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09)
* * *
“세~모래사장~ 금~자리 걸음으로~ 넙죽넙죽~ 행~똥그려~ 걸어간다~”
군판식이 조금 벌게진 얼굴로 노래를 해 댔고, 주변에 있는 자들은, 그냥 그러려니 내지는 조금 지겨운 표정으로 그 노랫가락을 듣고 있었다.
취기만 있으면 노래를 불러 대는 군판식이었으니, 오참에 곁들인 탁주가 조금 과했던 모양이었다.
뭐,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기에 그러려니 하든, 지겨워하든 다른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휴식 시간을 즐기며 담소를 나눴다.
“저번에 받아 온 멸충환은 다들 자셨소?”
“먹었지. 한 번도 안 먹은 이는 있어도, 한 번 먹고 또 안 먹는 이는 없지 않겠어?”
“그치. 똥에 묻어 나오는 그 징그런 것들을 보고 안 먹을 수가 없지.”
“그야 그런데. 가끔 넘기다가 목에 걸리면 꽤 괴로워서 고역이야. 그렇다고 씹어 삼키는 건 더 힘들고.”
“배가 불렀구먼. 그 벌레들을 배때기 안에 넣고 다니는 건 안 힘들고? 나라에서 공으로 주면 좋다고 감사히 먹어야지, 좀 쓰다고 투덜거리면 쓰나.”
“누가 싫댔나. 그냥 그렇다는 게지.”
멸충환은 나름 먹기 좋게 조그만 환의 형태를 띠고 있어 물과 함께 삼킬 수 있었지만, 현대의 약처럼 매끄럽게 ‘코팅’되어 있는 건 아니기에, 종종 목에 걸리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원, 밥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똥 얘기여?”
또 다른 이가 풀대로 이를 쑤시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대었다.
“똥 얘기가 뭐가 어때서? 임자는 똥 안 싸나? 그리고 저들 논마지기마다 몇 가마의 똥오줌이 퍼질러 있을 것인데?”
“에이씨, 꼭 그 얘기를 직설로 해야겠소?!”
“크크크.”
똥 얘기에 질색하는 동료의 반응을 보고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똥오줌을 늘 밟고 다니는 이들이었으니, 그들이 쓰는 마른 거름과 액비의 재료가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렇게 누군가는 취기에 노래하고, 다른 이들이 잡담을 하는 사이에 또 다른 이가 뒤편 언덕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를 향해 수고했다 말하며 물었다.
“잘 돌아가고 있냐?”
“예. 퇴근 때까지 문제없을 겁니다.”
“어이야, 잘했다.”
일행들 중 막내 격인 이는 언덕 너머에 있는 저수지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 저수지는 5년 전에 완공되어 근방 농토의 농수를 책임지고 있었다.
다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저수지 사이에 제법 큰 언덕이 있어서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 2년 전에 열반부라 불리는 설비가 설치되면서 그곳도 농수를 제공받기 시작했다.
반부에 놓인 불을 잘 관리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다소 있긴 하지만, 농수 걱정을 하거나 힘들게 우회하는 농수로를 파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열반부라는 게 참 신기해. 그냥 군불만 때놓으면 물을 끌어올리니, 첨에는 무슨 귀신이 붙었나 싶었다니까.”
“접때 신길 주임이 원리에 대해 설명해 줬잖어?”
“그야 듣긴 했지. 근데 도통 모르겠던데. 너는 아냐? 알면 설명해 봐라.”
물론, 다들 제대로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세상이 참으로 좋아졌지. 내가 농사일 막 시작할 때만 해도 여기는 진짜 하늘만 보고 농사 짓다가 가뭄에 망하기 딱 좋은 곳이었는데 말이여.”
그들이 있는 곳은 열수(한강) 남쪽, 주장성(남한산성)의 서북쪽으로 광주군의 외곽이었다.
그곳부터 열수 남안 근처까지 온통 농지로 가득했으니,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지만, 그 농토의 전체 면적은 더욱 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 더 변한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저마다 사유한 농지대로 비뚤비뚤하게 농지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네모반듯하게 정리되어 있고, 그 하나하나의 크기도 비교적 일정하다는 점이었다.
누가 봐도 절대 그곳의 농토를 많은 이들이 나눠 가지고 있다면 하지 못할 정리인 바, 모르는 이가 본다면, 어느 대형 세가가 대단한 대토지 장원을 운영하는 줄 착각할 수도 있을 법했다.
물론, 그자가 한 십 년 동안 고려를 떠나 있었다면 말이다.
“나는 가끔 예전에 내 땅을 파고 있을 때가 좀 그립기도 혀.”
한 사내가 문득 처연한 표정으로 어느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하니, 그가 과거에 가지고 있던 농토가 위치했었던 지점이었다.
지금은 예전 농토를 정확히 획정하지 못할 정도로 구역이 바뀌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눈대중할 수 있는 그곳에 대한 그의 향수는 분명히…….
“지랄하네. 네가 땅이 어디 있었냐? 남의 땅을 부쳐 먹던 걸 왜 그리워해?”
“아니, 뭐, 어쨌든 내가 농사지었고, 나만 농사지을 수 있었던 땅이니…….”
“뭐가 너만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너 말고도 농사지을 사람 수두룩했고, 그 때문에 만날 사조(私租 : 소작료)를 올리지 못하면 땅 빼앗긴다고 울상이었던 건 기억 안 나냐?”
“아이, 거참, 그냥 그것도 추억이라 좀 떠올린 걸 가지고 되게 뭐라 하네.”
“그게 추억이냐? 추악이지. 너는 그때 홀몸이라 좀 덜했겠지만, 애새끼까지 있던 나 같은 놈들은 끼니도 거르며 죽지 못해 살았던 때라고.”
“알았네, 알았어. 내가 참 잘못했네! 꼭 지만 힘들었던 것처럼…….”
“뭐?”
일행 중 두 사람이 옛 추억(?)으로 인해 투닥거리던 게 싸움으로 이어질 분위기가 되자, 다른 동료들이 그들을 만류하였다.
“그만들 하세요. 이제 좋은 세상이고, 다들 잘 먹고 잘 사는데, 옛날이야기 가지고 왜 싸우고들 그래요?”
한쪽에 남자들과 따로 모여 참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여자들도 괜한 싸움에 핀잔을 던졌다.
그러자 사내들도 두 사람을 향해 더욱 화해하라 채근하니, 두 사람도 잠시 콧바람을 내며 버티다 못이기는 체하곤 사과를 나눴다.
“미안하이. 나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네.”
“나도 미안하네. 요즘도 가끔 옛날에 소작하던 때가 꿈에 나올 정도로 힘들었던 터라, 좀 과민했네.”
서로 사과하고 나자, 둘 다 마음이 좀 풀렸는지 좀 화목한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장남이 선원이 된다며?”
“어. 기술학교 졸할 때부터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이번에 새로 생긴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대.”
“잘되었군. 부자가 사원이니 이제 밥벌이 걱정은 사라졌겠어. 우리 강산이는 언제 다 크려나? 내가 너무 늦게 애를 봐서리.”
“걱정은 이제부터지. 사원이라지만, 우리처럼 탐라상단에 속한 것도 아니고, 주식회사인지 뭔지 면식도 없는 많은 이들이 돈을 모아서 만든 회산가 본데, 여차하면 풍비박산 나기 딱 좋겠더라고. 게다가 명나라와 교역하는 사업부터 시작하려는 모양인데, 바다라는 게 어디 사람 뜻대로만 되나. 암만 성실히 노력해도 폭풍 한 번에 다 날아가 버릴 수도 있잖아. 재산은 물론…….”
뒷말은 참언이 될까 저어하여 삼갔지만, 장남이 위험한 바다로 나가는 게 크게 걱정인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 강산이도 얼마 전부터 바다 너머 이야기를 입에 달고 다니더라고. 말하는 투가 자기도 언젠가 꼭 가 보고 싶다는 양 하던데, 그럴 때마다 강산이도 바닷사람이 되려고 그러나 싶어 걱정이야. 왜 그렇게 젊은 애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 가 보고 싶어서 안달인지 몰라.”
“뭐, 젊은이들이라고 다 그렇겠습니까. 여기도 젊은이들이 많은데요.”
두 사람 사이에 아까 열반부를 보고 와서 쉬고 있던 막내 사원이 끼어들어 한마디 하였다.
“요새 탐라공 저하께서 남양에 다녀오신 뒤로, 거기 같이 다녀온 자들이 퍼뜨린 소문이 많아서 좀 그런 경향이 있긴 한 모양이더군요. 삼 척 뿔을 가진 돼지가 있다고 그러고, 어느 섬에 식인하는 족속이 있다 그러고.”
“그 흉흉한 소문이야 나도 들었지. 근데 그 흉악한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가 보고 싶어 하니까, 그게 참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
“원래 두려움이랑 호기심은 비슷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한참이나 그리 나이 든 건 아닌 농부들 사이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희한한 성향에 대한 성토 내지, 토론이 이어졌다.
한데, 그 이야기는 잠시 후 뒷간에 다녀온다고 갔던 다른 사원이 갓 나온 순보를 가져오면서 흐지부지되었으니, 그 순보에 그들이 하는 일과 유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이보게들, 우리 회사가 이 근방에 또 토지를 얻으려는 모양이네.”
“엥? 또?”
그에 다들 그가 가져온 순보를 둘러싸고 확인하니, 농업회사가 바로 옆 양주군의 토지 경매에 참여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어허, 여기면 바로 저쪽이네?”
어느 이가 멀찍이 가리킨 곳은 그들이 농사를 짓는 곳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이거, 또 후배들이 많이 생기겠어.”
누군가는 농사짓는 사원으로 변모하게 될 농사꾼들을 떠올렸고, 또 다른 이는 그들이 속한 농업회사에 대한 염려를 품었다.
“이거 우리 회사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지 몰라. 이러다 남면에 있는 농토 전부를 취하겠어. 지금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땅이 엄청난데 말이야.”
도 행정 구역이 제도적으로 쓰이지 않은 지 꽤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지역을 크게 구분할 때는 사용하고 있었다.
“뭐, 상전들께서 다 알아서 하겠지. 설마하니, 우리 회사가 망하겠나.”
“망하진 않아도 우리 월봉이 줄어들까 걱정하는 게지.”
그들이 속한 농업회사는, 그냥 농업회사라고만 지칭하는 것만 봐도 탐라상단에 속한 회사였다.
농업회사의 경우는 아직 탐라 상단에 속한 것이 유일했지만, 다른 회사들 중에는 다른 이가 운영하는 회사와 겹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따로 상호가 없이, 중업회사니 내류회사니 수운회사니 지칭하면 그건 곧 탐라 상단의 회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무리 세상물정을 모르는 자들도 탐라 상단이 누구의 것이고,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알기에, 탐라 상단에 속하는 회사가 망하는 건 감히 상상할 수 없었고, 농업회사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이제 회사가 무엇인지 알고, 이윤을 얻지 못하는 회사는 회사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은 만큼, 너무 무리하게 사세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뭐, 우리만 좋으면 쓰나. 농사만 지을 줄 아는 이들에게 우리 회사가 얼마나 좋아? 좀 걱정이긴 하지만, 기왕지사 하는 김에 우리 회사가 농사꾼 전부를 사원으로 삼았으면 좋잖아.”
“어이구, 그게 가당키나 한가. 아무리 탐라공이시고, 탐라상단이라고 해도, 나라 안 농사꾼 전부를 어찌 거둘 수 있겠어.”
“못할 게 뭐 있나. 어차피 그 땅에서 땅 파고 살던 이들이고, 그 땅을 거두면서 그 이를 사원으로 받는 건데?”
“돈이 다르지 않냐. 네가 예전에 농사로 얻던 벌이랑 지금이랑 같아? 거 뭐냐, 회사는 가능한 큰 이윤을 얻기 위해 있는 거라고 너도 들었잖어. 우리 늘어난 벌이만큼 회사의 이윤이 줄어드는 것일 텐데, 말이 회사지 실상 탐라공께서 우릴 거두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이다.”
“허, 유식한 소리를 잊지도 않고 잘 말하네. 어쨌든 회사가 망할 정도만 아니면 다 같이 좋으면 좋은 거지, 뭘 그리 예민하게 구냐? 그리고 네가 암만 머리 굴려 봐야 상전들이 하는 것에 비하겠냐. 그러니 다 어련히 알아서 하실 거 괜히 심력 쓰지 말어.”
아까 말다툼하던 이들이 다시 입씨름이 붙었지만, 이번에는 그리 심각한 건 아니기에 다들 대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순보의 기사에 열중하였다.
“한데, 나는 도통 이 토지경매라는 게 이해가 안 되네. 아가야, 네가 좀 알면 말해 봐라. 어차피 이 나라 모든 땅이 탐라공의 것인데, 탐라공께서 주인이신 탐라상단이 토지를 쓰는 걸 왜 따로 또 경매를 하는 거냐?”
“아, 그게요…….”
막내 사원인 이가 답을 시작했는데, 그도 확실히 아는 건 아닌 듯 조금 자신없는 말투였다.
“그러니까 토지 자체야 탐라공 저하의 것이지요. 다만, 그 토지를 이용하는 건 꼭 탐라공 저하만이 아니잖아요. 다른 회사나 상점도 있고, 집도 있어야 하고. 그러니 그 이용하는 권한을 얻어야 하는데, 하면, 그 권한을 누구에게 줄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겠죠. 같은 토지를 이용하려는 자가 여러 명일 수 있으니까요. 해서, 그 권한을 토지를 이용하는 대금을 많이 내는 이에게 주기로 한 거고요.”
“그건 알지. 한데, 왜 탐라공께서도 따로 그 경매에 참여하시는 거냔 말이야. 솔직히 탐라공께서 경매하려 한다 하면 다들 그 경매에 참여하지 않으려 하잖냐.”
“그렇긴 한데, 그게 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 탐라공 저하와 감히 견줄 수 없기에 그러는 거잖아요. 탐라공 저하께서야 자기 마음대로 토지를 처분하지 않으시려는 의미에서 경매에 참여하시려는 걸 테고요.”
“나는 도통 모르겠다. 가끔 탐라공께서 하시는 일 중에는 의미를 모르겠는 게 있단 말이야.”
탐라상단이 토지 경매에 참여하는 건 탐라공이 직접 참여하는 것과는 구분되는 게 맞겠지만, 탐라 상단의 주인이 탐라공인 걸 누구나 아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탐라 상단이 경매에 참가하는 걸 곧 탐라공이 참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한데, 저번에 신길 주임이 그러더라고요. 이 토지 경매 덕에 우리가 세금을 적게 낸다고요.”
“응? 그래? 어떤 까닭으로?”
“그게…….”
젊은 사원이 쉽게 답하지 못했으니, 기술학교를 졸한 지식으로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지대론’과 ‘헨리 조지의 단일토지세론’을 관통하여 흐르는 지대(地代)의 의미를 깨닫고 있진 못했다.
물론, 탐라국의 조세 제도가 지대에만 국한하고 있지는 않았으니, 이는 탐라국 조정이 토지의 대가로 그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에는 나라 내 전체적인 토지의 이용률이 적은 편이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상 토지 경매, 더 정확히는 토지 이용권 경매에 탐라상단만 입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탐라국이 나라 안의 모든 토지를 탐라공의 이름으로 국유화하면서도, 그 이용의 방법만큼은 시장 원리에 입각하고자 경매를 방법으로 쓰고자 한 것인데, 그 시작부터 완벽하게 작용할 수는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탐라의 세율이 소폭이라도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소득에 대한 징세 외 물산의 소비에 관한 세금을 포함해서 여타의 세금이 일절 생기지 않을 수 있는 건 모두 토지 경매를 통해, 지대로 흡수될 부가가치를 나라가 독점할 수 있게 된 덕이었다.
“아이고, 저도 잘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근데, 저저번 순보에 토지 경매가 점점 더 활황이라는 기사에 신길 주임이 조만간 세금 낮아지겠다며 좋다고 희희낙락하는 걸 보면, 뭔가 원리가 있긴 한 모양이에요.”
“그런가. 아이고, 하여튼 사람은 배워야 해. 이제는 세상이 복잡해서 그런가, 좋은 일도 뭘 알아야 좋아할 수가 있게 되었어.”
저마다 조금씩 아는 걸 입에 담으면서, 어떻게든 세상 돌아가는 걸 파악하려고 애를 쓰는 중에 누군가가 멀리 가리키며 다른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리 망아지들이 오는군. 이제 슬슬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아무리 우리 회사가 너그러워도 농사 망치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는 천성이 농꾼이라 그런지, 벌이와 상관없이 농사가 잘 안 되는 꼴은 볼 수가 없더라. 자, 어서 가세나.”
왁자지껄한 중에 농업회사의 사원이자 농사꾼인 이들이 한곳으로 몰려가니, 아까 망아지들이 온다는 말대로, 수십 필의 말들이 몇몇 몰이꾼을 따라오고 있었다.
농사에 쓰는 노역마들인데, 모두 몸집이 작은 편이라, 말이라기보다는 망아지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워~ 랴~ 워~ 랴~, 농부들을 곤케 하노~ 우장을 두르고 삿갓을 써라~ 서마지기 논빼미가 반달이나 남았네~”
농업회사 광주군소의 ‘공식 가수’ 군판식이 부르는 노동요에 따라 수십 명의 농부들이 드넓은 농토로 퍼져 나갔다.
* * *
“구경은 잘하셨소?”
“예, 공의 충신 덕분에 볼 수 있는 곳은 잘 보았습니다.”
“하하하.”
대답에 뼈가 있음이 단박에 느껴졌기에 몽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뭐가 인상 깊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뭐, 한두 가지로 국한하여 지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포구 앞 섬에 있는 등탑은 확실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공께서 선제께 바친 조각상이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 부처의 모습을 통해 공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 보았습니다.”
“허허, 과찬의 말씀이시오.”
확실히 범섬의 등탑은 홍로동과 탐라섬의 첫인상으로 자리매김하였으니, 처음 홍로포로 들어올 때, 그 등탑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화도 마찬가지였고, 하여 몽주가 청한 탐라섬의 소감에 대해서 그 시작은 등탑이었다.
“다만, 나름 탐라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은 터라, 미리 들은 것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면, 듣지 못한 걸 보고 마음이 동요된 게 있으셨소?”
“그보다는 들어서 알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보고 더욱 감탄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수로가 그렇지요.”
“음, 그렇소?”
열반부로 물을 끌어올리는 구역은 접근이 제한되었을 터이니, 문자 그대로 물이 흘러오는 수로만을 보았을 테지만, 그래도 충분히 인상 깊을 만했을 것이다.
“그걸 짓느라 수년 동안 수많은 인부와 자금을 동원했는데 좋게 보셨다니 다행이오.”
“예, 규모도 규모지만, 그 결과를 백성들과 나눠 쓰시고 계시니까요.”
정화가 수로에 인상 깊은 건 수로의 거대한 규모가 아니라, 수로로 들어오는 용수를 비단 탐라공이나 권력자들만이 독점하거나 우선하여 쓰지 않고, 여타의 백성들에게로 골고루 분산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두무악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짓는 것도 큰 자금과 인력이 필요했겠지만, 홍로동의 모든 집에 용수관을 일일이 연결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자원이 쓰였음을 동행한 관리의 설명을 통해 알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이었다.
“한데 말입니다. 제가 무엇보다 감탄한 건, 기물도 제도도 아닌, 탐라 백성들이 그 기물과 제도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
“이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더군요.”
“아…….”
탐라시 외 다른 곳, 특히 탐라국의 다른 지방이나 다른 제후국도 아닌 외국에서 온 자들에게는 분명 그게 오히려 놀랄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놀라워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탐라시의 백성들은 이미 적응한 상태라는 게 말이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실행한 것인지 감탄했고, 동시에 얼마나 오래 노력해야 대명이, 전국은 아니더라도 그저 응천부라도 탐라섬에 견줄 수 있을지…….”
“……미처 몰랐는데, 꽤 솔직한 분이셨소.”
기대 이상으로 솔직하게 속내의 감상을 밝히는 것에 몽주가 오히려 놀라 말하니, 정화의 얼굴에 쓴웃음이 흘렀다.
“좀 원통한 마음이 있습니다. 소국이라 무시하지 않고 조금 더 신경 써 살펴보았다면, 대명이 지난 전쟁에서 …….”
무슨 말을 하려다가 명나라 천자를 모시는 그의 입장에서 차마 입에 담을 말이 아니라는 걸 느낀 모양인지 정화는 말을 줄였지만, 무슨 말이 뒤에 붙었을지는 뻔했다.
“원통할 것까지야 무엇이겠소. 지금 명나라도 무섭게 바뀌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 언젠가는 이곳 탐라가 그리 놀라운 곳이 아니게 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얼마나 걸릴까요?”
“한 2, 30년이면 족하지 않겠소?”
“미처 몰랐습니다만, 꽤 위로에 능하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탐라가 그 시간 동안 놀고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모든 일을 과거에 묻어 둘 수는 없겠지만, 서로 득이 되는 일이 있다면, 탐라는 결코 대명을 배격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서로 노력해 봅시다.”
“그 말씀, 감사히 새겨듣겠습니다.
정화가 마차로 포구로 향하기 전에 몽주와 마지막으로 나눈 이야기였다.
명나라는 지금, 흔한 표현대로 가깝고도 먼 나라인 바, 완전히 근린할 수 없을지라도, 정화가 그의 이름처럼 교류와 소통의 선을 이어 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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