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07)
* * *
정화와 처음 독대한 그 자리에서 모든 걸 결정할 이유는 없기에, 그의 여독을 빌미로 다음 날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물론, 몽주는 직후에 관련된 여러 대신청장들을 불러 모아, 명나라의 기도에 대한 대책을 논하였다.
한데, 대신청장들과 논의 중에 몽주는 의문을 품게 되었으니, 다음 날 정화를 다시 만났을 때 처음 꺼낸 이야기도 그에 관한 것이었다.
“왜 바다로 나오려는지를 여쭈시는 겁니까?”
“그렇소. 모든 것을 이용하려 한다고 하였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에 있어 명나라와 교역을 할 만한 나라는 우리 고려뿐이지 않소? 하면, 바다를 알아봐야 괜한 짓이 아니오?”
그건 어제 정화가 바다를 알길 바란다는 말에 현대 중국의 개방과 역사 속 정화에 대한 반가우면서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기시감 때문에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에 대한 정화의 첫 답은 다소 싱거운 것이었다.
“탐라의 지도에 보면 바다 너머에 많은 땅과 제국(諸國)들이 있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까.”
“하여, 혹시 명나라와 교역할 만한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에 기대어 바다를 개척하고자 함이라는 게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요. 알아보지도 않고 앉아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지요.”
정화의 말은 몽주가 보기에는 다분히 그의 취향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에서 그가 대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의 동편까지 원정했던, 그것이 설령 영락제의 명과 윤허하에 진행된 일일지라도 정화 본인이 원하지 않았다면 당대에 그렇게나 먼 곳까지 원정을 가지 않았을 것임을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의 호기심 말이다.
하여, 몽주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정화를 잠시 응시하였으니, 그 시선을 회피하던 정화는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잠시 후, 미소를 띠며 말문을 다시 열었다.
“천자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천자께서 군림하시는 동안 반드시 이루고 싶은 공업에 관한 것이었지요.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와 수수께끼 놀음을 하자는 게요?”
“아닙니다. 다만, 공이시라면 짐작하실 수 있는 것이라 여겨 여쭈었을 뿐입니다. 어심에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불쾌할 정도는 아니기에 몽주는 고개를 흔들곤 정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순식간에 정화의 물음에 대한 답이 떠오르긴 했다.
탐라 따라 하기와 그 완성.
그것이 성영제가 바라는 것이라 여겼으니, 당금 명나라에서 그가 그 많은 혼란과 반란을 무릅쓰고 행하고 있는, 나름의 개혁을 떠올리면 생각할 수 있는 답이었다.
하나, 그걸 몽주가 스스로 입에 올리기 민망하여 모르쇠한 것이었다.
“천자께서는 대명의 경로를 만들어 두길 바라십니다.”
“경로?”
“탐라에서 관리가 되려는 자들이 보는 서책에 경로의존이라는 심의가 있다 들었습니다. 나라는 한 번 잡은 길로 계속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라지요.”
“…….”
일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영제가 탐라국 고학교의 교과서까지 입수하여 읽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표현이 다소 다르긴 하나, 몽주는 정답을 맞춘 셈이었다. 성영제가 원하는 명나라의 경로가 탐라국을 참고했음이 분명했으므로.
다만, 그렇다고 탐라국과 완전히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게 명나라의 운명이라는 게 몽주의 생각이었다.
고려로 확장해서 생각해도, 명나라와 고려는 도저히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사이즈’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명은 바다에 전력을 기울일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나라입니다. 다만, 천자께서 꺼려 하시는 건 후에 대명이 다시 중원에 안주하는 것이니,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세외의 현황을 상세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교역을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지 않겠습니까.”
끄덕끄덕.
몽주는 이해했다는 양 고갯짓을 하였다. 다만, 속내로는 설령 지금 정화가 하는 말이 진실일지라도 이유의 전부라고 여기진 않았다.
세상과 거래를 하는 것이 세상을 아는 첩경…… 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나, 단지 세상을 알기 위해 세상과 교역을 추진, 그것도 명나라 스스로 바다로 나가는 고역을 감수하는 길을 간다는 건 ‘가성비’가 영 좋지 않은 방법이고, 그 정도는 성영제와 정화도 능히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니, 몽주는 대략 그것이 작금 명나라가 처한 외교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함에 있다고 여겼다.
명나라는 지금 예전과 같이 골목대장처럼 떡하니 앉아 엎드려 찾아오는 ‘속국’들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적국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와 같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 볼 심산이라는 게 몽주의 추측이었다.
‘근데 어쩌나?’
명나라의 잠재적 고립을 타개해 줄 만한 나라는 없다.
그 정도 강력한 국가가 근방에 있다면, 이미 명나라가 알고 있을 것이고, 모른다면 그만큼 멀다는 의미였다.
인도는 아직 통합되지 못한 채 지역으로 남아 있고, 티무르는 너무 먼 데다가 그 힘이란 지극히 ‘유목전통적’인 형태일 뿐이다.
역사에서 훗날 동아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그 힘을 갖추기 전이고, 천몽 속에서 똑같이 강력함을 발휘할지도 미지수다.
정말 명나라가 고려를 위시한 ‘포위망’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동맹할 만한 나라를 찾느니, 차라리 잠재력을 실제 힘으로 발전시키는 데 집중하는 편이 더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어쨌거나 몽주도 속내를 감춘 채, 정화와 성영제의 대의에 동감하는 듯 반응하다가 불쑥 꽤 민감한 부분을 건드려 보았다.
“다 좋소. 한데, 하필 왜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게요? 이제는 제법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나, 나라와 나라 사이에 7년 정도는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전쟁까지 치렀던 탐라국이 명나라를 진심으로 도울 것이라 여기는 게요?”
“저도 그렇지만, 천자께서는 탐라국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이 탐라공을 가리켜 믿고 이문을 나눌 수 있는, 군자의 마음을 가진 상인이라 칭하는 것을 믿을 따름입니다. 비록 지난날 대명과 고려 가 크게 싸운 바가 있으나, 함께 나눌 이득이 있다면 마땅히 손을 잡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꽤 마음에 드는 답이외다.”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특히 이문을 나눈다는 점이.
그 말은 곧 탐라에 줄 것을 주겠노라 작정했다는 것이니, 명나라가 세외와 교역함에 있어 실상 탐라가 얻을 이문이 없을 것인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건, 도움의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호응해 줘야지.’
몽주는 빙그레 웃음을 띠고는 양손을 모아 앞에 놓인 탁자에 올리며 자세를 전진하였다.
“명나라가 위세에 치중하는 대신 교역하는 것에 눈을 뜬 것이 마음에 든다는 말이었소.”
거짓말이었다. 명나라에 ‘빨대’를 꽂을 기회가 생긴 게 좋았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자께서도 이번 일을 통해 지난 전란의 상처를 씻고 오래전과 같이 대명과 고려가 우호로 친교하던 시절로 회복하길 바라십니다.”
거짓말일 것이다. 중국은 중화의 권세와 동떨어질 수 없다.
현대 중국마저 그렇지 않던가. 특히, 명나라는 전통의 중화제국을 천명하며 탄생한 나라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비록 잠시 위축된 상황에 놓였지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하기야 정화가 말하는 ‘친교’와 몽주가 생각하는 친교가 애초에 다를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오. 해서 나도 크게 마음을 열어 명나라가 교역의 길에 나선 것을 축하하고자 하오. 음, 보자…… 내가 보기에 외신이 탐라국에 바라는 것은 탐라의 포구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겠구려. 그 이용에 대해 약간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나는 충분히 허락할 용의가 있소. 한데 말이오, 외항을 이용하기에 앞서 명나라가 먼저 준비해야 할 게 있지 않겠소? 짐작해 보시오. 외신이라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이오. 바다를 이용하고자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음, 물론 배도 중요하지. 하나, 명나라는 이미 큰 배를 가지고 있으니, 당장 급한 건 아닐 게요. 생각해 보시오. 배라고 하여 늘 바다에 떠 있을 수만은 없으니…… 하하, 맞소. 바다로 나서기 위해서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포구가 필요한 법이오.”
몽주가 뻔한 답을 굳이 정화의 입으로 내뱉게 만들자, 정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양주에 큰 포구가 있는데, 따로 포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양주에는 큰 포구가 있소. 하나, 장강을 600리 넘게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양주의 포구는 내륙의 운하를 위한 포구지. 바다에 접근하기 위한 포구는 아니오. 사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탐라 상단이 양주까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건 꽤 고역이오. 강이란 계절에 따라 그 흐름이 천변하니, 때로는 하구에서 몇 날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소.”
게다가 잦은 일은 아니지만, 수로가 정비되지 않은 강은 홍수 한 번에 그 강줄기가 변로하기도 하고, 없던 모래톱이 생기기도 하여 운항에 유의해야 할 점이 많았다.
“하면, 먼저 포구를 지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지어 주겠소.”
“……네?”
조화로운 정화의 표정에서 그 조화가 깨지는 걸 보는 건 의외로 유쾌한 일이었다.
“우리 탐라국에서 지어 주겠다 하였소.”
“굳이…… 대명이 포구를 짓지 못할 것 같아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지어 내겠지. 다만, 제대로 된 포구는 아직 지어 본 적이 없으니 그 시행착오와 물자의 낭비가 많을 것이오. 아, 제대로 된 포구라는 건 여기 오면서 보았을 것이니, 판단에 참고하시오.”
뭔가 발끈하려는 기색이 떠올랐던 정화였지만, 제대로 된 포구, 즉 홍로포구를 언급하는 순간 그런 기색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도입가능한 현대적인 토목 지식을 지속적으로 접목하여 30년 가까이 갈고닦은 홍로 포구였으니, 당대의 홍로포구는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버금갈 만한 포구를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최고의 항구였다.
“호, 홍로포와 같은 포구를 지어 주시겠다는 겝니까?”
“처음부터 홍로포와 같은 규모는 아닐 것이나, 그 방식은 같을 것이오.”
“…….”
정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몽주를 응시하였다. 뭔가 다른 말이 뒤에 있다면 얼른 하라는 신호처럼 느껴졌기에 몽주는 실소를 흘리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는 단순한 선물은 아니오. 엄연히 투자이니, 장차 명나라와 고려의 교역 규모가 커지길 기도하는 것이오. 하여, 포구의 건설에는 조건이 있소.”
“말씀해 보십시오.”
“첫째, 포구는 탐라의 것이어야 하오. 영구적으로, 적어도 명나라가 존속하는 한은. 그리고 둘째로는 포구의 첫 건설은 탐라국이 그 비용을 전담할 것이나, 그 유지와 확장의 비용은 명나라가 부담해야 하오.”
실무적으로 합의해야 할 게 더 많이 있겠으나, 합의가 아닌 관철이 필요한 부분은 그 두 가지였다.
그에 정화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말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인 탓에 외신이 확답을 드릴 수는 없으나, 천자께 상세히 고하기 위해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포구가 고려의 것이라 함은 명나라 영토의 조차를 원하신다는 것입니까?”
“아니오. 토지는 명나라의 것이되, 포구는 탐라의 것이라는 것이오. 이는 땅은 천자의 것이나, 집은 백성의 것인 것과 같은 이치이니,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소.”
“하면, 두 번째 조건은 과한 것이 아닙니까. 백성의 집은 나라에서 유지하고, 확장해 주지는 않는 법입니다. 만약 탐라국이 조그만 포구를 만들고 나중에 크게 만들고자 하며 그 비용을 전가하려 하면 차라리 처음부터 대명이 짓고, 대명의 것으로 함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 그 정도는 따져 줘야 정화라는 이름값을 하는 거지.’
몽주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나를 그렇게 소인배로 보다니, 좀 실망이오.”
“아, 아니, 제 말은 …….”
“아니,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소. 나랏일을 하는 자라면 자그마한 빈틈이라도 남겨 두어 서는 아니 되니, 따질 건 따져야지. 하나, 그 점은 걱정 마시오. 나는 적어도 십 년은 내다보고 포구를 지을 것이오. 명나라와의 교역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 예상하는 그 십 년 뒤 말이오.”
몽주의 장담을 들은 뒤, 정화의 표정은 다시 신중해졌지만, 동시에 미혹도 희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명나라가 손해 볼 게 없다는 판단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분명 몽주는 명나라에 투자를 하고자 하였다.
다만, 그건 순투자이니, 총투자를 의미함은 아니었다.
총투자는 순투자에 갱신 투자를 더한 것으로, 갱신 투자는 유지 보수와 확대를 위한 투자를 의미한다.
항구라는 기간 설비의 총투자 중 순투자와 갱신 투자를 탐라와 명나라가 각각 나누는 셈인데, 단기적으로는 당연히 탐라가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십 년 뒤, 이십 년 뒤, 백 년 뒤?
아니, 이는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문제였다.
항구라는 시설이 얼마나 커지고, 얼마나 중요해지는 지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그 상상력의 실제 결과는 아무리 당대인들이 한계까지 머리를 굴려 상상해 봐도 도달할 수 없는 수준에 있었다.
14, 15세기의 인물이 21세기의 부산항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정도까지가 아니더라도, 근대화 이후의 여러 주요 출입항의 규모를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탐라의 중함선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게 현실인 당대에서 배수량 수만 톤급 배들이 고기 떼처럼 드나드는 항구를 상상하는 건 우주를 상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거대해지는 항구의 건설을 위해 시나브로 들어가는 갱신 투자의 누적 규모는 어느 순간, 아마 역사적 단위에서는 순식간이라 표현할 수 있는 시간 안에, 순투자를 넘어설 것이고, 그 증가세 또한 지속적으로 가팔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인들도 혼란스러워하는 소위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민간 투자의 진면목이었다.
순투자로서 민간의, 정확히는 기업의 투자를 받아 짓는 사회 기간 설비는 초기 비용은 낮을지라도, 결국 급격히 늘어나는 갱신 투자에 의해 삽시간에 사회적 비용이 국가 시설의 경우를 능가하고, 그 증가한 사회적 비용만큼 일반 시민들의 손해와 기업의 이익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찾아보면 민간 투자에 의해 기업과 사회가 상호 ‘윈-윈’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의 첨병’들은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승리를 원하지, 상생을 추구하지 않는다.
지금 그 ‘돈벌레’의 방식을 몽주가 명나라를 향해, 정화를 상대로 시도하는 중이었고, 몽주의 눈에 비친 정화의 표정에서 그 시도가 성공으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흠, 과연 공께서 상인군자라는 소문이 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처럼 양국의 교역에 헌신하시려 하신다니, 천자께서도 그 진심을 외면하지 않으실 겝니다. 한데, 그 포구는 어디에 지으실 것인지, 혹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아주 좋은 질문일세.’
안 그래도 그 부분을 언급할 생각이었던 몽주는 다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갱신투자로 명나라에 ‘빨대’를 꽂기 위해서는 두 가지 숨겨진 전제 조건이 필요한 바, 그중 하나가 ‘대체 불가능성’이다.
즉, 항구에 들어가는 갱신 투자 비용이 막대함을 깨달은 후대의 명나라가 다른 포구를 지어 탐라의 포구를 대체하려 해도 그럴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구의 대체 불가능성은 대개 그 위치로 결정되는 법이다.
“아무래도 장강의 하구가 좋지 않겠소? 양주만큼은 아니겠으나, 응천부로의 접근도 용이하고, 전에 보니, 작은 어촌만 몇몇 보일 뿐, 대개가 야생 그대로이니, 명나라에서도 대처하기에 편할 것이오.”
몽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화의 안색이 환해졌다.
하여, 몽주는 내친 김에 비서 관리를 호출하여 지도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곳이 어떻소?”
“하나, 이곳은 습지가 많아 개발함에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상관없소. 어차피 포구는 해안에 건설하는 것이고, 그 배후에는 포구에서 일할 이들이 사는 작은 고을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니 말이오.”
몽주는 은근히 정화의 상상력을 제한하였고, 정화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곳, 상해현을 지정하여 천자께 고하겠습니다.”
장강 하구의 남안, 태호(太湖)와 황해를 각각 서쪽과 동쪽에 둔 곳은 이미 송나라 때에 상해(上海)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후, 몽주는 명나라의 바다 진출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더 나누었으니, 적어도 정화는 완전히 속아 넘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와중에 머릿속으로는 따로 두 가지 생각이 수시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상해포구 건설에 필요한 두 번째 숨겨진 전제 조건으로, 강력한 국력과 군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훗날, 명나라가 대체 불가한 상해항에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국가 비용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할 때, 그것을 거부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건 외교적 문제인 바, 외교의 최후 수단인 전쟁까지 염두에 둘 수 있으니, 자연히 명나라가 쉽게 전쟁을 택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국력이 필요하고, 만약 전쟁이 발발할 경우, 너끈히 이겨 낼 수 있는 군력이 필요한 건 당연할 것이다.
물론, 아마 그 부분은 몽주가 아닌 후대가 해결해야 할 몫이겠지만, 몽주도 해 둘 수 있는 건 다 해 두고자 하였다.
특히, 군력의 강화와 그 유지에 대한 국가적 경로를 확고하게 해 두자 함이니, 다만, 부디 후대에 어리석은 자가 집권하여 망가뜨리지 말길 기원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국가적인 경로에 대한 연상이 몽주로 하여금 잊고 있던 복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앞서, 정화의 입을 통해 성영제가 훗날을 위해 명나라가 중원에 안주하지 않도록 경로를 만들고자 하였다 하였으니, 당대인인 성영제마저 미래를 생각하는 중에 몽주가 단지 당장 무의미하다고 복지 제도를 무시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복지라는 건, 그러니까 구휼의 수준을 벗어나 사회 제도로서 항시적으로 가동되는 국가의 지원은 그 전례가 있느냐에 따라 도입 때 저항의 수준이 달라졌고, 복지의 전통(?)이 없거나 부족할 때는 설령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도입에 늘 진통을 겪어야 했다.
하니, 작은 부분일지라도 복지적인 제도가 존재하느냐의 여부가 훗날 진정 복지 제도가 필요한 시대에 복지 제도를 제대로 적시에 도입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할 수도 있었다.
몽주는 홍 대신을 다시 불러, 그에게 의술과 교육의 영역에서 백성들에 대한 제도적인 도움을 구상하게 하였으니, 그것을 기반으로 당대에 걸맞은 복지를 추진해 보고자 하였다.
물론, 현대적인 시선에서의 복지에 비해 많이 부족하겠지만, 적어도 경로를 만들어 두는 건 가능할 정도는 해 볼 생각이었다.
* * *
그날, 밤이 깊어 공택으로 돌아가니, 탕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약탕 도기 앞에서 하인과 더불어 불을 살피고 있던 아버지를 보고 몽주가 다가가니, 묻기도 전에 그 탕약에 대해 말하였다.
“총명탕이다. 머리가 맑아진다더군. 크게 기대하지는 않으나, 혹시 모를 일 아니겠느냐.”
몽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탕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몽주야말로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뇌세포의 파괴에 의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질환은 단지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약효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놈이 아니던가.
몽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탕약의 재료를 감쌌던 게 분명한 사각의 커다란 종이, 흔히 복지(袱紙)라 부르는 게 근방에 나뒹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한창 복지(福祉)에 대해 논하다 온 탓일까. 단지 발음이 비슷할 뿐인데 그 종이에 시선을 오래 두었다.
약효가 분명한지도 알 수 없는 약재를 감싸 두었던 복지(袱紙).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그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부작용을 능가할지 알 수 없는 복지(福祉).
하나, 약효를 기대할 수 없다 해도 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복지(福祉)도 그 효과를 알 수 없다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몽주는 문득 현대에서 복지는 취향과 기분을 위한 것이라는 글귀를 본 걸 떠올렸다.
그때는 그냥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치정자로서 재원을 소모하며 행하려 하니, 그 말이 어느 정도 이해되고 있었다.
복지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하층민을 중산층으로 만들어 주진 못한다.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의 복지 제도를 가진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도 그 복지 제도의 혜택을 전폭적으로 받는 하층민들은 대개 계속 하층민일 뿐이다.
단지 가끔 그 복지 제도의 지원을 통해 그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계층을 상승하는 자들이 나오고, 하층민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소비가 가능해진다는 게 다를 뿐이다.
한데, 그 효과가 그에 들어가는 재원에 대비하여 유효한지는 사실 누구도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 복지 제도를 통해 생활을 영위하며 글을 썼다는 영국의 어느 여성 소설가는 후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판타지 소설을 썼다.
그녀 개인이 복지 제도를 통해 얻은 도움을 금전적으로 환산하면, 그녀가 후에 만들어 낸 굉장한 부가 가치에 비해 아주 작을 것이니, 복지 제도가 엄청난 흑자(?)를 거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나, 그녀가 그 복지의 혜택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복지 제도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그녀가 만들어 낸 부가 가치가 수조 원이라도 오히려 크게 손해일 것이다.
물론, 그런 금전적인 계산에는, 기본 생활의 보장을 통한 인간성의 유지와 같이 비금전적인 효과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그 비금전적인 효과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복지 제도가 사회적으로 유효한지 판가름 날 것이다.
바로 그 부분에서 복지라는 게 취향과 기분의 문제라는 문맥이 이해될 수 있었고, 동시에 몽주가 복지라는 경로를 당대부터 만들기로 작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인본주의를 주요 토대 중 하나로 삼은 탐라국의 기조에서 인간성의 유지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참 괴로운 처지로군.’
당대인이라면 누구도 고민하지도, 고민할 수도 없는 부분에 대해 몽주이기에 훗날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고민해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멍하니 있느냐? 복지를 왜 구기고 있고?”
“아, 아닙니다. 그냥 어머니의 환후가 걱정이 되어서…….”
어느새 손에 든 복지를 움켜쥐고 있던 몽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둘러 대었다.
“너무 걱정 마라. 탐라를 다스려야 하는 네가 자기 때문에 심기가 어지러워지는 걸 네 어미도 바라진 않을 게다.”
몽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탐라국은 정도에 올랐는데, 훗날을 더 많이 염두에 두면서 몽주의 걱정거리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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