 터인데, 어인 일이냐 물었다.
“왕도에서 서찰이 당도하였는데, 아무래도 급히 알려야 할 것 같아 왔습니다.”
“무슨 일……? 아, 혹시?”
“예, 그에 대한 답이 왔습니다.”
관리가 답하자, 반색하는 반응이 몽건으로부터 먼저 나왔다.
“드디어 역법을 바꾸는 데 고려왕이 응한 겁니까?”
경제를 연구하는 이로서, 자연히 통계에도 눈을 뜨게 된 몽건은 당연히 반길 일이었다.
물론, 단지 통계에 도움이 되는 정도의 여파만 가질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남방행은 더 미뤄야 할 것 같군.”
그렇게 중얼거림으로써 지금 일어난 일의 중요성을 알린 몽주는 아내 앵도에게 다가가 먼저 떠남을 알린 뒤, 서둘러 공택으로 향하였다.
그것은 세계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기준을 정하는 일이자, 천몽 밖의 세상을 생각하면 또 하나의 거대한 변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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