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01)
* * *
여름철 북방 초원길은 이름만큼 푸르지는 않았다.
그저 동서로 쭉 닦인 길만이 그 황량한 풍경 중에서 한 줄기 시원함을 느끼게 해 주었는데, 다만, 그 길도 도문(道門 : 몽골 자민우드)이라는 이름의 작은 고을까지만 포장되어 있을 뿐이고, 이후로는 그저 우마차가 오간 흔적이 길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도문은 공식적인 요동공 강역 중 가장 서쪽에 있는 고을인데, 그곳까지만 이조(吏曹)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서 지역에도 요동국의 고을들이 있긴 하나, 그 고을들은 병조(兵曹)의 담당으로 군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도문 이서 지역 중 존재감이 뚜렷한 고을은 귀산(貴山)으로, 유명하기로만 따지자면, 어쩌면 요동국 전체 고을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고을이었다.
개척회사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발견되어 개척회사를 살린 금광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중요성을 생각하면, 아직 요동국이 공식적으로 귀산을 영토화하지 않고, 길도 제대로 닦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일 수 있었다.
하나, 도문에서 귀산까지만 해도 400길미가 넘으니, 당대에 초원과 황무지로 이뤄진 그 거리를 영토화하거나, 도로를 닦아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귀산은 당연하고 더 멀리 북서쪽으로 600길미 떨어진 호곡기지, 멀리 황금(알타이) 산맥을 바라볼 수 있는 그곳까지 요동국은 분명히 군사적인 장악력을 갖추었고, 근방에 있는 호인 부족들은 요동국에 협조하거나 굴복하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따르고 있었다.
“어떠냐? 이렇게 먼 곳까지 요동국의 힘이 미치고 있음이 실로 대단하지 않느냐?”
노년의 중신이 말함에, 그의 주변에 있던 젊은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답하였다.
“이곳 귀산은 문자 그대로 귀한 곳이다. 지금은 금과 동만 산출하고 있으나, 저쪽 북서 방향에서는 질 좋은 흑토가 발견되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근방에 여러 자원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곳은 요동국 산업의 피와 살이 될 곳이다.”
노신의 설명을 들으며 젊은 관리들의 시선은 귀산 금광의 여러 곳을 훑었다.
귀산이라 하여 산(山) 지형을 연상했건만 귀산 지역은 드넓은 평야지대였다. 다만, 딱 금광이 있는 곳만 다소 솟아 있었으니, 산이라기에는 손색이 있고 그저 구릉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그 구릉에 여러 건물들이 있고, 곳곳에 흙이 산적해 있었으며, 수많은 말들이 울타리 안에 있었다.
개척회사의 건물로 문서 작업을 하는 곳은 물론, 금과 동을 최종적으로 적출하고 보관하는 곳이었고, 산적한 흙은 광산에서 퍼내고 금과 동을 적출하는 과정에서 나온 흙은 쌓아 둔 것이었으며, 2백 마리는 족히 되는 말들은 각종 작업을 하는 데 쓰는 축력을 제공하는 노역마들이었다.
“내가 저하께 고하여 너희 같은 신입 관리들을 이곳까지 답사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걸음을 옮기며 귀산 금광의 이곳저곳에 대해 말을 늘어놓던 노신이 문득 질문을 던지니, 긴장을 놓고 있던 젊은 관리들이 단숨에 진지해졌다.
“무엇하느냐?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닌 듯한데?”
노신이 재촉하자, 젊은 관리들이 쭈뼛거리다가 학생인 양 몇몇이 손을 들었고, 노신이 그중 하나를 지목하여 답하게 하였다.
“이곳이 중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귀한 금과 동이 많이 산출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
“금과 동이 귀한 거야 세 살배기도 알 터, 굳이 너희를 이 먼 곳까지 데려와서 확인시켜 줄 이유가 없지 않더냐?”
“…….”
노신의 일갈에 젊은 관리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하는 중에 한 사내가 한 걸음 나서며 말문을 열었으니, 젊은 관리들 중에서도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자였다.
“이판 영감, 혹시 말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기에 저희들을 데려오신 것 아닙니까?”
“음? 어째서 보는 게 중요할까?”
“그야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금과 동이 귀한 것이야 요성에서도 금과 동을 보며 알 수 있지만, 이곳과 이곳까지 오면서 봤던 그 드넓은 대지는 요성에서는 볼 수 없으니까요.”
“오호, 하면, 말해 보아라. 이 땅을 보고 나니 무슨 생각이 들더냐?”
그러자 그 관리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한껏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겉보기에는 싸구려인데, 살펴보면 귀한 곳이군요. 하면, 이곳뿐만 아니라 어느 곳 어느 땅이 한순간에 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니, 평소에 잘 관리했다가 건수가 생기면 잘 써먹어야겠지요.”
다소 가벼운 대꾸에, 주변 다른 젊은 관리들은 혹여 이판이 크게 불호령을 내리는 것 아닐까, 그러다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튀는 건 아닐까 우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요동국 이조판서의 얼굴에는 웃음이 지어졌다.
“옳다. 그러니 땅은 넓을수록 좋다. 황무지이고 진창이라 농사도 목축도 할 수 없는 땅이라도 언제 귀한 것을 토해 낼지 모른다. 이 사실을 머릿속에 꽉 집어넣고 있으라는 뜻이다.”
“…….”
별 대단한 결론도 아니라는 감상이 젊은 관리들 사이로 스쳤지만, 이판은 그에 상관없이 아까 답을 한 관리를 짚고 있던 지팡이 끝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김자디입니다.”
“김자디(金自知)라…… 대과에 붙은 놈이구나.”
“예…….”
당당하던 그 관리도 대과 급제한 관리임을 밝히면서는 조금 몸을 사리는 기색이었다.
이는 이판이 기술과 파벌의 수장이라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당금 요동국의 관계에는 두 가지 파벌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유자 출신 관리이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관리가 된 자들로 이뤄진 파벌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과(技術科)라 하여 유학 경전이 아닌 잡술을 시험하여 관리가 된 자들로 이뤄진 파벌이었다.
그중 기술과는 본디 잡과라는 과거 제도의 한 분야에서 비롯된 것인데, 지금 그들 앞에 있는 이판이 유학 이외의 학문과 기술을 천시하지 말 것을 요동공에게 간청하면서 이름도 바뀌고, 선발 인원과 과종도 늘리게 되었으니, 이판은 소위 기술과 파벌의 수장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젊은 관리들 중 대다수가 기술과 출신으로 대과 출신들은 이판이 호판이었던 시절부터 몇 년째 시행하고 있는 답사에 좀처럼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술과 출신이 아닌 대과 출신인 김자디로서는 혹여 그 탓에 미운털이 박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주변에서 만류하지 않더냐, 여기 따라온다니까?”
김자디는 대답 대신 염화미소를 띠는 것으로 긍정을 표하였고, 그걸 본 이판은 혀를 쯔쯧 차며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다가 멈칫하곤 다시 자디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하나만 더 묻지. 이 땅들을, 이 요동국의 영토를 어찌하면 잘 관리하고, 개발할 수 있겠느냐?”
“…….”
그 질문에 자디는 조금 전보다 더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되물었다.
“솔직한 대답을 해도 되겠습니까.”
“누가 거짓을 고하라더냐?”
“모름지기 무슨 일이든 선행자가 있다면, 그 뒤를 따르며 취할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을 버리는 것이 가장 낫다 생각합니다. 이 고려에서 대저 무엇이든 개발함에 있어…… 탐라국을 따를 곳이 없으니, 탐라국이 했던 바를 배우고, 궁리하여 요동국에 맞춰 행하면 될 것입니다.”
김자디의 대답이 흘러나오는 동안 주변 젊은 관리들의 표정은 당혹과 충격에 휩싸이고 있었고, 동시에 이판의 표정과 기분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조판서 노숙진.
요동국 관계에 대과 파벌과 기술과 파벌이 있는 것 이전에, 더 근본적인 의견의 대립이 있었으니, 친탐라파와 반탐라파가 그것이었다.
그중 이판 노숙진은 반탐라파의 핵심 인물로 꼽히고 있었는데, 그의 앞에서 김자디가 ‘탐라 따라 하기’를 답으로 내놓고 있었으니, 다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만큼은 크게 호통이 터져 나올 것이라 다들 예상하는데…….
“잘 아는군.”
“……?”
이판 영감의 반응은 간결하면서도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사실 탐라국에 반대하거나 배척하는 자들이 요동국 조정에 없는 것은 아니나, 이판 노숙진은 반탐라파라 칭하기에는 그 궤가 달랐다.
지(知)탐라파 내지, 용(用)탐라파라 표현하는 것이 합당하나, 어쨌든 탐라국이나 탐라공과 부딪친 전력이 있어 그런 오해를 사고 있는 것이었다.
“뭣들 하는 겐가? 어서 따라오게. 여기 개척회사의 사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귀산 금광에 여러 번 왔던 덕인지, 안내하는 이의 도움도 없이 나름 복잡한 금광 내부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이판의 뒤를 따라, 새끼 오리들처럼 젊은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 * *
“잘 지냈나? 오랜 만이로군.”
“예, 국공 저하 덕에 호의호식하였습니다.”
“내 덕은 무슨…… 자네가 맡은 바 임무에 열심히 하였다는 건 잘 들어 알고 있었네.”
“감사합니다.”
몽주에게도 그의 얼굴은 사뭇 낯선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 냈을 때 이후, 가까운 곳에서 그를 다시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주에서는 자네를 함부로 대하는 자가 없다 들었네.”
“변변치 못한 제가 저하 덕에 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어 팔자에 없던 명성을 얻었습니다.”
사내는 내내 겸손하였다. 하기야 어지간히 오만한 자들도 탐라국에서 탐라공 앞에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만, 그의 겸손은 차라리 주인을 대하는 종의 태도에 가까웠다.
은승업.
그의 이름은 탐라섬보다는 구주에서 더 유명했으니, 지금 구주에서 탐라국의 관리로 일하는 자들 중에서 그에게 배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상인 출신으로 왜구에게 협력했다가 오래전 몽주에게 잡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그는 2년여 동안 얼굴도 드러내지 못하는 ‘죽은 노비’로 살다가 구주 출신들에게 고려말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 그 덕에 수많은 제자들을 둘 수 있었다.
물론, 단지 운이 좋아 그가 구주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왜국말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고려말 교사가 되었지만, 이후 왜어 사전과 왜어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스스로 실력을 갈고닦았고, 단지 말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넘어 구주인들이 탐라국의 일원으로 자리 잡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렇게 쌓은 20여 년의 시간이 그에게 명성을 선사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알겠나?”
“소인이 어찌 함부로 넘겨짚겠습니까. 그저 부르신다기에 한 걸음이라도 빨리 닿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답할 줄 알았네.”
몽주는 쓴웃음을 짓고는 근처에 시립해 있던 비서원 관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가 승업에게 문권을 하나 건넸으니, 그것을 펼쳐 본 승업이 잠시 후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인이 어찌 이런 대임을……!”
“자네만큼 적임자가 어디에 있겠나. 자네의 명성이 비단 구주뿐만 아니라, 왜국에도 퍼져 있다더군. 특히 남조에서는 자네가 편 고려말 교과서가 불티나게 팔린 바 있고 말이야.”
불티나게 팔렸다기에는, 탐라국에 나본이 쓴 삼국연의가 있고, 사롱이 내는 여러 이야기책들이 있어 다소 무색한 면이 있긴 하나, 적어도 교육적인 분야에 한하면 그의 책들은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그중에서도 남조는 도학생을 많이 보내는 터라, 승업의 제자도 많았고, 그의 책도 널리 퍼져 있었다.
“하나, 저는 교사일 뿐, 관리가 아닙니다. 자칫 일을 그르쳐 저하께 폐가 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특명전권대사의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나라의 이야기를 들어, 내게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일세. 그런 거라면 자네도 이력이 충분하다고 보네만.”
구주인과 왜인들을 상대로 말을 가르치다 보면, 자연히 그들이 맞닥뜨린 사정에 도움을 주어야 했다.
고려인들과 문제가 생기면 그가 나서서 서로 협의를 할 수 있게 돕고, 구주인과 왜인, 그리고 고려인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오해가 있으면 그것을 상호 설명하여 이해시키곤 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특명전권대사의 할 일이란 무대가 더 커진 것일 뿐, 그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왜국은 머지않아, 자네가 독단으로 결정을 해야 할 일이 극히 드물어질 걸세. 너무 부담 갖지 말게.”
몽주가 그렇게 설득을 이어 가자, 승업도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중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승업이 돌아가고 난 뒤, 어느 비서원 관리 아니, 비서원 주문관이기 전에 익문대의 장인 차현유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
“괜찮을 거라 봅니다.”
“이용하는 것 같아서 맘이 편치 않아.”
몽주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니, 차 대장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자가 직접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그저 저 자가 가진 명성을 저희가 빌리는 것뿐이죠.”
“그러니 잘해 보게. 괜히 소란이 생겨서 저자를 당황스럽게 하지 말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왜국의 북조와 남조에 대사관을 세운 지 거의 9년이 흘렀으니, 왜국의 두 대사관은 공식적으로 북조와 남조를 상대로 외교적인 관계를 도탑게 하는 동시에, 은밀히 정보 ‘라인’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먼저 이점이 있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정보원을 구하였고, 몇 년이 지나면서는 제법 그 정보망이 충실해졌다.
이제 익문대는 왜국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정보망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물론, 지금도 사실상 정보원으로서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긴 하나, 아직 만족스럽진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은승업이 왜국 관리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진 것을 알게 된 익문대는 그를 왜국 남조의 대사로 삼아 그의 명성을 이용하여 정보원이 될 관리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긁적긁적.
차현유도 나가자, 집무실에 홀로 남은 몽주는 창가에 선 채 머리를 긁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가 익문대를 통해 왜국에서 노리는 바는 왜국 분열의 심화 내지, 현 상태의 공고화였으니, 남북조의 분열을 고착시키고, 남조와 북조 또한 각각 나누기를 기도하고자 함이었다.
지난날 도가시 요시시게에게 슬쩍 밝힌 바 있는 것처럼 왜국을 사분오열할 속셈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이 고려에 이득임을 확신하면서도 속내로 맘이 좋지 않은 것은, 경우가 똑같은 건 아니나, 천몽 밖 한국의 분단 상황이 절로 떠오르는 탓이었다.
나 좋자고 남을 괴롭히는 것 같고, 그 괴로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하기야 어디 이번 일뿐이던가.”
몽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쁜 짓한다고 해신이 노여우시면 안 되는데…….”
미뤄졌던 여송행 출항 날자가 다시 잡혀 있었다.
* * *
참모라는 이름의 장교가 탐라군에 존재하게 된 건 꽤 오래전이라, 명나라와의 전쟁 당시에도 참모가 활약하였다.
다만, 당시 참모는 특정 임무를 맡긴 장교를 통칭하기 위해 당겨 쓴 것이고, 실제로 참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교육받아 공식적인 참모가 군내에 자리 잡게 된 건 3, 4년 전부터였다.
물론, 그 이야기는 참모를 배출하는 참모 학교가 그보다 1, 2년 먼저 활성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쌀쌀할 때는 그것도 괜찮겠군.”
마차 안에서 몽주는 앞에 앉은 사내를 향해 농을 던지듯 말을 건넸다.
그에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손으로 그의 얼굴 한쪽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 한쪽 절반쯤이 검푸른 비단으로 덮여 있었으니, 군모 안에 따로 모자처럼 써서 얼굴을 덮는 형태였다.
“대신, 여름에는 좀 고역입니다.”
“저마포로 된 걸 쓰면 어떤가. 요새 짙게 물들인 저마포가 이주와 여송의 주둔군에도 보급되고 있을 터인데.”
“해 봤는데 가렵더군요.”
“음, 저마포가 좀 그런 경향이 있지.”
저마포(紵麻布)는 모시 옷감을 가리키는 말로, 현대의 충남 서산시인 서령(瑞寧)을 당진군 내에서 독립된 시(市)로 승격시켜 준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이제 여름철에 저마포를 재료로 한 옷을 입지 않는 자들이 없을 정도였고, 더운 남방 지역에 주둔하는 군병들의 군복에도 일부 쓰이고 있었다.
“이제 슬슬 군무에 복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나?”
“…….”
잠시 말이 끊겨 몽주가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던진 말에 맡은 편의 사내가 고민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고민을 할 시간이 필요한 겐가?”
“……잘 모르겠습니다.”
겨우 나온 대답이 그러매, 몽주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 화상으로 인한 트…… 위축된 마음이 풀릴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런 건 이제 없습니다.”
“하면, 무엇이 문젠가. 이제 자네에 대해서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 참모학교 비단 모자 장군하면 다 아는 체하지.”
“…….”
사내는 군모 아래로 머리를 긁적이려다 비단에 손이 걸리는 걸 알고는 반대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실은 지난날에 한 말이 있어, 복귀하겠다는 마음을 굳히기가 민망합니다.”
사내, 정지가 말 그대로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모학교를 개교하면서 그는 소장(小將)에 올라 참모학교의 교장직에 임하였으니, 지난날 몽주가 화상으로 인해 은퇴하려는 그를 만류하면서 맡긴 일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무슨 말? 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
몽주는 정말 별 기억이 없었다. 뭐, 화상을 입은 자가 군을 이끌 수 없는 이유를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얼핏 기억이 나긴 했지만, 어차피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던 몽주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린 탓이었다.
“참모를 만들어 군에 내보냈으면, 그들을 이끌어서 그 제도를 확립시키는 것도 책임져야지, 안 그런가?”
참모 제도의 확립은 참모 사령부의 정착으로 일단락된다고 보았기에, 정지에게 책임감을 요구하는 몽주가 그렇게 묻는 것처럼 말을 끝낼 때, 마차도 움직임을 서서히 멈췄다.
마부가 나서기도 전에 먼저 문을 열고 내린 몽주는 따라 내리려는 정지를 향해 말하였다.
“굳이 내릴 것 없네. 곧 출항할 터이니, 대신 내가 돌아오기 전에 마음을 정해 놓게. 그때도 복귀하겠노라 답이 없으면 나도 포기할 걸세.”
“예, 저하.”
“혼자만 고민하지도 말고, 여러 친우들과 논의도 해 보면서. 알겠나?”
“알겠습니다, 저하.”
몽주는 그래도 내리려는 정지를 한 번 더 만류하곤 그 마차 그대로 그를 돌려보냈다.
“이.제 오.셨.습.니.까.”
“……?”
마차가 떠나는 걸 힐끔 확인하는 사이에 몽주의 등 뒤에서 뭔가 서늘한 느낌의 말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마중 나온 여러 관리들과 장교들 사이에 석삼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
그 눈빛을 읽은 몽주는 석삼을 향해 손짓하여 다가오게 하였는데, 석삼이 그에 얼결에 한 걸음 디디려다가 멈칫하곤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어허, 남석삼 대사, 잠시 못 본 사이에 뭐라도 잘못 자셨소?”
“아니지요. 저는 잘 먹고 지냈습니다, 이 포구에서요.”
“오호라, 그간 출항 준비에 바쁜 것에 불만이 생긴 모양이구려.”
“아니지요. 어차피 제 할 일인데, 무엇이 불만이겠습니까.”
몽주가 천천히 걸어가며 물으니, 석삼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답하였다.
“하면, 어찌 주군이 부름에 이처럼 도망치는 해괴한 짓을 하는 게요?”
“제 육감에 지금 가면 한 대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요.”
“뒤로 물러나면 괜찮을 것 같소?”
“지고지순하신 분께서 손수 손을 쓰시는 꼴을 면하게 해 드리려는 소인의 충심으로 봐주시지요.”
피식피식.
몽주와 석삼이 서로 마주하며 천천히 움직이니, 자연 주변의 관리들과 장교들도 따라 움직였고, 두 주종 간의 대화에 실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탐라국에서 탐라공을 상대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제는 유일한 신하인 석삼을 향한 감탄과 탄식이 섞인 것이기도 했다.
“하기야 나도 나이도 적잖이 먹었는데, 손수 손을 쓰면 안 되겠지.”
직후에 몽주가 근처에 있는 장교들을 향해 시선을 주니,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석삼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엇!”
석삼이 기겁하여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장교들이 달려드는 걸 피하긴 어려웠으니, 채 몇 걸음 도망치기도 전에 장교들에게 붙잡혔다.
“자, 저놈이 왜 저러는지는 배 위에서 알아보기로 하고, 준비가 되었으면 바로 출항하세.”
딱히 출항식 같은 것도 없었다. 탐라국에서 배가 드나드는 건 이젠 너무 흔하디흔한 일인 바, 원정군 출정이라도 있지 않는 이상 그 대상이 탐라공이랄지라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몽주가 중함선 5척을 포함, 15척으로 이뤄진 함대의 기함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움직였다.
기함의 갑판 위에서는 석삼에게 간지럽히기 고신을 가하며 투정을 부리는 이유를 토설하게 만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석삼의 불만은 별게 아니었다. 그저 급하게 출항할 것처럼 하여 열심히 준비하는데, 그래서 화극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정작 탐라공이 왕도에 가 버리는 바람에 꼼짝없니 포구에 오랫동안 묶여 있게 된 일에 대한 투정이었다.
기함 어디에서도 출항에 대한 긴장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지는 않았고, 한 사내만은 유독 긴장으로 가득했다.
“어이, 긴장 풀어.”
“네? 넷!”
아직 어린 티가 묻은 관복 차림의 사내는 선임 관리가 툭 치며 건넨 말에 완전 긴장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너도 참 재수 없다. 관원이 되자마자 원항에 투입되다니 말이야. 배는 타 봤냐?”
“타 봤습니다.”
“아니, 탐라섬이랑 남면 오가는 배 말고, 멀리까지 가 봤냐고.”
“그건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선임 관원은 피식 웃다가, 문득 걱정스레 물었다.
“뱃멀미는 뗐고?”
“…….”
“아이고, 잘하면 초상 치르겠네.”
혀를 쯔쯧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선임을 보며 그 어린 관원이 울상을 지었다. 안 그래도 뱃멀미가 좀 있는 편이라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너, 호가 뭐랬지?”
“절재입니다.”
“알았어. 기억해 두지. 나중에 초상 치르면 네 시신 위에 이름이랑 같이 잘 표기해 두마. 하하.”
놀리는 것이 분명한 선임의 말에 열여덟 살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의 얼굴은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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