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
추대현에서 석씨 가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민전(民田)과 사전(私田)을 가지고 있었다.
뇌물을 주고 성을 받아 향리가 되면서 봉록이라 할 수 있는 직전(職田)을 크게 받은 것도 있고, 이후에도 재산으로 토지를 계속 사들였던 것이다.
그렇게 뇌물을 뿌리고, 공명첩을 사들이는 데에 재산을 많이 썼음에도 여전히 큰 부자인 걸 보면, 벽란도에서 장사를 했을 때에도 제법 거상이었던 모양이다.
노비도 서른 명 정도 있었고, 그중 열아홉이 외거 노비였고, 나머지는 솔거 노비였다.
일종의 소작인인 전호(田戶)도 거의 백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토착 향리도 아닌 데다, 그 정도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현민이나 전호들 사이에서 석해민의 평판이 꽤 좋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 떠올리면, 석해민은 적어도 이 시대의 상식선에선 수탈하지는 않는 착한 관리이자 지주인 듯했다.
사실 평판을 따지자면, 몽린이 더 문제였다. 기억에 남은 걸로 볼 때, 아무 생각 없이 놀고먹는다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많았던 것 같았다.
하기야 공부를 한 기억은 10대 초반까지가 고작이었고, 그 후에는 해금이나 타거나 술친구와 놀러다니기 일쑤였다.
심지어 최근에는 기방에도 들락거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나마 글을 쓸 줄 안다는 게 다행이랄까.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운 거지.’
안 그래도 손이 귀한 석씨 가문의 삼대독자, 부모가 늦은 나이에 힘들게 얻은 귀하디귀한 아들.
지난 날, 석해민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게 이해가 되었다. 하마터면 대가 끊길 뻔한 것이니까.
“좀 막막하긴 하네.”
다시 꿈속 인생을 시작하는 걸 수없이 상상했지만, 그 상상 속 인생은 기본적으로 군림하는 자의 것이었다.
명령을 내리면, 그 명을 수행할 자들이 많았던 삶.
지금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들이 있긴 있지만, 그가 했던 상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지금은 겨우 한 집안 내의 수준이었고, 몽주가 기대했던 건 세력 단위였으니까.
그렇다면, 세력의 권력자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전제 조건은 권력자와 연이 닿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없다.
있을 턱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몽주가 차지한 몸의 주인이었던 몽린이라는 인물은 해금 연주나 할 줄 아는 전형적인 한량이었다.
그렇다면 권력자와 연을 맺고 있는 또 다른 인물과 연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도 시원찮긴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아버지 해민을 통하는 것이다.
솔직히 그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된다고 해도 그에게 ‘아버지, 주상 전하나 다른 도당의 고관들 중 아시는 분이 계신지요? 혹 계시다면 저와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될까.
몽주가 가진 정보 속 아버지 해민은 그저 하나뿐인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얼른 자식을 보는 것만 바랄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엔 은근히 혼인 자리를 알아보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이 무시무시한 권력층과 연을 만들려 하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이 시대의 권력이란 그런 무시무시한 느낌이었다.
현대인이 느끼는 권력자와 이 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권력자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왕?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움찔거린다.
정말이지 눈앞에서 왕을 대면한다면 그곳이 설령 진창 바닥이라도 엎드리고,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 몽린의 머리에 남아 있는 기억들이 아직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데, 그만큼 왕이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경외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도당의 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과 만난다고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향리나 그의 자식 같은 건 벌레와 동급으로 보는 자들이다. 눈 밖에 나는 순간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고, 더 심하게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처지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건 마치…….
‘지난 꿈속의 나와 같군.’
시대가 많이 흘러, 법과 제도라는 게 더 구체화되어 존재했지만, 그건 엄연히 피지배층을 향한 것일 뿐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특히 나라의 상황이 혼란에 빠진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근처 주현의 수령이 자기 현의 조세와 요역을 추대현에 전가해 대려는 통에 최근 아버지 해민이 끙끙 앓고 있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고심하는 걸 알면서도 노닥거리기나 한 몽린이라는 녀석이 한심스러운 게 먼저긴 했지만, 어쨌든 고작(?) 수령의 야료에도 어쩔 수 없는 게 속현의 향리였으니, 그 자식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도 없고…….’
상황이 녹록치 않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그러려고 천몽을 펼친 게 아니었다.
‘쉽게 생각하자, 쉽게.’
그는 권력에 다가가려는 생각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쫄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는 현대인이다. 물만 건너도 귤이 탱자가 되고, 탱자가 귤이 되는 법이다. 이 시대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식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했다.
즉, 평범한 현대인도 여기선 천하제일의 천재이자 기재인 것이다.
그걸 생각하자, 몽주는 아랫배가 든든해졌다.
쫄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 접근하면 될 것이다.
‘아, 그렇지! 향희가 있었구나!’
향희는 몽린이 드나들던 기방, 애월루의 기생으로, 본래 여악(女樂) 소속의 예악인이었는데,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나 애월루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이쿠. 이 자식, 벌써 동정을…….’
기생 향희를 떠올리자, 후끈한 기억도 머릿속을 스쳤다. 17살에 벌써 동정을 때다니.
하기야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생긴 조혼 풍습 덕에 17살이면 결혼하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어쨌든 향희와 살도 섞은 사이가 되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 그녀가 여악에서 쫓겨난 이유가 개경의 어느 군인과 사통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여악은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불교 행사에서 예를 행하는 단체로, 자연히 불교적 관습을 따라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는 위치인데, 남정네와 배가 닿았으니 쫓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쫓겨나는 정도가 아니라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다행히 그 사통한 군인이 힘 좀 쓰는 자라서 쫓겨나는 정도의 벌만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군인이 그래도 양심은 있는 건지, 아니면 향희에게 홀딱 빠진 건지 지금도 달에 한 번 정도는 한양부까지 내려와 그녀를 만난다고 했다.
‘금오위의 중랑장이라고 했지?’
금오위라면, 현대의 경찰 조직에 해당하는 군대였다. 그리고 중랑장이라면 정 5품의 지위로, 대충 중대장이나 대대장에 해당했다.
그 정도면 딱 적당하다 싶었다.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정도. 그를 통해 금오위의 장군과 연을 맺고, 다시 그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통한다.
‘후후, 나 같은 현대인이면 여기선 천재지.’
몽주는 자신의 계획이 썩 맘에 들었다. 계획이 섰으니 이제 행동해야 할 때였다.
“이보게, 석삼이! 게, 있는가?!”
“……예이!”
그가 문을 열며 부르자, 석삼이 크게 대답하며 달려와 몸을 조아렸다.
석삼이.
쉽게 말해서 몽주 아니, 몽린의 방자였다. 나이는 몽린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겉보기엔 서른은 족히 넘은 듯했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요?”
“외출을 해야겠네. 채비를 해 주시게.”
“예? 외출이요? 아직 몸도 성치…….”
“멀쩡하네. 그러니 채비하게.”
“……예에, 알겠습니다요. 근데 그래도 마님께는 고하고…….”
“어허! 괜찮대도. 그냥 가볍게 다녀올 데가 있는 것뿐이네.”
몽주가 부모님께 자신의 외출을 고하겠다는 석삼을 말리자, 석삼의 표정이 묘해졌다.
“혹시 애월루에 가시려는 겝니까?”
“…….”
그의 표정에, ‘네놈이 부모 몰래 어딜 가려는지 아주 뻔하지.’라고 쓰인 듯했다.
“……채비나 하시게.”
찔끔한 몽주는, 애써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재차 명령하였다. 그제야 석삼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좀 쪽팔리는 상황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뜻을 펼치려면 한시라도 빨리 향희를 만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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