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02)
삐걱삐걱.
바다를 헤치며 나가는 배가 고달픈 신음을 내고 있었다.
파랑이 약간 있긴 했지만, 풍랑을 만난 것도 아닌데, 삐거덕 소리를 쉬지 않고 내는 건 목조선의 한계 탓이다.
“아, 글쎄, 그놈이 허구한 날 어미하고만 이야기하려 하고 나랑은 도통 말을 하려 하질 않는다니까요.”
“왜 그럴까?”
“나야 모르죠. 뭘 물어봐도 네, 아니오, 단답만 하고 더는 말하는 게 없어요. 아들 녀석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건 더 드물고요.”
술 한잔을 들이켠 석삼이 신세 한탄 중이었다.
그의 신세야 탐라국에서도 최상급이긴 하지만, 가정 안의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건 녀석이 어릴 적에 제가 집에 많이 있어 주지 못한 탓임에 분명합니다.”
“……내 탓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요.”
“…….”
석삼의 고민은 장남 안창과 친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실 부자지간에 대화가 별로 없는 거야 고래부터 현대까지 흔하디흔한 일이지 않나 싶지만, 사실 당대의 가정 분위기는 오히려 현대보다 더 돈독한 느낌이 있었다.
이걸 또 부모와 자식 간의 상하 관계를 강조한 유교적 문화의 폐습으로 지적하는 건 공자 맹자님이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대에 유교 문화가 확립되지 않은 차이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야 어떠하든, 당대 일반적인 부자지간은 조금 더 부드럽고, 속되게 말하면 만만했다.
그러니 석삼이 그의 장남과 친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고민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가끔 안창이 제 아들 같지가 않아요. 저랑 닮은 구석이 없어요. 외모도 성격도 머리도 다 어미를 닮았잖아요.”
“……발가락이라도 닮았겠지.”
“…….”
하마터면 ‘그것참 잘된 일 아니냐’라고 대꾸를 더할 뻔한 걸 겨우 참은 몽주는 석삼의 아들 남안창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는 어미를 전적으로 빼닮았다. 그의 아비가 푸념하듯 외모부터 성격까지, 그리고 머리도 어미 금점녀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받았다.
그가 지금 재관부의 관원이라는 점은 모든 면에서 어미를 닮았다는 확증이기도 했다.
“그래도 둘째랑 셋째는 다르잖아.”
그 말도 뒤에 ‘셋째가 널 닮다니…….’라는 탄식을 붙일 뻔했다.
둘째처럼 아비를 빼닮은 건 아니지만, 여식인 셋째가 아비 쪽 유전자를 많이 받은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부디 성장하면서 어미를 닮아 가길…….’
점녀가 분명 미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추남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닌 석삼보다는 훨씬 나은 외모였다.
“아무렴 장남만 하겠습니까.”
그가 가업을 세워 이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장남, 차남, 그리고 남녀를 차별할 이유가 없지 않나 싶지만, 아비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 몽주도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뭔가 친해질 계기를 마련해 보지, 그러나?”
“안 그래도 친해지려고 시도를 해 봤죠. 같이 축구 보러 가기도 했고요. 근데 별로 재미를 못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 거기서도 말수가 줄고…….”
“허, 젊은 사내들 중에 요새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던데, 안창이가 예외였군.”
“그러게 말입니다.”
남면은 물론이고, 고려 전체를 보아도 축구는 가장 인기 ‘스포츠’였고, 그 제도나 축구 관람 문화 또한 이제는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래도 뭔가 취미가 있을 것 아닌가, 안창이에게도?”
“피리를 좀 불더라고요.”
“피리?”
“예, 친한 친구가 있어서 배운 모양입니다. 그 친구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피리 연주에서는 고려 최고라던가 하더군요.”
“아, 혹시 그 친구가 박연이라는 자인가?”
“으음, 맞는 것 같네요. 그런 이름이었죠. 유명한 사람인가 보죠?”
“순보에서 사롱에 속한 연주가 중에 피리에 능통한 자가 있다는 기사를 본 적 있지.”
몽주도 1년 전쯤에야 박연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어디서 뭘 하나 싶던 위인들 중 하나였는데, 사롱에 소속되어 음악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흐뭇했던 것이다.
이제 스물둘, 셋 정도 되었을 그가 음악에만 열중할 수 있다면, 고려의 음악계는 자체적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면, 자네도 같이 피리를 배워 보지 그러나? 부자가 함께 연주하면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절로 친근해질 터.”
“아유, 제가 무슨 악기를 연주한답니까. 이 손이 어디 악기를 연주할 손입니까.”
그러면서 석삼이 손을 쫙 펴 보이는데, 손마디가 굵고 손가락을 짧은 것이 확실히 음악가의 손이라면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모양이었다.
“뭐, 징을 치는 거면 모를까…….”
“…….”
한데, 손사래를 치는 석삼이 뒤에 붙인 말에, 몽주의 머릿속에 악기 하나가 떠올랐다.
“징을 치면 되지 않나?”
“예?”
“잘 보게.”
몽주는 술상 위에 놓인 술잔을 젓가락으로 살짝 쳤다.
퉁!
술이 반쯤 들어 있는 자기잔에 명쾌하고 짧은 소리를 내었다.
이어, 몽주는 술잔을 들어 안에 든 술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빈 잔을 다시 젓가락으로 쳤다.
통!
비슷하지만 울림이 더 있는 소리가 나자, 몽주는 석삼을 바라보며 어떠냐 물었다.
“아니, 든 잔과 빈 잔이 소리가 다른 거야 당연합죠.”
“누가 당연하지 않다더냐. 소리가 다른 게 느껴진다는 걸 보인 것 아니냐.”
“예, 그렇죠. 당연히.”
“그러니 이런 식으로 소리를 내면 어떻겠느냐?”
몽주는 젓가락으로 상 위에 모든 것을 치기 시작했다. 여러 안주들이 놓여 있는 접시와 그릇을 쳤고, 상 자체도 쳤으며 술병도 쳤다.
그러다 소리가 대략 파악되자 둔탁한 소리와 명쾌한 소리를 번갈아 쳤고, 박자를 맞춰 보았다.
투탁! 툭투탁!
몽주의 몸인 몽린이 해금 연주에 능숙한 덕이라도 보듯, 몽주의 젓가락 장단은 어느 순간부터 제법 ‘리듬감’을 갖추기 시작했다.
뭐하는 짓인가 싶었던 석삼도 대략 그의 주군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따라오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 니까, 아들, 놈이, 피리, 불 때, 제가, 박잘, 맞춰, 주라, 는 겁, 니까?”
투툭탁!
“그렇지.”
타탁!
“한데, 연주, 할 때, 마다, 매번, 술상, 을 펼, 쳐야, 합니, 끄아?”
챙!
술병 주둥이를 쳐서 울림을 내며 젓가락질을 멈춘 몽주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
“예? 악기는 뭐 아무나…….”
“소리의 정교함은 그 아들의 친구에게 부탁하면 봐주지 않겠나?”
“어…….”
그 말에 제법 그럴싸하다는 표정을 지은 석삼은 진짜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타악기야 흔하디흔했다.
송대에 수입한 편종처럼 크게 무거운 악기는 둘째치고, 흔히 민속 악기라고 하면 떠오르는 악기들 중 상당수가 타악기이기도 하니, 당대에도 타악기는 많았다.
“빈 통이 울림이 좋으니, 크기와 모양, 그리고 재질이 다른 통을 놓고 두드리면 흥겨운 타성을 조합해 낼 수 있을 것 같군.”
몽주가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하니, 석삼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히죽 웃었다.
잘하면, 아들과 말을 붙일 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상상만 해도 좋은 모양이었다.
범인들이라면 어지간해서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 만한 여유를 부릴 수는 없겠지만, 남양 대사와 전당청장의 집안이라면, 아들과의 돈독함을 위해 그 정도 비용은 능히 감당할 만할 것이다.
“자, 한잔하세.”
“예.”
몽주가 거배하며 술을 권하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문득 귓가에 정겨운 소리가 들렸다.
우엑!
“……요즘도 뱃멀미를 하는 자가 있나?”
“거의 없습죠, 탐라 사람이라면. 한데, 남면 출신인 자들 중에 배를 별로 안 타 본 사람이 탄 모양입니다.”
“누구?”
“저도 잘…… 아! 신입 관원이 몇 탑승했으니,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우에엑!
“아주 죽어 가는군.”
구역질 소리에 혀를 차며, 몽주는 술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죽어 가는지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볼 참이었다.
* * *
“어째서 외관부에 지원하였지?”
“탐라국의 안위를 결정하는 것은 나라 안보다 나라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 안보다 밖?”
“예, 소신이 보기에, 오늘에 이르러 탐라국의 내부는 갖춰진 것보다 더 정진하는 모양으로, 이는 한 나라나 세력이 흥기하는 동안 만사가 두루 절로 형통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런 흐름은 주군께서 귀천하시기 전까지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약 탐라국에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나라 안이 아닌 밖에 원인이 있을 것이라 봅니다.”
한마디로 외부적인 변수가 없다면, 탐라국은 계속 발전할 수 있을 테니, 자신은 외부에서 탐라국의 장애가 될 무언가를 막고 싶기에 외관부에 지원했다는 뜻이었다.
몽주는 그 대답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일단 어린 관원의 대답이 얼추 또랑또랑한 것이긴 하나, 아직 그 시야의 좁음을 느낄 수 있기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탐라국이 커지고 풍족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내부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건 오만한 판단이었다.
나라가 작고 가난하면 당연히 문제가 많지만, 나라가 커지고 풍족해져도 또 다른 문제들이 생기는 법임을 역사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소위 혁명이나 운동이라 불리는 여러 소요와 반기에 있어, 경제적인 위축이나 불황이 그 기반에 있다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면에서 그렇고, 시대적으로는 이전보다 더 풍족해진 시대이기에 비로소 가능한 움직임들이었다.
물론, 그런 움직임을 두고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그런 흐름에 대응하는 것, 변화의 압력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정하고, 그 대책을 세우는 것은 관리된 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탐라국이 점점 풍족해지니, 점점 더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는 건 그 식견이 짧음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몽주가 그 어린 관원을 보며 흐뭇한 것은 그가 내부에 문제가 없을 것이니, 외부의 문제를 막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 역사에서 그가 세운 업적과 연관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절재 김종서.
멀미로 죽어 가던 자가 바로 김종서였으니, 며칠이 더 흘러 그가 뱃멀미를 이긴 후에야 몽주도 그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김종서가 탐라의 관리로 임하였음은 몽주도 알고 있었다. 그가 임명권자였으니까.
다만, 그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아무런 접점이 없는 어린 관원에게 탐라공이 신경 쓰는 것 자체가 관계에 파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김종서가 역사 속에서나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지, 이제 완전히 변한 환경 속에서는 어떤 인물이 되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관리가 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였다는 것만큼은 확인할 수 있어 흐뭇하긴 했었다.
한데, 몽주가 신참 관리의 승선 여부까지 확인하지는 않으니, 정말 우연히 남양으로 가는 배에서 만난 김종서에게서 역사적 위인 김종서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 흐뭇함이 절로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몽주가 김종서를 보며 웃음을 감출 수 없는 또 다른 큰 이유는 김종서의 작고 귀여운(?) 모습 때문이었다.
김종서라는 위인이 흔히 장군이라고 칭해지기도 할 만큼 무관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과거 한반도의 유명 장수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는 문신인 것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김종서였다.
게다가 포은처럼 문신임에도 체구가 있고 강인한 느낌을 주는 것조차도 아니고, 안 그래도 현대인들에 비하면 키가 작은 당대인들 중에서도 작고 왜소한 편이었다.
더구나, 아직 어린 탓도 있겠지만, 생김새도 여리여리한 느낌이 몽주와, 그러니까 몽린과 유사하였으니, 북방의 대호라는 ‘닉네임’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렇게 잠시 흐뭇하게 훗날의 절재 영감을 바라보던 몽주가 문득 물었다.
“하면, 그대가 보기에 장차 고려와 탐라를 위협할 적이 무엇이라 보는가?”
“짧게는 명나라일 것이나, 길게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짐작할 수 없다?”
“예, 그건 전적으로 주군께서 어디까지 보고 계시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니, 지금 뻗은 탐라국의 영토가 더 넓어진다면, 그 너머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알아본 후에야 가장 큰 적이 무엇인지도 가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답 속에 명나라를 아주 큰 적수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군.”
“명나라는 능히 세상을 홀로 상대할 만큼 큰 나라이기에 방심할 수 없으나, 만약 지금 고려가 만든 구도를 지키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명나라는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시대를 넘어서는 식견은 없지만, 시대에 국한한 시야는 괜찮아 보였다.
하기야 김종서가 천재라서 역사에 이름이 남은 건 아니었으니.
몽주는 여송 파식군에 닿기 전까지 김종서를 종종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김종서만 불러 총애함을 드러낸 건 아니었지만, 예민한 자들은 김종서가 가장 자주 탐라공과의 대화에 참여하였음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그만큼 김종서의 ‘싹수’가 제법 괜찮다는 의미였으니, 몽주는 그가 역사에서만큼 뛰어난 관리가 되길, 이왕이면 외국과의 관계에서 이름을 떨치길 바랐고, 동시에 역사와 달리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길 바랐다.
* * *
몽주가 탑승한 함대가 이주 가남군을 거쳐 여송 파식군에 닿은 건 탐라섬에서 출항한 지 스무날이 지났을 때였다.
파식군의 앞바다 파식만에 함대가 들어설 때, 막 이주로 향하려던 연락선과 조우하였는데, 함대에 탐라공이 탑승하였음을 안 그 배가 급히 기함으로 다가왔다.
그 덕에 몽주는 아주 중요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으니…….
“그것이 참말인가?”
“예, 부루내의 남부에 하얀 수액을 내는 나무가 있다 합니다.”
연락관이 부연하니, 그 하얀 수액을 내는 나무의 양태가 인도고무나무를 가리킴이 분명했다.
“하하하, 이렇게 좋은 일이 있나.”
몽주가 아주 만족스러워하자, 주변의 신하들이 같이 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 중에 몽주가 고무나무를 고대함을 아는 자가 있고, 아닌 자들도 있었으나, 알고 있던 자들도 대체 고무나무에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 얼른 파식군에 입항하지. 그리고 얼른 부루내로 다시 출발하세.”
몽주가 박수도 몇 번 치며, 주변에 호령하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던 선원들도 얼른 다시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식만 입구로 들어가면서 몽주는 남서쪽 먼 바다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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