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28)
* * *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차양으로 만든 그늘 아래 혼주석에 몽주가 있었다.
그의 곁에는 아버지 해민이 있었는데, 솔솔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노곤해지신 듯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어머니 주이는 매병의 증세로 인해 공택을 벗어나길 꺼려 하셔서 그 자리에 안 계셨다.
이제 스스로 매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 어머니는 크게 낙심하셨으니, 그 증세가 발현되는 시간이 하루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혹시나 혼례 중에 증세가 나타날까 저어하여 오시지 않으신 것이었다.
몽주는 약해지신 부모님 두 분이 정말 많이 연로하신 것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몇 년만 더 지났다면, 두 분 모두 살아계시든 아니든 그의 아우가 하는 혼인을 보지 못하셨을 것 같았다.
‘어쩌면 몽건이도 부모님께서 연로하신 것을 보고 혼인을 결심한 것일 수도 있지.’
괜히 짠한 마음에 몽주는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 감각에 졸던 아버지가 잠을 떨치다가 아들이 자신의 손을 잡은 것을 보고는 미소를 보였으니, 몽주도 마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아우의 혼례를 바라보았다.
몽건의 처가에서 진행된 혼례는 크게 화려할 것도, 소란스러울 것도 없이 차분히 진행되고 있었다.
몽주는 혼례날 밤에 공택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같은 홍로동 사람끼리의 혼인이라 얼마든지 올 수 있지만, 마을 축제 같은 혼례 ‘뒷풀이’에서 몽주는 얼마든지 그 밤 내내 어울릴 생각이 있었다.
하나, 사정이 생겨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명분은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간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어사대로부터 중요한 보고가 왔기 때문이었다.
“화포라…….”
어사대의 급보에 실린 내용은 유덕사가 화포를 제작하였고, 그 성능이 탐라의 초기 화포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앞에 어사대장, 전임 기명 대장에 이어 반년 전에 새로 임한 풍 대장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중요한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사과였다.
“좀 아쉽긴 하군. 하나, 근자에 어사대가 하는 일이 너무 많은 탓이라 여기겠네.”
풍 대장은 고개를 크게 숙여 송구함을 다시 표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어사대의 경우는 그 정상을 참작해 줄 필요가 있었다.
2년 전에 몽주의 엄명으로 시작된 남면의 토지 상황 조사는 모든 관부가 동원되어 진행하긴 했지만, 역시나 주도는 어사대의 몫이었다.
또, 그 조사는 공식적으로 약 1년 만에 마무리되긴 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여전히 토지 상황 조사가 진행 중이라 여전히 어사대에서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있었으니, 어사대의 규모가 지난 2년간 세 배 가까이 커졌음에도 여전히 과부하 상태였다.
어쨌거나 유덕사가 꽤 괜찮은 성능의 화포를 제작하였다는 건 확실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더 신경 쓰이는 점은…….
“이게 요동공이 방원을 후계자로 삼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리라 보는가?”
“저희는 그렇다 여기고 있습니다. 요동국 조정에서 오랫동안 화포를 연구하였음에도 결국 제대로 된 강철 화포의 제작에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방원 공자에 대한 요동공의 신임이 분명 커졌을 것입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
몽주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였지만, 이내 풍 대장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일단 좀 더 생각을 해 보아야겠네. 자네는 또 다른 정보가 있거든 바로 보고하게.”
“예…….”
풍 대장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물러났다.
유덕사가 화포를 제작한 것에 대해 곧바로 분개하고 제재하라는 명을 내리지 않은 것에 의아해 하는 모습이었다.
강철의 제조법을 몰래 빼낸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경계해야 하는 일임에 틀림없는데 탐라공이 너무 담담한 게 이상했다.
의외로 몽주는 그리 화가 나진 않았다.
사실 당장 내일 강철 화포가 다른 나라에서 등장해도 크게 놀랄 것 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진 지도 벌써 거의 10년이었다.
몽주가 처음 화포를 ‘함포 시위’로써 세상에 공개했던 때로부터 30년에 달하는 시간이 흘렀으니, 생각해 보면 예상보다 훨씬 늦게 등장한 것이었다.
그것도 명나라나 왜국이 아닌 같은 고려인 요동국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히려 반가움마저 있었다.
물론, 그 반가움 때문에 경계하는 마음이 풀어진 건 아니었다.
다만, 탐라국에 속하지도 않은 유덕사를 제재하는 것도 영 마땅치 않고, 만약 제재하려 한다면 요동국과 마찰을 감수해야 하니, 차라리 강철 제조법의 보안에 신경 쓰라는 경고 내지 조언이나 전하는 게 낫다 싶었다.
물론, 겉으로는 매우 언짢은 심정임을 피력하긴 할 것이니, 방원이 혹여 탐라국의 기술을 훔쳐도 된다 착각하는 건 방비할 생각이었다.
“역시 본 게 있으니, 따라 할 수 있었던 거겠지.”
사위가 탐라에 있던 시절에 제강하는 철소를 탐방할 수 있게 허락한 것을 떠올리며, 몽주는 이내 조금 전 머리를 스친 생각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그건 전에 요동공과 사위로부터 각각 들어온 제안에 관한 것이었으니, 그들의 제안이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재단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물론, 그 목적은 방원이 요동공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었다.
요동공은 방원이 강철 화포를 바치는 것을 보고 고민 중이던 후계자의 자리에 방원을 앉히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방원이 감히 강철 화포로 후계자의 자리를 거래하진 않았을 테고, 오히려 기꺼이 나라에 받쳐 그의 충성심을 ‘증명’함으로써 요동공의 선택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요동공과 방원이 자신에게 제안을 한 것이라 추정한다면…….
“허허, 요동의 회사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던가?”
일단 요동공의 제안에서 유덕사의 화포에 대해 탐라국의 항의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즉, 탐라국이 화포 제작에 대해 요동국의 제재하려 한다면, 요동국은 탐라상단의 회사를 두고 협박하여 화포를 계속 생산하거나, 아니면 그 회사라도 압류하려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처음 몽주가 요동공의 제안을 확인한 그 순간에 떠오른 게 무순 탄광이었다.
이미 20년 넘도록 탐라국에 역청탄을 비롯한 석탄을 수출하고 있는 무순 탄광은 그 기반이 확고하여 그저 문서 작업으로 요동국에 등록하기만 하면 곧바로 회사로 변모할 수 있었다.
가장 빠르게 이익을 창출할 수 있고, 가장 크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주 명백한 만큼, 요동공 측도 탐라공이 무순 탄광을 회사화하려 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순 탄광은 요동국이 그저 인건비나 받아먹는 정도로는 너무 아쉬울 만큼 커진 상태였고, 반대로 탐라국 입장에서도 무순 탄광을 요동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점점 더 아까운 중이었다.
그러니, 만약 화포가 양국간의 문제가 되었을 때, 회사화된 무순 탄광을 볼모로 잡는 건 요동국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협상 ‘카드’를 손에 쥐는 것이고, 설령 화포를 포기하게 돼도, 무순 탄광을 오롯하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화포든 무순 탄광이든, 어느 쪽이라도 방원의 공업으로 삼기도 좋을 테고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몽주는 다시 실소를 머금었으니, 방원의 이상한 제안도 그 연장선에서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포든, 무순 탄광이든 요 지역의 요동국 백성들에게는 아주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화포는 연나라나 다른 유목 민족과의 경계와 가까운 요 지역 백성들에게 환영 받을 만하고, 무순 탄광은 요 지역 백성들의 경제적 기반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어느 쪽이든 방원의 공업으로 삼으면, 상대적으로 방원 공자가 낯선 요 지역 백성들 사이에 그의 명성과 인정이 높아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요 지역에 비해 유덕사가 위치한 함주 일대에서 방원의 입지가 너무 크다는 의미였으니, 몽주도 잘 알고 있는 요동국의 고려계와 거란계의 갈등을 생각하면 방원이 유덕사의 주인이라는 신분에서 한발 물러나려 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밌군, 재밌어.”
몽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이미 밤이 깊은 가운데 등불이 내는 빛으로 창에 그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나도 많이 늙었군.’
서기로 1353년생.
올해가 1403년.
만으로 쉰 살이 된 몽주는 누가 뭐래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지만, 그래도 세월이 묻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백 원짜리에 박힌 내 얼굴이랑 좀 비슷해져 가는 것 같기는 하네.’
예전에 원화 동전을 만들면서 몽주의 얼굴을 새기니, 당시만 해도 나이에 비해 앳된 얼굴이라, 동전의 근엄한 얼굴이 어색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적합한 모습이 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함께 나이 먹어 가는 자들, 자신과 더불어 고려를 만들고 있는 자들을 떠올렸으니, 그중에는 요동공도 있었다.
만날 때마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던 요동공 이성계는 분명 후계자에게 요동국을 다스릴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테니,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우습고도 유치한 짓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면이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몽주의 입장에서 이성계의 의도를 무작정 용인할 수는 없었다.
몽주는 지금 이 순간 답을 구해야 하는 질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방원은 요동공으로서 적합한가. 고려의 절반을 다스릴 자로서 적합한가.”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창의 위쪽, 검은 밤하늘을 투영하고 있는 그곳에 몽주는 눈으로 그 질문을 써 놓고 가만히 응시하였다.
그리고 그러길 잠시 뒤, 일순 몸을 돌린 몽주는 그의 책상 서랍 안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었으니, 거의 1년 전에 어사대가 올린 장계들 중 하나였다.
‘남면의 토지 상황을 조사하는 중에 함주의 사정도 절로 알게 되는 부분이 있어, 그에 관하여 따로 보고를 올립니다.’
두루마리의 첫 시작이 그와 같았으니, 함주의 사정이라 함은 결국 방원과 유덕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본래도 이방원과 유덕사를 상대로 낮은 수준이나마 정보 활동을 하던 어사대가 남면의 토지 상황을 조사하는 와중에 흘러들어온 유덕사의 행태를 보고한 것이었다.
1년 전, 몽주가 그 내용을 확인하고 혀를 차며 중얼거린 말이 있었다.
“록펠러가 따로 없군.”
* * *
몽주의 답신은, 요동공이나 방원의 예상보다 훨씬 늦게 당도하였다.
그중 요동공은 탐라공의 답신을 확인하자마자 대관들을 불러 모아 그 서찰을 공개하였다.
“끌끌, 역시나 탐라공은 눈치가 빠릅니다.”
이조판서 노숙진이 서찰을 확인하자마자 말하니, 요동공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닐세. 탐라공이 나를 어찌 생각할까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리는군.”
“그래도 탐라공이 불쾌한 심기를 피력하는 와중에도 화포에 대해 크게 항의하지 않은 건 큰 수확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게다가 유덕사의 지분 또한 사들인다 하니, 저하와 공자께서 바라는 바가 모두 이뤄진 셈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대신 탐라공은 국토령을 강요하고 있지.”
“그리 어려운 요구는 아니라 생각하고, 일견 바람직한 것이라 봅니다.”
뒷말은 정승 정도전의 말이었고, 노숙진도 동감하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모인 이들 중 몇몇 신하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는데, 대개가 사가에 큰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탐라국의 조정이 그 세금을 낮추면서도 조정의 살림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 모두 국토령을 통한 지대 수익 덕분이라 합니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면서도 나라의 살림이 풍족해진다면 지옥이라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도전이 꽤 강경하게 말하자, 불만을 입에 담으려 움찔거리던 신하들이 일순 숨을 죽였다.
“무차별로 토지를 수용할 것도 아니고, 나라에서 차근히 보상을 진행한다면 무엇이 어렵고, 누가 억울하겠습니까.”
노숙진마저 빙그레 미소를 띠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니, 그 두 명의 최고 공신들의 뜻에 반할 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요동공은 그의 두 공신들이 순식간에 국론을 잡아 버리는 것을 보며 속내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요동국이 탐라국을 모방한 면이 많았으니, 국토령 또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다만, 그 모방의 대개가 철두철미하게 따르는 대신, 요동국의 사정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하였으니, 그 유연함이란 대체적으로 제대로 따라 하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하여, 국토령도 처음에는 모든 국토에 대한 완전한 왕토화 내지 국유화를 목표로 하였으나, 대지를 그 누구의 소유로 하지 않는 유목 부족들의 반발이 있고, 또 당시 고려인들이 소유한 토지를 수용하기에 재원이 부족한 탓에 요성과 일부 산업 관련 토지에 관해서만 수용하고 일단락한 바 있었다.
일단락이라곤 하나, 언제 다시 재개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고, 요동공에게도 어느새 잊힌 일이 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탐라공이 요동국의 강철 화포 제작을 묵인하고, 이방원의 후계자 등극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토지 국유화의 재개를 요구하니, 단숨에 국정의 주요 논건이 되어,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토지의 국유화를 반대하면, 비단 그걸 반대하는 걸 넘어, 요동국의 자체적인 화포 제작과 이방원 공자의 후계자 인정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니,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또, 토지 국유화를 진척할 상황도 과거에 비해 나아졌으니, 유목 부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제 요동국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에 비해 국유화에 대한 반발이 적을 것이고, 요동국의 재정 또한 사정이 크게 좋아진 만큼 노 판서가 말한 대로 ‘차근히 보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듯했던 것이다.
논의는 이후에도 얼마간 진행되었지만, 이미 대세는 바뀔 수 없었고, 속내로 불만이 있는 자들도 입을 다문 채 물러났다.
다만, 요동공은 정도전과 노숙진만을 남도록 하였으니, 다른 자들이 물러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일이 쉽게 되어 가니 다행이긴 한데, 내가 보기에 토지를 수용하라는 게 결국은 유덕사의 자산을 줄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네.”
“하나, 유덕사는 탐라공의 자산이기도 합니다. 방원 공자가 지분을 일부 넘기면 탐라공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지지요. 그런 중에 탐라공이 자신의 자산을 줄이는 것에 불과한 일을 요구하겠습니까.”
정도전은 일반론에 기대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곁에 있던 노숙진은 고개를 저었다.
“탐라공이 하는 일은 늘 간단히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는 바라는 게 있으면 자신의 손해 따위에는 초연한 자입니다.”
“하면, 탐라공은 요동국의 토지가 나라에 모두 수용되게 하려고 본인의 손해를 감수하려 한다는 게요?”
“평범한 자라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탐라공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탐라공은 그럴 수 있다고만 하지 말고, 그 이유를 짐작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정도전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였지만, 노숙진은 잠시 끌끌 웃음을 지을 뿐이었고, 그 끝에 나온 대답도 시원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알면 제가 탐라공과 견줄 수 있겠지요. 끌끌.”
무책임한 대꾸이긴 했지만, 솔직히 그 자리에 있는 세 사람 모두 동감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하면, 어쨌든 자네들이 보기에 지금의 상황에서 탐라공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불리할 게 없다는 건가?”
두 노신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으니, 요동공도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었다.
* * *
“선생,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인 것 같소만?”
“그렇습니다.”
하륜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대꾸하였지만, 진지한 표정 뒤로 다른 말이 없자, 방원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내 장인은 참으로 짐작할 수가 없는 분이오.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해괴한 선택을 하시다니…… 선생은 내 장인이 뭘 노리고 계신 것인지 짐작하실 수 있소?”
“지금으로서는 그저 요동국에서도 토지를 국유화하게 만들 요량이라는 정도밖에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흠.”
그건 짐작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드러난 사실 자체에 불과했다.
방원이 궁금해 하고, 아마도 탐라공의 요구를 전해 받은 모든 자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부분은, 요동국으로 하여금 ‘국토령’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탐라공이 얻는 유익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이 없었다.
오히려 유덕사의 많은 토지들만 나라에 수용되면서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도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다만, 한 가지 드는 생각은…….”
한데,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다던 하륜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말문을 열자, 방원이 몸까지 앞으로 기울이며 그의 말에 귀를 곤두세웠다.
“탐라공은 유덕사가 요동의 철물을 홀로 점유하는 걸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유덕사가 독점하는 게 싫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유덕사가 철물을 독점해서 철물의 값을 올렸소? 아니면 질을 떨어뜨렸소? 오히려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저질의 철물을 비싸게 파는 자들이야말로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이오. 게다가 장인어른이야말로 독점 중에 독점을 가진 분이 아니오?”
“맞는 말씀이시지만, 토지가 나라에 수용되었을 때를 감안해 볼 때, 유덕사에 미치는 당장의 영향으로 가장 큰 것이 그 부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동에도 회사가 여럿이니, 유덕사의 초창기에 철을 다루는 회사들도 몇몇 있었다.
무산 철소가 요동국 최대, 고려 최대의 철소인 것은 초창기부터였지만, 그렇다고 요동국의 철소가 무산 철소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게다가 유덕사가 요동국 전역에 철물을 유통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 당연히 요 지방에서는 몇몇 중업 및 철물 회사가 운영되고 있었다.
한데, 그 회사들이 내놓는 철물이라는 게 유덕사의 것에 비하면 하등한 품질이었으니, 그저 유덕사의 철물이 요 지방까지 유통되는 비용만큼 더 비싸지는 ‘패널티’에 힘입어 운영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러다 유덕사와 그들 회사들 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시작은 그쪽 회사들부터였다.
유덕사가 유통 비용까지 감수하고도 점점 낮은 가격으로 철물을 판매하자, 더 이상 가격만으로 승부하기 어려워진 그 회사들이 힘을 합하여 요동국 관원을 구워삶아 유덕사가 요 지방에서 철물을 유통하는 것을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방원이 요동공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은커녕, 오히려 방과 공자를 위해 경계하는 분위기가 컸던 만큼 요동국의 관리들도 비리를 저지르는 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 크게 분노한 방원은 하륜 등과 논의하여 특단의 조치를 시행하였으니, 그 수단이 바로 토지였다.
철소는 거의 다 산에 가까운 곳, 고을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만큼 그 철소로 이어진 길은 길이면서도 길이 아닌 곳이 태반이었다.
유덕사는 길이 나 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길이 아닌 그 땅들을 사들여 철소의 진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요 지방의 회사들이 크게 항의하고 심지어 몸싸움이 나기도 했는데, 유덕사는 충분히 무시하고 감당할 만했다.
이에, 요 지역의 회사들은 다시 요동국 관리를 동원하여 일을 해결하려 했지만, 유덕사는 엄연히 정당한 계약에 의해 얻은 토지인 만큼 차일피일 협상을 미룰 수 있었으니, 그렇게 한 달, 두 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덕사의 철물은 요 지방에 성공적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요동국에서 철물의 경쟁자는 없었으니, 요 지방의 그 회사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두 무너져 유덕사에 흡수된 상태였다.
그러니 만약 토지가 나라에 속하여, 그 방법을 더 쓰지 못하게 된다면, 차후에 생겨날 다른 중업회사를 견제할 방법에 제약이 생긴다 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 회사들을 무너뜨린 것보다 대장간에 손을 뻗은 게 탐라공의 심기를 더 거슬렀을 수도 있습니다.”
“……?”
“아시지 않습니까. 탐라공은 새로이 창업하는 자들을 매우 열정적으로 돕습니다. 탐라공이 많은 물산을 독점한다곤 하나, 최근에 이를수록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그것이 새로 회사를 세우는 자들이 탐라공의 독점 분야에 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탐라공은 그런 자들을 오히려 돕고 있지요. 그걸 보자면, 탐라공의 눈에는 대장간마저도 공격한 우리 유덕사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 그 또한 백성들이 좋은 철물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소?”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만, 탐라공의 눈에는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하륜은, 그가 탐라공의 생각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불문하게, 탐라공의 가치관을 제대로 짚고 있었다.
토지를 이용한 압박으로 요 지역의 회사들에게 승리한 유덕사는 이후 같은 방법을 일개 대장간 규모의 철물 생산자에게도 사용했다.
작거나 동떨어진 고을에는 유덕사든 다른 회사든 대량으로 생산되는 철물이 팔리는 대신 전통적으로 그곳에서 철물을 만들어 내는 대장장이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방원이 보기에 그 품질이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하여, 먼저 그들에게 철물 자체는 알아서 생산하더라도, 유덕사의 철괴를 써서 그 품질을 올릴 수 있게 하였는데, 적지 않은 자들이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모두 자기들만의 고집이 있어, 제철 과정부터 모두 자기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 주장하니, 방원은 그런 자들을 토지로 압박한 것이다.
당연히 규모에 있어 비교가 안 되는 대장장이들은 오래 버틸 수 없었고, 절반쯤은 유덕사의 철괴를 쓰기로 하되, 나머지는 울화를 내며 대장장이 생활을 접어 버리기도 하였다.
“나는 철물의 값을 올린 적도 없소. 심지어 경쟁하느라 내린 철물의 값도 그대로 두고 있소. 이를 두고 어찌 독점이라 할 수 있소?”
방원은 붉어진 얼굴로, 마치 하륜이 탐라공인 양 열불을 내었다.
그에게 있어 독점이란 단지 물산의 생산을 장악한 것을 넘어, 그걸 통해 백성들로부터 획리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일면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하나, 역사에서 석유왕 존 D. 록펠러도 독점을 위해 석유의 가격을 본래 가격의 20퍼센트로 줄이고 경쟁자들이 몰락한 뒤에도 다시 올리지 않았음을 안다면, 그리고 그랬음에도 그 독점 체계가 결국은 사회적 후생을 저하하여 훗날 록펠러 가문의 ‘스탠더드 오일’이 국가의 손에 강제 분할되었음을 안다면, 탐라공이 그 의도와 무관하게 유덕사의 행태를 좌시하지 않는 걸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걸 아는 걸 불가능하니, 방원의 불만은 사라질 수 없었다. 아니, 알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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