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23)
* * *
“하면, 앞으로 금납광고를 적극적으로 수주해도 되는 겁니까?”
“적극적으로?”
“예, 그러니까 급납광고를 실어 주겠노라 저희가 광고를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
광고 사건의 주동자(?)들 중 사롱 순보의 수장인 시준희가 눈빛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어제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광고가 무엇인지, 그리고 광고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 당대에 사정에 맞춰 한참을 설명했는데, 오늘 다시 만나자마자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딱 봐도 돈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다.
“할 수 있다면 많은 금납광고를 싣는 것도 좋겠지. 순보의 운영에 금전적으로 도움이 될 테니까. 다만…….”
웃음을 보이며 말하던 몽주는 표정을 냉정하게 바꿨다.
“만약 그 금납광고의 조금의 거짓이나 과장이 있다면, 그 광고주는 벌을 받을 것이고, 그 정도에 따라 순보 또한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네.”
“…….”
몽주의 말을 통해 ‘신문 광고’에 대한 또 하나의 규칙이 세워졌다.
이미 금납광고(金納廣告), 즉 돈을 받아 싣는 광고라는 의미로서 신문 광고의 개념을 세우면서, 금납광고를 실을 경우 반드시 그 광고의 상하좌우에 금납광고임을 명시하도록 하고, 광고의 내용이나 문구 또한 순보의 직원이 아닌 광고주 측이 직접 마련하도록 하는 규칙을 세운 바 있었다.
시 수장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략 그 규칙이 가진 의도를 짐작할 수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래도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니, 그 규칙이 상당히 애매하기 때문이었다.
“저하의 뜻은 충분히 사료할 수 있습니다. 한데, 그 거짓의 기준이 무엇이고, 현저한 거짓과 평범한 거짓의 구별은 어찌해야 합니까.”
“그래, 확실히 애매한 부분이 있지. 하여, 안 그래도 순보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공령을 준비할 생각이네.”
“예…… 예?”
시 수장은 수긍하다가 문득 놀라워하였으니, 몽주가 말한 바가 단순히 광고에 대한 규칙을 넘어 순보 전체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려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우려할 건 없네. 이미 사롱 순보의 창간과 운영은 내가 허락한 바 있으니, 지금에 와서 사롱 순보의 운영에 해가 될 규정은 없을 것이네.”
“저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혹, 염두에 두신 것을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몽주는 생각한 것 중 대부분을 간추려 말해 주었다. 그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금납 광고에 대한 ‘가이드라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정한 거래에 의한 기사의 제재였다.
광고에 대한 규정은 광고 수주 단가나 지면 할애 비율, 그리고 광고가 불가한 업종 등 기술적인 부분인 터라, 시 수장도 비교적 금세 수긍하였다.
하나, 부정한 거래에 의한 기사의 처벌 부분은 사롱 순보의 수장 시준희로서는 불안한 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자네가 앞서 말한 현저한 거짓의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니까. 만약 순보에 실린 기사에 오류나 곡해가 있어, 그로 인해 나라와 백성들에게 유무형의 손해를 입히는 일이 있다고 가정해 보게. 그 오류나 곡해가 순전히 실수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사정을 감안하여 처벌을 감면하되, 그것이 고의에 의한 것이라면, 특히 다른 누군가의 청탁과 증루에 의해 그를 돕거나 다른 자를 해하려는 악한 의도까지 더해진 것이라면 반드시 엄벌에 처하고자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나?”
“…….”
몽주가 세운 전제를 당대에서 부당하다고 말할 자는 없었다.
이는 탐라공의 권위에 눌린 것은 차치하더라도, 당대의 정치와 언로(言路)의 개념에서 합당함으로 무장되어 있음은 물론 심지어 자비롭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야 제4부라 불리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언론의 자유가 절대선으로 인식되고 있어, 고의에 의한 왜곡 기사에 대한 증명과 그 처벌이 굉장히 어렵지만, 몽주는 일반적인 범죄와 동등한 선에서 판결과 처벌을 하도록 유도할 작정이었다.
전면적인 언론의 자유는 아직은 방종과 폐습으로 직행하는 방아쇠일 뿐이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순보와 관련해서 하나 더 추진하고자 하는 게 있네. 다만, 이는 순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터라, 추후에 따로 알려 줄 것이고 사롱 순보의 의견도 들을 터이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세.”
“……알겠습니다, 저하.”
시 수장은 몽주가 말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꽤나 궁금한 표정이었지만, 감히 채근하지 못하였다.
사실 그녀도 지금까지 탐라공이 그녀 등을 향해 설명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함을 인정했다.
다만, 후에 그녀에게 전해진 몽주의 추가적인 구상은 어쩌면 앞서 그녀에게 말해 준 규정보다 더 근본적으로 ‘언론’을 제어하는 ‘굴레’였다.
협동조합(協同組合)이 바로 그것이었으니, 몽주는 언론을 비롯하여 몇몇 업종의 경우는 반드시 협동조합의 형태로만 설립되고, 운영되게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협동조합은 여러 개인이 자본을 모아 설립하는 법인으로 기업의 일종이긴 하나, 출자금의 규모와 상관없이 의결권이 동등하여 대주주가 경영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형태이니, 특히 언론의 운영 형태에 크게 적합하다 여겼다.
법인의 개념이 이제야 자리 잡기 시작한 현황에서 협동조합을 도입하는 건 다소 이를 수 있겠지만, 사롱 순보가 순보의 상업성에 눈을 뜬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협동조합의 형태를 강요한다고 해도 사롱 순보가 당장 큰 타격이나 체제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사롱의 소속원조차도 대부분 알지 못하지만, 애초에 사롱 자체가 몽주의 지원으로 설립되었고 운영되고 있는 만큼, 절대적인 ‘대주주’가 경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건 협동조합과 동일하고, 이는 사롱 순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경우, 몽주가 비밀리에 사롱을 지원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해지겠지만, 이미 사롱도 자체적인 사업을 통해 수익을 거두고 있는 만큼 슬슬 몽주도 손을 놓아도 될 때가 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협동조합의 도입은 몇 달이 더 지나, 행정적인 준비와 사롱 및 사롱 순보와의 논의를 거쳐 진행되었고, 어쨌거나 당장 백성들의 눈에 띈 건 역시나 금납광고였다.
어쩌다 보니 고려 최초로, 아니 아마도 세계 최초로 상업 광고를 게시한 주선경업은 광고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으니, 남면 전역에서 몰려드는 구매자들, 주로 잡물상점들로 인해 크게 몸살을 앓아야 했다.
물론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몸살이었을 것이다.
이는 광고의 효과를 여실히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탐라국의 산업적, 상업적 기반이 광고를 통해 수익성을 창출할 수 있을 정도로 무르익었다는 증거였다.
* * *
강중이 여송섬으로 향하게 된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상해포구의 건설을 외교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관리로서 상해로 떠난 강중은 상해에서 채 짐을 풀기도 전에 영장을 받게 되었는데, 그 명령이 여송의 거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하여, 곧바로 특별히 파견된 중함선 한 척에 몸을 실었으니, 여름이 코앞인 시절이었다.
“거, 그 족장이라는 작자가 참 멍청하군. 어찌 감히 우리를 의심하는 건지…….”
강중과 함께, 더 정확히는 강중이 속한 사신단을 이끄는 상해 협력소의 부소장 요진철 주무관이 투덜대었다.
이미 몇 번이나 들은 불평이었지만, 사신단의 대부분이 그 불만에 동감하는 터라 딱히 지루해하는 자들은 없었다.
오히려 같이 그 족장이라는 자를 흉볼 뿐이었다.
“어쨌거나 가장 곤란한 건 아마도 공자겠구려. 하는 작태를 보면, 그자가 공자마저 부족하다 떼를 쓸 수 있을 테니.”
“그러기까지 하면, 더는 달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협박을 해서라도, 협박이 모자라면 실력을 행사해서라도 그자의 오만함을 꺾어 버려야지요.”
요 부소장의 말을 받은 건, 강중이 아닌 다른 동료들이었고, 몽주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어허, 네 녀석은 어찌 그리 경박한 언사를 하는 게냐? 외관부 관리로서 나라를 대표하는 자는 언중해야 함을 모르는 게냐? 공자께서도 가만히 계시는데 네놈이 어찌 나서!”
“죄송합니다…….”
같은 외관부 소속이자, 1년 선배이기도 한 행정부관 승지훈철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씰룩거렸으니, 부소장의 눈을 피해 투덜댐이 틀림없었다.
그 모습에 다시 미소를 지은 강중은 이내 그의 사신단이 받은 명령과 그 속에서 그가 해야 할 임무에 대해 떠올렸다.
영장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거양의 대족장 라카드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라는 것으로, 라카드 대족장은 더 많은 쌀을 생산하라는 탐라국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는 더 많은 쌀을 생산했다가 탐라국이 사 가지 않으면 거양이 크게 손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기인하였으니, 라카드 대족은 탐라국의 절대 보증을 요구하며 탐라공의 친필로 된 문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탐라공이 쓱쓱 만년필 몇 번 놀림으로써 해결될 일일 수도 있지만, 자칫 차후에 모든 탐라국 외곽의 ‘위성 세력’들로 하여금 탐라공의 보증을 요구하는 전례로 남을 가능성이 있어 어떻게든 대신청장의 선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하고자 했으니, 그 와중에 떠오른 방책이 바로 강중을 보내는 것이었다.
즉, 탐라공의 친필 보증 대신 탐라공의 유일한 아들을 파견함으로써 그 대족장을 안심시키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또한 자칫 공자를 파견하는 전례로 남을 수 있겠지만, 지금 강중은 엄연히 외관부의 관리였고, 여송섬으로 가는 것도 관리의 신분으로서 가는 것이었다.
그를 파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권에는 외관부 행정부관 석강중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 탐라공의 아들이라든지, 공자라는 단어는 일절 쓰이지 않았다.
그들이 방문할 거양에 먼저 보낸 외교문서에도 외관부 주축의 사신단이 당도할 것이라고만 쓰여 있을 뿐, 공자의 존재는 생략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송은 탐라공 저하께서 가능한 평화적으로 흡수하고자 노력하시는 곳입니다. 라카드 대족장의 요구가 어처구니없는 부분이 있긴 하나, 지금까지 저하께서 여송섬에 기울이신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위압을 행사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일 것입니다.”
강중이 입을 열어 의견을 말함에, 모든 이들이 필요 이상으로 경청하였다.
그가 사적으로 아버지인 탐라공을 아버지 대신 저하로 칭하는 것은 관리인 입장에서 당연히 그리해야 하는 것이지만,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겸허로 느껴졌다.
또, 누구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의견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최고의 판단처럼 느껴지고 있었으니, 공자라는 신분인 탓도 있지만, 강중 특유의 설명할 수 없는 매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제 의견에 어폐가 있습니까?”
강중은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주변을 느끼며 물으니, 그제야 적막을 만들 정도로 그에게 집중하던 주변 인물들이 스스로 어색함을 느끼며 시선을 떼었다.
“언제 봐도 공자께서는 참으로 현명하고 신중하십니다. 가히 모든 관리들이 본받아 마땅하신 모습입니다.”
“감사합니다만, 존댓말을 삼가 주십사 말씀드렸었습니다.”
“아차차, 이런 내 정신을 보게. 진즉에 그리하겠노라 말씀…… 말해 놓고 다시 실수를 하는구먼.”
부소장이 겸연쩍게 웃고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평대로 말투를 바꿨다.
비단 부소장뿐만 아니라, 강중을 대하는 모든 탐라의 고위 관리들이 가지는 부담이자 어려움이었다.
본인이 청하고, 마땅히 그리하는 게 맞다고 여기면서도 자꾸만 강중을 행정부관으로 보지 못하고 공자로서 공대하게 되었다.
탐라국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자, 후계자를 상대함에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보다는 이 역시 강중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분위기(?)에 홀린 탓이었다.
* * *
탐라의 배가 파식군의 포구에 닿은 건 상해를 떠난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파식상시장 곽충보의 환대 아래 하루 동안 여정의 피로를 씻은 뒤, 사신단은 거양으로 길을 나섰다.
과거에는 거양으로 갈 때 바다를 통해 북쪽 해안에 닿고 거기서 육로로 남하하는 경로를 이용했지만, 최근 들어 파식군에서 곧장 육로로 북상하여 거양에 이르는 경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는 파식군부터 거양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건설된 덕으로, 특히 거양이 있는 거대 계곡과 그 이남의 평지를 가로지르는 산맥을 구불구불 위태롭게 관통함으로써 가능한 경로였다.
“이렇게 거친 산중턱 위로 도로를 건설함에도 사망자가 없었으니, 실로 탐라의 역사(役事)에서 가장 성공적이라 할 만할 것입니다.”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다 하였음에도 기어이 동행한 곽 시장은 묻지도 않았음에도 그 도로에 자부심 어린 말을 늘어놓았다.
“대단하군요. 건설을 이끈 회사와 노동자들이 얼마나 성심을 다했는지 느껴집니다.”
“…….”
“아, 시장님께서 큰 공헌을 하신 것도 절감하고 있지요.”
“하하,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개 행정부관이나, 결국은 공자일 수밖에 없는 강중의 곁에서 열심히 안내역을 자처하는 곽 시장의 뒤에서 다른 사신단들이 눈총을 보냈지만, 그 도로의 건설은 확실히 대단한 역사였다.
말로만 듣던 중국의 촉도(蜀道)가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절벽이나 다름없는 산허리를 가로지르고, 도저히 인간의 발로는 건널 수 없는 험지 위로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저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약하고 좁은 길도 아닌 우마차도 몰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넓은 길이었으니, 수십 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자금과 기술이 접목된 도로였다.
“이렇게나 힘든 도로를 건설한 우리의 진심을 거양에서도 알아줄 만한데 이상하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구방(多邱邦)으로 도로를 놓기도 전에 그 먼 곳까지 험지를 뚫어 주었는데도 감히 우리 탐라국을 의심하는 꼴을 보자니, 울화가 치밀 정도입니다.”
곽 시장이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화를 내는 양 노한 음성으로 거양을 욕했다.
그의 말 중에 나온 다구방은 파식군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주요 원주민 고을 중 하나로, 거양에 비하면 손색이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많은 쌀을 생산하여 탐라국에 공급하는 고을이었다.
다만, 다구방은 해안 고을인 터라, 애초에 도로가 급하지 않았고, 또 다구방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이미 탐라국에 복속된 고을이나 마찬가지인 터라, 북여송 지역의 복속이라는 노림수가 있는 도로 건설에서 아무래도 후순위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반대로 그 거양으로 향한 그 도로의 노림수를 생각하면 거양의 원주민인 대족장으로서는 마냥 환영할 수마는 없는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강중은 그런 사정을 떠올리고, 또 곽 시장의 다소 과한 자랑질이 담긴 언사를 적당히 받아 주었으니, 강중을 비롯한 사신단을 태운 마차들은 계속 북쪽으로 향하였다.
그렇게 거양에 닿은 건 파식군을 떠난 지 만 하루가 지난 뒤였다.
* * *
확실히 탐라공의 하나뿐인 공자라는 신분은 탐라국의 위상을 알고, 인정하는 곳에서는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사신단이 거양에 닿았을 때, 그리 내키지 않는 분위기로 맞이하던 거양 측은 사신단의 일원으로 공자 강중이 있음을 알게 되자,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탐라공이 직접 방문할 때도 이 정도일까 싶을 정도로 극진히 대우함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도 대족장의 거처 주변에 모여 강중의 모습을 잠시라도 보려고 난리였다.
그리고 협상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아니, 협상이랄 것도 없었으니, 사신단이 쌀의 구매에 대한 문권을 제시하자마자 대족장 라카드는 지체 없이 수결하였던 것이다.
“이거야 원, 우리가 그 먼 길을 온 보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헷갈리는군.”
그 광경을 보던 승지훈철 행정부관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니, 사신단 모두가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애초에 거양의 반항(?)이 곧 탐라국의 관심을 구걸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탐라국의 관리된 입장에서는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본디 아이가 투정하는 것이 미워도, 그게 곧 자식이기에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투정이지 않은가.
탐라국과 거양 사이는 이미 그런 관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어쨌든 임무를 순식간에 해결한 사신단은 이후 맘 편히 거양의 접대를 즐기고자 하였으니, 음주가무는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중의 시선에 어느 여인이 들어왔다.
“…….”
여송 원주민 특유의 화려한 색감으로 물들인 얇은 천을 머리에 감은 그 여인은, 얼굴을 많이 가렸음에도 여타의 원주민 여성과는 많이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얼마든지 하문하십시오.”
강중이 대족장의 측근이자 역관의 역할을 하는 자에게 말을 걸자, 그자가 흔쾌히 응하였다.
“저 여인은 누구입니까?”
“오, 맘에 드는 아이가 있……?!”
그자는 강중이 원주민 여인 중에 품고 싶은 여인을 찾았나 보다며 반색했다.
강중이 가리킨 쪽에는 음식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이내 강중이 정확하게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찌 그러시오?”
“송구하나, 다른 여인을 택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저 여인 외에도, 아니, 저 여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여쁜…….”
“나는 하룻밤 노리개로 삼을 여인을 택하고자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하여 묻는 것이니 대답해 주십시오.”
“…….”
강중의 정중한 요청을 받은 역관은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이내 그 여인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대족장의 여식 중 하나입니다. 다만, 그의 어미가 본디 톤도에서 시집 온 여인인 터라, 지금은 내쳐졌고, 저 여인도 더는 대족장의 여식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관이 곤란했던 이유는 단지 대족장의 여식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여식이었다면 오히려 반겼을 수도 있었다.
하나, 강중이 궁금해 하는 여인은 하필 대족장이 버린 여식이었다.
탐라국이 도래하기 전에 여송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톤도국에 복종하는 의미로 톤도의 여인을 아내로 삼아야 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족장에게는 ‘흑역사’의 증거이자, 탐라국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멀리해야 할 족속이 되어 버린 탓이었다.
“저런…….”
강중의 반응은 단출했고, 더는 그 여인에 대해 묻지 않았으니, 역관도 안도하였다.
하나, 강중의 속내는 달랐다.
두근두근.
아마도 처음으로 여인 때문에 심장이 크게 뛰고 있음을 느끼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심장을 달래며 대신 차가운 머리로 생각에 집중했다.
그건 연심에 매몰되기 전, 탐라국의 공자로서 혼인 상대의 가치를 판단하는 절차였다.
공감과 동정심이 가득했던 강중도 어느새 감정을 절제하고, 자신의 신분과 탐라국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강중이 처음 보는, 심지어 말 한 마디 나눈 적 없는 여인을 혼인 상대로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러 연애를 경험하면서도 한 번도 없던 일이었고, 처음으로 국공부인이 아들 때문에 속상해서 몸져눕게 만든 ‘불효’의 시작이었다.
그 여인, 큰 키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대족장의 버려진 여식은, 톤도국이 인도계 지배층의 나라였던 만큼, 당연하게도 국공부인의 외모와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