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04)
스르릉, 스르릉.
관성 바퀴(플라이 휠)의 회전 소리가 귀를 건드렸고, 꾸물거리는 톱니바퀴는 심경을 건드렸다.
“미쳐 버리겠네…….”
군기소 반장 중 하나인 철장보의 중얼거림은 주변 모든 공인들의 마음과 같았다.
“또, 힘이 떨어지는 거지?”
“예…….”
이미 알고 있는 바지만, 그래도 혹시나 아니길 바라며 물었던 말에 대한 대답은 역시나였다.
그들 앞에 있는 복잡한 기계, 현대의 시선에서는 간단하지만, 당대에서는 충분히 복잡한 그 기계는 열기 기관이었다.
열기 기관은 증기 기관을 포함하여 뜨거운 공기를 이용하는 모든 기관을 의미했지만, 탐라에서는 ‘스털링 기관’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군기소의 장인들은 열기 기관을 제작하는 중이었고, 꽤 오래된 실패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래서야 우리를 믿어 주신 저하께 면목이 서겠나.”
“…….”
장보가 탄식하듯 말하니, 그들은 탐라공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만 4년이었다.
홍로동의 상수로가 완성되었던 5년 전쯤, 그 성공을 자축하고 다른 동과 다른 지방에도 상수로의 확대를 결정짓는 자리에서 장인들은 열기 기관에 대한 구상을 탐라공께 밝히며 그 제작을 개시하게 해 줄 것을 청했었다.
상수로를 위해 물을 끌어올리는 열반부(펌프)의 원리를 이용하면 축을 회전시킬 수 있다는 건 이미 착안되어 장인들 사이에서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었으니, 그것의 실현을 시도하고자 함이었다.
그에 탐라공은 크게 흡족해 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해 줬고, 실제로 상당한 자금과 자원을 동원하여 장인들에게 안겨 주었다.
심지어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이것저것 실험을 해 보면서 지식과 자료를 축적하는 데 집중하라며 부담까지 덜어 주시기도 하였다.
그렇게 비교적 맘 편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4년 동안 실패만 잇고 있으니, 아무리 탐라공의 재촉과 채근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찌 막아야 하는 거지?”
다시 장보가 물었으나, 답을 구하기 위해 물은 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이 실패하는 원인은 파악되었고, 지난 2년 여 간은 그 실패 원인의 대책을 세우기 위한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 열기 기관이 실패하는 원인, 처음에는 그럴싸하게 운전이 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동력이 점점 떨어지는 현상의 이유는 기관의 밀폐성이 부족하다는 점에 있었다.
열기 기관은 밀폐된 기관 안에서 뜨거운 공기와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의 움직임에 의해 동력이 발생하는데, 그 공기가 새면 자연히 열 온도의 차가 줄어듦은 물론, 공기 압력도 작아지기 때문에 동력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여, 그간 여러 대책을 세워 시도하였으니, 보다 많은 나사를 이용하여 여러 연결부를 더 강하게 죄기도 하였고, 아예 부품의 수를 줄여 연결부 숫자 자체를 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공기가 빠지는 현상이 멈추지 않자, 연결부에 여러 원료를 발라 막아보려는 노력을 계속하였으니, 온갖 재료가 동원되었다.
유약과 황칠 및 옻칠처럼 그간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이던 것은 물론, 세망이나 고령토를 써 보기도 하고, 역청 찌꺼기를 이용해 보기도 했다.
하나, 대개가 소용이 없거나 있어도 그리 큰 개선점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결과만 보일 뿐이었다.
“적어도 한 해는 버티게 하고 수리를 할 수 있어야 기관을 만드는 이점이 있을 것 아닌가. 한데, 기껏 한 주를 버티기 어려우니…….”
“반장님, 좀 쉬시고, 다시 심기일전하시죠.”
누군가 장보의 어깨를 살짝 주무르며 말하니, 공소의 장인들 중 하나이자, 사사로이는 그의 아들인 덕진이었다.
어릴 적부터 제법 손재주가 있어, 후에 자기도 장인이 될 거라 말하더니, 기술학교를 우수하게 졸하고 탐라 상단에 들어간 지 몇 년 만에 군기소의 장인으로 지정되기까지 하였다.
덕진은 장보에게 있어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내가 너무 실의하였구나. 후우, 세상만사가 이처럼 뜻대로 되는 게 아니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위로에 답을 했지만,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반장은 그만 실망을 표하는 걸 멈추고, 휘하 장인들에게 휴식하라 명하곤 그도 쉬기 위해 작업실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작업소에 남겨진 열기 기관은 운전을 멈춘 채 미미하게 남아 있는 열기만 흘리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최초의 열기 기관으로서 ‘자태’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침묵 속에서 ‘거의 다 되었다’고 외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외침에서 ‘거의’를 없애 줄 자원이 탐라섬에서 수천 길미 떨어진 곳에 등장해 있었다.
* * *
부루내에 있는 동안, 몽주는 부루내 원주민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치안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몽주가 대중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게 중론이었고, 그도 수긍하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곳 부루내를 탐라와 고려의 확고한 영토로 자리 잡게 할 의향이 있었다면, 몽주도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그곳의 지배자임을 드러낼 생각이 있었지만, 부루내는 고려로부터 너무 먼 곳이었다.
사실 여송섬도 파식군 외에는 아직 탐라의 영토가 아닌 상황에서 그곳에서 다시 1천 길미 이상 더 멀리 떨어진 부루내 지역을 확고한 영토로 삼길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하여, 부루내에서 몽주가 원하는 건 도시였고, 정확히 말하면, ‘항구’였다.
이는 비단 부루내뿐만 아니라, 장차 탐라국이 그 영역을 넓힘에 있어 기본적인 방침이었으니, 포구를 얻어 탐라의 배와 군대가 이동함에 있어 무리가 없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그 이상의 일은 세태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지역의 ‘여론’에 따라 달라질 것인 바, 만약 원주민들이 스스로 친밀해지고, 복속하길 바란다면 그렇게 될 것이나, 아니라면 포구의 안위와 그를 통한 경제 및 군사 활동에 어려움이 없게 하는 데에만 집중할 생각이었다.
여송섬과 그 이후 영역의 차이점은 바로 그 부분에 있었으니, 둘 다 원주민들의 자발적인 복속을 받아들이고자 하나, 여송섬은 그 자발적인 복속을 ‘유도’할 의향이 강하고, 그 외는 굳이 유도까지 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면, 그들의 처벌은 포기하는 것입니까?”
“아니, 어쨌든 이곳은 탐라의 것으로 할 셈이니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탐라의 법대로 처리해야지. 다만, 그에 반대하는 자들을 굳이 안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말일세.”
“……?”
“그 구분을 나누는 걸 이번 일로 계기를 삼자는 말일세. 탐라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면 어떤 벌을 받지?”
“명을 내리거나 직접 손을 쓴 자가 사형을 언도받고, 그에 조력한 자들은 유형에 처해진 판결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 이곳에 재판청이 없지만 판례는 있으니, 그대로 적용하면 되네. 만약 그에 항거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곳에서 추방시키게. 그들의 재산을 챙겨 가는 건 허락하고.”
“아…….”
탁기는 그제야 이해가 되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부루내의 다른 지역에서 원주민들의 풍습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되, 부루내라는 ‘도시’이자 ‘항구’에서는 탐라의 법대로 살아야 하고 그것이 싫다면 나가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처음 몽주가 부루내에 닿았을 때, 보고받았던 ‘명예 살인’에 대한 몽주의 처결이었다.
어찌 보면 ‘침략자’가 자신의 법령을 강요하는 작태일 수 있지만, 원래 침략자는 다 그런 법이다.
이전 부루내 왕 또한 그들의 기준과 법을 원주민들에게 강요했을 것이고, 앞으로 만약 또 다른 침략자가 이곳을 점령한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적어도 따르지 않을 때, 죽이지 않고 그저 내쫓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몽주의 ‘침략’은 충분히 자비로웠다.
그 결정이 또 다른 소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지금 부루내의 탐라군은 그곳 원주민 전원이 들고 일어나도 상대하고도 남을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귀찮고 성가신 것이 문제이고, 피를 보는 걸 피하고자 함이지, 그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여,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은 내정의 고민거리가 해소된 탁기는 마음 편하게 주군의 결정을 시행하였다.
결과적으로 미리 잡아 둔 ‘명예 살인자’들의 처벌은 순탄하게 시행되었다.
비록 그들의 일가 몇몇이 돌을 던지고 도망치는 정도의 소소한 항의가 있었고, 그에 대한 처벌이 추가로 있긴 했지만, 원주민들의 소요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그 처결에 대한 동의와 동감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탐라군이 두렵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 문제 이후, 몽주가 집중한 것은 역시나 고무나무의 재배와 고무 생산에 대한 계획이었으니, 거의 두 주 동안 구 왕성에서 군정의 관리들과 함께 고민하였다.
가장 쉬운 것은 현재 자생지를 그대로 재배지로 바꾸는 것이지만, 여러모로 검토 끝에 자생지를 확대하는 대신, 새로 다른 곳에 재배지를 육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이는 현재 발견된 재생지로의 접근이 용이치 않고 ‘항구 도시’ 부루내로부터 너무 멀리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도시라고 해서 작은 마을 수준에 국한할 건 아니고, 몽주도 부루내가 많은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큰 도시로 성장하길 바라고 있기에 그에 필요한 영토의 크기를 갖추길 바랐지만, 그 영토가 주로 해안을 따라 넓어지길 바라지, 건사하기도 어려운 내륙의 밀림에 소중한 고무 생산지가 위치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는 장차 파라 고무나무를 얻게 되면, 부루내와 여송섬으로 옮겨서 육성할 계획이기도 한 바, 어차피 새로 재배지를 구성할 것이라면 미리 길게 보고 좋은 곳에 재배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하여 부루내 주변 해안지 안쪽 땅을 확인하였으니, 몇 군데 좋은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중 최종적으로 낙점된 곳은 부루내의 동북쪽 해안의 평지로, 그곳도 밀림이 가득하긴 했지만, 지형 자체가 평평하고, 토질도 좋은 편이라 개간할 만하다는 판단이 섰다.
하여, 현대에서는 ‘브루나이 베라카스’ 해변의 고급 빌라촌이 있는 그곳은 몇 년 안에 고무나무로 도배가 될 운명이 되었다.
“한데, 저쪽 남서쪽에 더 좋은 곳이 있는데 거긴 왜 피하신 겁니까?”
포구로 향하는 중에 석삼이 물으니, 고무나무 재배지로 삼을 후보지 중 한 곳을 언급하였다.
“아, 거기?”
“예, 거기도 평탄하고, 수풀은 오히려 덜 우거져서 개간하기도 편하다 봤습니다. 또, 해안과 가까운 것도 마찬가지, 포구로부터는 더 가깝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지. 한데, 거긴 나중에 쓸 데가 있는 땅이라서 말이야.”
“어디에 쓸 건뎁쇼?”
“있어. 불붙이는 데 쓰는 거.”
“……?”
‘브루나이’ 국왕을 세계 최고 갑부 중 하나로 만들어 준 천연가스 유정이 있는 곳을 고무나무로 뒤덮을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다친 이가 없었으면 좋겠군.”
“뭐, 피해가 없다지 않습니까. 그게 그 얘기겠죠.”
“그렇지?”
포구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지 않았으니, 전날 몽주가 부루내로 오기 전에 탐사에 나섰던 탐라의 선단 중 한 척이 먼저 입항하여 소식을 전해 왔는데, 그 소식에 탐사대가 원주민의 습격을 받았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 * *
사실 탐사대는 부루내에서 출발하진 않았다.
정확히는 여송섬에서 출발했고, 술루 제도를 중간 기점으로 삼았으니, 부루내에는 온 적이 없는 함대였다.
그저 탐라공께서 부루내로 가실 것이라는 소식을 사전에 듣고 귀환지를 부루내로 정한 것이었다.
참고로, 술루 제도는 아직 술루 왕국이 세워진 건 아니었지만, 그곳에 이슬람교를 전한 카람(Karamul) 가문이 이미 사실상 왕처럼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림 가문은 부루내 왕과 달리 탐라의 힘을 인정하고 협조하였기에 아무런 화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여러모로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 중이었다.
어쨌든 그렇기에 탐사대도 부루내로 향하는 건 처음이었고, 항로 지도가 있긴 하나, 미지의 곳을 탐사하고 오는 길이 다른 만큼, 완벽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덕분에 부루내로 향하는 중에 다소간의 혼동이 있었으니, 그 결과 본의 아니게 ‘술라웨시’ 섬을 발견, 이미 지도에 표시되어 있긴 했지만, 어쨌든 탐라 최초로 그 섬에 닿게 되었다.
한데, 그곳의 원주민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 우리가 그 제도로 간 항로는 술루에서 여남도(민다다오 섬)의 남쪽을 통해 동진하였고, 이후 열도(列島)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소. 뭐, 워낙에 탐라공 저하께서 주신 지도가 믿을 만한 것이어서 그 향신료 제도라는 데에 도착하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소. 게다가 그 향신료 제도의 원주민들은 이미 외부와의 거래에 익숙해서인지 우리처럼 낯선 이들이 등장함에도 전혀 혼란함이 없었지. 향신료를 구하고자 한다고 의사를 전하니, 태도도 친절했고.”
“허, 신기하네. 그 외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외부와 거래에 능하다니.”
“뭐, 우리네 입장에서는 외딴 곳이라도 거기선 또 아니지 않겠소.”
“한데, 거기서 구한 향신료가 뭐요?”
“따로 이름이 있긴 했지만, 그걸 중국에서는 정향이라고 하더군.”
“정향? 어디서 들어 본 것도 같은데?”
“고려에서도 약재로 조금 쓰이고 있다 들었소.”
“엥? 고려도 거기와 거래를 했었소?”
“아니,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겠지. 중국도 남만이나 인도를 통해 들여왔을 테고.”
“호오, 거 참, 세상은 요지경이라 알게 모르게 물산이 세상에 잘도 퍼지고 있었구려.”
“더 재밌는 거 알려 드릴까? 우리가 고려와 탐라를 어찌 소개했는지 아시오? 그들도 우리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으니 어디에 있는 어떤 나라인지는 알려야 하지 않았겠소.”
“아, 그도 그렇소. 마냥 저 먼 북쪽에 있는 나라라곤 할 수도 없고. 해서, 어찌 설명한 게요?”
“하하하, 의외로 간단했소. 세상에, 거기에 탐라의 비노가 떡 하니 있더군. 그것도 종이갑에 한글로 한양 비노라고 적혀 있는 비노가 말이오. 그걸 가리키며, 저걸 만든 나라에서 왔소이다, 했지.”
“어허허, 그것이 참말이오? 그것 참 신기한 노릇이오. 대체 비노가 어찌 그런 외진 곳까지 흘러들어간 게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정향이 고려에 들어온 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되지 않겠소?”
수십의 군병들이 모여 있는 중에 유혁술 중사의 입놀림이 연신 이어졌으니, 비단 그뿐만 아니라 탐사대에 속해 있던 장령 군병들 중 상당수가 다른 탐라군병들 사이에서 그들의 모험담을 설파하는 중이었다.
순위군으로 명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이후 탐라군에 지원하였으니, 그의 동생이 큰 부상을 감수하고 고려 세자를 구한 덕에 왕실의 지원을 얻게 되어 집안 걱정을 덜 수 있었고, 평소 꿈꾸던 탐라수군이 되어 원양을 항해하게 되었다.
“한데 도중에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었소?”
“그게…….”
유 중사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잠시 시선을 돌려 포구에서 다소 떨어져 머물고 있는 기함 쪽을 바라보았다.
‘말을 해도 되나 모르겠네.’
그가 머뭇거리자, 주변의 군병들이 더욱 재촉하였으니, 궁금증이 커진 탓이었다.
하여, 유 중사도 딱히 입을 무겁게 하라는 명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침내 입을 열었으니, 그의 첫마디는 제법 듣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지. 측량을 하면서 해안을 가까이 스쳐 가는데, 한 무리의 괴물들이 아이를 잡아먹고 있는 것 아니겠소. 그에 깜짝 놀라 우리가 총포를 쏘며 달려갔는데…….”
* * *
유 중사가 한창 입을 놀릴 무렵, 기함의 선실에서도 탐사대장이 탐라공께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원숭이였다?”
“예, 한데 멀리서 보면 정말 원주민 아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연한 갈색 피부에 털도 거의 없고, 생긴 것도 피부가 좀 쭈글쭈글한 사람처럼 생겨서…….”
탐사대장은 그의 실수담을 이야기하면서 창피한 양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한데, 그게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은 것과 무슨 상관인가?”
“예, 어쨌든 저희가 오해하여 그 괴물 같은 돼지들을 사격하여 몇 마리를 잡았는데, 얼마 후에 주변의 원주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마 총포 소리에 모인 모양인데, 그들이 죽은 돼지들을 보고는 크게 놀라며 뭐라 마구 고함을 지르더니, 순식간에 분위가 흉흉해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창과 방패를 든 자들이 모여들었고, 저희를 향해 화살을 쏘기도 했습니다. 하여, 저희는 괜한 충돌을 일으키는 대신 서둘러 철수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몇몇이 화살에 맞긴 했지만, 다행히 상대적으로 약한 위력에 군병의 갑구가 막아 줘서 크게 다친 자는 없었다.
“대체 돼지 몇 마리 잡았다고 왜 그리 난리인지…… 저희가 배로 철수한 뒤에도 조그만 쪽배 같은 걸로 추격까지 하더군요.”
“음…….”
몽주는 탐사대장의 말을 들으며, 그가 가진 정보와 맞춰보았다.
“혹시 그 돼지의 어금니가 크던가?”
“아, 예! 맞습니다. 엄청나게 크더군요. 이렇게 휘어서 마치 자기 얼굴을 찌를 것처럼…….”
“하면, 혹시 그 원숭이를 돼지들이 잡은 게 아니라, 사람이 잡아서 놓아 둔 흔적은 없던가?”
“예? 으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돼지가 그렇게 민첩해 보이진 않았는데, 어떻게 원숭이를 잡았는지 이상하긴 합니다. 게다가 그곳은 해안으로 키 작은 수풀만 있을 뿐, 원숭이가 좋아할 만한 나무는 없던 곳이었지요.”
“아무래도 그 돼지가 그곳 원주민들의 신앙이었나 보군.”
“예?”
몽주의 말은, 탐사대장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리 놀랄 건 뭔가? 고려에도 서낭당에 기원하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또, 오래된 고목이나 장승을 수호신 삼는 마을도 있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돼지를 어찌…….”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던 석삼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으니, 몽주는 실소를 지을 뿐이었다.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이나…….’
어쨌든 그 돼지는 아마도 ‘바비루사’임에 분명했다.
술라웨시 섬과 주변에만 서식하는 희귀종 멧돼지로, 털도 거의 없어 일반적인 돼지에 비해 좀 징그러운 느낌이 들고, 뿔도 큰 탓에 충분히 괴물처럼 보일 만한 놈이었다.
하나, 뿔은 겉보기용, 과시용에 불과하여 ‘무기’로서는 연약한 것이었고, 잡식성이긴 하나, 사냥 능력은 별로 좋지 않아, 인간에게도 별 위험한 놈은 아니었다.
그런 돼지가 어떻게 신앙의 대상인 ‘애니미즘’적 존재가 되었는지는 몽주도 추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소순다 제도 쪽은 아직 조직화된 종교보다 애니미즘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시기였다.
“음, 잠깐…….”
바비루사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하던 몽주는 문득 스친 생각이 있었다.
술라웨시 섬을 비롯한 소순다 제도에는 희귀한 동물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예컨대, ‘쿠스쿠스’라 불리는, 원숭이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유대류, 즉 코알라와 비슷한 동물도 그곳에 서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희귀 동물들 중 상당종은 현대에서 멸종되었거나,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으니, 바비루사나 쿠스쿠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비단 그곳의 희귀 동물뿐만 아니라, 아직 이 세상에는 천몽 밖 현대에서는 멸종된 동물들이 많이 살아 있을 때였다.
가장 최근에 멸종한 포유류이자, 최초로 멸망한 고래류인 장강의 돌고래는 몽주가 직접 본 적도 있었다.
북해도는 늑대 떼의 터전일 것이고, 독도와 울릉도는 강치들의 둥지일 것이다.
사자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사실상 멸종한 바바리 사자도 북아프리카의 고독한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을 것이다.
콰가나 도도처럼 인간에 의한 멸종의 전설을 만들고 사라진 동물들도 아직은 그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 전이었다.
‘그 멸종들을 막는 것도 내가 역사를 바꾼 업에 대한 보상일 수 있을까.’
생태계라는 게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라, 어느 한 종의 멸종을 막는 것이 또 다른 종의 멸종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몽주는 사라진 종을 남기는 것이 인류를 위한 큰 선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무와 향신료 제도, 그리고 ‘싱가포르’를 이유로 찾은 부루내에서 몽주가 뜬금없이 새로운 목표를 하나 더 얻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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