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08)
변법 기변(變法 機變)
정화가 홍로동 ‘투어’에 나선 것은 탐라공과 이틀 연속으로 만난 다음 날이었다.
명나라 선박의 탐라포구 이용 및 상해포구 건설을 위한 양해 문건의 초안을 마련한 뒤, 그 완성을 기다리는 사이에 홍로동 일대의 탐방을 청하였고 허락을 얻은 것이었다.
물론, 그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으니, 정화와 그 일행에게는 홍로 포도청의 포도관 9명과 내관부 관리 2명이 붙어 호위 및 안내, 그리고 감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소에 들러도 좋소?”
“가능합니다.”
“정말이오?”
“네.”
내관부 관리 중 선임이라는 안휘병수 주무관의 허락(?)에 정화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홍로동 일대를 구경하는 중에 여러 번 특정 구역에 대한 접근을 제지당한 바 있었으니, 탐라국의 국력과 군력의 핵심인 홍로 선소 또한 당연히 탐사하기 불가능할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다만, 선소 안에 따로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보실 수 없습니다.”
“아…….”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정화는 선소 안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딘가 싶어 선소로 향하였다.
한데, 바로 보이는 선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안휘 주무관이 앞을 가로막았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바로 코앞이니 걸어가도 괜찮소.”
“저희가 괜찮지 않습니다.”
“……?”
좀 걷는 게 그렇게나 두고 볼 수 없는 일인가 싶던 정화는 직후에 선소로 향하는 길목에 안내판이 붙어 있고, 군병 2인이 입구를 경비하는 좌우로 높은 담과 철조망이 쳐져 있는 곳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접근을 제지당하면서 그런 곳이 탐라국의 비밀 구역임을 깨닫고 있었으니, 정화는 자신이 마차에 오르는 이유가 걷는 수고를 줄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구역을 돌아가기 위함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르시지요.”
“알겠소. 그리 채근할 필요는 없소.”
마치 시선을 두는 것마저도 막으려는 양 승차를 재촉하는 관리를 향해 조금 못마땅한 말투로 대답한 정화는 일행과 더불어 마차에 올랐다.
“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막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그 앞을 지나간다고 뭘 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요. 하여튼 소국의 호들갑이란 …….”
“말조심하게. 이자들이 한어를 모른다는 보장이 없다고 강조하지 않았나.”
“예…….”
일행의 불평을 정화가 막으며 안휘 주무관과 다른 관리 및 포도관들을 둘러보았는데, 다들 묵묵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 이들 중에 명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내 그가 고려말을 하여 의사를 나누었지만, 정화는 그들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명나라 말을 알아들을 줄 알 것이라 여기고 있었고,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중에 명나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안휘 주무관이 아닌 관리이자 익문대 소속인 자는 정화와 그 일행이 보고 듣고 말한 모든 것을 정리하여 차후에 탐라공에게 보고할 예정이었다.
어쨌거나 정화가 마차에 오른 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얼마 후 선소에 들러 거대한 중함선이 건조되는 광경을 감탄 어린 눈으로 살폈다.
그들이 탐라로 오면서 보았던 문섬의 등탑에 직접 올라가 보기도 하였으니, 짧은 시간에 홍로동을 꽤 알차게 구경할 수 있었다.
하나, 그들이 순순히 마차에 오르기로 결정하였을 때, 어쩌면 꽤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 은 불가능했겠지만, 적어도 담 너머로 들려오는 환호성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도 사라졌음을 그들은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다.
“성공이로다! 만세!”
“만세!”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군기소의 공소에 틀어박혀 열기 기관과 싸웠던 장인들의 환호성은 얼마 후 탐라공에게도 전해졌다.
* * *
“자네의 장계는 잘 보았네.”
정화가 한창 제한 가득한 홍로동 관광 중이던 시간에 몽주는 한 관리를 대면하는 중이었다.
“주군의 대계에 괜한 혼란을 가중한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습니다.”
“혼란은 무슨…… 자네처럼 오랫동안 한 관부의 일을 하면서 개선해야 할 부분을 보고한다면, 당연히 신중히 살펴야지. 차부터 들게. 식겠어.”
“예, 저하.”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며 두 사람이 차 한 모금을 마신 이후에 몽주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네가 올린 내용 중 절반 정도는 곧바로 추진할 수 있을 것 같네.”
“그렇습니까.”
되묻는 이, 재판청에서 두 번째로 오랫동안 판사의 일을 수행 중인 공요첨의 말투에는 기쁨과 아쉬움이 겹쳐 있었다.
“판사가 백성들의 삶을 크게 좌지우지하는 만큼, 지금처럼 일반 관리가 배정되는 대신, 따로 판사를 선별하는 제도가 있어야 하고, 그 학문적인 지원 또한 필요하다는 것은 완전히 통과.”
“예.”
“고소하거나 고소당한 백성들이 그 변론에 능하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그들을 도울 조력자들이 필요한 것도 모두 통……. 아, 다만, 그 조력자들을 관리로 삼는 대신 따로 자격을 주어 전문적인 직능으로 삼는 자들을 만드는 게 낫다고 보네만.”
“그 또한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 하면, 수정해서 통과.”
“예.”
“포도관이 국법을 위반한 자에 대한 추궁을 담당하는 것은 그 실력과 여유가 모자란 만큼, 따로 그 담당하는 관리를 두자는 것은…… 일단 통과인데, 이 부분은 학문적인 성찰이 더 중요시되어야 할 것 같네. 단지 국법이라 함은 그 범위가 애매하지 않나. 판례를 모두 포함하면 너무 넓고, 따로 법령이 있는 것에 국한하면 너무 좁지. 또, 백성들 간의 갈등을 조율함에는 굳이 나라의 관리가 따로 개입하기보다는 앞서 말한 조력자들을 통하는 것이 나을 것이네.”
민법과 형법, 그리고 사법(私法)과 공법(公法)의 구분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데, 공 판사의 반응을 보면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뜬금없이 몽주에 의해 판사에 임명된 이래 10년 동안 판결을 내려온 만큼 재판의 성격이 다 같지 않고 분류되어야 함을 알고 있겠지만, 아직 그 개념을 정확하게 깨달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 차차 궁리하다 보면 깨닫는 게 있을 걸세. 나도 차후에 다시 그에 관해 논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
공 판사의 장계의 내용 중 지금까지 언급한 건 모두 전폭적으로 혹은 수정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이제부터 다룰 내용은 아니었다.
“내가 판례를 수정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제한이라기보다는 자제해 주실 것을 청한 것입니다.”
“이유를 들어 보지.”
공 판사에 올린 장계에 그에 대한 구설이 있었으나, 몽주는 그의 입으로 듣길 원했다.
“이는 판결의 결과가 시행됨에 있어 그 신뢰에 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군께서 판례를 고쳐 내려 주실 경우, 대개가 판결이 있은 지 적게는 수일, 때로는 몇 주가 지난 뒤입니다. 그때는 판결에 따라 그 처분이 시행되었거나 시행 중인 경우가 많으니, 그런 중에 판례가 수정되면 그 처분을 시행하는 일선에 큰 혼란이 발생합니다. 또, 그런 수정이 여러 번 반복됨에 따라, 판결 후에도 그와 같은 수정을 기대하고 판결에 저항하는 자들마저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재판청이 내린 판결의 신뢰와 위엄에 손색이 생기는 형편이니, 주군께서도 그 수정에 각별히 유념해 주시길 청하는 바입니다.”
“음, 일리가 있긴 하군.”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행정 처분의 시행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는 건 몽주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몽주는 그와 같은 요청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재판청이 따로 생긴 지 20년이 넘었고, 재판의 양과 질이 크게 증가하여, 재판청 또한 그 규모와 자질 또한 발전했지만, 여전히 몽주의 눈에는 그 판결이 절대적으로 미덥지는 않았다.
가끔은 판결을 내린 판사를 불러다 혼찌검을 내고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경우도 있었으니, 앞서 공 판사가 제안한 것처럼 그 제도가 아직 미약한 탓도 있지만, 판사의 실수나 나아가 고의에 의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금 탐라국의 법제도가 ‘대륙법’이 아닌 ‘영미법’적인 형태로 발전함에 있어, 판례의 선행과 그 누적이 굉장히 큰 중요함을 띠고 있기에 몽주는 자신의 눈이 캄캄해져 판례를 보기 어려워질 때까지 결코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 나는 이런 대안을 생각해 보았네.”
“하명하십시오.”
“명까지는 아니고, 일단 한번 들어 보게. 판결 후 그에 따른 처분을 끝까지 시행하되, 만약 내가 판례에 수정할 경우에는 그 수정된 내용을 판례에 동봉하여 남기고, 또 그 시행에 따라 특정 백성의 손실이 가중되었다면 나라에서 그 보상을 하는 걸세. 그리고 내가 판례를 수정할 경우, 그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해 인사적인 기록을 남겨, 만약 그 경우가 심한 자는 판사직위에서 해직하고자 하네.”
몽주의 말이 흐르는 중에 공 판사의 표정에 당황함이 스쳤고, 곧바로 반론이 있었다.
“하면, 판사가 주눅이 들어 판결에 주저하거나 기존의 판례에 추종하기만 하는 단점이 생길 것입니다.”
“한두 번 수정된다고 해서 내가 해직할 것도 아닌 바, 그 정도의 압박도 못 이길 자라면 판사에 임할 자격이 없겠지. 그리고 어차피 선판례를 따르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보게, 공 판사.”
“예, 주군.”
“자네가 이미 말했듯, 판사가 하는 일이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네. 그건 곧 상당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뜻이지. 그런 자리를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고 남겨 둘 수는 없지 않겠나.”
“…….”
몽주는 마지막 말을 하며 은근히 냉랭한 기색을 더하였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처럼 절대적인 위치에서 오랫동안 군림하면 목소리를 조금 낮추기만 해도 듣는 자들이 알아서 위축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역시 공 판사라면 내 뜻을 알아주리라 보았네. 하하.”
몽주는 얼마 전에 감사대에서 재판청의 판사들이 회동하여 그들의 권익 증대를 위해 단합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것을 머릿속에 잠시 떠올렸다가 지웠다.
만약 그 단합의 형태가 개인적인 탐욕을 추구하는 방향에 치우쳤다면 지금 공 판사는 차를 마시는 대신, 다른 판사들과 더불어 포승에 둘둘 말려 있었을 것이다.
하나, 그들의 요구는 개인적인 치부나 권력에 대한 탐욕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나와바리’인 사법(司法)적 권력의 보호를 추구하는 형태인 바, 어찌 보면 사법부의 독립과 그 궤가 유사한 면도 있기에 몽주도 처벌 대신 포용을 택한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몽주도 차후에 사법부의 독립성을 추진할 마음이 있었다.
하나, 차후는 차후일 뿐, 아직은 아니었다.
몽주가 보기에 제법 경력을 쌓은 재판청의 판사들마저도 아직은 ‘리갈 마인드(legal mind)’가 부족했고, 사법 제도의 중추인 판사가 갖춰야 하는 도덕적 가치 또한 채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몽주가 사법권을 놓는 건,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사법권이 저해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여, 공 판사가 대표로 올린 요구사항 중에서 받아들일 만한 걸 받는 대신, 판사가 함부로 그 권력을 휘두를 수 없게 인사적인 족쇄를 더 강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요새 사롱을 고발하는 자들이 많다지?”
잠시 서늘했던 분위기를 웃음과 함께 무마한 몽주는 주제를 바꿔 물었다.
“예, 사롱 자체를 고발하는 경우는 드무나, 사롱에 속한 자들을 고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합니다. 하여, 서남지소에서 꽤 곤란해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사롱에 속한 자들이 무엄한 언행을 많이 하는가?”
“아무렴 많기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주군의 인척이 이끄는 단체인데…… 다만, 워낙에 천성이 제멋…… 자유로운 자들이 많아 평범한 자들이 보기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은 모양입니다.”
사롱의 단장인 종도가 탐라공의 처남이나 다름없는 처사촌이라는 정도는 다 아는 사실인 만큼, 공 판사의 말도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런가? 하나, 그건 오래전부터 그랬던 거니, 요사이에 고발이 증가한 것은 따로 이유가 있을 것 같네만?”
“그게, 사롱에서 순보를 따로 발간하려 한다는 소문이 난 이후에 그런 걸 보면…….”
“음, 순보 발간 때문이라는 겐가?”
“아무래도 탐라 백성들에게 있어 순보는 주군께서 독점하셔야 하는 영역이지 않겠습니까. 하니, 사롱이 순보를 발간하려는 걸 막기만 하신다면, 고발도 극히 줄어들 것입니다.”
공 판사의 말에는 은근히 몽주가 사롱의 신문 발행을 막길 청하는 ‘뉘앙스’가 있었다.
하기야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몽주를 위해 일하는 관리들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이 그와 같은 청원을 한 바 있었다.
‘이거 참…….’
사실 때로는 몽주 스스로도 시대에 너무 앞서는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강행하는 것들이 있었으니, 사롱도 그중 하나였다.
몽주가 사롱을 두고, 은밀히 그 방침을 내려 추구하는 것은 ‘반골’을 모으고 남겨 두는 것이었으니, 몽주의 독재가 훗날 곧 탐라공의 독재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예비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야당’ 내지, ‘반왕파’가 될 재목들을 키워 두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반골들 중에 진정 역적인 자들과 크게 보아 존재함으로써 사회의 변화에 동력이 될 만한 자들, 예컨대 홍길도 대신의 아우들과 같은 자들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하여, 진정 역적인 자들은 종도가 그 자신의 임무로 알고 있듯 증좌를 포집하여 잡아들이고, 그저 순수한 의미에서 반골인 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상과 뜻을 펼칠 만한 ‘놀이터’를 제공하고 있었다.
한데, 그것이 순보의 발간이라는 꽤 거창한 사업과 얽히게 되자, 많은 이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몽주는 사롱으로 하여금 순보를 발행하게 하려는 의지를 꺾을 생각이 없었다.
이는 언론의 자유나 그 다양성과 독립성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에 앞서, 몽주가 완성하고 싶은 탐라국의 반석 중 하나였다.
후대의 탐라공이 어떤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든, 적어도 가시적인 범행을 모의하거나 결행하지 않는 이상, 단지 주장하는 것만으로 반골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하는 풍토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안배가 후대의 영특한 탐라공이 나라를 이끄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엉망인 후대 탐라공이 함부로 정치하는 것을 최소한이나마 제어할 수 있는 방책이라 몽주는 믿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한번 나서 줘야겠군.’
몽주는 종도를 떠올리며 사롱을 방문할 마음을 품었다.
* * *
군기소 공소에서의 환호성이 몽주에게 전해진 건, 공 판사를 돌려보내고 공택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당연히 소식을 들은 몽주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려 공소로 직행하였으니, 이미 밤이 된 시간에도 공소에서는 많은 장인들과 공인들이 환한 안색으로 몽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하, 마침내 성공하였습니다.”
눈물마저 그렁그렁한 공소 반장 철장보가 이제는 폐한 예인 읍까지 하며 보고하니, 그간 그가 감내했던 노고와 마음고생이 그만큼이나 컸던 모양이었다.
“이런, 이런, 고생이 참으로 많았나 보군.”
몽주가 양손으로 장보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하니, 장보가 기어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주변의 다른 장인들도 자신들이 위로 받은 것처럼 황송해 하였다.
‘이렇게나 부담감이 심한 줄 알았다면, 내가 좀 더 조언을 해 줄 걸 그랬나.’
언젠가부터 몽주는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 장인들에게 조언하는 걸 삼가고 있었다.
경험칙이 중요한 기술적인 영역에서는 그 경험과 자료를 누적하는 것을 지원해 주기만 하면 이제 느리더라도 알아서 발전할 만한 토양이 확보되었다 여겨, 자발적인 발전을 꾀하고자 함이었다.
“결국 저하의 도움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저하께서 멀리서 고무를 구하여 저희의 오랜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지요. 실로 감개무량하고, 송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꼭 그 때문에 고무를 구해 온 건 아니었고, 실상 고무를 부루내에서 귀환할 때, 고무 수백 길구람을 가져가기로 결정함에 있어, 열기 기관은 생각지도 않았었다.
이는 고무에 황을 첨가하여 그 내열성과 견고함을 시험하라는 명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고, 열기 기관을 개발하는 공소에서 그 고무를 일부 얻어 기관의 시험에 쓴 것도 알지 못했었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군. 그나저나 한번 시범을 보고 싶은데 말이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열기 기관의 가동을 위해 이미 가열부 아래 흑토로 불길을 지핀 중이었다.
열기 기관은 가동을 위해 일정 정도 예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리 준비한 탓에 몽주는 곧바로 열기 기관의 가동을 관람할 수 있었다.
한 장인이 마치 예전 경운기의 시동을 걸 듯 손잡이 기구를 이용하여 커다란 관성 바퀴를 돌리자, 가열부에서 갈 곳을 모르고 있던 더운 열기가 관을 통해 빠져나갔고, 그 관을 통해 도착한 냉각부에서 열기를 식힌 후, 다시 다른 관을 통해 가열부로 돌아갔으니, 그 공기의 가열과 팽창, 그리고 냉각과 수축의 과정 속에 ‘피스톤’이 움직여 관성 바퀴를 지속적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폭발도 배기도 없기에,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에 비해 절대적으로 조용한 열기 기관은 그렇다고 해서 적막한 상태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아직 기계적인 제작술이 미천한 탓에 여기저기서 철거덩거리는 소음이 연달아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나, 그래 봐야 그저 귀에 조금 거슬리는 정도였으니, 장차 기계적으로 다듬으면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과는 비교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정숙성을 자랑하게 될 것이었다.
물론, 기관의 관건은 소음 따위가 아니라, 기관이 발휘하는 힘이었다.
“잘 돌아가는군. 한데, 어느 정도 힘을 내는 지 볼 수 있겠나?”
“예. 일단 1마력부터 해 보겠습니다.”
지난 세월, 기술적 체계를 잡는 중에 이미 마력이라는 단위가 정해졌다.
한 마리의 말이 내는 힘이라는 개념은 말을 축력의 기본으로 삼아 널리 쓰고 있는 탐라국에서는 크게 호응 받을 만한 개념이었다.
다만, 그 마력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
문자 그대로 말 한 마리가 낼 수 있는 힘을 측정하기 위해 실제로 노역마 몇 마리를 선별하여 그 평균을 내었는데, 현대의 마력보다 더 큰 힘이 1마력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즉, 1초 동안 75킬로그램을 1미터 움직이는 힘이 현대의 마력인데 비해, 탐라국에서는 100길구람을 십분촌각(9초) 동안 10미만큼 움직이는 힘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탐라의 1마력이 현대의 1.4마력쯤에 해당하게 된 셈인데, 1초라는 짧은 시간을 측정하기 어려운 데다, 측정에 쓰인 제주 토마들의 지구력이 좋은 탓이었다.
어쨌든 1마력이 규정되자, 여러 곳에서 쓰이고 있었으니, 열기 기관도 그 힘을 마력으로 측정하고 있었다.
철커덕, 철커덕 규칙적인 소음이, 열기 기관에 부하를 거는 순간 엇박자를 내었고, 일정하게 돌던 관성 바퀴도 순간적으로 속도가 줄었다.
하나, 멈칫하던 것도 잠시, 정지 관성의 부하를 이겨 낸 열기 기관이 다시 가동을 지속하니, 여러 개의 도르래로 연결된 끝에 매달린 쇠뭉치가 스르륵 위로 솟았다.
“저 철덩이가 200길구람입니다. 도드래를 통해 필요한 힘을 절반으로 줄였으니, 열기 기관이 들어 올린 무게는 100길구람이지요.”
“음…….”
1마력(?)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이후에 1, 20길구람씩 무게를 더하여 몇 번의 시험을 더하였는데, 290길구람을 시험할 때 열기 기관이 ‘턱!’하는 소리와 함께 가동이 멈췄다.
“아직은 1.4마력 정도입니다만, 빠른 시간 안에 더 큰 힘을 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부피로 따지면 쌀 네 가마니쯤에 해당할 정도로 상당히 큼에도, 열기 기관의 힘은 확실히 아직 인상 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철 반장이 소수점을 사용해서 수를 표현한 것이 더 흥미로웠을 정도였다.
1.4마력.
현대의 마력으로 치환하자면 2마력이 좀 안 되는 수준.
앵앵거리며 다니는 소형 ‘스쿠터’의 마력이 6, 7마력쯤 되니, 현대적인 기준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올 수준의 ‘파워’였다.
하나, 장인들의 표정에는 그저 뿌듯하고 자랑스러움이 가득했고, 몽주도 제법 기특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금 열기 기관을 제작한 수준의 기술로 증기기관을 만들었다면 적어도 10배는 더 큰 힘을 내었을 것이니, 그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십분지 일의 힘이지만, 그에 필요한 ‘에너지’는 그 이상으로 더 적었을 것이니, 1.4마력의 힘은 그 시작점으로서 충분히 감격스러운 결과였다.
“보십시오. 이곳과 이곳, 음…… 그리고 이곳에도 저하께서 가져오신 고무가 쓰였습니다. 그 덕에 열흘 동안 시험하였음에도 힘의 유실이 일절 없었습니다.”
장보가 고무의 쓰임새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기관의 연결부 여러 곳을 가리켰지만, 사실 꼭 붙어 있는 연결부의 안쪽에 들어 있을 고무를 외부에서 보기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몽주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고무를 제대로 이용했음을 칭찬하였는데, 속내로는 그래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관의 밀봉은 차라리 반쯤 녹인 구리를 접착제처럼 쓰는 게 더 나았을 터인데…….’
더 좋은 건 상온에서 오직 압력으로 압착시키는 방법이겠지만, 이를 시도하기에는 아직 당대의 기술적 여건이 좋지 않았다.
다만, 예전에 중함선의 하부를 구리로 덮을 때처럼 열기 기관도 흐물흐물 녹인 구리로 연결부를 덮는 방법을 쓰다가 팽압에 떨어져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있었으니, 그때 그 방법을 다시 시도해 보라고 조언하지 않은 것이 다소 후회스러웠다.
열기 기관은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에 비해 그 열기의 온도가 높지 않아, 내열성을 높인 고무라면 제법 오래 버티긴 하겠지만, 결국은 열기에 노화되어 틈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몽주는 곧바로 그 점을 알리고 다시 제작할 것을 요청하려다가, 철 반장과 장인들이 만들고 있는 그 기쁨 어린 분위기를 다시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조언해야겠군.’
하나, 몽주가 예상한 문제는 훨씬 오랜 뒤에 발생했는데, 애초에 열기 기관, 즉 ‘스털링’ 기관이 고열의 팽창 압력보다는 온도차에 의한 유체 운동에 의한 기관인 탓에 그만큼 열기의 온도가 높지 않아 고무의 손실이 적은 덕이었다.
그리고 그 덕에 몽주는 예상보다 훨씬…… 정도를 넘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시기에 재밌는 ‘장난감’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장난감으로 인해 탐라국과 고려에서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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