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29)
뜻하지 않은 그렇지만 너무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 건 10월 초였으니, 몽주가 남양으로 떠나기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외할아버님, 그간 강녕하셨어요.”
공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몽주와 앵도 앞에 정지한 마차에서 먼저 내린 사내아이가 몽주 내외를 보자마자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계집아이도 인사를 올리니, 사내아이보다는 훨씬 명랑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안녕하셨어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하하, 오랜만이로구나. 이리들 오너라. 한번 안아 보자.”
몽주가 양팔을 벌리며 웃으니, 사내아이 승제는 조금 쭈뼛했지만, 계집아이 순화는 방긋 웃으며 먼저 몽주에게 폭 안겼고, 승제도 뒤늦게 순화와 더불어 몽주의 팔 안에 들어왔다.
“아이구, 이제 다 컸구나.”
이제 열한 살이던가. 쌍둥이 남매는 제 부모들이 다 키가 큰 덕인지 일반적인 그 또래에 비해 키가 컸다. 특히 승제는 얼굴만 보지 않으면 청년으로 착각할 만큼 발육이 좋았다.
그렇게 잠시 쌍둥이 남매와 부벼 대고 있자, 마차에서 강영이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그녀의 손에 잡혀 마차에 내리는 아이도 있었다.
직전까지 잠에 빠져 있었는지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 통통한 그 아이는 막내 승도였다.
“승도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인사 드려야지.”
“……아녀하세여.”
고개만 까딱거리곤 다시 어미의 팔에 매달리며 눈을 감는 아이.
“아니, 얘가…….”
“허허, 그만두어라. 눈꺼풀은 천하장사도 들지 못하는 법이지.”
어미가 야단을 치려는 걸 막으며, 몽주가 쌍둥이 남매를 양쪽에 두고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그러곤 졸린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는데, 진짜 졸리기는 무척 졸린지 낯선 외할아버지에게 안기는 데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오히려 몽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본격적으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승제가 ‘쟤는 올 때도 내내 잠만 자더니 아직도…….’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몽주는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로구나.”
“네, 잘 계셨죠?”
미소를 지으며 아비를 보는 강영에게서, 이제 누군가의 딸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더 강하게 비쳤다.
“오느라 수고했다. 들어가자꾸나.”
“예, 한데 강중이는…… 아, 상해에 있겠군요. 내 정신 좀 봐.”
“허허, 그래, 혼인 문제로 잠깐 머물다가 한 달 전쯤에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
“걔도 참 대단해요. 그렇게 느닷없이 신붓감을 정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나란히 공택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화를 나누니, 강중이가 화제가 되었다.
“괜찮으세요, 며느릿감?”
“나야 강중이가 좋다면 상관없지.”
“피이.”
강영이는 입술을 삐죽이면서 은근히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도 앵도가 며느릿감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던 것인데, 딸아이의 그런 시선을 느낀 앵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쩌겠니. 아들 녀석이 좋다고 그러고, 아비가 상관없다고 그러는데. 너는 어떠니?”
앵도가 물음을 던질 무렵에 그들은 이미 공택 안으로 들어왔으니, 하녀들에게 아이들을 데려가 쉬게 하고, 세 사람은 안방에 모였다.
“저는 좀 놀라긴 했지만, 강중이가 선택한 여자라면 크게 부족한 부분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물론, 어머니께서 저어하시는 부분도 충분히 이해하고요. 말도 잘 안 통할 테고, 풍습도 다를 테니까요. 또, 뭐…… 그렇죠.”
제법 짙은 피부색을 가지긴 했지만, 앵도만큼은 아닌 탓인지, 강영이는 굳이 피부색을 언급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앵도는 여전히 조금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한 번 차고는 허탈한 양 말을 받았다.
“내가 반대해 봤자, 나만 속 좁은 여자가 되는 것 같아서 더는 못하겠더라.”
“어머니만큼 마음이 넓은 분이 어디 계시다고 그러세요. 어머니시니까 아버지 같은 분도 받쳐 주시는 거죠.”
“응? 왜 말이 그렇게 흘러가느냐?”
“사실 그렇잖아요. 집 밖에 나가 계신 적도 많고, 만날 일이 많아 밤늦게 들어오시고.”
“허허, 그거야 사내는 대개 그렇지, 어디 나만 그러더냐? 네 남편도 마찬가지일 텐데?”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자식들 아끼는 마음이 커서 그런지 바쁜 중에도 애들은 꼬박 챙겨요.”
“그러니 다행이구나. 한데, 요새…….”
앵도가 무슨 말을 꺼내려고 그러자, 강영의 표정에 아차 싶은 기색이 스쳤으니, 그다음 나올 이야기의 주제를 벌써 꺼내기 싫음이 분명했다.
하여, 몽주가 마치 앵도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다른 말을 꺼내어 주제를 바꾸고자 하였으니, 어차피 강영이 갑작스레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인 바, 오자마자 그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많이 컸더구나. 막내도 알아서 걸으니, 너도 이제 좀 한숨 돌릴 수 있겠어.”
“예에, 정말 다행이에요. 승도는 아직 어리광을 한참 피워야겠지만, 이제 말은 통하니까요.”
강영은 얼른 아버지의 말을 받아 대꾸하였고, 주제가 외손자들인 만큼 앵도도 자기 말이 끊긴 것을 상관치 않고 아이들 이야기에 응하였다.
그날은 공택에서 쉬었고, 다음 날은 몽주가 일을 일찍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자동차도 구경시켜 주었는데, 승제는 몹시 신기해 하면서 자기도 자동차를 몰아 보고 싶어 하여, 몽주가 직접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이틀의 시간이 더 흐른 뒤, 강영이 아이들을 떼어 놓고 몽주가 있는 집무실을 방문하였으니, 몽주도 올 게 왔음을 짐작하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무슨 말이든 해 보아라.”
“사위에게 혹 불만을 가지고 계신가요?”
강영의 말을 들은 몽주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띠며 되물었다.
“그렇게 보이느냐?”
“예, 그래요. 물론, 지금껏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한데, 늘 한 가지씩 제약을 걸어 두시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만 해도 그이는 아버님께 결코 손해가 아닌, 오히려 큰 이득이 될 만한 제안을 했다고 봐요. 한데, 아버님은 유덕사의 토지를 빼앗아 요동국의 것으로 만들게 하셨어요.”
“방원은 장차 요동공이 될 것이다. 하면 그 땅이 나라의 것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아뇨, 달라요. 유덕사는 그이가 십여 년의 시간 동안 온갖 노력을 쏟아부어 키워 낸 회사예요. 유덕사의 재산은 그이의 피땀이고 살이라고요. 저도 제 남편과 유유자적할 수 있었던 시간을 희생하며 지켜본 회사지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유덕사의 그 많은 땅이 사라진다니 허탈할 정도예요.”
“너희가 허탈해도 백성들에게는 더 나을 게다.”
“그건 상관없는 일이에요. 백성들은 그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요.”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
몽주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으니, 강영도 멈칫하였다. 그녀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대개는 그래요.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래, 그건 맞는 말이다. 한데, 그저 일부의 사람이 만족하지 못한 것과 그 일부를 괴롭히는 건 다른 이야기지.”
“그 철물 회사들과 대장장이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것도 다른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들이 얼마나 조악한…….”
“조악한 품질의 철물을 비싸게 팔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무너뜨린 것을 정당화하진 않는다.”
“치사한 방법을 동원한 건 그 회사들이 먼저였어요.”
“대장장이들도 치사했더냐?”
“그자들은 멍청했지요. 자기 물산의 품질을 올릴 수 있던 걸 제 고집으로 거부했으니까요.”
“그렇구나. 하면, 그냥 두기만 해도 알아서 무너졌을 게다.”
“그동안 손해를 볼 백성들은 어쩌고요? 그런 곳은 유덕사의 철물이 쉽게 들어가지 못하던 곳이라고요.”
“대장장이들을 무너뜨리려고 산 토지에 들어간 비용으로 유통로를 개척했으면 됐겠지.”
“…….”
강영은 말을 멈췄지만, 아비의 말에 설득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고 있는 꼴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사위가 못마땅하세요?”
“허허, 아니래도, 자꾸 그러는구나. 너도 그게 아닌 걸 알지 않느냐. 나는 유덕사에게 손해를 끼치고자 함이 아니다. 내가 바란 것은 요동국이 탐라국처럼 국토령을 시행하는 것이다. 비록 유덕사가 그 와중에 많은 땅을 잃게 되겠지만, 마땅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고요. 제대로 된 보상도 아니고요. 그리고 탐라국에 국토령이 유효했다고 해서 요동국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만약 그게 필요하면 그이가 요동공이 되었을 때 시행했을 거라고요.”
“글쎄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땅을 그렇게 사들이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거야 아직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요동공의 아들이자 탐라공의 사위가 되어서 탐라국이 국토령으로 치세에 큰 이점을 누리는 걸 잘 알 만한데도 느끼지 못했다면 전혀 생각이 없는 게지.”
“예, 그럴 수도 있지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아버지가 그걸 강요하시는 거냐는 거예요. 결국 아버지는 앞서 아버지가 그이의 행태를 비난하신 바를 그대로 그이에게 행하신 거라고요.”
“허허.”
몽주는 점점 거세지는 딸의 항의 끝에 헛웃음을 흘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천몽 속 자신은 독재자였고, 자신이 판단하기에 옳다고 싶은 걸 강제하는 걸 피하지 않았다.
요동국에 대한 국토령 강요(?) 또한 마찬가지.
탐라국처럼 국토령이 유효할지, 제대로 쓰일지 확신할 수 없지만, 몽주는 화포와 방원에 대한 인정을 대가로 요동국이 국토령을 시행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근데 그게 뭐?’
몽주는 흘리던 웃음을 거두며 강영을 향해 담담하게, 아니, 딸아이는 좀처럼 본 적 없던 냉정한 표정과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네 남편과 같더냐?”
“…….”
“너는 나를, 지난 30년 동안 탐라와 고려를 지난날과 전혀 다른 강성한 나라로 탈바꿈시킨 나를, 탐라상단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네 남편과 똑같이 평하느냐 물었다.”
“……!”
“필요하다면, 네 남편이 시행했을 거다? 정녕 그리 여기느냐? 네 남편이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요동공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국토령을 시행할 수 있었으리라 보느냐?”
“모, 못할 이유가…….”
“……많지. 당장에 조정 회의에서 수많은 대신들이 반발할 것이고, 한 뙤기의 땅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모두 다 반대하고 나섰을 것이다. 특히 고려계 백성들이 더욱 그러했겠지. 하면, 거란계가 아닌 그들의 지지에 힘입고 있는 방원이 그 반발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이라 보느냐?”
“…….”
“천만에. 방원은 후계자로서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유덕사가 가진 힘은 함주에 국한되어 있고, 요동국의 중심인 요 지방에서는 전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힘이 없다. 그건 요동공이 후계자로 낙점하는 것과 무관하게 본인이 갖춰야 할 힘이니, 방원은 지금껏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방원이 뭘 한다는 게냐?”
“그이는 그렇게 무능력하지 않아요!”
“무능력하다는 게 아니다.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야. 만약 그런 상황을 무시하고 무작정 행동하면 그것이야말로 무능력한 거겠지.”
몽주는 잠시 말을 끓었다가 시무룩하면서도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딸을 향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는 알겠다만,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진 않다. 방원이 요동공의 후계자가 된 이상, 나는 내 사위를 사위이기 전에 차기 요동공으로서 대할 수밖에 없다. 이건 요동공도 마찬가지일 터, 아들이기 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또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와 요동공이 과정이야 어떻든 방원의 치세 이전에 요동국에서 국토령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덕사의 땅? 대저 탐라국과 요동국을 다스리는 자의 눈에 그게 대수롭게 보이겠느냐?”
“나라를 다스린다고 회사를 무시해도…….”
“무시가 아니라!”
“……!”
생전 처음 듣는 몽주의 노성에 강영이 크게 놀라 홉 뜬 눈으로 그녀의 아비를 바라보았다.
“나라를 다스릴 자라면, 일개 회사의 이득 따위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국공은 공국을 다스리는 자이지, 회사를 이끄는 자가 아니란 말이다. 나라의 사정보다 제 손에 쥐고 있는 회사의 이득에 얽매이는 순간, 방원이 좋은 국공이 될 가능성은 없다. 아니, 그 전에 내가 손발을 다 잘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
“딸아, 내 사랑하는 딸아. 너도 국공부인이 되려 한다면, 시야를 더 넓혀라. 유덕사는 고려 전체에서는 물론이고, 요동국에서조차 고작 한 줌에 불과하다. 땅을 조금 잃는다고 그 먼 거리를 격해 아이들까지 끌고 올 심보라면, 너 때문이라도 방원이 요동공이 되면 안 될 게다.”
“……!”
마지막 즈음에는 노기가 잦아들었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오히려 더 잔혹했으니, 강영은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하나, 몽주는 위로의 말 한 마디 꺼내지 않고 그저 주시만 할 뿐이었다.
딸아이는 원망과 후회를 담은 시선을 마지막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물러났다.
강영이 탐라를 떠난 건 칠 일 뒤였으니, 그사이에 부녀지간의 분위기는 내내 냉랭하였다.
앵도는 일찌감치 그 분위기를 눈치챘지만, 국공부인으로서의 이력(?)이 쌓일 만큼 쌓인 그녀는 그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들리기로, 딸아이가 어미에게 기대어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고 시도한 듯한데, 앵도도 딸의 투정을 잘 들어 줄지언정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아마 강영이로서는 처음으로 느끼는 부모로부터의 찬바람에 몹시 서운했을 것이고, 그런 감정을 전혀 숨기지도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공택 내의 분위기마저 그에 휩쓸린 건 아니었다.
그건 모두 외손자들 덕이었으니, 세상 물정 모르는 게 특권인 아이들은 그저 신날 뿐이었다.
다만, 순화는 어미의 기분을 파악한 듯했고, 그게 외할아버지와의 문제라는 것도 눈치챈 듯했으니, 어미를 위로하고 몽주에게 재롱을 피우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에 비해 어린 승도는 물론, 순화와 같은 나이인 승제도 그저 신기한 것이 많은 공택과 탐라섬에서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자동차에 푹 빠진 승제는 매번 몽주에게 자동차를 태워 달라 떼를 썼으니, 그에 지친 몽주는 비서원 관리에게 승제를 맡겨 자동차를 태워 주게 명하기도 하였다. 가족 간의 일은 관리에게 좀처럼 맡기지 않는 몽주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에 비해, 승도는 좀 더 얌전한 편이었는데, 순화가 그랬던 것처럼 ‘접대형 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접대 받는 아기라고나 할까.
그도 그런 것이 워낙 먹성이 좋아, 낯선 음식도 마다치 않고 일단 입에 넣고 보니, 먹이는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찌나 귀엽고 보기 좋은지, 몽주와 앵도 모두 연신 음식을 대령하게 하였으니, 공택의 식모(食母)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자식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전혀 아깝지 않은 건 외손자에게도 마찬가지인 법이라, 승도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린 채 음식을 씹을 때면 몽주와 강영도 잠시 냉랭한 상황을 잊고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처음 볼 때까지만 해도 너무 통통해서 이러다 뚱보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는데, 먹는 걸 보고 있으면, 적어도 먹는 것에 비해 살이 찌지 않은 게 확실했다.
‘승도가 세종인들 어떻고, 아닌들 어떠하리.’
세종 이도의 탄생을 기원했던 사내아이였지만, 막상 승도를 보니 그런 거야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건강하게 자라 가진 재능을, 그 재능이 무엇이고 얼마나 큰지는 상관없이 마음껏 펼쳐 세상 속에서 한몫하길 바랄 따름이었다.
어쨌든 승도 때문에 간간이 말을 나누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쌀쌀했던 부녀 사이에 조금 대화다운 대화가 짧게나마 오간 것은 강영이가 출항하기 직전이었다.
“이건 말씀드리고 떠나야 할 것 같아요.”
“……?”
“그이가 저를 여기로 보낸 건 아니에요. 오히려 만류하였지요. 그저 제 고집으로 온 거니까, 혹여 오해는 말아주세요.”
“알겠다. 나도 하나 물어도 되느냐?”
“네.”
“이번에 요동공과 방원이 내게 각각 제안한 것이 참으로 교묘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더냐?”
“그건 저도 알지…….”
“성이 하씨더냐?”
“…….”
움찔한 강영이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대답은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 질문이 마치 방원과 유덕사에 대해 몽주가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고 있음을 시위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었고, 몽주의 의도에도 그런 면이 없진 않았다.
“가 볼게요.”
결국 서운한 표정을 씻지 못한 채 강영이 몽주 내외에게 인사를 올리고 아이들과 함께 중함선에 승선하였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몽주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쥐는 감촉을 느꼈으니, 아내가 곁에 다가와 있었다.
“사위가 요동공의 후계자가 되는 게 마냥 좋진 않네요.”
“그러게 말이오.”
그저 유덕사만 경영했다면, 강영도 굳이 그녀의 아비와 부딪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유덕사 사장의 ‘사모님’으로서는 딸아이도 부족함이 없었으므로.
하나, 역사는 기어이 방원을 ‘왕좌’에 올리고자 하였으니, 몽주는 그의 요동국 경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에서 조선 태종을, 알려진 것보다 더 좋은 임금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그였지만, 지금의 방원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의 머리에 자본가로서의 사상이 자리 잡은 탓이었다.
자본가를 육성하는 정치가와 자본가 그 자체인 정치가는 엄연히 다른 법이니, 고려의 초기 자본 축적 과정을 조율하고자 하는 몽주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고, 그 최초이자 최소한의 방법이 요동국의 국토령이었다.
‘하륜이라…….’
방원의 곁에 하륜이 있음을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으로, 그가 방원을 따라 탐라에서도 머물렀을 때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시 방원의 심복을 주시하긴 했지만, 그 행동에 대해 그러했을 뿐, 신분을 따로 조사하진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수염을 밀고 바짝 말라 버린 탓에 예전의 그를 알던 자들마저도 알아보기 어려웠던 모양이니…….
다만, 그가 방원의 곁에 있음을 알게 된 이후에도, 역사에서 하륜이 방원의 치세에 크게 활약한 것과 무관하게 지금까지는 그저 유덕사의 경영에만 국한하여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제는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더해, 전해진 게 모두 사실이라면, 하륜도 방원 못지않게 많이 바뀌었을 테니…….
‘폭주하기 전에 기를 한번 죽여 놔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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