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12)
* * *
붓놀림이 더해질수록 화풍이 거칠어졌다.
안목이 없는 자가 보면 오히려 점점 그림을 망치는 것 아니냐고 혀를 찰 만한 모습이었으나, 화장(花匠)의 집중한 얼굴은 결코 아무렇게나 붓을 놀리고 있는 게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후우…….”
쉴 새 없이 붓을 놀리던 화장이 한숨을 돌린 건 반 시진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패랭이 아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친 화장은 곁에 둔 바구니에서 물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이어, 앉아 있던 호상에서 일어나 그가 조금 전까지 그린 대상이었던 풍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가 있는 언덕 아래에 진주시의 풍경이 보였으니, 지난 세월 과거와는 전혀 달라진 진주시의 모습을 확연히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
누구든 그 거대한 고을의 풍경에 감탄을 금할 리가 없을 것 같건만, 화장의 표정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차라리 너무 익숙해져 담담한 것이라면 이해할 법하건만, 진주 고을을 바라보는 화장의 표정에는 뭔가 한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풍류란 무엇인가…….”
문득 화장이 중얼거리니, 그가 처음 사롱에 들어섰을 때, 단주가 말해 준 바에 대한 것이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리고 노여우면 노여운 대로 그 흐름을 타서 표현하는 것이 풍류가 아니겠나.’
그 말은 그의 화풍을 바꾸는 기반이 되었다.
물론, 표현법 자체야 사롱에서 다른 화가와 다른 예인들의 작품과 활약을 지켜보며 받은 영향에 기인한 면이 더 크겠으나, 그 변화의 추진력은 단주의 그 말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덕에 그의 화풍은 물상의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넘어서 그 진면목을 통찰하고자 하는 노력이 담기기 시작했고, 당연히 그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 또한 담겨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어느 순간 몸을 돌려 화구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니, 그가 그리던 그림 또한 화판의 덮개 안으로 그 모습을 감췄다.
농토 위에서 한 농부가 여러 장정들에게 거칠게 끌려가는 모습, 아니, 그보다는 뜯겨 나간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 그런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상이란 분명 분노임에 틀림없었다.
* * *
몽주의 거동 일체가 백성들에게 공개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대개 백성들은 탐라공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공식적인 일정이 있을 경우, 그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백성들도 몽주가 어디에 방문함을 알 수 있게 되니, 그때는 곧잘 백성들이 몰려들곤 하였다.
특히, 탐라국의 지배가 완연히 자리 잡은 곳이면서, 탐라섬처럼 탐라공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지방에 몽주가 방문할 경우에는 근방의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와 몽주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애를 쓰곤 했다.
물론, 현대의 인기 정치인이 그러하듯 최근방까지 몰려들지는 못했다.
호위군병들이 철통같이 막고 있기도 하거니와, 한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신분과 일반 백성들과의 격차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대개 허리를 굳혀 예를 표하였고, 때로는 구법에 따라 오체투지하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설마하니 동원한 건 아니겠지?”
“하하, 한두 번 경험하신 것도 아닌데 무얼 그리 의심하십니까.”
“지금은 한창 일할 시간이 아닌가.”
“주군께서 간만에 방문하신다는 소문이 있으면, 작업소의 주인부터 문을 닫고 여기로 달려왔을 겁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무개의 마차 위에서 여기저기 손을 흔들어 주는 몽주가 동행한 내관대신 홍길도와 복화술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나를 향해 환호하는 자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나를 싫어하는 자는 없는 것처럼 느껴져.”
“탐라국 백성들 중에 주군을 싫어하는 이가 있겠습니까.”
“있네. 그것도 적지 않아.”
어사대와 익문대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는 내관대신도 모르는 게 대부분이기에 의외로 자주 탐라공의 정치에 반항하는 자들이 많음을 그도 잘 모르고 있었다.
“한데, 사롱에는 꼭 방문하셔야겠습니까? 그들에게 너무 힘을 실어 주시는 게 마땅치 않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하니 이상하군. 자네의 아우들이 크게 개입한 일이 아닌가.”
“제 아우들과 제 생각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송구한 면이 있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사롱의 단주는 내 처남일세.”
홍길도 남매의 길래와 길선은 사롱에서 부단주의 신분에 있었으니, 특히 길선은 지금 탐라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순보 발행의 대표였다.
적지 않은 이들이 삿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롱의 수장들이 정작 탐라국을 이끄는 자들의 친인척들이니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사롱을 적대하는 자들조차 사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네도 큰 틀에서는 나라에서 발간하는 순보 외 다른 순보가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게 꼭 사롱일 이유는 없습니다.”
“사롱이 안 될 이유도 없지.”
“사롱에는 불한당이 너무 많습니다.”
“그 이야기, 한 백 번은 넘게 들은 것 같군. 진짜 불한당은 한 줌도 안 될 걸세. 나머지는 그저 겉보기에 평범하지 않은 자들일 뿐이지. 대저 악기와 화구를 만지는 자들마저 불한당으로 취급하지 않나. 그들도 나름의 생산을 도모하고 있고,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인데 말이야.”
“악공과 화장을 두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어쨌든 불법적이고 무책임한 짓이 아니라면 탐라의 백성은 누구라도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네. 나는 순보의 발행 또한 법과 책임에 거역하는 일이 아니라고 여기네.”
“…….”
몽주는 결론을 짓듯 말하곤, 잠시 멈췄던 백성들을 향한 손 흔들어 주기와 웃어 주기를 이어 갔다.
마차는 진주시청사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움직였다. 그 마차가 시청사에 거의 닿을 무렵, 몽주가 홍길도를 향해 무어라 말을 하니, 내관대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 * *
사롱은 사실 ‘본부’가 없었다. 여러 큰 고을에 사롱이 가진 건물이 있긴 하나, 그것들 중 으뜸인 곳은 없었다.
실제로 사롱의 단주도 몇 달에 한 번씩 고을을 옮겨 거했고, 수장 격인 자들도 저마다 나뉘어 흩어져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롱이 ‘점조직’ 같은 건 아니었고, 그저 각각의 핵심 인물들마다 관심 있고 실력 있는 정치 문화적인 분야가 다른 만큼 서로 돌아가며 여러 고을에서 관련 사업을 실시할 수 있도록 순회하다 보니 그리된 것이었다.
하나, 순보의 발행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순보의 발행을 담당하는 고을이 사롱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그 고을은 당연히 진주로 낙점되었다.
탐라특별시를 제외하면, 출해시와 더불어 가장 큰 고을이면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남면을 권역으로 품고 있는 고을이 진주였고, 또 사롱에서 출간하는 여러 서적의 인쇄소 또한 진주에 위치하여 순보의 발행을 준비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잘 지냈나?”
“저하의 보살핌 덕에 평안하셨습니다.”
“나도 자네 덕에 평안했네.”
“저야 그저 놀고먹을 따름이니, 그런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허, 그렇게 조심할 건 없네. 내가 오면서 내관대신에게 자네가 한 일들에 대해 말해 주었으니.”
“…….”
그 말에 종도가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홍길도를 바라보았으니, 그 시선에 경계가 가득했다.
홍길도도 마주하는 시선이 온화하지마는 않았다. 진정 사롱을 이끄는 종도가 주군을 위해 움직이는 게 확실한 지를 꿰뚫어 보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시선이었다.
“내관대신에게 알린 게 마뜩치 않은가?”
“어찌…… 그저 너무 많은 자들이 알면 사롱이 주군께 충성할 여지가 줄어들 것이기에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제 입이 그리 가볍지는 않습니다.”
종도의 대답에 홍길도가 끼어들어 답하니,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기 싸움은 그만들 하게.”
“예.”
“내관대신에게 알린 건, 이제 비서원을 통해서 사롱을 지원하는 걸로는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네.”
이제껏 사롱에 대한 지원은 비서원이 담당했으니, 과거에는 아내 앵도가 관여했었고, 지금은 비서원의 관리이자 익문대 대장인 차현유가 맡고 있었다.
“순보 때문입니까.”
“그래, 사롱의 힘만으로는 지면을 몇 장이나 채울 수 있겠나. 정보든 자금이든 아직은 많이 부족하겠지.”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겠으나, 차차…….”
“그 차차를 위해서일세. 관이 기사에 개입하는 걸 저어하는 거라면 걱정 말게. 그 점은 내가 철두철미하게 막아 주겠네. 그저 고려 내외의 사정에 대한 녹계를 얻어 쓴다고만 생각하게. 그걸 그대로 순보에 싣든 따로 탐사를 하고 쓰든, 그건 사롱이 알아서 할 일이고.”
“알겠습니다.”
몽주가 진주의 사롱에서 무언가 논의를 한 건 사실상 그게 전부였다.
엄연히 사롱이 순보를 발행하는 것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따로 명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몽주가 사롱을 방문한 이후에도 사롱이 순보의 발행을 지속적으로 준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탐라공이 사롱의 순보 발행을 허하고 지지하였음을 세상이 알게 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순보의 발행을 두고 사롱을 적대하던 자들의 기세가 크게 꺾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몽주는 이후 사롱의 악공과 화장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간만에 푹 휴식을 취하였고, 밤이 깊어지자, 아예 사롱의 단청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소란은 그날 밤에 벌어졌다.
* * *
혹인서는 명나라와의 전쟁 때만 해도 하병으로 갓 입대한 육군 소속 군병이었으나, 지금은 전혀 다른 신분이 되었으니, 탐라공의 호위 무관 중 하나였다.
명나라와의 전쟁 중에 특별히 세운 공은 없었지만, 여인의 몸으로 다른 사내 군병들 못지않게 활약한 그녀는 당시에도 이미 수가 많이 줄어든 여군의 존재감을 다시 드러낼 만한 인재였다.
물론, 그녀가 모두가 원하던 탐라공의 호위 무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여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아무래도 백성들을 대함에 있어, 그리고 탐라공의 호위 무관은 곧 탐라공의 가족을 위한 호위 무관이기도 하다는 점에 있어, 성별이 여성인 것은 충분히 이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혹인서는 모든 근무에 있어 여성으로서 ‘배려’를 거부하였으니, 그녀는 자신이 여인이라는 점 때문에 계속 이득을 얻는다면 훗날 군에서 여인들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얼마든지 빠질 수 있었던 야간 경비 또한 일절 빠지지 않았으니, 탐라공이 진주를 방문한 첫날 밤, 사롱의 대문을 지키는 2인의 호위 군병 중 하나가 그녀였다.
그런 혹인서가 어느 한 인물을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그가 근방에 모습을 드러낸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탐라공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에 근처를 기웃거리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기에 단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
하나, 백성들 대부분이 잠시 기웃거리다가 얼마 뒤 발걸음을 옮기는 것에 비해, 그자는 가만히 서서 사롱의 단청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자연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메고 있는 큰 가방 또한 절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다만, 경계함에도 당장에 그를 쫓지 않은 것은 탐라공을 호위함에 있어 일정 범위 안에 접근하지 않는 이상 단지 보는 것만으로 쫓아낼 수 없다는 내부 방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혹인서가 그자에게 다가가기로 마음은 먹은 것은 그가 몇 걸음 다가와 가방을 풀기 시작한 때였다.
“이보시오!”
“……?”
인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자를 부르는데, 그자가 순진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으니, 동시에 그가 열어젖힌 가방 안도 보였다.
“그림을 그리면 안 됩니까?”
“…….”
인서는 잠시 우물쭈물하였는데, 탐라공께서 머물고 계시는 사롱의 단청을 그리는 것은 탐라공께 위협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탐라공을 찬양하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그자, 아마 화장임에 분명한 자가 화구를 주섬주섬 꺼내 놓으니, 인서는 그제야 마음을 정하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가능하나, 너무 가까운 곳이니, 저 나무 근처로 자리를 옮기시오.”
“……알겠소.”
화장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이긴 했지만, 다시 화구를 정리했으니, 그제야 인서도 그자로부터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대문 앞을 그녀와 함께 지키던 무관의 표정이 어느 순간 급박해졌고, 그녀의 뒤를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쳤다.
그 소리가 ‘조심해!’임을 깨닫는 즉시, 인서는 앞으로 구르며 방향을 돌렸고, 화장이 작은 손도끼를 치켜 들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눈매에 살기를 돋운 인서가 허리춤에 패용한 검의 자루를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그 화장이 손도끼를 치켜든 손을 움직였다.
인서는 그 순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 도끼로 자신을 내려치기에는 너무 멀었고, 손도끼를 던진다 하더라도, 화살도 아닌 바, 얼마든지 피하거나 쳐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 손도끼가 향한 방향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퍽!
“……!”
“끼아악!”
비명성을 터뜨린 건, 근처에 있던 다른 백성들이었다. 다만, 손도끼가 그들에게 날아간 건 아니었다.
그 손도끼는 누구에게도 던져지지 않았고, 화장의 손에 쥐어진 채 땅을 내려찍었다.
단지 그 땅 위에 그 화장의 왼손이 놓여 있었다는 점이 비명을 터지게 만든 이유였다.
“커억!”
자신이 내려친 손도끼로 자신의 왼손 검지와 중지를 찍어 버린 화장은 직후에 몰려오는 극통에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잘려 나간 손가락이 땅바닥을 나뒹구는 걸 버려 둔 채, 피가 줄줄 터져 나오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손도끼를 내려찍느라 굽혔던 무릎을 펴 자세를 바로 한 화장이 심호흡과 더불어 크게 고함쳤다.
“오호, 통재라! 밝은 태양이 떠오르매 어찌 그늘이 없을손가! 하나, 만백성의 환호 속에 피눈물 짓는 농부의 절규를 듣지 못하는 것 또한 만인을 이끄는 자의 오점이 아니련가!”
원한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눈물 젖은 목소리로 우렁차게 터져 나오는 화장의 고함 소리에 당황과 당혹으로 몸이 굳었던 인서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깨달았으니, 등 뒤로 동료들이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검 자루를 쥔 손을 휘둘렀다.
철퍼덕!
고래고래 소리치던 화장이 널브러지는 것과 함께 짧지만 강렬했던 소동이 일단락되었다.
* * *
“해서 어찌하였나?”
선잠에 들었다 도로 깬 몽주가 호종이 가져다 준 세숫물로 얼굴을 씻고 수건으로 닦으며 하문하였다.
“칼등으로 내려쳐 기절시킨 후, 일단 치료를 하는 중입니다.”
“잘린 손가락은?”
“거두긴 했습니다만, 다시 붙일 수는 없을 겁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게지?”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해 취조하지 못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가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관대신의 말 뒤로, 종도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하였다.
“그자를 보고 오는 길인가. 아는 자고?”
“예, 사롱에게 지원하고 있는 화장 중 하나입니다.”
“하면, 그자의 사연 또한 알고 있겠군.”
“자세하고 정확한 건 차후에 알아봐야겠습니다만, 그자가 외친 내용을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자의 아비가 본디 진주에서 전소작을 크게 하던 이였습니다.”
“마름? 흥, 마당통으로 받아 가량통으로 넘기던 짓을 못하니 배가 아팠던 모양이군.”
홍길도가 혐오가 가득한 어조로 비웃었지만, 종도는 고개를 저었다.
전소작(轉小作)은 소작 받은 농토에 다시 소작을 주는 걸 의미하는 바, 주인의 농토를 대신 관리하는 마름과는 엄연히 다르나, 소작인의 입장에서는 대동소이하였다.
그리고 마당통이란 쌀을 푸는 되에 수북이 고봉이 되도록 퍼는 걸 의미했고, 가량통이란 되의 밑을 훑어 평평하게 퍼는 걸 의미하니, 마당통으로 받아 가량통으로 낸다 함은 마름이 소작인과 지주 사이에서 그 차이만큼 착복한다는 조롱이었다.
안 그래도 힘겨운 소작농부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짓이었다.
“화장의 주장이긴 하나, 그의 아비는 그런 이들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오히려 나름 부유한 집안이었기에 전소작을 하며 소작인들이 마름에게 착취당하는 걸 막아 주었다지요.”
“흥!”
악덕 마름에 대한 혐오가 깊은 홍길도는 그리 믿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몽주는 종도에게 계속 말하라 신호를 주었다.
“한데, 국토령이 내려온 뒤, 모든 땅이 나라의 것이 되면서 일이 벌어졌답니다. 일단 전소작이나 마름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닙니까. 국토령의 보상은 땅의 주인과 그 땅을 실제로 이용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지, 그 중간에서 이익을 가로채는 자들을 위한 게 아닙니다. 아주 이치에 합당한 조치지요.”
다시 홍길도가 가시를 세우며 핀잔하니, 종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 화공의 아비가 흉작에 소작인들을 대신해서 소작료를 내주었고, 나중에 풍년이 들 때 받기로 했는데, 국토령으로 그게 붕 떠 버린 것이지요.”
“…….”
대략 억울한 면이 있음이 이해가 갔기에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면서까지 고할 정도로 억울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종도의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큰 손해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집안이 기울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후에도 그의 아비가 갈 곳 없는 소작인들을 추슬러 다시 전소작을 할 마음을 먹었다고 하니까요. 근데, 거기서 그의 아비가 실수한 게 애초에 나라의 땅을 받아 농사를 지으면 될 것을, 굳이 다른 자가 땅을 받은 것을 다시 빌려서 농사를 지으려 했답니다.”
“음, 어찌 그런…… 실제로 더 번거로운 일이 아닌가?”
“아무래도 평생 해 온 게 전소작인 만큼 더 번거로울지언정 더 익숙한 방법을 택한 것이겠지요. 한데, 그렇게 해서라도 농사를 잘하였으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그 땅의 주인이 농사 도중에 변심하여 그 땅에 황칠 나무를 심기로 했답니다. 그때가 마침 한여름이었다지요.”
토지의 이용권을 경매함에 있어 그 용도를 명백히 밝히고, 반드시 그에 따라 사용하도록 정해진 건 비교적 최근이었으니, 초창기에는 이용권을 얻은 땅 주인이 그 땅을 어디에 어떻게 쓰든 마음대로였다.
설령 한창 곡식이 익어 가는 땅을 뒤집어엎는다 하더라도.
“허, 재수도 참 없는 인사인 모양이군요.”
홍길도의 비아냥은 여전했지만, 그 정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예, 그렇지요. 한데, 불운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답니다. 다시 크게 손해를 본 그의 아비가 그다음에는 직접 토지를 얻어 소작인들을 거두고자 하였는데, 아무래도 손해를 연달아 본 뒤라 가진 재산이 많이 줄어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여, 그가 얻을 수 있는 작은 땅으로 그가 거느린 소작인들을 다 수용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하던 차에 본디 알고 있던 지주가 투자를 제안했답니다. 그가 돈을 더해서 필요한 만큼 땅을 얻고, 나중에 수확물을 그 비율대로 나누기로요. 그때는 문권으로 작성해서 나중에 뒤통수 맞지 않게 노력도 했다지요. 또, 그 지주가 화장의 아비보다 더 많은 돈을 내놓기도 했으니, 아무래도 크게 신뢰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다시 토지를 얻었는데, 이번에도 그 지주가 농토가 아닌 다른 사업에 그 토지를 쓰려 했답니다.”
“문권이 있다지 않았나.”
“그래서 그걸로 항의를 했는데, 그 지주가 자신은 돈이 없다면서 가져가려면 땅을 가져가라 했답니다. 해서, 관아에 찾아갔는데…….”
“불가능했겠군.”
“예. 30년간은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토지 이용권의 경매 시 그 시한도 정해지는데, 최소 단위가 30년이었다. 만약 합자(合資)로 이용권을 얻었다면 합자를 풀 수 없는 기간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사기의 냄새가 나는군.”
“화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명백히 사기입니다.”
어조가 완전히 달라진 홍길도가 종도를 향해 물었다.
“하면, 이후 그의 아비가 그 땅에서 비롯된 이문을 일부라도 얻었습니까?”
“저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 후에 그의 아비가 폭삭 망했고, 결국 실의 끝에 병을 얻어 죽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요. 한데, 어차피 계약서에 수확물을 나누기로 하였다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그 땅에서 한 건 돼지 사육이었답니다.”
“수확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곡식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비슷한 문제에 있어 생산하는 모든 것으로 확대해석한 판례가 있었습니다. 사기에 횡령도 포함되겠군요.”
몽주도 이맛살을 찌푸린 채 질문을 더하였다.
“내가 보기에 관아에 그 계약서를 보였다면, 적어도 관아에서 그 문제를 재판에 넘겼을 법한데…….”
“모든 관아의 관리들이 자비롭게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저하께서 이끄신 세태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종도의 대답에는 뼈가 담겨 있었으니, 그걸 느낀 몽주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주군,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화장의 말을 들어 그 문제에 대해 소상히 살핀 후 보고드리겠습니다.”
내관대신의 걱정에 몽주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왠지 느낌에 그 화장의 아비만 그런 일을 겪은 게 아닌 것 같네. 더 광범위하게 조사해 봐야겠어.”
몽주는 토지 이용권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 전수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그 조사는 짧은 기간 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해가 넘어가 세력 1년이 거의 다 지난 후에야 완료될 수 있었다.
다만, 일차적인 보고는 두 달 뒤에 있었으니, 진주 일대에 국한한 그 보고만으로도 몽주는 자신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육성하고 지원하고자 노력했던 자본이라는 놈의 본색이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으니,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고, 나름 대응하고 있다고 여겼던 자본의 시초축적(始初蓄積) 과정의 잔인함은 고려도 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몽주가 천몽을 끝내는 그날까지 저항해야 했던 가장 큰 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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