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21)
* * *
“아무래도 명나라는 아예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입니다.”
“그쪽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겠지요.”
이제 사시 정각에 불과했지만, 벌써 네 번째로 탐라공을 찾아온 관리인 포은은 몽주가 장계를 훑는 중에 고려의 칭제 선언과 역법 도입에 대한 명나라의 반응에 대해 구설로 보고하였다.
“괜히 항의하러 와 봐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말다툼하다가 진짜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명나라로서는 피하고 싶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처음에 모른 척하면서 태왕 폐하를 묵인하는 쪽으로 넘어가면 다행이지만, 일단 인내하고 나중에 힘을 모아 대적하려 할 수도 있으니, 방심해서는 안 될 겁니다.”
“명심하지요.”
입으로는 포은과 대화를 하면서, 눈으로는 외관부의 장계를 훑던 몽주가 수결로 결제한 뒤, 장계를 포은에게 넘겨주었다.
“한데, 들리기로 요새 군기청 공소에 자주 가신다더군요.”
묻는 투가 몽주가 공소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몽주는 그 ‘수레’에 대해서 철저하게 비밀 엄수하도록 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원래도 모든 작업이 군기청과 탐라공 외에는 비밀로 처리되는 곳인데, 몽주가 새삼 비밀 유지를 강조한 만큼 외관대신 포은조차도 군기청 공소에 하는 일에 대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재밌는 일이 있지요. 그래서 나도 자주 가 보는 거고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군께서 즐거워하시니, 분명 기쁜 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나중에 좀 더 명확한 성과가 나오면 그때 다 함께 즐기시지요.”
몽주가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을 밝힐 생각이 없음을 눈치챈 포은은 더 캐묻지 않았다.
포은이 물은 대로 몽주는 최근에 군기청 공소를 자주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자동 수레’ 때문으로, 그 느리디느린 수레를 손수 조종해 보고, 그 개량에 대해 공소 장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 것이다.
뜬금없이 등장한 ‘자동차’였고, 그로 인해 온갖 상상과 망상을 다 하였지만, 사실 그 수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수준이었다, 당장은.
성인 남성 둘이 올라가면 움직이기 어렵고, 조금만 경사가 진 곳도 오르지 못하는 자동차가 어디 제대로 된 자동차일까.
하여, 너무 ‘천기’를 누설하지 않는 선에서, 여러모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은근히 전했는데, 사실 가까운 시일 안에 그 수레가 자동차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는 열기 기관이 근본적으로 가지는 한계 탓으로 토크(Torque), 즉 축을 회전시키는 물리량 자체가 워낙에 낮기 때문이었다.
공소에서 쓰는 용도로는 관성 바퀴를 커다란 걸 장착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긴 하지만, 자동차용 열기 기관에는 해결책일 수 없었다.
열기 기관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다른 해결책도 당장은 마땅치 않았다.
무작정 기관의 크기를 키워 열기 기관 내부의 유체량을 증가시키는 방법같이, 역시나 자동차라는 소용처를 생각할 때 선택할 수 없는 방법을 제외하면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열기 기관 내부에 공기를 압축 주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열기 기관을 발전기로 쓰면서 따로 ‘모터’를 동력원으로 쓰는 것이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당대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열기 기관 내부에 공기를 압축 주입하는 건, 그것이 두 배, 세 배 수준이 아니라 최소 수십 배, 증기 기관이나 내연 기관과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아마 수백 배로 압축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탐라국의 공업력 자체가 한두 단계는 성장해야 가능할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인 ‘모터’를 사용하는 게 그나마 더 가까운 시간 안에 가능한 방법이고, 장기적으로 더 각광받을 방법이겠지만, 모터 역시 언제 개발이 가능할지 알 수 없고, 모터 자체도 충분한 힘을 낼 정도로 발전시켜야 하는 만큼 결국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런 한계가 분명히 보임에도 몽주가 공소에 자주 찾아간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재밌으니까.’
힘이 부족하든 아니든, 그 ‘수레’를 모는 게 재밌고, 그 ‘수레’를 조금이나마 ‘자동차’스럽게 만드는 것도 재밌었다.
몽주가 빙그레 웃고 있자, 그 웃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미소를 짓던 포은이 문득 표정을 정돈하곤 새로운 주제를 입에 담았다.
“한데, 정녕 고려사 집필진을 파견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예. 우리 탐라에서도 파견하지 않을 것이고, 요동국에도 파견하지 말라 요청할 생각입니다.”
몽주의 대답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포은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정재, 그자는 훌륭한 학자이나, 그 학업이 유학에 국한되어 있는 자입니다. 배운 바가 오로지 그뿐이니, 그가 쓰는 고려사 또한 유자의 시선으로 지어질 것입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포은이 물으며, 주군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하였다.
그가 보기에 왕국에서 제국으로 전환하는 고려를 일단락하는 과업으로서 왕국 고려의 역사를 반추하는 그 작업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포은이 언급한 정재(貞齋)라는 자는 황도의 내수총랑 박의중(內需摠郞 朴宜中)으로, 직위만 보자면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소의 수장이지만, 대헌장 체제하의 고려에서는 황제의 승상이요, 호조판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색 문하 출신의 유자로, 포은과는 동갑내기이기도 했다.
“고려사의 집전은 태왕의 몫입니다. 제후가 개입할 이유도 없고, 해서도 아니 될 일이지요.”
“개입이라고 할 것까지야…… 어차피 황실에서 먼저 청한 것 아닙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고려사 집전에 대해 황실의 전갈에는 만약 고려사 집전에 참여하길 바란다면 미리 말하라는 식의 내용이 있었다.
“그게 어디 요청이겠습니까. 그저 당금의 고려 상황에서 황실이 나나 요동공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냥 해 본 소리지요.”
“그래도…….”
“포은 선생, 제가 황실의 고려사 집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습니다.”
“……?”
“역사는 우리가 더 많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황실의 역사에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몽주가 언급한 역사는 중의적이었다.
하나는 역사서로서의 역사이니, 소학교, 기술학교, 고학교에 걸쳐 3종의 역사 교과서가 몇 년마다 편찬 중이었고, 최근에는 사인이 지은 역사서 또한 발행되어 팔리고 있어, 그 면모가 규모만 다를 뿐, 현대와 비슷했다.
그러니 황실에서 한 질의 역사서를 펴낸다고 해도, 황실이라는 ‘브랜드’ 덕에 더 각광받을 수도 있겠지만,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다.
사실 질적으로도 몽주가 예상하기에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황실의 역사서는 아마 고전적인 형식, 기년체니, 기전체니 하는 방식으로 기술될 것인 바, 이미 상당히 자유로운 형식으로 만든 역사서에 익숙한 탐라국 학생과 백성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하여, 몽주는 황실의 고려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마 사료적인 가치만 남을 것이라 여겼으니, 그 정도라면 황실만의 생각을 담는 것을 어느 정도 존중해 줘도 되겠다 싶은 것이었다.
더불어 역사서가 아닌 ‘History’ 그 자체로서의 역사에서 이미 고려의 역사를 주도하는 주체 중 황실은 그 자리가 없었다.
오히려 제후국들이 고려의 역사를 주도하고 있고, 그중 탐라국이 최선두에 있으니, 황실의 고려사 중에 당금의 사정에 대해 기술함에 있어 그 입장이란 수동적이고 관찰자적인 수준에 머물 것이 분명했다.
또, 아무리 황실의 내소총랑이 유학적인 잣대로 평하려 해도, 그가 홀로 고려사를 지을 리도 없고, 황실의 감수도 통과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후국을 비방하거나 오해를 살 만한 내용에 대해 황실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게 당금의 고려라는 뜻이기도 했다.
몽주의 말을 들은 포은은 잠시의 생각 끝에 그 의미를 깨닫고는 더는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으니, 황실의 고려사 집필에 관해 몽주가 언급한 것은 그것이 끝이었다.
실제로 황실이 편찬한 고려사가 발간된 것은 2년 후였으니, 박의중 외 7명이 필진으로 참여한 그 사서의 제목은 ‘고려사 중요(高麗史 中要)’로, 고려의 역사의 중간에서 지난날의 주요한 사정을 살핀다는 의미였다.
훗날에는 그 본연의 제목이 아예 ‘왕국 고려사’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기년체 형식, 즉 연대기적인 형식으로 편찬된 왕국 고려사는 당대보다는 오히려 후대에 더 많이 읽히고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대헌장 체제 전후의 내용에 있어, 기계적인 중립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되어 고려 황실의 입장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탐라공의 활약상이 당대인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탐라공이 일개 산원 시절에 요동성 수성전에서의 활약상으로 잘 알려진 정방의 화룡 ‘에피소드’가 대표적이었다.
– 화룡이 난입하여 횡포를 부림에, 성을 범한 무수한 적병들 중 불에 타지 않은 자들이 없더라.
* * *
몽주가 할릴을 다시 보게 된 건 그를 데리고 탐라섬으로 돌아온 지 거의 두 달 가까이 지난 뒤였다.
그와 그의 일행들, 그리고 낙타들까지 모두 탐라섬으로 옮겨 와 있었고, 옥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정해진 거처에 계류되어 있어야 했다.
할릴이 가져온 낙타들 스무 마리가량은 탐라섬에 오기 전에 죽고 말았다.
이미 고려로 오는 중에 추위를 못 이겨 죽은 낙타들이 적지 않았는데, 즉위식 이튿날부터 몰려온 한파로 인해 떼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나름 좋은 마구간을 내주고 불도 피워 주었지만, 사막 기후에 걸맞게 진화된 동물에게는 잔혹한 환경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가엽게 여긴 태왕이 탐라공에게 할릴 일행을 데려갈 때, 낙타들도 데려가라고 하였으니, 탐라섬이 고려 본토 중에서 가장 남쪽이기 때문이었다.
남쪽이라고 해도 탐라섬도 겨울에 춥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다르긴 한 모양인지, 탐라섬에 도착한 단봉낙타들은 더는 추위에 죽지 않고 있었다.
참고로 낙타들의 관리는 태백상시의 시장을 마지막으로 이제 관직에서 물러나 탐라섬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초고불이 자진하여 맡았다.
그가 탐라섬으로 이주하기 전, 그러니까 예닐곱 살의 어린 시절에 북방에서 낙타들, 북방 초원의 쌍봉낙타를 길렀던 추억이 있었으니, 마치 예전 고려의 아이들이 소를 치는 것과 같았다.
그런 초고불에게 서역에서 건너온 단봉낙타는 애뜻하면서도 낯선 이질적인 감정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렇게 낙타들은 낯선 곳에서 좋은 주인을 만나 나름 행복한(?) 삶을 이어 가게 되었는데, 정작 그들의 원래 주인이었던 할릴은 다소 달랐다.
그는 사실상 죄인의 처지로, 탐라 조정 소유의 가옥에 연금된 채, 외관부의 취조, 실상은 익문대의 취조를 받아야 했다.
고문이나 학대는 없었지만, 한 달 이상 집에 가둬 두고 담당자 십수 명이 번갈아 상대하자, 어느 순간 할릴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탐라공에게 보고되었으니, 할릴에게 묻는 질문들의 대부분 또한 애초에 탐라공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할릴을 통해 알아볼 만한 걸 다 알아본 뒤에야 몽주는 할릴을 공택으로 초청하였다.
“잘 지내었소?”
인사말을 건네자, 비서원 소속이자 익문대원인 자가 통역하였다.
“…….”
할릴은 불만 어린 표정을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말을 받았다. 적어도 자존심은 꺾인 게 확실했다.
하나, 몽주는 그런 할릴의 반응은 대충 넘기고 대신 통역을 한 익문대원을 바라보았으니, 내심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 대원은 원래 티무르 왕국의 말을 알지 못했다. 한데, 고작 한 달 만에 할릴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티무르 왕국의 언어까지 습득한 것이었다.
물론, 배울 만한 여건은 충분했다.
티무르 왕국의 언어는 전혀 모르지만, 대신 하샤신 출신을 통해 회교도의 언어를 배운 바 있고, 그 언어가 티무르 왕국에서 쓰는 언어와 유사한 면이 많아 배우기 용이했다.
또, 그가 홀로 배운 것도 아니고, 이미 외국의 언어를 습득하고 체계화하는 데 이력이 있는 여러 대원들이 협동해서 티무르의 언어를 파악한 것이었다.
할릴과 그의 일행들도 처음에는 전혀 협조하지 않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이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의사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으니, 자연히 그들의 언어를 익힐 기회도 많아졌다.
하나, 그런 실마리와 여건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게 분명한 바, 몽주는 차후에 익문대를 치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다시 시선을 할릴에게 돌렸다.
“정복자 운운하더니만, 알고 보니 정복자에게 버림을 받았더군.”
그 말에 할릴이 일순 발끈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처연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살아남기 위해 황금 거울을 바치고자 고려까지 온 건 대견하다만, 그런 마음이라면 자존심도 함께 굽힐 것이지, 어찌 그렇게 거만하게 굴었는가?”
“우리는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그래? 그럼, 이제 꺾였는가?”
“…….”
꺾였다.
꺾일 수밖에 없었다.
이역만리 외딴 곳, 티무르의 위명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탐라섬에서는 더욱 그랬다. 가택연금 상태이긴 했지만, 그 가옥에 갇히기 전에 확인한 탐라군의 군기(軍器)와 탐라섬의 광경은 그에게 별천지 내지, 세외세의 압도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황도 개경의 모습도 대단하긴 했는데, 그래도 사마르칸트에 모자라다고 애써 무시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고려는 정복자의 제국에 못지않은 나라였다.
아니, 만약 그를 담당한 탐라의 관리들이 그를 회유하고 압박하기 위해 흘린 말들 중 절반만 사실이어도, 고려는 그 이상의 제국이었다.
물론, 고려 또한 정복자의 제국과 부딪힐 방법이 없겠지만, 어쨌든 티무르의 위명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는지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할릴이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동안, 몽주는 그를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티무르의 인도 원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제 끝날 분위기였고, 할릴이 고려까지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분명 끝났을 것이다.
물론, 이는 티무르의 친정이 끝났다는 의미로, 티무르의 군대 중 일부가 그곳에 남아 약탈과 파괴를 실행하고, 꼭두각시 왕족이나 귀족을 세우는 작업은 한창 진행 중일 것이다.
사실 현대에서 역사로 티무르 제국의 행보를 살피면서 몽주로 하여금 여러 번 헷갈리게 한 것 중 하나가 티무르가 한 번에 몇 개의 전쟁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인도를 치면서 잘라이르조와 싸우고, 동시에 킵차크 한국과 싸우다가 심지어 모스크바 코앞까지 쳐들어가는 건 아무리 티무르가 전쟁의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티무르가 정예군을 이끌고 여러 전쟁을 연이어 치르고, 티무르 제국의 다른 군대가 잔여 전투와 전후 처리를 실행하는 형식임을 깨닫고야 실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감안해도 티무르 본인은 쉬지 않고 전쟁을 치른 것이니, 그야말로 정복자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어쨌든 역사와 달리, 할릴은 인도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니, 배제되었다.
이는 그가 역사와 달리 공훈을 세울 기회가 박탈되었다는 의미이고, 그가 훗날 영토를 봉분 받고, 그의 아버지의 죄까지 용서받을 기회도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그가 후계자로 지목받지 못했음에도 재빠른 행동과 왕족 회유를 통해 정복자의 후계자가 되는 역사도 사라진 셈이었다.
그렇게 할릴의 이용 가치의 전부나 다름없던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전부 사라지자, 몽주에게 있어 할릴은 딱히 필요 없는…….
‘아니지. 애초에 저자를 이용함에 있어서, 저자가 알아서 티무르의 후계자가 되는 건 의미가 없지.’
중요한 건 어쨌든 할릴이 티무르의 직계라는 점이었다.
“살아남고 싶나?”
“……?”
“살아남고 싶냐고 물었다.”
“화, 황금 거울을 주실 것이오?”
“황금 거울은 아주 비싸지. 한두 장이면 모를까. 네가 했던 말대로 큰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은 그냥 내줄 수 없어.”
“얼마든 상관없소. 내가 돌아가 정복자의 총애를 얻는다면 크게 대가를 치르겠소.”
“뭘 믿고? 사마르칸트와 이곳 탐라섬이 얼마나 먼지는 자네가 잘 알지 않나?”
탐라산 거울은 탐라국의 주요 산물로서, 일반적인 수은 거울은 이제 값이 많이 내려가 청동이나 황동으로 만든 거울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금을 섞은 거울은 여전히 초고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탐라국에서 생산량을 조절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고려는 물론 주변 다른 나라의 상류층과 지배층의 수요가 무척 높기 때문이기도 했다.
“믿어 주시오. 절대 배신하지 않겠소!”
할릴이 재차, 재삼 맹세하듯 애원했지만, 몽주의 표정에 변화를 일으키진 못했다.
오히려 할릴로서는 인정할 수 없는 말이 몽주의 입에서 나왔다.
“유감이지만, 자네 아버지 미란 샤는 숙청될 거야. 티무르에게든 다른 형제에게든. 티무르가 장자상속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티무르는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할 테지. 티무르가 직접 아들들을 정리하지 않아도, 그가 티무르의 왕관을 물려받게 되면, 피바람이 불 걸세. 그중 미란 샤는 숙청 대상 일순위일 테고.”
“…….”
몽주의 말이 전해질수록 할릴의 안색은 점점 더 아연해졌다.
“대, 대체 어떻게……?!”
그가 티무르의 이름을 아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래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나, 그가 미란 샤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때부터 대체 어찌 그걸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폭증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치 귀신을 보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무함마드 술탄이 살아 있고, 그가 후계자가 된다면, 네 어머니 한자다 베굼을 통해 중재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가 없지.”
“……!”
할릴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의 모친은 원래 백부 자한기르의 아내였으니, 백부가 죽은 뒤, 동생인 아버지가 형사취수(兄死娶嫂)하였고, 할릴을 낳았다.
하여, 피르 무함마드의 형이자, 본디 티무르의 장손인 무함마드 술탄과 할릴은 이부동복(異父同腹) 형제인 셈이었는데, 무함마드 술탄이 요절해 버렸다.
티무르의 왕국에서는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이곳은 머나먼 고려였다.
알 리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야기가 고려 최고의 권세가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건 신기한 걸 넘어,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이제 네 혈통은 네 자부심이 아니라 형틀과 같다. 힘이 없다면 말이지.”
“…….”
놀란 마음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할릴은 이어진 몽주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전해진 말 속에 탐라공이 힘을 언급한 것이 마치 그에게 힘을 빌려 주겠노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가 내 말대로 따르겠다면, 10년 안에 네게 페르시아의 관문 이남 지역을 쥐어 주겠다.”
몽주의 말이 통역되어 전해지기 무섭게, 할릴의 눈이 달처럼 커졌다.
페르시아의 관문은 현대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의 별칭인 바, 그 이남 지역은 이란에서도 손꼽히는 비옥한 지대였다.
그리고 북서와 남동으로 길게 뻗은 자그로스 산맥의 남동쪽 끝은 호르무즈 해협을 향해 있었다.
* * *
“그러고 보면, 탐라국의 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의 방식과 비슷해요.”
언젠가 두신이 한 말이었다.
포르투갈은 가까운 곳은 영토화하되, 먼 곳은 일개 도시 정도만 확보하고 교역의 이득에만 집중했다.
그와 비교되는 스페인의 경우는 먼 곳마저도 군사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정복과 지배를 시도하였다.
“둘 다 장단점이 있지만, 제가 몽주 씨라면 제가 추진하는 진출 방식도 포르투갈의 방식에 가까웠을 겁니다. 그게 더 안정적이고 적도 덜 만들죠. 한데, 그렇다 해도 그 방식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대비해야겠죠. 탐라국 정도의 규모라면 분명히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잖아요.”
애초에 포르투갈이 광대한 정복을 시도하지 않은 건, 포르투갈이 작은 나라로서 그 힘의 투사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의 진출 방식의 부작용 또한 막지 못했으니, 그들을 통해 교역의 이점을 깨달은 세력이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교역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을 군사적으로 막지 못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교역이 얼마나 대단한 이득을 주는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진출한 현지 세력들에게 알려 주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수행한 뒤 쫓겨난 셈이었다.
다행히 탐라국은 포르투갈보다 더 규모가 있었고, 고려로 확대하면 훨씬 더 큰 실력과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젠틀’한 진출의 부작용을 상대할 힘이 있지만, 머나먼 곳에서는 탐라국도 홀로 모든 걸 처리하기 어려운 건 매한가지일 터였다.
“결국 적아를 구분해서 미리 준비해야 할 겁니다. 그게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말이죠. 그리고 아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여러 군데 걸리는 게 많아 복잡해지는 걸 감수해서라도요.”
결론은 재상이 내렸지만, 두신도 동의했다.
그리고 몽주 또한 그 의견을 따르고자 하였으니, 할릴을 이용하고자 함도 그에 합당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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