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25)
* * *
검술이라기보다는 격투에 가까웠다.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팔다리가 상대의 몸통을 가격하기 위해 수시로 튀어나왔다.
방호구가 있고, 목검을 쓰고 있으며, 대련을 하는 두 사람 모두 능숙하기 이를 데가 없어 크게 다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무예를 모르는 이들이 보면 수시로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격렬했다.
“그만!”
어느 순간 대련의 일편이었던 여인이 뒤로 물러나며 검을 거두고 대련을 마칠 것을 선언하자, 상대였던 탐라공의 호위군병인 자도 공손히 납검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여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거두어 뒤로 묶으니, 날렵한 여인의 얼굴에 세월이 조금 묻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이마에 맺힌 땀도 훔쳐 낸 여인은 크게 호흡하며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니, 그녀의 앞에 한 사내가 마른 수건을 든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정녕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더냐?”
“예.”
“마음 같아서는 너를 상대로 대련을 하고 싶구나.”
“이미 회초리로 마음을 돌릴 나이는 지났다 봅니다.”
“그런 소리는 아들이 먼저 할 게 아니지.”
어미의 한숨 어린 대꾸에 강중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집을 꺾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아직도 찬동하지 않는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앵도는 뭔가 능글맞은 아들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손에 있던 수건을 빼앗듯 건네받곤 얼굴을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띠던 강중도 그녀의 뒤를 쫓으며 말문을 열었다.
“해오는 좋은 아내이자 며느리가 될 겁니다. 물론, 좋은 어머니도 되겠지요.”
“그거야 두고 봐야겠지.”
“장담합니다.”
“아니기만 해 보아라.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시집살이를 며느리에게 보여 주마.”
“하하, 그러십시오. 며느리에게요.”
앵도가 무심코 며느리라는 말을 쓴 것을 놓치지 않고 강중이 그 단어를 되풀이하자, 앵도는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멈춰 서 아들을 쬐려 보았다.
“내가 아직 찬동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지!”
“예.”
“한데, 너는 이미 승낙을 받은 것처럼 구는구나?”
“어머님은 어쩜 그렇게 젊으신가요?”
“……뭐?”
어머니의 기세에 잠시 밀리는 양 하던 강중은 이내 다시 웃음을 지으며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요즘 탐라의 젊은 여인들 사이에 어머님을 따라 하려는 이들이 태반이라 합니다. 그래서 무관을 찾는 젊은 여인들이 많다지요. 무예를 배우려고요. 그리하면 어머니처럼 어려 보일까 싶은 게지요.”
“그게 무슨…….”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꼭 그 비법을 알아서 해오에게 전해 주고 싶거든요. 하면, 해오도 어머니처럼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겠지요?”
“…….”
앵도는 아들이 말하는 바가 무슨 의도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가 며느릿감을, 강중이 해오라는 이름을 붙여 준 그 여송의 여인을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피부색 때문임은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비록 앵도는 다른 변명들, 예컨대 고려말을 모르는 며느리는 원치 않는다든가, 그녀의 어미가 남편에게 버려졌다든가 하는 이유를 대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며느릿감이 짙은 피부색을 가진 것을 싫어하는 건 바로 그녀 자신이 피부색에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본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굉장히 컸던 앵도였지만, 이제는 적어도 생김새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
이는 국공부인으로서 탐라와 고려의 많은 여인들이 그녀를 추종하고자 하는 중에 자연히, 과거에는 너무 날카롭다 내지 도깨비 같다고 평가하던 생김새를 미인의 또 다른 기준처럼 여기는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나, 피부색만큼은 여전히 삼흑, 삼홍, 삼백의 기준에 따라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선호하였으니, 그에 대한 콤플렉스는 사그라질 수 없었다.
한데, 지금 강중이 그녀의 젊음을 두고 칭찬하며, 비슷한 피부색으로 연결하니, 마치 피부색이 짙기에 더 젊은 피부를 유지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전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앵도가 가진 피부색에 대한 콤플렉스를 조금이나마 감쇄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흥! 어디 피부색이 짙다고 나와 같다고 할 수 있느냐?”
“그래도 같을 확률은 높겠지요. 젊을 때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여인네 중에 마흔 살만 넘어도 주름이 가득하여 할머니처럼 보이는 이가 숱한데, 어머니는 이순의 나이를 넘어서도 제가 꼬마 시절에 뵙던 그 모습 그대로이니, 저는 해오도 어머니처럼 나이를 잊을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
앵도는 아들이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며느릿감을 칭찬하는 건지 헷갈렸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저는 잘 살 겁니다. 한 여인의 지아비로소는 물론, 탐라의 공자로서도 말이지요.”
강중은 자신이 선택한 혼인에 대해 자신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일개 사내로서는 물론, 탐라의 공자로서, 차기 탐라공으로서도 좋은 여인을 얻었다 확신하고 있었다.
해오(海俉).
본디 헤오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인은 강중으로 하여금 첫눈에 반하게 만든 미모뿐만 아니라, 성정과 인품 또한 훌륭했다.
강중이 헤오르와의 만남을 몇 번 가진 뒤, 그녀와 혼인을 염두에 두고 교제할 것을 청하였다는 소문이 돌자, 그녀의 주변인들 중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그 주변 인물이란, 주로 그녀와 함께 일하던 거양 대족장의 하녀들이었으니, 비록 해오가 내쳐져 대족장의 여식으로 취급받지 못하였다고 하나, 엄연히 신분이 달랐음에도 진심으로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것만 봐도, 해오가 충분히 인덕을 쌓을 줄 아는 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강중은 해오가 거양 대족장의 여식인 것이 맘에 들었다.
내처졌다곤 하지만 도로 받아들이면 그만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 탐라의 공자이자 차기 후계자가 여송의 여인과 혼인하는 만큼 이제 거양의 원주민들은 더는 탐라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이는 거양뿐만 아니라 여송섬 전체 원주민들에게도 비슷한 효과를 보일 것이니, 장차 여송섬을 통째로 탐라의 강토로 삼고자 하는 대계에 큰 이점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몽주가 해오와의 혼인을 언급한 뒤로, 일부 대신청장들 중에 공자와 여송 원주민 여인과의 혼인이 자칫 장차 탐라국 외곽 세력이 탐라를 따름에 있어 혼인 동맹(?)을 요구하는 전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도 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지만, 탐라공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혼인의 상대가 곧 탐라에 완전히 편입되는 걸 보고도 선뜻 혼인을 청할 귀한 족속이 얼마나 있을까 싶소.’
여송은 분명 탐라의 영토가 될 것인 바, 강중의 혼인으로 인해 그 가능성은 더 커지고, 시기 또한 더 빨라질 것이다.
그리고 탐라에서 탐라공 외에 귀한 족속이 존재할 수 없음을 생각하면, 장차 거양의 대족장 또한 공식적으로 탐라의 일개 평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위 족장이니 군주니 하는 자들이, 용의 꼬리가 될지언정 뱀의 머리가 되는 편을 선호하는 걸 생각하면 쉽게 탐라공가와의 혼인을 추구하기 꺼릴 터였다.
아마, 거양의 대족장 또한 당장은 위세 높은 탐라공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되어 기쁘겠지만, 차후에 거양이 탐라에 흡수되는 걸 인식하면 탐라공가와의 혼인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강중은 어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잠시 떠올리다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하였다.
말로는 아직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승낙 없이는 자신의 혼인을 공개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머니도 어느 정도 마음을 돌리셨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 ‘어느 정도’를 ‘절대적으로’로 바꿔야 하는 게 강중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임무이자, 해오와 축복받는 혼인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후우,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구나.”
“제가 잘 압니다. 아들을 한번 믿어 보세요.”
“믿지, 늘 믿지.”
그 말을 한 뒤로 앵도는 잠시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곤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자신이 피부색으로 며느리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의미 없는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며느리의 집안이나 탐라공의 아들이기에 걸리는 정치적인 부분에 문제가 없다면 그다음부터는 아들이 좋아하고 원하면 그만이다.
단지 자신만의 욕심,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닮아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고, 딸이 자신을 닮아 피부색이 짙긴 하나, 그래도 자신보다는 옅다는 점을 두고, 그들의 2세, 3세에 거쳐 점점 피부색이 옅어지길 꿈꾸었던 그 욕심에 대한 미련이 아직까지 그녀로 하여금 며느릿감에게 흔쾌한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앵도는 결국 포기하고 져야 하는 게 자신임을 인정해야 했다.
강중은 어머니의 마지막 표정 속에서 벽 하나가 무너졌음을 느끼며, 아버지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9.5//“내가 너와 며느리의 혼인을 승낙하고자 하는 마지막 이유는 며느리의 피부색에 있다. 장차 탐라의 권역이 넓어짐에 있어 피부색이 짙은 자들을 숱하게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고, 피부색을 이유로 사람을 차등하는 분위기를 단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고려에서 네 어미를 두고 흑나찰이라 멸칭을 붙인 것에 적지 않은 이유가 짙은 피부색에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짙은 피부색을 가진 여인을 멸시하는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건 감히 탐라 국공부인을 멸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네 며느리 또한 네 어미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 물론, 그렇다고 네가 싫은데 억지로 짙은 피부색을 가진 여인을 며느리로 삼으라는 건 아니다. 요지는 사람마다 선호와 취향에 따라 아름다운 피부색의 기준을 가지는 건 마음대로 하되, 단지 피부색이 다르거나 고려 본토에서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사라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 * *
끼룩.
“알아, 나도 안다고. 벌써 아홉 장째지.”
끼룩.
“그래서 뭐? 8백일 넘게 있었는데 뭐?”
끼룩.
“진짜 그럴래? 뭘 너랑 여기서 평생 살아? 너 인마, 나보다 훨씬 빨리 죽을 거 아냐? 하면, 그다음에 나는 어쩌고?”
끼룩끼룩.
“아냐, 나는 절대 포기 안 해.”
끼룩.
“반드시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가족도 다시 만날 거고…… 예쁜 색시도 만나서 알콩달콩 잘 살 거야…….”
끼룩.
“아이씨! 포기 안 한다고! 자꾸 부정 타는 소리 할 거면 저리 가! 이제 먹이도 안 줄 거다!”
휙!
눈매가 축축해진 해구는 근처에 작은 돌을 주워 던졌으니, 그 돌이 날아가 스친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작은 새가 푸드덕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잠시 씩씩 대던 해구는 문득 사방이 조용해진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나는 말을 많이 해서 그렇지, 그래도 그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유일한 친구가 사라지니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표류한 지 대략 반 년 정도 지났을 무렵, 어쩐 일인지 땅바닥에 쓰러진 채 허우적대는 작은 새를 발견했었다.
살펴보다, 다리가 부러진 것을 확인한 해구는, 흥부놀부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해서 그 새의 다리에 부목을 대 주고, 얼마간 먹이도 잡아다 주며 보살폈다.
정말 부러진 다리가 도로 붙을까 우려한 것과 달리, 한 달가량 지나자 그 작은 새는 부목이 없이도 똑바로 서고 날았다가 착지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어졌다.
그 후로, 그 새는 호박씨를 물어다 주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의 곁을 맴돌며 말벗이 되어 주었다.
간혹 해구가 섬을 옮길 때도 기어이 그를 찾아와 하루에도 몇 시간씩 끼룩대곤 했던 것이다.
“뭐, 또 오겠지. 한두 번도 아니고.”
괜히 친구에게 화풀이를 한 것, 그의 말마따나 한두 번 한 게 아닌 것에 미안한 마음을 일부러 외면하며 해구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의 곁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나무판들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숱한 도흔(刀痕)이 나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9장의 나무판 중 8장에는 각각 100개의 도흔이 있었으니, 해구가 매일 한 번씩 칼로 만들어 낸 흔적들인 바, 그가 표류한 지 800일이 넘었음을 가리켜 주고 있었다.
“후우, 진짜 구출될 수 있으려나…….”
해구는 한숨어린 중얼거림을 흘리며 시선을 바닷가 쪽으로 옮겼다.
멀리 해변 위에는 한 척의 작은 배가 비스듬히 놓여 있었으니, 그가 통나무를 베어다 만든 것이었다.
탐라군의 단검이 아까워서, 돌도끼와 돌칼로 한 달에 걸쳐 통나무 안을 파내어 만든 그 배로 그는 근처 섬들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좀 더 먼 바다로 나가 보기도 했다.
혹시 의외로 가까운 곳에 사람이 사는 육지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없었다.
더 멀리 가 볼까, 차라리 그냥 무작정 북쪽으로 나아가 볼까, 하면 아마도 왜국의 어느 땅에 닿기는 할 텐데…… 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할 용기 아니, 만용은 해구에게 없었다.
자칫 그나마 이제는 적응하여 살 만한 섬들마저 잃어버리면 정말 꼼짝없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죽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끼룩.
“……?”
끼루룩.
“돌아왔냐? 배고프냐?”
해구는 친구를 향해 묻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곁에 있는 작은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보관해 둔 열매 몇 개를 꺼내어 근처 바다에 툭 던졌다.
그러자 친구가 그 곁에 내려와 열매를 쪼아 먹기 시작했으니, 해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풀이하듯 말문을 열었다.
“그래. 나도 안다. 여기로 사람들이 올 리가 없겠지. 근데, 그렇다고 그걸 포기할 수는 없어. 그러면 난 정말 자결해 버리고 말 것 같거든.”
끼룩.
“맞다. 네가 있는 덕에 나도 이만큼 버티고 있는 거지. 그래서 고맙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랑 여기서 평생 살 거라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어. 나는 오늘도 꿈꾸고 있거든. 저 바다 너머로 배가 보이는 꿈을 말이야. 저기 봐. 저거처럼…….”
수평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던 해구는 어느 순간 멈칫하였다.
그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으로 눈을 마구 문지른 뒤, 다시 수평선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
끼룩!
“그치? 너도 보이지?!”
끼룩.
“배야, 배! 배가 보인다고!”
소리치는 순간, 해구는 이미 벌떡 일어나 해변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여기요! 여기! 여기, 사람이 있어요!”
국부를 어설프게 가린 나뭇잎이 아니면 완전히 벌거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해구였지만, 부끄러움 따위는 아무런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팔짝팔짝 뛰며, 양팔을 마구 흔드는 해구의 눈물 젖은 시선에 높은 돛을 단 배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사람 살려요!”
* * *
“음, 이거 흥미롭군.”
“뭔데, 그러십니까?”
외관대신과 함께 오찬을 하던 중에, 여러 판무청에서 보낸 장계를 요약한 문권을 훑던 몽주를 향해 포은이 물었다.
“요동국이 마침내 해망 군도에 닿았는데,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는군.”
“예? 아니, 그 외딴 군도예요?”
해망(海望) 군도는 ‘오가사라와라 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디 무명의 군도였던 것을 유구국에 탐험을 요청하면서 대해를 바라본다는 의미의 이름을 지어 준 것이었다.
“원래 살던 사람이 아니라, 예전에 폭풍에 휘말려 표류한 사람인 모양일세. 2년 넘게 홀로 살았다고 쓰여 있군.”
“저런…….”
“한데, 의외의 소득을 올린 모양일세. 그 자가 근방 섬들을 두루 옮겨 산 덕에 군도의 지리에 아주 밝다는군.”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해망 군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면, 한번 초청해 보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듣고도 싶고.”
“홍 대신에게 말해 두겠습니다.”
몽주는 계속 문권에 시선을 두며 숟가락을 놀렸다.
“저하, 식사 중에는 글자를 멀리하시지요.”
“이런, 보기가 좋지 않습니까?”
“어디 보이는 게 문제겠습니까. 글자에 시선을 둔 채 하는 식사는 속이 탈날 가능성이 높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치 많이 해 보신 듯하군요.”
“젊은 시절에는 그랬지요. 덕분에 체한 적도 많았지요.”
젊은 시절을 운운하니, 몽주의 눈에 포은의 머리에 내린 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로 예순다섯이던가.
조만간 은퇴를 청해도 몽주가 거부하기 어려울 나이였다.
역사에서 선죽교에서 피 흘리며 죽은 시기를 이미 십 년이나 넘긴 그는 인생의 황혼기를 잘 보낼 것 같았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아직은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하면, 태마식에 함께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태마식예요?”
의외라는 표정의 포은을 보며 몽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외관대신이신데, 가 본 외국이라곤 명나라가 전부이시지 않습니까.”
“혹 제가 일을 못한다고 핀잔을 주시는 겝니까?”
“하하, 아닙니다. 그냥 포은 선생께 전혀 낯선 세상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따름입니다.”
몽주는 포은이 더는 거동하지 못하거나 죽기 전에 그가 역사와 달리 자신을 만나 얼마나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남양의 끝자락에 탐라가 진출함을 통해 알려 주고 싶었다.
문서와 협상장이 아닌 현장에서 탐라국의 압도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 이번에는 좀 더 편한 항해가 될 겁니다.”
“음, 태함을 출진시키실 요량이시군요.”
몽주는 고개를 끄덕이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며 포은에게도 일어나라 손짓하였다.
그러곤 근처 창가로 다가가니, 창 너머 멀리 홍로 포구와 홍로 선소를 볼 수 있었다.
“정말 듬직하지요.”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홍로 포구에 정박한 많은 배들이 조그맣게 보이는 중에 다른 배들보다 훨씬 커다란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큰 배가 홀로 부두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태함(太艦).
작년 봄에 건조 완료되어, 1년가량의 시험 운항과 전력화를 거쳐 한 달 전부터 정식으로 근위 수군에 배치된 탐라국 최고의 전력이었다.
잘 모르는 자가 본다면, 그저 중함선의 덩치를 키운 것처럼 보이지만, 중함선과 태함은 전혀 다른 배였다.
목선과 목철선의 차이는 목철선과 철선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게 현대에서 시뮬레이션 비교를 통해 확인한 바 있었다. 강철로 된 용골과 늑골이 주는 견고함은 나무로 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철선을 넘어 현대식 구조의 선박과 비교하자면 천외천의 차이가 나겠지만, 어쨌든 태함은 목선으로서는 구현할 수 없는 내구성과 확장성을 갖추고 있었다.
“저는 저 태함을 볼 때마다 돛대가 참 눈에 뜨입니다. 어찌나 높은 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느낌이지요.”
“하하하.”
포은의 말마따나 태함의 돛대 높이는 무려 47미에 이르렀고, 그런 돛대가 6개나 솟아 있었다.
높이도 그렇고 돛대의 수도 그렇고 범선 역사의 말미에나 등장할 치수와 숫자이었다.
그리고 치수와 숫자보다 더 중대한 돛대의 변화는 그 구조와 재료였으니, 돛대의 일부에 강철이 쓰인 것이었다.
즉, 돛대의 아래쪽 23미는 3단으로 연결된 철기둥이고, 그 위로 33미짜리 돛대가 철기둥 안으로 6미 들어가 고정되어 나머지 돛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근 50미짜리 돛대에 쓰일 나무를 구하는 건 동금주의 침엽수림에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높이 자체야 그 정도 되는 나무들이 종종 있긴 하나, 막상 가늠해 보면 휘거나 얇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적합하지 않은 게 거의 대부분이었다.
하여, 강철의 철기둥을 하부로 하는 돛대를 설치하게 하였으니, 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였다.
본디 돛대 전체를 철기둥으로 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는데, 강철의 무게가 나무의 무게에 비할 바가 아닌 탓에 무게 중심이 크게 흐트러질 우려가 있어 상부는 기존의 나무 돛대를 이용하였다.
더 노력하면 강철 돛대를 세우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열기 기관의 발전을 추진함에 따라 돛대가 필요 없는 선박이 그리 멀지마는 않다 여기기에, 돛대에 대한 연구와 개발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한 것이었다.
“저걸 타면 폭풍도 그리 두렵지마는 않겠지요?”
“폭풍이야 언제나 두렵지요. 그래도 뭐, 죽을 확률은 감소하겠지요. 가 보시렵니까, 태마식에?”
“하하, 기대가 됩니다. 아무래도 준비를 좀 해야겠군요. 그간 배를 많이 안타서 혹여 배멀미라도 다시 나면 곤란하겠지요.”
세력 10월로 예정된 태마식으로의 출정까지는 아직 넉 달가량 남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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