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10)
“찍혔네, 찍혔어.”
뱃전에 서 있던 김자디가 하늘을 올려다보다 무심코 뱉은 말이었다.
귀산 탐방을 마치고 온 뒤로, 그가 겪었던 폭풍 같은 나날들 속에서 정신이 없다가, 이제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새삼 깨달은 것이었다.
그가 탄 배는 연나라 직고로 향하는 중이었고, 그곳을 시작으로 머나먼 여정을 시작할 참이었다.
2년 차의 여전히 신입 관리 딱지를 떼지 못한 그가 요동국공의 사신단 부사가 되었으니, 그는 요동국의 핵심 인물 2인의 기대와 지원을 받는 촉망받는 인재가 되었다.
……만, 그것이 곧 시련과 고난의 시작임에 틀림없었다.
그를 지원하고 그에게 기대하는 두 인물 모두 김자디를 그저 아끼기보다는 제대로 조련하려 하였고,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과 자격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정도전과 이판 노숙진.
김자디를 밀어주겠노라며, 장차 그를 위해(?) 큰 경험을 쌓게 만들어 주려고 벼르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내가 바란 건 아닌데 말이야.”
힘 빠진 목소리로 시선을 뒤로 돌려 북쪽을 바라보며 김자디는 근 두 달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이판 영감과의 인연은 귀산 탐방 때 눈에 든 것이었으니, 그것이 곧 영의정 영감과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귀산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뜬금없이 영의정의 부름을 받았으니, 깜짝 놀라 허겁지겁 달려간 그 자리에 이판 영감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김자디인가?”
“그러합니다, 영감.”
공손히 답하자, 정 정승은 그에게 자리를 권하듯 손짓하였다.
그에 자디가 서둘러 앉자, 영의정이 한참을 그를 뜯어보듯 살펴보았다.
“다소 늦게 급제한 모양이군.”
“예, 소싯적에 문과를 준비하다가, 혼란하던 시절에 공부를 접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찌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수양을 접은 뒤 4년 전까지만 해도 연안에서 옷 장사를 하였는데, 꽤 잘되었습니다. 덕분에 집안에 도움을 받지 않고도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한데, 몸이 풍족해지자, 마음이 더 빈곤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빈곤함이 무엇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때 관직에 뜻을 두었던 것을 포기한 것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걸 깨닫자, 저는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사도 아우에게 넘긴 후 곧바로 다시 서책을 손에 잡았고, 정진하였습니다.”
김자디가 나름 자신의 지난 몇 년간의 인생을 요약하였는데, 영의정 옆에 앉아 있던 이판이 투덜댔다.
“말이 길기에 뭔가 대단한 계기라도 있는 줄 알았구먼. 그냥 관직이 아쉬웠던 건데 뭘 그리 주절대느냐.”
“죄송합니다.”
자디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하니, 영의정이 껄껄 웃음을 흘리며 말문을 열었다.
“아닐세. 잘 말해 주었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자네 각색에 적힌 바가 이해되는군.”
“…….”
정도전의 손에는 작은 두루마리 문서가 쥐어져 있었으니, 그것이 김자디의 각색임에 틀림없었고, 느슨하게 감겨 있는 걸 보면 직전까지 그 각색을 훑어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각색(脚色)이란 관리의 이력서쯤에 해당하는 것인데, 요동국에서는 관리에 대한 평가 또한 기록되고 있었으니, 각종 인사에 앞서, 그 적임자의 후보를 선별함에 있어 각색은 가장 크게 이용되는 것이었다.
“여기 보니,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적혀 있네. 사실인가?”
각색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제출한 것에 기반하되, 등용된 이후에는 상관이 남긴 기록 위주였다.
영의정은 상관이 남긴 기록에서 김자디가 잡학에 능한 점에 흥미를 가지며 물었으니, 혹시 상관이 헛집은 게 아닌지 본인에게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크게 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방황하던 시절에 이런저런 자들과 어울리며 한두 가지씩 배우다 보니, 나름 눈을 뜬 부분들이 있습니다.”
“흠…….”
그 대답에 영의정의 이맛살이 조금 구겨졌는데,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보다는 뭔가 생각하는 느낌이었고, 그 생각이 무엇인지는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우리 요동국보다는 탐라국에 더 적합한 자였던 것 같네. 그렇지 않나?”
표현은 적합이었지만, 의미는 원래 탐라국에서 관리가 되려 했지 않았느냐는 것에 가까웠다.
그에 김자디가 조금 뜨끔한 표정이 일순 보였다.
“제가 본디 황해도 연안에서 나고 자랐으며, 고려에서 관리가 되고자 하는 마음만을 품었습니다. 다만, 세월이 하수상하여 지금의 구도가 된 바, 저 또한 요동과 탐라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긴 합니다. 하나, 어릴 적부터 배우고 익힌 것이 공맹의 도리였으니, 저에게 있어 일순위는 요동국임이 당연했습니다.”
“하나, 잡학에 열중한 바가 있지 않은가.”
“그야, 만약 대과를 통하지 못하게 되면 기술과라도 응할 요량으로…….”
“이보게, 자네가 잡학에 열중할 때만 해도, 기술과는 잡술과라 하여 인원도 적고, 대우도 낮았네. 대과에 응할 실력을 갖췄다면 절대 잡술과에 응할 생각을 품지 않는 게 일반적일 때였단 말일세. 솔직히 말해 보게. 설마하니 탐라국에 먼저 뜻을 품었다고 한들, 우리가 자네를 벌하겠는가.”
“…….”
영의정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압박하고 달래니, 김자디의 얼굴에 곤란함이 가득한 중에 더는 거짓을 더하여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김자디가 탐라국에 먼저 뜻을 둔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고향인 황해도 연안은 후국령에 속해 있는 바, 후국은 두 공국에 비해 그 국가적인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실제로 후국의 정치는 가문의 정치였으니, 서원 염씨 가문이 모든 정사를 관장하고 있었다.
하여, 대관은 모두 서원 염씨의 몫이고, 회사들 또한 서원 염씨의 수중에 모두 들어 있었으니, 후국령에서 큰 뜻을 품은 자들은 대개 탐라국이나 요동국에서 출세하길 기도하였다.
그런 흐름은 김자디 또한 마찬가지였고, 아무래도 먼저 시선이 간 것은 당금 고려를 주도하는 탐라국이었다.
하여, 탐라국에서 관리가 되기 위해 필수로 졸해야 한다는 고학교에 입학을 타진해 보고자 큰 고학교가 있는 남면 진주에까지 가 보기도 하였다.
한데…….
“솔직히 말해서 제가 탐라국에 입관한다 한들, 전혀 눈에 띌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지식과 실력은 탐라국에서 어릴 적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자들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용의 꼬리가 되느니, 차라리 뱀의 머리가 되겠노라 하여 요동국으로 온 것인가.”
“예……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저 저를 보다 크게 쓸…….”
무심코 답을 했다가, 자디는 자기가 뱉은 말에 경기하여 우왕좌왕 변명을 늘어놓았다.
답을 하고 보니, 그가 몸 담은 요동국에 대한 엄청난 조롱이 될 수도 있었으니…….
“끌끌끌.”
다행히 영의정이나 이판이나 모두 쓴웃음을 지을 뿐, 딱히 자디의 대답을 두고 탓하진 않았다.
“굳이 변명할 필요는 없네. 당금 고려를 주도하는 게 탐라국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탐라국이 용이라면 요동국은 뱀이라 해도 아주 큰 과언은 아닐 게야. 다만, 중요한 건 뱀을, 용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무기 정도는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느냐는 것이겠지.”
“그런 마음! 있습니다! 제가 그런 뜻을 품고 있습니다. 요동국은 이미 제게 모국이며, 일심동체입니다.”
아무리 영의정과 이판이 탓하지 않더라도, 이미 가시방석 위에 앉은 심정인 김자디는 없던 대의라도 만들어 낼 판이었다.
물론, 그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그가 단지 출세와 영달만을 위했다면, 굳이 관직에 임할 필요도 없었으니, 그가 하던 장사만 꾸준히 성장시켰다면, 그는 누구에게도 무시 받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개인적인 편의와 출세를 넘어 세상과 만인을 위해 힘쓰는 일과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은 그로 하여금 요동국 과거 시험에 응하게 만들었으니, 그렇게 임관한 요동국의 운명은 이미 그와 무관할 수 없었다.
“끌끌끌.”
다시 두 노신들이 자디의 발버둥에 웃음을 흘렸으니, 이번에는 좀 더 웃음다운 웃음이었다.
“그래, 그런 마음이 있다니, 참 좋군. 한데, 마음만 있다고 세상 일이 되는 건 아니지. 해서, 묻겠네. 어찌하면 요동국이 탐라국에 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엄청난 질문이었다.
과거 시험에서 보았던 과제가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광범위하고 난감한 물음이었다.
하나, 김자디 또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인물은 아니었다.
과거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임관된 이후에도, 요동국의 발전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궁리해 왔으니, 한 번의 큰 심호흡 이후, 나름 거침없이 대답을 늘어놓았다.
하나, 그 대답들에 대한 두 노신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한 것이었다.
밀과 양모, 그리고 흑토를 비롯한 자원 조달 위주의 산업 체제에서 벗어나 보다 큰 이문을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제조 산업의 육성과 같은 경제 방책도.
화포와 총포의 자체적인 개발에 도전함으로써 요동국만의 독립적인 군사 능력의 육성을 추진하자는 군사 방책도.
서방 개척지의 영토화 및 발전을 위한 이주 정책이나, 유목 호인들의 포섭과 빠른 복속을 위한 시시콜콜하되 체계적인 사회 통합 방책까지도.
김자디가 생각해 본 적 있던 그 방법론에 대해 두 노신은 별거 없다는 양 듣는 둥 마는 둥하였던 것이다.
그쯤에서 자디는 깨달았으니, 그가 아무리 생각을 깊고 넓게 해 봤다 한들, 두 노신이 수십 년 동안 고심한 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자디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세상을 종횡무진하는 줄 착각하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말을 계속 쏟아 낸 탓에 더해, 두 노신의 눈에서 벗어날까 저어한 탓에 자디의 이마에는 진땀이 가득했다.
뭔가 두 노신의 마음에 흡족할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마음이 바싹 말라 갈 때, 자디는 문득 지금 두 노신이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건 뻔한 시험이로구나.’
이미 모범 답안을 가지고 있는 두 노신이 그를 시험하는 것이니, 관건은 두 노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답을 구하는 데에 있지 않았고, 두 노신이 정해 놓은 대답을 내놓는 것에 있었다.
그에 초점을 두자, 자디의 머릿속이 몹시 부산해졌다.
‘무엇이 정답일까. 이제껏 대답한 것들 또한 충분히 모범 답안에 해당하는 것일 터인데…….’
자디가 골몰하는 중에 말이 끊기자, 이판 노숙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시험을 종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뭐, 당장 답을 내놓…….”
“편을 만들어야 합니다!”
“……?”
그 순간 뇌리를 스친 생각에, 자디는 이판의 말마저 끊으며 소리쳤다.
“아마도 소인이 여태껏 답한 것들은 이미 시행 중이거나, 아직 시행하기에 이른 것들인 바, 아직 시행하지 않았으면서도 당장 시행할 만큼 그 시기가 적절한 것이 있다면, 요동국이 주축이 되어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마감하는 순간에 영의정과 이판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니, 김자디는 자신이 영 헛집은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영의정 정도전이 짐짓 이해가 되지 않는 양 하며 하문하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생각해 보면 말이 되지 않는 것 아니냐. 이미 명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탐라국이 주축인 고려와의 연합에 동참하고 있다. 설마하니 명나라와 손을 잡자는 건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따로 남은 나라가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연합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요동국이 주축이 된 것이 아니라면, 요동국이 주축이 된 연합에 따로 참여하는 것이 불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디가 말을 이으니, 그건 고려 중심의 대명(對明) 연합 내 요동국의 지분을 늘이는 것과도 연관된 일이었다.
“멀리 남양이나 남만의 제국들은 어려울지 모르지만, 가까운 연나라나 양나라, 그리고 토번과 촉나라까지는 오히려 요동국이 탐라국보다 포섭할 힘이 충분하다 봅니다. 이는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은 물론, 탐라국의 힘마저도 요동국을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호, 하면, 그렇게 해서 얻는 건 무엇인가? 한낱 연합 내의 지분을 늘리기 위함인가?”
“어찌 그것을 한낱이라는 말로 평하겠습니까. 고려 안에서만 탐라국과 견주고자 하면 백 년도 모자랄 수 있지만, 연합을 통하면 보다 빠르게 탐라국에 비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가장 중요한 점은 그보다는 산업에 있습니다.”
“산업이라…….”
“탐라의 고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 비교 우위라는 심의가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자디가 묻자, 두 노신 모두 빙그레 웃었으니, 굳이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 따르면, 요동국은 탐라국에 비해 그 산업을 고도화하기 어려우니, 언제까지고 자원을 충당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하나, 연합 내에 다른 나라와 비교하자면 요동국 또한 전혀 다른 비교 우위를 가질 수 있는 바, 이는 앞서 말씀드린 산업을 발전시킬 방책의 기반이 되는 일입니다.”
자디는 말을 마치곤 이마의 땀을 훔치며 크게 호흡하였으니, 긴장한 중에 생각한 바를 피로하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다.
그 탓에 자디는 그의 대답을 들은 두 노신이 다시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미처 보지 못했다.
어쨌든 그것이 지금 김자디가 배에 올라 있는 배경이었으니, 그저 눈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발버둥 친 결과, 오히려 큰 신임을 얻을 수 있었으나, 고행이나 다름없는 임무도 맡게 되었다.
연나라를 거쳐 양나라를 통해 사천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토번까지 가는 엄청난 대장정에 오르게 된 것이다.
명분은 양나라 원수왕의 후계 문제에 대해 요동공과 탐라공의 충고를 전하고, 토번이나 사천 등에 경고하여 양나라에 개입하거나 침공하려는 걸 막는 것이었다.
듣기로, 이미 요동공께서 탐라공과 얘기하여 그 명분을 인정받았다는데, 요동국은 그 명분으로 북방 4국의 맹주로 자리 잡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나리, 정사께서 차를 함께하시잡니다.”
호종인의 전갈에 자디는 알겠노라 답하곤 몸을 돌렸다.
사신단의 정사 이말국은 그저 사람 좋은 인사였으니, 모든 실무는 부사인 그가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너무 잘 알려진 고관이 시작부터 나서면 탐라국이 알아차릴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무명자들로 사신단이 구성된 것인데, 덕분에 자디는 벌써부터 막중한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 시작은 연나라부터일 것이고, 아마 가장 힘든 순간일 게 분명했다.
* * *
바지를 걷어 해변을 거니니 제법 시원했다.
해변의 사장이 몹시 고아 발에 전해지는 그 바스라지는 느낌도 좋았다.
개척대장 상달은 해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해주 금각군(金角郡, 현 블라디보스톡).
탐라공께서 직접 정해 주신 이름이 그것이었으니, 쉽게 개척할 수 없는 연해주에서 정말 금쪽같이 남쪽으로 뿔처럼 튀어나와 개척의 시발점으로 삼기 좋은 곳이라는 의미였다.
사실 처음에 상달은 금각군에 고을을 세우라는 명에 몹시 의아해 하였다.
그가 보기에 지형적으로 고을이 적합한 곳은 지금 금각군이 위치한 곳보다는 더 북쪽이자, 만의 안쪽(현 러시아 아르튬)이 더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개척함에 있어, 바다에 접해 고을을 세울 때는 늘 포구에 적합한 지형을 골랐으니, 당연히 연해주의 첫 고을도 포구를 두기에 유리한 곳을 택하리라 여겼다.
물론, 금각군도 포구를 두기에 적합한 곳이긴 했지만, 깊은 만이 천혜의 양항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것에 비해 손색이 있었던 것이다.
한데, 딱 한 번 겨울을 나고 나니, 그 주변에서 포구를 둘 곳은 금각군 한 곳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녹둔도에서 북동쪽으로 고작(?) 130길미 올라온 곳이지만, 겨울에 바다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그 추위가 남달랐던 것이다.
그나마 금각군이 위치한 곳이 바다가 얼어붙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곳이었으니, 겨우 25길미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 만의 안쪽은 3월에도 바다가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
“나는 이곳이 맘에 드네. 훗날 금각군이 큰 고을이 되는 게 절로 상상이 되거든.”
“그렇습니까.”
수하의 되묻는 말투에는 자기는 상상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기야 지금 금각군은 조그맣게 지어 놓은 포구가 사실상 전부인 상황이었다.
이주하여 개척할 백성들은, 지금 모집 중이라곤 하는데, 큰 호응은 없다 하니, 적당한 규모까지는 한참 걸릴 것 같았다.
하나, 상달은 꽤 확신하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보게. 이곳에서 이제 북쪽으로는 포구를 지을 수 없지?”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포구를 짓는 거야 가능한 곳이 많겠지만, 금각군마저도 일 년 중 사분지 일 이상 바다가 얼어 쓰지 못할 것인데, 그보다 북쪽은 일 년에 최소 절반 가까이 쓰지 못할 것이 분명한 바,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곳은 이 북서방 영토의 중심 포구일 수밖에 없네. 육로도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곳에서 이곳은 세상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겠지.”
“그렇군요.”
그렇다고 답하는 수하의 말투에는 연해주가 교류의 창구가 크게 필요할 만큼 성장할 것 같지는 않다는 회의가 담겨 있었다.
“자네가 보기엔 연해주가 그리 쓸모가 큰 것 같지 않은 모양이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땅이야 넓으니, 어딘가에 뭔가 쓸 게 있기야 하겠지만, 그것이 독보적인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다른 곳에서 구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만큼 연해주는 척박한 곳이지. 한데 말일세. 그런 평가는 너무 이른 게 아닐까. 아니, 이르다기보다는 너무 국소적인 게 아닐까. 녹둔군만 해도 예전에는 감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네. 하나, 지금은 고려의 여느 고을 못지않게 큰 고을이지.”
“그야 녹둔군이야 배후의 동금주나 요동국이 있어 성장이 가능했지요. 게다가 적어도 이곳보다는 더 따뜻한 곳 아닙니까.”
“그것도 지금 봐서 그렇지. 예전에는 아니었지 않은가. 반대로 보면, 이곳 연해주도 지금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람이 많이 살 수도 있겠지.”
사실 연해주는 생각보다는 상황이 괜찮았다.
특히 북쪽으로 금각만의 안쪽 큰 계곡이 동금주의 일란 할라와 직결되기에 금각군이 발전하면 일란 할라의 경제력은 녹둔군보다 금각군을 더 이용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훗날에는 그럴 수 있겠는데, 소인은 그저 당장 비협조적인 호인들이 걱정입니다.”
“음…….”
“야인, 야인, 호인들을 두고 그 소리를 많이 했지만, 진짜 야인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런 자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돕니다.”
“뭐, 그 또한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주지 않겠나.”
사실 상달도 연해주의 호인들에 대해서는 수하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동금주나 요동의 호인들은 비록 수준이 낮긴 했지만, 그래도 개중에 글자도 알고 학식이 있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 연해주의 호인들은 그야말로 야만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니, 비단 고려인에 비해서뿐만 아니라, 예전의 호인들을 떠올려 비교해도 진정 문명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실제로 해안을 통해 여러 번 교류를 위해 접근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적대적인 습격이나 도피의 흔적뿐이었다.
과거 무족들이 부족 내, 죄인에 대한 처벌로서 연해주로 쫓아내는 것을 택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수군이 준비가 된 모양입니다.”
수하가 어느 곳을 바라보며 말하니, 상달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말을 탄 전령이 해안을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 금각군에 주둔한 분함대가 출항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예정보다 빨리 흑대도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잘되었으면 좋겠군.”
“설마하니 왜놈들이 진정 흑대도를 노리겠습니까.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우리가 손짓 한 번만 해도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상달은 수하의 대답에 그를 바라보며 그의 나이를 가늠하다가 실소를 흘렸다.
왜국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새삼 놀라웠고, 그렇게 놀라워하는 자신에 대해 더 놀랐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지금 고려가 왜국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상달의 머릿속에는 아직 과거 왜구들이 고려를 침탈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기에 그도 모르는 사이에 왜국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발현되는 모양이었다.
“그래, 분명 그렇게 되겠지.”
왜구들이 고려를 한창 괴롭힐 때, 세상에 태어나긴 했을지 애매하게 젊은 관리를 보며 상달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