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11)
* * *
“좀 똑똑하던데?”
“감사합니다.”
“너, 내 부하가 되라.”
“전 탐라공의 부하입니다.”
“나도 그래. 근데 내가 더 높잖냐.”
“그거 사당을 꾸미자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럼, 취소하지.”
“예, 잘하셨습니다.”
김종서의 단호한 대답에 석삼은 그가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다가 한 팔로 목을 감았다.
“하면, 내 동생 할래?”
두툼한 팔뚝에 눌려 켁켁거리는 김종서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양 석삼은 내 동생 소리를 연신하며 김종서를 좌지우지,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향신료 제도로 향한 고려인들 사이에는 특별한 유대감이 생겼다.
힘겨운 항해,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과 같은 것이야 앞서 향신료 제도로의 항로를 개척한 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석삼의 분함대는 분명 다른 게 있었다.
향신료 제도에 닿아 스무 날 넘게 지내면서, 경험한 모든 것이 그들로 하여금 고려인으로서의 자각을 새롭게 했다고나 할까.
문화가 다르다고 해도, 중국이나 왜국, 혹은 그 주변의 나라들은 뭐라도 공통점이 있거나 적어도 비교가 가능한 정도의 차이가 존재했다.
심지어 부루내조차도 회교라는 알려진 종교를 통해 이해 가능한 영역이 있었다.
하나, 향신료 제도는 진정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특히, 고려인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동물 숭배였으니, 앞서 탐사대도 목격한 바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잠시 다녀간 것과 보름 이상 머문 것은 그만큼 향신료 제도의 사회상을 지켜볼 수 있는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석삼들이 목격한 어느 부족의 동물 숭배는 원숭이가 대상이었다.
짧은 검은색 털을 가진 작은 크기의 원숭이였는데, 그 부족의 전설에 따르면, 부족민의 조상과 그 원숭이의 조상이 형제였고, 신이 원숭이를 택해 사람을 만들 때, 아우인 원숭이가 양보해 줘서 자신들의 조상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설 자체도 뜨악했지만, 사람과 원숭이들이 섞여 살고, 사람들이 원숭이를 위해 먹이를 가져다 바치는 걸 보며 석삼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 조금 더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되자, 동물 숭배라고 해서 동물 자체를 숭앙하는 게 아니라 그 동물의 영혼에 기원하고, 그 영혼이 자신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이 근원인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단 동물뿐만 아니라 무생물인 큰 바위나, 오래된 나무에도 원령이 있어 그 영혼과의 교감을 추구하는 것을 보며, 고려에도 있는 민간 신앙과 충분히 통하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긴 했다.
“아우, 그래도 원숭이가 먹다 남긴 음식 먹는 건 진짜…….”
누군가의 불평에 모두 같은 장면을 연상했는지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다.
원숭이들에게 바친 먹이랄까, 음식이랄까, 어쨌든 남긴 것을 먹으면 원숭이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구현된 그 모습은 고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뭐, 어쨌든 이제 떠날 참이니, 좋은 기억만 남기세. 나름 괜찮지 않았나?”
또 다른 누군가의 말에, 많은 이들이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웃음을 보였으니, 특히 총각들이 주로 그러했고, 기혼자들은 뭐라 표현 못할 감정을 애매하게 드러내었다.
향신료 제도의 부족들은 많은 곳에서 그러하듯 모계 부족 사회였으니, 외부 남성의 씨를 받아 잉태하는 풍습 또한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근방에 일반적인(?) 혼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세력이나 나라와의 교류가 많은 덕에 기혼자들의 씨를 받는 건 금물하고 있었으니, 고려인들 중에서도 총각들만 본의 아니게 여자 경험을 제법 쌓게 되었다.
게다가 과거 석삼이 표류하였던 여나국과 달리, 강제로 교접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피부가 희고 키도 큰 고려 사내들은 융숭한 대접 속에서 여인을 골라잡는 호사마저 부리기도 했다.
“너는 뭐가 가장 신기했더냐?”
여러 말들이 오가는 중에 석삼이 김종서를 향해 물으니, 어린 관리가 잠시 생각하다가 답하였다.
“아무래도 문자가 없다는 것이 신기했고, 문자를 대신하는 그림도 신기했습니다.”
“그도 그렇지. 여기 사람들은 교역이 익숙한데도 제대로 된 문자를 쓰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했지.”
“네, 덕분에 탐라공께 괴이한 문권을 전해 드려야 하는 상황이라 나중을 생각하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아…….”
향신료 제도에는 제대로 된 문자가 없었다. 대신 그림으로 문자를 대신했으니, 표의 문자 내지 표어문자로 발전하는 도중의 상황과 같았다.
게다가 따로 숫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숫자의 개념도 크게 부족해서, 1부터 10까지만 헤아리고 그 이상은 그저 많다는 개념만 가지고 있었다.
하여, 모든 교역은 기본적으로 ‘현찰 박치기’급 물물 교환의 형태였고, 가끔 많은 거래 경험을 통해 신뢰를 쌓은 자들만 장부를 두고 거래를 했는데, 석삼은 그것을 보고 한양부 시절의 기시감을 느꼈다.
오래전, 처음 비노와 가다랑어포를 만들어 그것으로 장사를 할 때, 당시 주인 도령이었던 탐라공께 장사한 결과를 보이기 위해 그림과 기호로 표기했던 것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가장 신기했던 건 네놈이었다.”
“예? 아…….”
“고작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곳의 말을 배웠더냐.”
“그저 낱말 몇몇을 외워서 더듬더듬 썼을 뿐입니다.”
“그게 신기하다는 거다. 뭔 말들이 따라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데다 반복하는 것도 많으니…….”
전형적인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의 특징을 보이는 향신료 제도의 언어는 사실 음소도 많지 않고, 음운도 단순한 편이지만, 그 탓에 한 낱말에 필요한 음소 자체가 많아지고, 반복되는 음소도 많아, 고려인의 귀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느껴졌다.
때문에 어지간한 이들은 듣는 순간, 배우길 포기할 마음이 드는데, 김종서는 끝끝내 듣고 외워 필요한 몇몇의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석삼은 향신료 제도의 몇몇 유력 부족들과 소통하여, 장차 탐라국과의 교역을 위한 양해를 닫은 문권을 작성할 수 있었다.
한데, 문제는 그 문권이 하나는 한글로 쓰였지만, 다른 하나는 향신료 제도의 문자…… 로 쓰이는 그림으로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탐라국이 중화 질서를 벗어나 외교의 체계를 세우는 과정에서 반드시 문서로서 모든 외교적 합의와 결과를 증명하도록 되어 있는 터라, 문권을 작성하긴 했지만, 석삼이 보기에 그 문권에 이름을 올린 부족들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도 않았고, 그 문권에 적힌 그림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담은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일단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만큼 나중에 탐라공께서 언짢아하실 것 같아 걱정이었다.
“언젠가는 이곳에도 대사관을 세울 날이 있겠지요?”
“그렇겠지. 여기에 제대로 된 나라가 들어선다면.”
이제 탐라의 분함대가 다시 출항할 때였다. 술루를 통해 곧바로 여송섬으로 향할 것인 바, 탐라섬에 닿기까지 한 달은 걸릴 듯싶었다.
* * *
“출포요!”
뻥!
방포 소리와 함께 무언가 길쭉한 것이 대기를 가르며 날아갔고, 그에 매달린 밧줄 또한 허공에 느슨한 호를 그렸다.
“아오!”
그렇게 날아간 것이 목표 근처의 바닷물 속에 빠지자, 뱃전에서 주먹을 움켜쥐며 격중을 기대하고 있던 자들이 크게 안타까워하였다.
뱃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에는 고래 한 마리가 숨을 뿜으며 물결 위를 헤쳐 나가고 있었으니, 마치 자기를 잡으려는 인간들을 비웃는 듯했다.
“내 저놈을 반드시 잡고야 말겠어! 바다 끝까지라도 쫓아가자고!”
선장이 분기 어린 목소리로 외치자, 포경선원들이 다시 기세를 올렸다.
잡힐 듯 말 듯한 두 시진에 가까운 추격전은 이제 포경선의 선장에게도 그 고래를 잡는 것이 일이 아닌 자존심 걸린 승부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마저 흔들린 탓일까.
여느 때라면 날씨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을 그 많은 선원들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그 바람에 습기가 묻어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저 고래를 쫓기에 더 적합한 바람이 분다는 것에 기뻐할 뿐.
그 경망(輕妄)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 지는 뱃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소리에 옅게 정신을 차렸던 홍해구는 죽을 것처럼 심한 갈증에 황급히 눈을 떴다.
태양, 해변, 파도.
익숙한 것들이 눈에 연달아 들어왔다.
몸이 서둘러 물을 달라고 난리를 쳤지만, 해구는 애써 마른침을 만들어 목구멍을 달래고, 주변을 살폈다.
“빌어먹을…….”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만 덩그러니 해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머릿속으로 지난밤, 정말 지난밤인지 며칠 전 밤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밤새도록 폭풍 속에서 사투를 벌인 기억이 스쳤고, 이어 그의 포경선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 누구든 단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진정 좋으련만.
해구는 허망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비틀거리며 일단 가까운 그늘로 몸을 움직였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열대 나무의 그늘 아래 들어가자, 그나마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풍경을 인식할 수 있었는데, 작은 만의 해변에 새하얀 모래사장이 열광하는 태양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하나, 해구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에 매몰될 여유가 없었다.
‘일단, 물을 구하자.’
일어설 기운도 없었지만, 물을 구하지 못하면 점점 더 힘이 없어질 테니, 조금이나마 기력이 있을 때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담수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 해구가 물을 구한 것은 정작 1시진이나 흐른 뒤였다.
그것도 샘이나 개울을 발견한 게 아니라, 갑작스레 내린 호우가 내려 준 선물이었다.
열대수의 커다란 잎사귀를 그릇 삼아 받은 빗물은 사탕물보다도 달콤했다.
비가 내린 대략 한 식경 동안 내내 빗물을 받아 마신 해구는 직후에 밀려오는 피로에 다시 정신을 잃었다.
혼미해지는 정신 끝에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은 그 순간에 가장 핵심적인 의문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당대에 그 답을 줄 수 있는 자는 세상을 통틀어 단 한 명뿐이었다.
* * *
몽주가 유구상단에 속한 포경선 한 척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건 십수 일이 지나 순보에서 그에 관한 짧은 기사를 보면서였다.
물론, 그 기사를 보았다고 해서 포경선과 그 배에 탄 선원들을 구하라는 명을 내리진 않았다.
이미 꽤 흐른 시간이나 이후 폭풍이 지나갔다는 사실 등을 볼 때, 그 포경선에 탄 선원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리라 여겼고, 또 그런 실종에 몽주가 일일이 대응하기에는 사실 흔히 있는 난파 사고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릴 수 있었으니, 예전에 현대에서 유구국에게 북태평양의 열도들을 탐사케 하려 했던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안타까운 포경선의 실종 사건이 그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을 절로 타진하게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이 표류하였을 경우 발견할 수 있는 섬들을 떠올리다,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연상하게 된 것이었다.
하여, 몽주는 홍길도를 불러 유구국공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하게 하였으니, 현대에서 ‘오가사와라’ 제도라 불리는 곳을 탐사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한데, 그런 망망대해 중에 있는 섬들까지 얻어야 할 이유가 있는 지요?”
국서를 쓰기 위해 몽주의 구술을 받아 적은 뒤, 홍 대신이 던진 질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발견하기도 어렵고, 발견한 후에도 통행하기 쉬울 리가 없는 외딴 제도는 거기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섬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굳이 확보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몽주도 단지 획토의 욕망 때문에 유구국에 ‘오가사와라’ 제도의 발견을 권하는 건 아니었다.
오가사와라 제도를 비롯하여 근방의 섬들을 확보하는 건 곧 북태평양의 서반을 장악하는 것이라는 점이라든지, 훗날 일본 열도를 견제하는 지정학적인 요충지라든지, 그곳에 기반하여 원양 어업을 육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등은 차치하더라도, 몽주가 오가사와라 제도를 탐내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현시점에서 오가사와라 제도가 ‘깨끗한 모래’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었다.
즉, 순도가 높은 석영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지금 탐라국에서 생산하는 유리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킬만한 자원이 그곳이 있는 것이었다.
“굳이 유리를 더 투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생산하는 것도 충분히 투명하고 아름답습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저 유리창과 유리잔으로 쓰고자 한다면 말일세.”
“……?”
“망원경은 어떤가? 거기에 쓰이는 유리도 만족스럽나?”
“아…….”
그제야 홍길도는 유리의 투명도가 아쉬운 물산이 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네도 저번에 보름달을 보았지 않았나? 그 정도로 양질의 망원경을 더 쉽게 만들 수 있다면, 많이는 아니더라도 꼭 필요한 만큼은 구해야지, 안 그런가?”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유구공에게 주군의 뜻을 정확히 전하겠습니다.”
“그러게. 후후.”
홍길도가 물러나자, 몽주는 설득하는 데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 만족했다.
모두 얼마 전에 남면 동래시에서 ‘진상’된 망원경 덕이었다.
망원경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등장한 이래,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민간에도 망원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주로 항해 용도로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동래의 어느 선주가 망원경에 매료되어 사사로이 그 개발을 도모하였다.
그러다 망원경으로 보는 화상의 질이 볼록 유리의 정밀함과 투명함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된 그는 탐라 공관부에 선을 넣어 비용은 자신이 댈 터이니, 가능한 깨끗한 볼록 유리를 생산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대에 쓰이는 망원경 자체의 제조법이야 복잡하지 않고 굳이 비밀로 감추지도 않았기에 민간에서도 비교적 쉽게 망원경을 제작할 수 있었으나, 유리나 볼록 유리의 제법만큼은 철저히 그 비밀성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 선주도 탐라 조정에 청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검토 끝에 민간 합동으로 당대로서는 고성능의 ‘렌즈’ 개발에 착수하였으니, 다시 2년 가까이 질 좋은 볼록 유리의 생산에 도전한 끝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물건이 나왔다.
철분 등을 제거하는 데에 몇 달씩이나 소모하여 볼록 유리의 투명도도 월등했고, 망원경 자체도 2단이 아닌 3단으로 제작되어 그 배율을 높인 것이었다.
몽주가 후에 받아 본 그 망원경의 배율은 대략 10배 정도였는데, 탐라군에서 쓰이는 것에 비해 그 성능이 거의 2배 정도 좋아진 것이었다.
하나, 그 망원경으로 보는 세상이 준 충격은 결코 고작 2배에 불과하지 않았다.
특히 그 망원경으로 달을 바라보게 하니, 모든 이들이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방아 찧는 토끼가 전설에 불과함을 아는 이들마저도 달의 ‘생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대에서 인터넷으로 금세 구할 수 있는 선명한 월면 사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망원경에 비친 월면만으로도 신비로 가득한 달이라는 존재가 허물어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참고로, 그 망원경을 제조하는 데 힘쓴 선주는 이후 뱃일을 아들에게 넘기고, 탐라공의 지원을 받아 망원경을 제조하는 회사를 세웠으니, 지금에 이르러서 나라에서는 망원경의 제조를 멈추고 그 회사의 것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 회사가 고성능의 망원경을 외국에 함부로 팔지 못하게 하는 대신, 어느 정도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어쨌든 그 망원경으로 본 달에 충격을 받은 이들 중 홍길도도 있었는데, 후에 그가 따로 망원경을 구하여 다시 달을 보다가 크게 아쉬워하기도 하였으니,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당대의 망원경으론 월면을 선명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몽주가 ‘깨끗한 모래’를 얻고자 하는 것을 금세 수긍하게 만들었다.
“근데 오가사와라가 세계 유산이었지, 아마?”
몽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현대의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오가사와라 제도가 그 고립된 위치 덕에 자연 환경이 잘 보존되어 세계 유산에 등록되었는데, 천몽의 미래에서는 그런 일이 생기기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소 미안한 일이었다, 오가사와라 제도와 근방의 여러 섬에 서식하는 고유종의 동식물들에게.
* * *
“아이구, 우리 막내, 이 아비 때문에 깨었구나. 아구구. 미안해라.”
저녁에 급히 일이 생겨, 회사에 나가려던 방원은 막내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다 아기의 잠을 깨우고 말았다.
선잠에서 깬 아이가 울먹울먹하는 걸 열심히 달래고 있는 방원의 모습은 영락없는 팔불출의 아버지였으니, 그걸 바라보는 아내 강영이나 다른 하인들도 모두 그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비가 나갔다가 금방 들어올게. 근데 네가 그때도 자고 있을 것 같구나. 어이구, 미안해라. 네가 얼른 커서 걷고 뛰게 되면 아비가 많이 놀아 줄 테니, 너무 아쉬워 말아라. 알았지?”
알아들을 리도 없건만, 방원은 막내에게 사과와 설명을 늘어놓고는 뺨을 부비적대며 이제 다시 아기와 떨어질 것을 아쉬워하였다.
“누가 보면 한 한 달은 떨어져 있는 줄 알겠네요.”
“한 달이 아니라, 한 시진만 못 봐도 가슴이 아프오.”
“그러면, 한 시진 안에 일을 처리하고 오세요.”
“하하, 알았소. 내 금방 다녀오리다.”
아기를 아내에게 넘기고 아내에게 인사를 남긴 방원은 몸을 완전히 돌리기 전까지 아기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아쉬운 발걸음을 떼었다.
“아버지, 다녀오세요.”
쌍둥이 남매의 인사에게 다시 헤벌쭉 웃으며 화답한 방원은 집을 나섬과 함께 표정이 바뀌었으니, 집에서는 아내의 지아비이고 아이들의 아비였지만, 이제부터는 유덕사의 사장이기 때문이었다.
“토설하였는가?”
“예,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모두 자백 받아 내었습니다. 대부분 노름빚을 갚는 데 쓴 모양입니다.”
“흥! 그만하면 재판에서 질 리는 없을 터?”
“물론입니다. 철저히 추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쁜 걸음을 옮기며 받은 수하의 보고에 방원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감히 횡령을 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기가 치솟았다.
유덕사의 사원 중 하나가 회사 돈을 빼돌리고 장부를 조작하였으니, 들통 난 뒤에는 도주까지 하였다.
화가 치민 방원은 사원들은 물론, 따로 사람들을 풀어 그자를 추격하였고, 보름 만에 결국 잡아내었는데, 이미 횡령한 돈을 대부분 소진한 상태였다.
쾅!
나쁜 심기를 드러내듯 문짝을 걷어차며 들어간 방원의 시야에는 회사 공소 내 어느 창고 안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
그곳에서 여기저기 앉아 쉬고 있던 사원들 몇몇이 방원을 보고 자세를 바로 하며 인사를 올렸지만, 방원은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곤 어느 인물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창고 가운데 의자에 묶여 있는 자.
바로 횡령한 당사자였다.
그자는 흠뻑 젖어 있었는데, 땀은 아닌 듯했고, 근처에 큰 물동이에 물이 가득한 걸 보면 물에 젖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곧 그자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를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이보게.”
“…….”
“이보게, 승찬이?”
방원이 부름에도 떨궈진 고개에 미동도 없자, 방원이 다른 사원을 향해 시선으로 신호를 보냈다.
촤악!
“으…….”
물이 끼얹어지자, 그제야 승찬이라는 횡령범이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을 내었다.
“고개를 들라.”
“…….”
방원의 목소리에 부들거리며 고개를 드는 승찬의 얼굴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얻어맞아 부은 건 둘째 치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색이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 살려 주…….”
“아아, 물론, 살려 줄 걸세. 설마하니, 내가 대명 천지에 사사로이 사람을 죽이기야 할까.”
“…….”
“자네는 이제 관에 넘겨져 재판을 받고 벌을 받는 걸세. 아주 정당한 재판을 말이야. 근데, 내가 하도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것만큼은 꼭 답을 해 줬으면 좋겠군.”
방원은 힘이 빠지는지 고개가 내려가는 승찬의 턱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는 시선을 마주하였다.
“내가 그리도 만만했던가?”
“……아, 아닙…… 그저 왈짜 놈들이 하도 협박을 해서…….”
“흠, 하면 적어도 내가 그 왈짜들보다는 만만해 보였다는 게군.”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기운이 없는 중에도 자신의 뜻이 곡해되는 것에 당황한 승찬이 애써 부정하였지만, 방원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말했듯 너는 정정당당하게 재판을 받을 거야. 그리고 아마 유형의 벌을 받을 것이고, 횡령한 돈의 추징 또한 선고받을 것이야. 물론, 자네는 돈이 없겠지. 하나, 이미 요동국의 판례에는 죄인이 추징할 돈이 없으면, 그 가족과 친족으로부터 추징할 수 있게 되어 있지. 나는 단 한 푼까지도 모조리 추징할 생각이야. 부디 자네의 노모께서 가지신 재산이 좀 있으시길 바라네.”
“사, 사장님……!”
승찬이 암울한 표정으로 방원을 불렀지만, 할 말을 다한 방원은 이미 일어나 몸을 돌린 상태였다.
“시대가 변한 게 좀 아쉽군. 재판장이 아니라 내 마당에서 내가 내린 벌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방원이 아쉬운 입맛을 다시자, 곁에 따르던 수하들 중 하나가 얼른 답하였다.
“가급적 큰 처벌이 내려지도록 애써 보겠습니다.”
“너무 티 나게는 하지 말고.”
“예, 조심하겠습니다.”
요동국의 재판과 형벌 제도는 다른 많은 제도와 마찬가지로, 탐라국을 추종하였으나, 그 상세는 많이 달랐다.
몽주의 주도와 검사하에 가급적 근대적인 형태를 추구하고 있는 탐라국에 비해, 요동국은 아직 전근대적인 내용이 많이 혼합되어 있었으니, 방원이 횡령범을 사사로이 잡아 문초까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요동국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형벌의 선고와 집행만이 재판의 몫인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철저히 추징해. 사돈에 팔촌까지 싹 다.”
“예.”
이미 승찬의 집안이 가난함을 알고 있었으니, 그가 횡령한 금액을 생각하면 그 집안이 망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나, 방원은 아무런 동정심도 가질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운 좋게 유덕사에 입사까지 하였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집안을 일으켜야지, 노름에 손을 댄 것부터가 그의 죄이자, 그 집안의 원죄인 것 아닌가.
그 순간, 방원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하륜과 나눴던 대화가 복기되었으니, 그가 가진 천성이 드러난 대화이자, 그가 정의라 믿고 있는 기준이 되는 대화였다.
“하면, 치자는 그런 본성(성악)을 가진 사람들을 어찌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어쩌긴,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걸 분명히 해 두고, 죄를 짓는 놈들은 박살 내야지. 아, 그러기 위해서는 치자가 힘이 세야겠네? 그래서 선생이 치자가 강해야 한다고 했던 건가? 오호, 역시 선생은 똑똑해.”
그 어린 시절의 경험은 방원만이 가질 수 있던 독보적인 것이었지만, 그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자들은 고려에 꽤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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