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13)
아마 회사령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고민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재상, 두신과 함께 그 문제를 두고 논의했으니, 흔히 그러하듯 그 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포함해서 아주 폭넓은 이야기로 흘러갔었다.
“최초의 자본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진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최초를 따지자면, 선사 시대를 넘어 현생 인류의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현대 자본주의의 실질적인 역사를 따져 보면 15, 16세기 농민들로부터 뽑아낸 거라는 게 일반적인 결론입니다. 아, 물론 유럽 기준이죠.”
“농민들로부터? 엔클로저?”
“예, 그게 대표적이죠. 농토를 바꿔 양목장으로 만들거나 공장을 짓고, 그 농토에서 일하던 농민들을 쫓아냈죠. 그렇게 농토에서 괴리된 농민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로 변했고, 자본가로 변한 지주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헐값에 사서 잉여 가치를 만들어 냈으니, 그 잉여 가치의 축적이 결국 최초의 자본이 된 것이죠. 즉, 농민들은 두 번 당한 거죠. 농민으로 한 번, 노동자로서도 한 번.”
“그거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 아닌가요?”
“주류 경제학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자본가의 경영자적인 역할을 강조하지만, 어쨌든 자본가가 신이 아닌 이상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는 없으니, 어디선가 끌어모아야 하고, 중세 말기 내지 초기 산업 사회에서 긁어모을 데는 아주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뭐, 현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죠. 주류 경제학이 착취라는 개념을 버리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 쳤지만, 결국은 불가능했고, 경제학 강의 중에도 최소 한 번은 꼭 쓸 수밖에 없죠.”
당시 몽주는 대학 시절 경제학 강의 중에서 착취라는 단어를 쓴 교수가 그 착취는 경제학적인 표현이자 용어로, 흔히 쓰이는 착취와 다르다는 걸 거듭 강조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근데, 정말 다른 것이었을까.
재상의 말대로 신이 아닌 이상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으니, 잉여 가치는 결국 그 가치를 생산한 누군가로부터 ‘빼앗는’ 것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떻게 포장해도 착취다운 착취일 뿐이다.
“우리 과 교수 중에 한 분이 공산주의를 아주 혐오하시는 분이셨는데, 그 양반이 경제사 강의 중에 그 착취를 두고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그 착취가 현대 사회를 이룩한 원동력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봐줄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하셨죠. 물론, 그 양반도 그 원동력을 골고루 부담하지 않고, 농민과 노동자들만 짊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이라면서 고칠 수 있다면 고쳐 보고 싶다고 했죠. 타임머신도 있어야 하고, 당시 지배층을 확 잡아 휘두를 수 있을 만큼의 권력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당할 수 있다면요. 어쨌든 자본주의가 수정된 역사가 바로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고전 자본주의의 차이점만큼 인류의 양심과 인정이 있음을 증명하는 거라고 했고요. 그러면서 당시 한창 기세등등했던 신자유주의를 두고, 인류가 뼈아픈 경험으로 얻은 반성을, 돈푼에 팔아먹는 양심도, 인정도 없는 새끼들이라고 강의 내내 욕을 해 댔는데…….”
두신의 말 중에 타임머신과 권력이라는 언급이 이후 천몽 속 몽주로 연결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누구도 몽주가 그 일을 해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타임머신 부분은 그렇다 쳐도, 몽주가 가진 권력이라 해 봐야(?) 탐라국을 조금 주무르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자본주의 초기 역사를 바꾸려면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적어도 자본주의의 본산이자, 천몽 속에서도 아주 높은 확률로 자본주의가 자생할, 아니, 이미 탄생하고 있을 유럽을 장악할 정도의 권력이 필요할 테니, 몽주가 가진 권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재상과 두신은, 몽주가 자본의 시초 축적에 개입하다가 자본의 형성 자체가 방해받게 되는 것을 우려하기도 했으니, 자본 형성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암만 몽주가 천몽 속에서 활약해도 그 후에 탐라국과 고려 가 전 세계적인 경쟁에서 뒤처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몽주는 물론, 재상과 두신도 천몽 속 고려의 자본주의는 그 초기 축적 과정이 현대의 과거에 있었던 피비린내 났던 초기 축적에 비해 훨씬 자비로울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기도 했다.
특히, 국토령을 통한 토지의 국유화는 자본의 초기 축적에서 무제한적인 인간의 이기심이 발현되는 주요한 수단을 제거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또 당시에는 없었지만, 농업 회사의 설립 계획도 있었으니, 농업 회사로 농부들을 흡수하면 그만큼 착취당할 농민들이 줄어드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분명 자본의 초기 축적 과정이 탐라국에서는 달랐다.
한순간에 아무런 보상이나 대책 없이 농토를 빼앗긴 농민은 없다 해도 무방했고, 자본 축적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노동자는 쫓겨난 농민이 아니라 늘어난 인구와 재구성된 산업 체계가 감당했다.
착취의 정도 또한 역사에 남겨진 실상에 비하면 분명 그 정도가 낮았을 것이다.
다만, 실수가 있었다면…….
‘그다음 과정을 생각지 않았다는 거지.’
다음 날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단청에 남아 현대에서 논의했던 걸 되짚고 있던 몽주는 전날 밤에 소동을 일으킨 화장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에 몸을 움직이면서 자신의 실수를 직시하였다.
아니, 실수라고 표현하는 건 너무 냉정한 평가였다.
어차피 자본의 초기 축적이라는 것 자체가 당대에 파악된 게 아니라, 훗날 그 과정이 다 지나고 난 뒤에 여러 천재들의 연구와 성찰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다.
아무리 현대적인 지식을 갖춘 몽주라고 해도, 세상을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이상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몽주와 같이 자본주의의 역사와 미래를 알고 대신 주의해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특히 국토령으로 지주들에게 지급된 보상이 거의 완료되기까지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은, 그 지주들이 확보한 보상금을 자본화하는 걸 관찰하고, 감시하기에 너무 긴 시간이었다.
다만, 그 지주들이 재산가로 남을 것이라 단정하고, 그들이 직접 자본가로 변신을 시도하리라 예견하지 못한 건 몽주의 실수에 가까웠다.
소규모의 자본가들이 서로 경쟁과 흡수를 통해 대형 자본가로 변신하는 과정의 ‘살풍경’은 상상해 본 바 있지만, 소자본가들이 그들이 미처 착취하지 못한 농민들을 그들의 무지와 부적응을 틈타 마저 착취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너무 오버하진 말자. 아직은 그저 화장의 아비가 사기당한 것에 불과하다.’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지는 걸 애써 막은 몽주는 단청에서 일하는 자의 안내를 받아 화장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종도가 먼저 와 있었다…… 기보다는 한참 전부터 있었던 모습이었다.
직후에 급한 발소리와 함께 홍길도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진주시청에 다녀온다더니, 때마침 돌아온 모양이었다.
몽주는 두 사람에게 각각 시선을 던져 인사를 대신하고, 곧바로 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희미한 눈꺼풀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가 누워 있었으니, 그의 왼손은 하얀 천으로 두껍게 감겨 있었다.
“어찌한 말마디를 전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잘랐는가. 내게 말을 붙이기 어려울 성싶으면, 단장을 통하면 될 것을…….”
몽주의 핀잔 어린 말이 전해지자, 화장의 눈꺼풀이 조금 더 올라갔고, 이어 그의 입술도 움직였다.
“제 말은 전할 수 있어도, 분기를 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을 절단하는 ‘쇼’가 있었던 덕에 몽주도 잠을 떨치고 사연을 파악하였으니, 아니었다면 깊이 듣기 전에 내관대신에게 대신 처리하라 명했을 수도 있었다.
“자네의 억울함은 내가 소상히 파악하라 명하였다. 이제 좀 분이 풀리는가?”
“세상에 억울한 사연이 어디 저와 제 가족뿐이겠습니까. 저로 인해 저하께서 세상을 보다 면밀히 살피신다면 그때는 분이 풀릴 것 같습니다.”
등 뒤에서 내관대신이 크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리니, 화장의 어조나 의미에 그의 주군에 대한 공경이 묻어 있지 않은 것이 몹시 불쾌한 모양이었다.
몽주는 화장에게 무어라 할 말을 입 안에 담았다가 도로 물렸다.
그의 사연으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을 깨달을 수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화장과 그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까진 없었다.
화장도 그의 아비와 가족이 겪은 것에 대한 억울함을 증폭시켜, 세상의 변화에서 낙오된 자들의 울분을 대변할 뿐이었을 것이다.
몽주는 잠시 화장의 손을 바라보다가 시야에 들어온 무언가로 시선을 옮겼다.
화장이 누운 침상 옆에 놓인 큰 가방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그 틈으로 그림의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이게 자네 그림인가? 좀 봐도 되겠지?”
손수 움직여 가방을 들추고 그림을 꺼내드니, 화장이 조금 동요하였는데, 아무리 그가 탐라공에게 불만이 많다고는 하나, 화장된 입장에서 탐라공이 그의 그림을 봐주니 부끄러우면서 기꺼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흠…….”
양손으로 화폭을 펼쳐 감상하니, 몽주의 입에서 절로 침음이 흘렀다.
흥미로운 그림이었다.
장정들에게 끌려가는 농부의 얼굴이 붉고 푸르고 누런 여러 색으로 겹겹이 칠해진 모습이 마치 야수파(野獸派)의 동양화적 변조처럼 느껴졌다.
그저 보이는 대로, 혹은 정해진 대로 그렸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그 그림은 그만큼 낯선 시야를 선사하였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광경과 풍경, 그 이상의 무언가를 연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네의 풍류가 제대로 담겼군.”
“…….”
몽주의 감상 아닌 감상에 화장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지만, 몽주는 그걸 보지 못했고, 그저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종도를 향해 말을 건넸다.
“기억하는가, 풍류가 무엇인지?”
“어찌 잊겠습니까. 그날 포구에서 들은 그 말씀에 제 좁은 시야를 깰 수 있었습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흥겨우면 흥겨운 대로…….”
“……노여우면 노여운 대로 그 흐름을 타는 것.”
몽주가 읊조려 시작한 말은 화장이 끝을 맺었다.
“음? 자네도 아는군. 자네가 말해 준 겐가?”
종도를 향해 물으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뿐만 아니라, 사롱의 모든 예인들이 한 번쯤은 들었을 겁니다. 열심히 전파하였지요.”
“허허.”
몽주가 조금 쑥스러운 웃음을 짓다가, 다시 그림을 훑은 뒤, 화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그림, 내가 사겠네.”
“예, 예?”
“값은 내가 알아서 쳐주지. 적진 않을 걸세. 한데, 자네 성명이 뭔가?”
“……화경이라 지어 쓰고 있습니다.”
듣고 보니, 그림의 귀퉁이에 ‘畵耕’이라는 글귀가 휘갈겨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림을 경작한다라. 좋군. 앞으로 기억해 두겠네. 부디 정진하게. 그나마 왼손 손가락이라 다행이군.”
“왼손잡이입니다.”
“…….”
본디 손도끼로 자신의 손목을 치려던 걸, 서툰 오른손으로 도끼질을 하다가 손가락만 자른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건 남은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어진 화경의 말에, 몽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곤, 그가 누워 있는 방을 나섰다.
“그 그림이 마음에 드십니까. 보기에 그저 거칠기만 한 그림 같습니다.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래서 마음에 드네. 내 집무실에 걸어 두면 볼 때마다 내가 세상을 면밀히 바라보고 있는지 지적해 주겠지. 아니, 아예 청사 입구에 걸어 둘까.”
“…….”
* * *
김자디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대면하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아니, 인사를 주고받는 건 상상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협상의 상대로 대면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연나라의 태자 주고치.
건장한 체격이 그의 아비를 꼭 닮은 모습을 한 이십 대 초반의 청년.
자디는 몰랐겠으나, 몽주가 봤다면 역사와 다른 면모에 꽤 흥미로웠을 인물이었다.
역사에서 주고치는 문무에 재능을 보였으나, 너무 뚱뚱해서 제위에 오를 무렵에는 홀로 거동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고, 당연히 건강도 몹시 좋지 않아 등극 1년 만에 사망했다.
한데, 지금 김자디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은 풍채가 좋은 그 모습이 건장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뚱뚱하다는 것과는 한참 먼 자였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못마땅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김자디는 어설픈 중국말로 얼른 부정하였다. 그리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태자라면 능히 연나라의 2인자라 할 만했고, 여전히 하급 관리에 불과한 김자디로서는 말을 나누는 것도 파격적인 상대였다.
다만,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정사를 앞세워 연왕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길 바란 것에 비하면 다소 격이 낮아진 경향이 있었다.
물론, 사신단의 정사가 연왕과 만나긴 했지만, 정사 이말국은 연왕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연왕도 이미 사신단의 사정을 파악한 듯 모든 것을 태자에게 맡겨 실무진과 협상하게 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 연나라는 묘한 상태입니다. 왕께서는 명나라에 한해서만 황제일 뿐, 다른 나라 특히 고려에 대해서는 왕이실 뿐이지요. 저 또한 태자라 불리나 제대로 된 태자는 아니고요.”
“……?”
김자디가 용건을 꺼내 들기 전에 문득 태자가 신세 한탄을 하듯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의 내용이야 잘 알려진 바였다. 연왕은 이미 건국 초기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천자의 의식을 치렀으나, 스스로 황제임을 밝히는 건 오직 적대하는 명나라를 대할 때뿐이고, 고려에 대해서는 예컨대, 고려와 주고받는 국서에는 연왕이라 낮추고 있었다.
외왕내제하는 것 이상으로 요상한 체제인 셈이었다.
그저 의아한 건, 연 태자가 왜 그 이야기를 뜬금없이 꺼내 들었느냐는 것이었다.
“고려가 따로 역법을 도입한다 들었습니다.”
“……!”
“그건 고려가 칭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요.”
김자디는 표정이 흔들리는 걸 간수하는 데 공을 들여야 했다.
그도 정말 최근에야 이판 영감을 통해 알게 된 일이었고, 요동국 관리들 대다수가 아직 모르는 일인데, 정작 연 태자가 이미 알고 있었다.
김자디는 모르는 척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악수인 듯하여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저희가 오늘 연을 방문한 것은 역법과 무관한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 우리로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요.”
“뭘 원하십니까.”
“일단은 그저 말씀만 전해 주십시오. 만약 고려가 칭제한다면, 우리 연나라 또한 황제국으로서 대우해 주길 바랍니다.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요. 더불어…….”
먼저 말한 바는, 김자디로서 가타부타 할 수는 없으나, 윗선에서도 분명 예상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라 보았다.
문제는 그 뒤에 나올 말이었다.
“본디 황가의 혼인은 같은 황가를 상대로 맞이하는 편이 보기 좋지 않겠습니까.”
“……!”
“물론, 저도 그렇고, 고려의 세자도 그렇고 이미 혼인하였으니, 일단은 아우들 중에 혼인할 이를 고르는 게 합당하겠지요. 다만, 차후에는 대통을 이을 자들이 혼인함으로써 양국의 정통성을 높인다면 서로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
아직 김자디는 그가 가진 용건을 꺼내지도 못했건만, 벌써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저 말을 전해 달라는 것이지만, 그 전하는 내용 자체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 일단, 정사께 고하여 논한 뒤,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가져온…….”
“무슨 말씀을 하시든 우리 연을 존중하신다면 응할 것이고, 아니라면 힘들 것입니다.”
“…….”
부스럭.
말을 잘라 답한 연 태자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듯 우뚝 선 태자는 그 체구나 생김새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지극히 온순한 미소를 김자디에게 보였고, 이어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떠났다.
“후우…….”
태자가 떠나자, 김자디는 한숨을 내쉬며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손에 장차 연나라의 철광석을 수입하여 요동국의 제철 산업을 일구는 방안이나, 산해관부터 서성까지 이어지는 가도의 건설 등 여러 제안이 담긴 문권이 허망하게 쥐어져 있었다.
엄연히 요동국에서도 충분히 철광석을 생산함에도, 요동국과 산업적인 관계를 깊게 하여 차후에 영향력을 행사하길 도모하는 계획이었으나, 김자디는 그에 관해 문권을 펼치지도, 입에 담지도 못한 것이다.
온갖 상황을 상상했지만, 설마하니 연나라가 이미 고려의 신역법 도입과 칭제 준비를 알고 있고, 그것을 빌미로 혼인을 강요할 줄은 전혀 예기치 못했다.
“그렇게 국혼을 맺고 싶으면, 왕도에 사신을 보내지, 왜 여기서…….”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이 김자디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사실 그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고려의 대사(大事)에 있어, 왕도의 의견보다는 요동국과 탐라국의 의사가 더 중요하니, 왕도가 원한다 해도 요동국과 탐라국이 반대하면 불가할 것이고, 왕도가 원치 않아도 요동국과 탐라국이 응하면 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동국이 뭔가 연나라에 바라는 게 있을 때, 그것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아 요동국이라도 일단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함이 연나라의 의도인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보기에 연나라와 고려의 국혼을 왕도도 꺼려 할 것이고, 무엇보다 탐라공이 반대할 것 같다는 점에 있었다.
연나라와 국혼을 맺는다면, 일단 정통성이 부족한 정도를 넘어 아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고려 ‘황제’의 지위에 국외의 인정이 일말이라도 더해지는 만큼 약간의 정통성이 생기긴 할 것이다.
하나, 대신 황실 자체의 정통성은 그만큼 약화될 것이고, 특히 원나라 부마국이던 시절의 기억을 가진 고려 백성 사이에 좋은 이야기가 나돌 리가 없었다.
그가 알기에 애초부터 고려의 역사에서, 아니, 전조의 역사를 포함해서 왕실이 고려의 밖과 국혼을 맺은 전례 자체가 없었으니, 다 포함해서 따지면 오히려 정통성이 떨어지는 일일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 자칫 탐라국에서 요동국이 북방의 제국들을 포섭하려 함을 눈치챌 수도 있다는 점이 걱정스러웠다.
부스럭.
김자디는 기운 빠진 자세를 고쳐 몸을 일으켰다.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의 막중한 무게감을 절감하는 순간이었고, 그 자리에 임하기에 아직 자신의 능력과 지위가 형편없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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