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20)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라.”
“왜 말이 안 돼? 그건 기원전에도 해냈거든?”
“그래서 기원전에 만든 게 지금 있을 것 같냐? 없거든. 왜? 돈이 안 되니까. 유지, 보수하는 비용도 안 나오니 그냥 버려진 거지.”
“버려지긴 했겠지만, 그게 경제적인 이유는 아닐 거다. 그냥 그 지역의 혼란이 극심한 탓에 무방비가 되었고, 이제는 다시 복구하려고 해도 새로 만드는 거나 다름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을 뿐이지.”
“그래, 잘 아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거긴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만든다 쳐도 언제 혼란으로 인해 쓸 수 없어질지 모르는 곳이지. 게다가 경제적인 유인도 확신할 수 없는데, 고려가 그 먼 곳에까지 가서 그걸 만들 이유가 없어.”
“아니, 내가 보기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오스만 튀르크를 잘 이용하면 그곳을 고려의 소유로 만들 수도 있을 거야. 상해항처럼 말이지. 게다가 이제는 예전에 없던 엄청난 경제적인 유인이 생길 거라는 게 중요해. 생각해 봐라. 성사만 되면, 고려는 아마 천 년 동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점을 지나서까지 쭈욱 달콤한 꿀을 빨 수 있게 되는 거라고.”
“요새 몽주 씨가 잘 나가니까, 네가 아주 망상에 빠졌구나. 네 말대로 경제적 유인이 생기면 더 난장판이 될 곳이야.”
재상이 두신을 향해 혀를 쯔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두신이 발끈하려 하였는데, 그 직전에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몽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저 왔습니다…… 근데 두 분 싸우셨어요, 또 무슨 일로?”
“그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신이 답하려 했지만, 재상이 그 말을 막으며 눈짓을 주었다.
“대체 뭔데 그래요?”
“아직 말씀 드릴 만한 건수가 아닙니다. 더 연구해 보고 조사해서 가능성이 보이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려 봐야 괜히 이사님 정신만 사납게 할 겁니다. 어차피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
몽주는 좀 더 궁금해졌지만, 재상이 정중하게 말하고, 두신도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더는 채근하기가 곤란해졌다.
“뭐, 알겠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준비가 되면 말해 주십시오.”
재상이 말한 대로 이미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은 탓에 몽주는 궁금한 걸 묻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천몽 속 이야기 전에 이것부터 어찌해야 할지 애매하네요.”
“아, 그 방송요?”
“예. 일이 꽤 커졌어요. DBS 측에서 아예 창사 특집으로 시작해서 반응 괜찮으면 시즌제로 해 보고 싶다는 모양이에요.”
몽주가 말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펼치니,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뭐, 어차피 방송국에서 연예인이나 셀럽들 데려다가 알아서 지지고 볶는 거 아닌가요? 몽린 재단은 그냥 배나 빌려 주고 마는 거잖아요?”
“처음엔 그랬는데, 방송국 측에서 우리 재단 직원들을 상대편으로 등장시켜 주길 바라고 있어요.”
“상대편? 아, 일레븐의 상대?”
“예.”
배만 대여해 주는 선에서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은 논의와 투자가 진척되면서 상당히 대형화되었다.
11명의 연예인 및 유명인들이 출연하는데 예상보다 거물들이 많았다.
투자도 많아졌지만, 비용도 늘어나 버리는 바람에 방송국 측에서 고민 끝에 양진이호 외에 어미새호도 대여하되, 재단 사원들을 ‘해적’으로 출연시켜 주길 요청하였다.
“귀찮으면 그냥 안 한다고 해요.”
“그러려고 했는데, 방 이사가 만류하더군요. 방송국과 척을 지면 곤란하다고요.”
“…….”
그 말 직후에 세 사람 사이에 시선이 얽혔다.
사실 방송국이라는 집단이 무섭긴 하지만, 어차피 천몽이 끝나는 순간에 완전히 세상이 변해 버린다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다만, 동시에 정말 천몽이 끝나는 그 순간에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 그저 또 다른 세상이 생겨나고 그들은 그들의 세상과 인생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일 수도 있으니, 생각이 복잡해졌던 것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사실 재단 직원들 중에 혹해서 출연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래요? 연예인 보고 싶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중에는 심심해서 그런 친구도 있는 것 같아요.”
“심심? 하긴, 요새 좀 재단이 할 일이 좀 없었죠.”
두신이 인정한 것처럼 그런 경향이 있었다.
대형 범선의 건조 후 뱃밥을 이유로 출항을 하지 않았으니, 기본적으로 바당보름 출신들이 많은 직원들의 사기가 다소 저하되었다.
물론, 이제 천몽 속에서 아직 적은 양이나마 고무를 구할 수 있게 된 만큼 대형 범선의 시험 운항을 시작할 수 있지만, 그럴 거면 하는 김에 오션스 일레븐 제작에 협조하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 협조하면 되죠.”
“혹시 그게 우리 재단이 괜히 시선을 받는 계기가 되진 않겠죠?”
“시선 받는 게 꺼려지십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우리가 하는 일이 알려질 가능성은 없지만, 재단이 하는 일을 보고 돈이 많은가 보다 하고 날파리들이 모여들 수는 있잖아요.”
“에이, 뭐, 그거야 지금도 그렇잖아요. 더 심해지진 않을 것 같은데요.”
이미 다큐멘터리를 통해 몽린 재단이 방송을 탄 경험이 있었고, 그 뒤로 정체모를 여러 단체에서 기부와 투자를 요구하는 연락이 오고 있었다.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방지영 이사가 다 알아서 처리하고 있는데, 특별히 회계상에 돈이 더 나가는 일이 없는 걸 보면, 철저하게 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겠죠?”
“예, 이사장님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저희는 그냥 새 세상 만드는 일에나 집중하죠.”
재상이 내린 결론이 곧 몽주의 결론이 되었다.
그리고 말마따나 천몽 속 세상에 집중하였으니, 여러 이야기들 중에 할릴 술탄이 주제인 대화는 거의 마지막쯤에 가볍게 거론되었다.
“근데, 얘는 왜 고려까지 온 거죠? 역사대로라면 지금쯤 인도 원정에 참여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역사에서 서기 1401년경에 티무르조는 인도 북서부를 공략하고 있었다.
“원정이 조금 늦어졌을 수도 있죠. 그래서 할릴이 길을 나설 때는 아직 인도 원정의 준비도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아무리 천방지축(?) 같은 티무르라도 원정을 몇 달 전에 결정할 리는 없겠지만, 그 결정이 공개적인 논의의 주제가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생각하면 할릴은 인도 원정을 모른 채 석상을 찾아 나선 것일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티무르의 인도 원정이 역사보다 늦어졌다면 말이다.
“근데, 이러면 할릴이 티무르조의 왕이 될 가능성이 많이 낮아지는데…….”
“그래요?”
“예, 할릴의 아버지 미란 샤가 티무르의 용서를 받아, 그의 측근과 친구들을 제거하는 정도의 벌만 받고 넘어간 건 할릴이 인도 원정에서 활약한 덕이었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사료가 부족하긴 하지만, 할릴이 인도 원정 이후에 페르가나 지방을 봉분 받은 걸 생각하면 그가 공을 세운 건 분명하고, 시간적 선후 관계를 생각하면 미란 샤가 용서를 받은 것에도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두신의 추정이 맞다면, 확실히 할릴이 티무르 왕조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고려에 있으면 안 된다.
그가 인도 원정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면 그의 아비도 더 큰 벌을 받아 숙청될 수 있고, 그러면 할릴이 티무르 사후에 권력을 쥘 가망이 없어질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그의 아비와 함께 숙청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럼, 별로 쓸모가 없네요?”
“무슨 쓸모를 생각하셨는데요?”
“혹시 그놈을 잘 구슬리고 티무르 왕조를 쥘 수 있게 도와서, 차후에 티무르 왕국을 친고려파로 만들면 어떨까 정도는 생각해 봤죠.”
“그게 될까요?”
재상이나 두신이나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뭐, 저도 그냥 혹시나 싶어 생각해 본 거예요. 다만, 할릴과 두 번째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 나온 말을 보면, 적어도 그가 티무르의 환심을 사게 도울 수는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요?”
“탐라에서 생산하는 거울 몇 장이 거기까지 흘러간 모양인데, 티무르 마음에 쏙 들었나 봐요. 술 마시고 황금 거울로 궁전을 도배하고 싶다는 식의 말을 많이 했대나 뭐래나. 어쨌든 같은 소리를 여러 번했다면 취중진담이라고 봐야겠죠.”
황금 거울은 탐라산 거울 중 금도금을 반사재로 사용한 고급 거울이었다.
역사에 남은 기록으로 티무르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만큼, 사람의 외모를 한결 수려하고 따뜻하게 비춰 주는 탐라의 고급 거울이 크게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거울로 티무르를 꾀는 게 가능할까요?”
“티무르가 수집욕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티무르는 정복한 땅을 지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 그곳에 있는 보물을 모조리 털어서 사마르칸트와 그의 궁정에 모아두는 데 열중했다.
“사실 아니면 말고죠. 말했듯이 저도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서 할릴을 잡은 건 아니에요. 티무르 왕국까지 갈 길도 멀고, 해 볼 거 해 보다가 안 되면 그냥 포기하면 그만이기도 하고요.”
티무르가 인도 전역을, 그러니까 인도 아대륙의 남부까지 석권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모를까, 오늘날의 이란부터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 정도가 남쪽 영토의 전부라면 없는 셈 쳐도 상관없었다.
바닷길은 페르시아만 대신 인도 남부에서 곧바로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 이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티무르 왕국은 정복자 티무르가 죽은 뒤로는 계속 침체하다가 결국 사라졌고, 티무르 왕국의 체제 자체가 바뀌는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건 천몽 속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지역에서 뭔가를 획책하고자 한다면, 차라리 훗날 무굴제국의 발흥을 노리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그건 몽주의 천몽 속 생애 내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왠지 아까운데요? 일단 잡았으니, 뭐라도 가르쳐 보시죠.”
“가르친다고요?”
“예, 잡아 두고 고려말이랑 한글도 알려 주고, 나중에 인도 쪽으로 갈 때 데려가세요. 하다못해 통역이라도 시킬 수 있잖아요.”
“음…….”
사실 몽주는 할릴의 소용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지만, 그의 처분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를 가까운 시일 안에 방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를 통해 티무르조와 그 주변의 정보를 캐낼 예정으로, 그 과정이 아주 평안하지는 않을 것이니, 돌려보내 봐야 좋지 않은 이야기만 전해질 게 뻔했다.
물론, 그에 티무르가 격노할지는 의문이고, 격노한다고 해도 티무르가 고려를 어찌할 방법은 없지만, 굳이 분노를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단 할릴을 좀 털어 보고, 다시 생각해 볼게요. 털다 보면 달리 쓰임새가 보일 수도 있겠죠.”
할릴에 대한 이야기가 대략 마무리되자, 회의는 파장 분위기로 변했다.
한데, 다들 일어서려는 참에 두신이 문득 생각난 양 물음을 던졌다.
“근데 열기 기관은 계속 만들고 있는 건가요?”
“예. 목철선 만들 때 동력원으로 써본다고 하더군요.”
“예? 목철선에 엔진을 달려고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배 지을 때, 무거운 걸 들고 내리는 데에 쓴다고요. 기중기에 말이에요. 인력이나 축력 대신에.”
“아…… 음, 왠지 아쉬운데요?”
두신이 진짜 아쉬운 양 입맛을 쩝쩝대자, 재상이 웃음과 함께 말을 받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거기 장인들도 머리가 있는데, 오토바이나 자동차 정도는 알아서 생각할 수도 있잖아?”
몽주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 겨우 4마력 정도예요.”
“작은 스쿠터는 가능하잖아요.”
“어휴, 기관 크기만 해도 커다란 수레에 한가득입니다. 이거 두 배는 된다고요.”
몽주는 양팔을 활짝 펴서 열기 기관의 크기를 표현하였다. 다만, 그건 열기 기관의 길이에 맞춘 말로, 두 개의 큰 실린더가 결합된 형태인 열기 기관의 전체적인 부피는 그 정도로 크진 않았다.
그러나 길이든, 부피든, 혹은 무게든, 몽주가 보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차량의 동력원으로 쓰이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다.
“우리 장인들이 똑똑한 만큼,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은 할 겁니다.”
몽주는 자신 있게 장담하였다.
* * *
“덕진아,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괜한 짓을 하는 것 같구나.”
“아버지, 여기까지 와서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탐라공께서 분명히 반가워하실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한 짓이 따지고 보면 횡령이 아니냐.”
“횡령은 무슨 횡령이에요. 우리가 우리 편하자고 써 버린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군기시에서는 권위를 좀 세울 수 있는 철장보였지만, 아들과 함께 공택으로 가는 길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후회가 가득했다.
아들의 착안에 솔깃해서 열기 기관을 생산하고 개량하는 데 써야 하는 자재를 함부로 쓴 자신의 짓거리가 후회스러웠던 것이다.
“우리가 만든 것도 결국 열기 기관의 개량과 소용을 위한 거예요. 제 말을 믿으세요. 절대 큰일은 없을 거예요.”
덕진은 아버지를 달래고는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리고 공택 아래 언덕길을 오르기 직전, 저 멀리 문 앞에 있는 호위군병이 그들을 주시하는 걸 느낀 덕진도 크게 호흡하며 긴장감을 떨치려 하였다.
그의 아비와 달리, 그들이 한 일에 후회나 걱정은 없었지만, 탐라공을 알현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긴장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따져 보면, 계통상 공관대신이나 그 아래 관리에게 보고하여 탐라공께 소식을 전함이 마땅하지만, 지난날 열기 기관의 성공 때, 탐라공께서 필요한 일이 있다면 직접 와서 청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고 공택을 방문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누구시오?!”
공택의 정문 앞 10미 앞까지 가자,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호위군병들 중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제법 사납게 물었다.
덕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답하였다.
“나는 군기시 을급 장인 철덕진이고, 이분은 내 아비이자, 군기시 갑급 장인 철장보시오.”
“무슨 일로 예까지 오신 게요?”
“탐라공 저하께 고할 게 있어서 왔소. 저하께서 언제든 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와도 좋다 하셨소.”
호위군병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자신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는 사이, 덕진은 혹여나 그 증거를 내놓으라 할까 걱정하였다.
사실 탐라공께서 말씀은 그리하셨지만, 그렇다고 언제든 만나 주겠다는 문권이나 다른 상징 같은 걸 주신 건 아니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비서원에 연락해 보겠소.”
‘후우…….’
다행히 말도 전하지 못하고 내쳐지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리고 더욱 다행스러운 건 반각도 되지 않아 방문의 허락이 떨어져 공택의 대문이 열린 것이었다.
‘첫 고비는 넘…… 아니구나. 이제 시작이로구나.’
덕진은 점점 더 격하게 몸을 떠는 아버지를 부축하며, 안내를 위해 온 비서원 관리의 뒤를 따라 공택 깊은 곳으로 걸음하였다.
* * *
“수레? 수레라 하였나?”
공소에서 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탐라공을 집무실에 알현한 덕진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답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수레입니다. 열기 기관으로 움직이는 수레입죠.”
“대체 어떻게 그걸 만들었지? 시간은 얼마나 걸렸고? 아니, 그보다 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한 거지?”
탐라공이 연달아 질문을 쏟아 내자, 덕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아버지가 걱정하던 게 사실로 드러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차, 내가 너무 추궁하듯 말하였군.’
답답한 표정으로 덕진이 답하지 못하는 걸 보던 몽주는 그제야 지금 자신의 모습이 마치 화난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당연히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너무 놀라서 그랬을 뿐이었다.
“자, 나도 그렇고, 자네들도 그렇고 좀 진정하지. 이보게, 여기 물 좀 가져다주게.”
몽주는 비서를 시켜 물을 가져오게 하고, 그들을 의자에 앉게 하여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렇게 얼마간 달랜 뒤, 차근히 하나씩 궁금한 걸 물었는데, 물어서 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함은 더욱 커졌다.
“이거야 원, 안 되겠군. 다들 일어나게.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신 부관, 탁 대신에게는 한 시진 후에 내가 부르겠노라 전하게.”
몽주는 예정된 일과까지 미루고, 두 장인들을 앞세워 군기시의 공소로 향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는 뻔하지만, 어쨌든 공소에 가니, 이미 장인들이 대기한 채 몽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탐라공 저하를 뵙습니다.”
몽주는 평소와 달리 장인들의 인사를 대충 받고는 이미 한 곳에 박힌 시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게 말씀드린 그 수레입니다.”
한층 안정된 말투로 철장보가 말하였다.
“그래, 이게 그거군. 그거야.”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거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미리 준비한 양 공소 앞에 떡하니 놓여 있는 그건, 구석에 놓아 두었어도 몽주가 바로 알아차릴 만한 모습이었다.
‘삼발이 자동차인 셈인가.’
흔히 쓰이는 큰 수레를 뒤로 더 길게 개조한 그 수레는 바퀴가 3개였다.
다만, 현대 5, 60년대의 삼발이 자동차와 달리 그 수레는 뒤쪽에 외바퀴가 달려 있었고, 대충 봐도 구동축이 연결된 바퀴도 그 외바퀴였다.
‘디퍼런셜 기어까지 구현했으면 기절하려 했더니, 그건 모면했군.’
양 바퀴에 동력을 차등으로 분배하는 디퍼런셜 기어(differential gear)의 원리를 모르니, 자연히 외바퀴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몽주는 수레를 더욱 뜯어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닥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며 상하좌우를 살폈다.
‘이거 진짜 움직이기는 하는 걸까.’
당연하지만, 유치한 수준의 변속 기어도 없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열기 기관처럼, 분리된 톱니바퀴를 통해 넣고 빼는 식으로, 동력을 연결했다 끊었다 하는 수준이었다.
기관의 힘이 약하고 회전이 느린 덕에 가능한 방법으로, 1단 기어만 있는 셈이라는 표현도 사치였다.
“이게 진짜 움직이는가?”
“예!”
장보를 향해 물으니, 대답만은 확실했다.
“좋아. 내가 한번 몰아 보지.”
“예, 예?!”
몽주가 소매를 걷으며 나서자, 장보는 물론 덕진이나 함께 온 비서원 관리도 크게 놀라 만류하였다.
“어허, 어찌 이러는 겐가? 이보게, 장보!”
“예, 저하!”
“자네는 이걸 몰아 보았나?”
“물론입니다.”
“그때 무슨 위험이라도 있었나?”
“아, 아닙니다. 없었습니다.”
“하면, 내가 몰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몽주가 고집을 피우니,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하여, 몽주가 수레 앞에 달려 있는 좌석에 오르자, 덕진이 수레를 움직이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사실 굳이 설명은 필요 없었다.
너무나 간단한 구조에 딱히 가려진 부분도 없이 다 드러나 있어 이미 파악은 얼추 끝난 상태였다.
“한데, 시동은 어찌하는가?”
예열이 끝나 시작할 참에 몽주가 궁금해 물으니, 덕진이 자신들이 할 것이라 답하였다.
하여, 어찌하나 지켜보니, 지난번에 보았던 열기 기관이 그러했듯 관성 바퀴를 돌려 열기 기관을 가동한 뒤, 몇몇 장인들이 수레의 뒤를 밀기 시작했다.
“…….”
그 미는 힘에 수레가 앞으로 나가자, 어느 순간 덕진이 힘껏 외쳤다.
“저하, 치차 손잡이를 당겨 주십시오!”
잠시 설마 사람이 밀어야 움직이는 건가 싶어 멍하던 몽주는 그 외침에 좌석 오른쪽에 튀어나온 쇠막대로 된 손잡이를 힘껏 당겼다.
끼이, 꽈각!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고, 동시에 손잡이를 통해 몽주의 손아귀에도 충격이 전해졌다.
그건 열기 기관과 외바퀴의 축이 톱니바퀴로 연결되는 소음과 충격이었다.
몽주는 당긴 손잡이를 고정 고리에 걸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레를 밀던 사내들이 그대로 서 있었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수레가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성인이 걷는 속도보다 빠르다고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천천히.
현대에서 애들이 타는 장난감 자동차보다도 느릴 것 같았다.
몽주는 미소를 띤 채 그의 무릎 앞에 솟아 있는 또 다른 쇠막대를 손으로 쥐었다.
그걸 왼쪽으로, 제법 힘을 주어 미니 수레의 방향이 왼쪽으로 조금 틀어졌다.
다시 반대로 오른쪽으로 미니, 수레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변하였다.
역시나 아주 간단한 구조.
두 개씩 길고 짧은 네 개의 축으로 직사각형을 만든 후에 긴 축 하나를 수레에 고정하고, 나머지 긴 축을 손잡이에 연결하고, 짧은 축에 바퀴를 달아 놓은 것이었다.
그저 손잡이 방향과 바퀴의 방향이 일치하도록 손잡이와 긴축 사이에 굴절축을 하나 더 달아 놓은 게 그나마 뭔가 기계스러운 전부였다.
“크흐흐…….”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수레 위에서 몽주는 웃음을 흘렸다.
열기 기관의 덜커덩거리는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고, 외바퀴는 가끔 바닥에 헛바퀴를 도는지, 안 그래도 느린 수레가 종종 더 느려졌다.
현대의 자동차를 생각하면 왠지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하나, 정작 몽주의 기분은 전혀 달랐다.
‘조, 존나 좋군!’
당대에서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표현이었으나, 몽주의 기분은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몽주는 15세기의 첫 번째 해에 자동차를 몰고 있었다.
“하하하!”
어느 순간 폭소로 변한 몽주의 웃음에 주변에서 우려와 기대를 품은 채 지켜보고 있던 여러 사람들도 함께 미소를 보였다.
몽주는 이리저리 수레를 몰다가 어느 순간 멀리 석양이 지는 쪽으로 수레의 방향을 고정시켰다.
예전에, 그러니까 첫 천몽에서 처음 말을 타고 달렸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하루 내내 고생하다가 몸의 주인이 가진 실력을 빠르게 흡수하여 석양이 질 무렵에는 제법 날래게 말을 몰 수 있게 되었던 기억.
그 당시, 해냈다는 쾌감을 석양의 아름다음으로 자축했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몽주가 직접 그 수레를 만든 건 아니었지만, 최초의 자동차를 알아서 만들 수 있는 세상을 일구었으니, 그 쾌감은 첫 천몽 속 승마의 쾌감에 못지않……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근데 이러다가 말년에 교통 체증이 생기는 건 아닐까.’
최초의 자동차가 무엇인지는 분분하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자동차는 18세기 중후반에 프랑스의 어느 장교가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백 년이 지나 19세기 중후반의 뉴욕은 자동차와 마차가 뒤섞인 교통 체증에 시달렸다.
몽주가 조금 신경 쓴다면, 정말 그의 천몽 속 삶이 끝나기 전에 거리에 자동차를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몽주는 작은 공포도 맛보았다.
너무 빠른 기술적 진보 자체도 다소 걱정이었고, 기술적 진보가 숙성되지 못한 사회와 만나 일으킨 재앙의 역사야말로 그 작은 공포의 근원이었다.
하나, 그건 말 그대로 작은 공포였다. 지금은 그냥 좋아해도 될 때였다.
“하하하, 이거 참 재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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