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06)
복지 복지(福祉 袱紙)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홍로 포구에 몽주가 닿았을 때, 그는 자신을 맞이하는 아내와 아들의 표정에 그늘이 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그에 대해 아내가 바로 말문을 열지 않기에 몽주도 딱히 언급하진 않았는데, 그녀가 그에 대해 말을 한 건 한참이 지나 공택의 안방 안으로 단둘만 남았을 때였다.
“……매병이라 하였소?”
“네…….”
몽주는 자신의 귀에 들린 병명에 크게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대체…… 어떠셨길래……?”
“아직 심각하신 건 아니에요. 몇 번 짧게 그러셨을 뿐이에요. 저도 알아보시고요. 한데, 강중이를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
아내가 말한 건 어머니 엄주이의 매병(呆病), 즉 치매 증세였다.
몽주가 출항하고 며칠 후 처음으로 발증하였다 하니, 현재의 공택이 아닌 예전 공택을 찾으며, 며느리에게 집이 사라졌다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였다.
그 후에도 몇 차례 한 시진 안팎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를 보이셨는데, 애지중지하던 하나뿐인 손자를 못 알아보고, 오히려 강중이에게 자기 손자를 찾아 달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이셨다는 것이었다.
사례를 들어 보니, 아머니의 기억이 십여 년 전으로 퇴화하는 모양이었으니, 치매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세였다.
“…….”
가슴이 싸하고 마른침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만큼 고령이 되시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걸 예견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니,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치매 환자를 보살피는 건 몽주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하려고 하면 간호자를 수십 명도 둘 수 있다.
그저 어머니, 비록 천몽 속의 인연이고, 정확히 말하면 몽린의 어머니지만, 그래도 자신을 아들로서 수십 년 애정을 베풀어 주신 분이 치매에 걸리셨다는 자체가 서글펐다.
“어머님은 아시……? 아, 모르시겠군.”
부모님도 포구에 마중 나오셨으니, 만약 어머니 본인이 알고 있으셨다면 그처럼 환하게 웃음을 보이진 않으셨을 것이다.
오히려 건강하셨냐는 몽주의 물음에 요새는 잔병도 별로 없다는 대답도 하셨다.
다만, 어머니의 곁에 있던 아버지가 묵묵하게 서 있으셨던 게 떠올랐다.
“아버님은 아시는 모양이구려.”
아내의 고개가 끄덕이는 걸 보며, 몽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해민을 찾아갔다.
공택에서 부모님이 기거하시는 곳은 2층으로, 몽주 내외와 같은 층이었다.
다만, 2층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별개의 공간처럼 지어져 있었다.
“나가서 이야기 하자꾸나.”
낮잠을 주무시는지 어머니의 옅은 코고는 소리를 뒤로, 두 부자는 뒤뜰로 나와 함께 거닐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처 백모도 매병으로 한참 고생하셨다지.”
치매도 유전력이 강한 질병이니, 선대에 발현한 예가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삼라만상은 잉태되던 그 순간에 이미 결정되었죠.’
예전에 대학 교양 수업 때, 아마 건강과 인체에 대한 수업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강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 유전자에 담긴 대로라며, 얼마나 머리가 좋을지, 얼마나 운동 신경이 좋을지, 얼마나 건강할지 모두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말이었다.
하루에 한 갑씩 30년간 담배를 피웠지만 유전력은 없는 사람과 담배는커녕 늘 맑은 공기에서 살았지만 유전력이 있는 사람 중에 누가 폐암에 걸릴 확률이 높을까라고 물으며 자신이 내기를 건다면 후자에 걸 거라고도 하였다.
당시에는 ‘거, 사람 희한하게 염세적이네.’라는 소감만 가졌을 뿐이지만 살면서, 동년배에 비해 몇 배는 많이 살면서 느끼는 바는 그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매병을 앓는 이들 중에 완쾌한 이를 본 적이 없다. 들은 적도 없고. 혹시 너는 들어 본 적 있느냐?”
해민의 물음은 마치 치매를 치료하는 방법을 아느냐는 물음처럼 들렸다.
몽주는 고개를 저었다. 현대에서도 치매는 아직 도전해야 할 질병이었다.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 몇몇 성과가 있다곤 하지만, 치료 가능하다는 결과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질환이었다.
물론, 현대에서 치료가 가능하더라도, 천몽 안에서 그 치료를 구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무엇이든 다 아는 것 같던 아들의 힘없이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본 해민이 옅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그리 작지 않은 뒤뜰을 한 바퀴 걸은 후에야 해민이 다시 말문을 열었는데, 그 말투가 짐짓 밝은 느낌이었다.
“어쩌겠느냐.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해 보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지.”
말 자체는 체념 어린 뜻과 통하는 듯했지만, 그의 말투가 그 반대의 의미로 만들고 있었다.
몽주가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들은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앞으로 어머니를 어찌 간호할지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나마 몽주가 다행으로 여긴 것은 매병 치료에 대한 헛소문들을 아버지가 추종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는 사실 매병이 당대에도 그저 답이 없다는 결론이 난 질병인 탓이기도 했다.
의술이 의학으로 진화하지 않은 현실에서 불치와 난치의 병은 때로는 무모하고 잔인한 치료법에 대한 소문이 따르곤 하는데, 한센병(문둥병)자가 아기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게 대표적인 예였다.
그에 비해 치매가 그런 괴담이 없다시피 한 건, 있다 하더라도 그저 노망이나 귀신 들린 정도(?)로 취급한 건 본래 치매가 걸릴 만큼 오래 사는 이가 적은 덕이었다.
치매는 뇌질환으로 반드시 노인성 질환인 건 아니지만, 폭음이나 약물이 원인이 아닌 이상, 치매를 일으킬 만큼 뇌의 손상이 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환자의 대부분이 노인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노인이 적은 사회에서는 치매도 그만큼 적고, 그에 대한 소문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몽주가 이를 원래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버지와 헤어진 후, 내관대신 홍길도를 호출하여 탐라국의 노인들에 대해 물어 그 답을 얻는 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다만, 이제는 노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비율로 따지자면 오히려 노인의 비율은 줄고 있습니다만, 이는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 성장한 덕이고, 절대적인 수만 따지면 과거보다 많아졌고, 앞으로는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대표적인 고령화 사회이자, 초고령화 사회로 나가고 있는 현대 한국을 경험한 몽주에게 당금 탐라국에 노인이 많아지고 있다는 건 별 체감이 되는 부분은 아니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달리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데, 흥미로운 건 노인층의 증가를 바라보는 당대인들의 시선이 현대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었다.
조선 중기만 되었어도, 아마 노인 문제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했을 것이니, 대가족 제도하의 충효 사회에서 노인은 가족이 모셔야 할 대상이고, 그것을 하지 못하는 가족에 대한 처벌만이 문젯거리였다.
하나, 당대 고려 사회는 굳이 따지자면 핵가족 제도에 가깝고, 충효 사상도 인륜의 영역에 속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핵가족 제도라 하여, 완전히 동떨어져 사는 경우는 드물지만, 차라리 집성촌을 이룰지언정, 혼인과 함께 자식이 분가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였고, 족속 내 인력 수급이 중시되는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 만큼, 그 경향성은 앞으로 계속 강화될 게 분명했다.
“한데, 어인 일로 노인들에 대해 하문하시는 겁니까?”
“……그냥, 문득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이 많지는 않나 싶어 물어보았네.”
몽주는 굳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기에 그렇게 둘러댔다.
그러자 홍 대신이 조금 반색하는 얼굴로 다시 말문을 열었으니, 안 그래도 평소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가 있던 모양이었다.
“우리 탐라국이 전에 비할 바 없이 풍요롭긴 하나, 세세히 살피면 여전히 궁핍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말씀하신 것처럼 노령인 자들 중에 탐라국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 이들은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는 중입니다.”
홍길도가 연이어 말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복지였다.
물론, 현대적인 의미의 복지 제도나 복지 국가를 언급한 건 아니었다. 복지(福祉)라는 말을 쓰지도 않았고.
하나, 밥을 굶고 거처가 없을 정도로 형편이 곤궁한 자들은 도와야 하지 않느냐는 홍 대신의 말은 그가 내관부를 담당하는 만큼 국가에 의한 제도적 복지에 닿아 있었다.
몽주는 그에 대하여 즉답을 피하였다.
현대에서는 복지 제도에 대해, 설령 그것이 다소 부작용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인 그로서도 당대에 복지 제도를 추진하는 것에는 미온적인 편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에 소모되는 자원이 아까운 면이 있었으니, 그 자원으로 산업에 투자하고 상업을 확대하는 것이 어차피 국가에 의한 복지가 0에 수렴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더 복지적인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여, 홍 대신의 청을 검토해 보겠다는 말로 대신하고 그를 돌려보낸 다음, 금세 잊고 다른 일에 집중하였는데, 며칠 후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인해 생각을 다소 달리하게 되었다.
몽주가 만난 이는 명나라에서 온 태감 정화였다.
* * *
정화를 처음 본 것은 갑술화의 때였다.
정전 협정의 실무진 중 하나로서 대내외적인 환경이 몹시 불리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명나라에게 한 점의 이득이라도 안겨 주기 위해 종횡무진하였기에 탐라의 관리 눈에도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몽주의 귀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하여, 양주로 향했을 때도 그를 유심히 눈여겨보았는데, 협정에 대한 절실한 마음과 그 마음을 뒷받침하는 능력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금 고려 물산의 대 명나라 교역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천건사 또한 사실상 정화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전승을 이끌었음에도 아무런 이득을 챙기지 못한(?) 고려를 위해 동맹국들이 무엇이라도 챙겨 주려는 분위기가 가득한 상황이었으니, 고려가 물산의 교역을 명나라에 강요하고자 함은 반드시 관철해야 할 조건이었다.
물론, 명나라로서는 몹시 부담스러운 사안이었으니, 고려의 물산 대개가 사치재로서 전후에 그 수요가 몹시 낮을 게 분명하고, 더욱이 고려에 대한 적대적인 민심이 가득할 것이 뻔한데, 명나라 조정이 고려의 물산을 떠안게 되면 엄청난 손실이 생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여, 협정 중에 그 부분을 두고 신경전이 드세었고, 협상이 파탄 날 조짐조차 생길 즈음, 명나라 측이 전격적으로 그 조항을 수용하겠노라 선언하였으니, 후에 그것이 천건사를 통해 고려 물산을 ‘국적 세탁’하고, 그에 관한 모든 이문을 황실이 손에 쥐는 방안을 구상한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정화의 구상이었음이 드러난 건 더 후에, 천건사를 통한 교역이 정상 궤도에 오른 뒤였다.
그리고 그 즈음에서 몽주는 정화가 그가 알고 있는 정화가 분명함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의 출신에 대한 정보를 얻어, 당대에서 정화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역사 속의 정치가이자, 탐라험가이며, 외교관이고, 전략가이자, 장수인 환관 정화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몽주는 내심 반가운 마음이 있었지만, 내심은 내심일 뿐 겉으로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당시 그는 고려 탐라공을 상대할 만한 지위도 아니었고, 또 몽주가 그를 반가워하기에는 그가 명나라의 신하라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다만, 이제 6, 7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아직 서른 살에 불과한 정화는 성영제의 태감들 중에서도 그 권력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가 되었다.
소위 대외총관태감.
공식적인 직책은 아니었으나, 대내총관태감이라는 최고위 태감에 비등한 권력을 쥐고 있고, 그 권력과 맡은 바 임무가 대개 국외의 문제와 교역에 집중되어 있어 전혀 무색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직책 또한 가볍지 않았으니, 그는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탕문위의 소위(帑門委 小委)이자, 천건사의 통감(統監)이었다.
그중 탕문위 소위라는 직책에 있어, 외부 사안에 집중하는 그가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직책을 가진 것은, 당금 명나라 황실 재산이 천건사의 교역, 더 정확히는 고려로부터 들어오는 물산에 상당 부분 기인하기 때문이고, 또 탕문위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기관이라기보다는 환관이 운영하는 여러 기관에서 대표를 보내, 황실 재산이 유용되는 걸 상호 감시하도록 짜인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공식, 비공식적으로 권력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정화가 탐라섬에 온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천건사의 일 때문에라도 탐라와 대화해야 할 일이 많은 그였지만, 그래 봐야 명나라에 나아가 있는 탐라 대사를 통해 뜻을 주고받는 게 전부였다.
한데, 구체적인 용건도 밝히지 않고, 대뜸 며칠 전에 전갈을 보내고 전격적으로 방문하였으니, 의아하고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몽주가 포구까지 마중 나갈 일도 아니기에, 마차만 보내고 공택에서 기다리니, 마침내 정화를 태운 마차가 당도하였다.
‘화(和)라는 이름이 참 어울린단 말이야.’
역사에서 정화의 이름을 지어 준 자는 영락제, 지금의 연왕이었고, 당금 정화의 이름을 지어 준 자는 성영제, 역사 속에서는 요절한 의문태자이다.
전혀 다른 이가 성명을 하사함에 같은 이름을 지어 준 것이 신기했는데,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성씨는 몰라도 이름은 절로 화(和)가 어울리겠다 싶었다.
화(和)의 의미는 곧 협(協)이니, 서로 응하고 합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교(交)를 전제로 하는 바, 그는 교(交)와 협(協)에 능숙하여 파탄이 날 수도 있었던 명나라와 고려, 탐라의 관계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 그의 업적은 둘째치고, 외모의 느낌부터가 조화스러웠다.
동서양 혼혈인의 느낌도 그렇고, 사람의 얼굴이란 게 좌우가 조금 다른 것이 보통이건만 그 대칭이 정확하였으며, 말투나 표정에 거슬림이 없는 것도 그랬다.
아마도 연왕이든 성영제든 다른 누구든, 그를 위해 이름을 지어 주고자 한다면 절로 화(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강녕하셨습니까.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더욱 헌앙해지셨습니다.”
오랜만에 봤다기에는 갑술화의 당시에 서로 시선이나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서신과 문권을 종종 나눈 바 있는 만큼 몽주도 오랜만이라는 인사말을 건넬 뻔했다.
하나, 그보다는 더 놀란 부분이 있어, 인사말을 달리 하였다.
“반갑소. 한데, 어찌 고려말이 그처럼 능숙하오?”
“배웠습니다.”
“배웠다라…… 단지 배웠다는 말로 가름하기에는 너무 잘하는 것 아니오?”
“노력했습니다.”
짧게 끊어지는 말에서 그가 외국어로서 고려말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긴 했지만, 발음과 억양만큼은 깜짝 놀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정화가 고려말에 상당히 능숙한 덕에 처음 분위기는 아주 온화해졌다.
아무리 몽주가 명나라에 경계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명나라의 고위 관리이자 황제의 측근이 고려말을 능히 하니, 마음속에 호감이 들어서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몽주가 그 호감에 경도되어 간담을 내줄 위인은 아니었다.
“도움을 청하고자 하여 귀인을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도움을 말하는 게요?”
“바다를 알려 주십시오.”
“…….”
그 말에 몽주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 대원정을 기록한 그가 바다를 알려 달라 하니, 반가운 마음이 불쑥 듦과 동시에, 그가 명나라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인 만큼 이제껏 자기 안방에만 죽치고 있던 명나라가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경계심 또한 치솟았다.
“의미가 애매하구려.”
“더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의 배와 상인이 바다 건너로 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래도 잘 모르겠군. 바다를 건너고자 한다면 행하면 될 것 아니오?”
“배를 띄우는 거야 가능하겠으나, 바다를 건너기에는 모든 길목이 탐라의 손아귀에 있어, 그것을 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
정화의 말대로 명나라는 탐라의 허락(?)이 없이는 근해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쪽은 고려와 탐라 그 자체가 있고, 동남쪽에는 이주가 있고, 남쪽에는 점파국과 그 괴뢰국인 해월국이 있었으니, 모두가 탐라의 영토이거나 그 영향력이 지대한 곳이었다.
지금 탐라국도 마찬가지지만, 그간 항해의 역사가 절단되었던 명나라는 더더욱 연안 항해가 최선인데 그렇게 길목이 모두 막혔으니, 배를 띄운다고 해도 바다를 건널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영해, 사실 영해라는 개념이 명백하게 당대에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가까운 바다를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과 더불어 포구의 이용권을 요청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몽주는 그 전에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게 있었다.
“모든 것을 갖춘 명나라가 굳이 바다 밖으로 걸음하려는 이유가 있소?”
명나라를 비롯하여 태생적으로 중화제국들은 그 ‘내재적인 완결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에 외부에서 중화를 찾아오는 걸 당연히 여기고, 외부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정화의 요청은 그 역사의 궤와 대단히 다른 부분이었다.
“모든 것을 갖출 수는 있으나, 모든 것을 이용할 수는 없으니까요.”
“……!”
몽주는 놀란 표정을 감추느라 꽤 애를 써야 했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명나라가 현대의 중국을 추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중국이 강력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건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 잠재력을 드러낸 건 개방 정책 이후였다.
엄청난 인구가 가진 생산력과 소비력, 그리고 드넓은 영토 안에 있는 풍부한 자원이 제대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상품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였다.
아무리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세상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 정화의 대답에는 현대의 중국이 나아간 길로 명나라가 걸음하겠노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허허…… 재밌는 말이로군.”
몽주는 짐짓 여유로운 웃음을 띠었지만, 머릿속은 비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절대 허락하면 안 된다는 비상등이 잠깐 켜지기도 했지만, 이내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에서 중국의 급격한 성장에 짧은 시야로 물을 주며 과실을 조금 챙겼다가 너무 커진 중국의 국력에 쩔쩔 매고 있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현대에서야 한국이 아니더라도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성장에 기여하고 과실을 챙길 수 있었고, 그렇기에 한국도 조바심에 과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움직일 수밖에 없었지만, 당대에서는 명나라를 상대로 그럴만한 힘을 가진 곳은 고려, 탐라뿐이었다.
상황이 다르면 대책도 달리해야 하는 법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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