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39)
* * *
차카차카찰칵!
카메라 소리가 요란했고, 기자들의 목소리도 요란했다.
“여기 봐주세요!”
“이쪽도요!”
그 소리에 따라 네 명의 남녀가 몸을 조금씩 돌리면서 나름의 포즈를 취하였으니, 그중 두 사람은 능숙하게 자세를 취하였고, 다른 두 사람은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떨려요.”
“나도.”
입만 웃는 와중에 나름 복화술로 짧은 심정을 주고받은, 그 어색한 두 사람은 몽주와 진주였다.
‘살다 보니 레드카펫을 다 밟아 보는군. 근데 생각보다 카메라 세례를 많이 받네. 우리가 누군지 아는 기자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연습 삼아 찍는 건가.’
그 자리는 오션스 일레븐의 제작발표회였다.
다다음주부터 방송될 그 서바이벌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은 간만에 대중과 언론의 큰 주시를 받는 대형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일단 두 척의 범선과 한 척의 럭셔리 요트가 동원되어 남태평양을 무대로 제작된 예능이라는 것 자체가 한국 방송사에서 기념비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규모가 커진 만큼 캐스팅도 수월해서, 출연진도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니, MC급 코미디언 2명을 중심으로 예능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인기 배우들을 비롯해 한류 아이돌, 그리고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춘 아나운서와 방송인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지금 몽주와 같이 레드 카펫을 걸은 홍시안이, 소위 가장 급이 낮은 출연 배우로 평가받고 있으니, 그녀도 나름 괜찮은 인지도와 인기를 가진 여배우임을 생각하면 캐스팅만으로도 큰 주목을 받기 부족함이 없었다.
“하하, 이거 의외로 재밌는데요?”
그리 길진 않았지만, 체감상으로 꽤 길었던 레드카펫을 걸어 나와, 카메라의 포화에서 벗어나자 강지혁이 흥겨워하며 말하였다.
그는 시안과 만난 이래로 몇 번 카메라를 탄 경험이 있어서인지 몽주나 진주보다는 더 자연스럽게 카메라 세례를 즐길 수 있었다.
“그랬나요? 난 기자들이 저 인간은 누구야라는 시선을 보내는 게 영 민망하던데.”
“그거야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면 곧 알게 되겠죠.”
“난 프로그램에 출연 안 했는데요?”
“아, 이사장님은 출연 안 하셨지만, 진주는 출연했으니까요. 그것도 의외로 비중이 컸다던데. 그러니 진주의 애인으로는 알려지지 않을까요? 하하하.”
“맞아요. 아마 저보다도 많이 비칠 걸요.”
시안까지 거들며 말하는 걸 들은 몽주가 진주를 바라보니, 그녀가 쑥스럽게 웃으며 얼굴을 가렸다.
“그 정도였어요?”
“실제로 봐 봐야 알죠.”
말하는 걸 보니, 촬영에 많이 참여한 모양이긴 했다.
오션스 일레븐은 이미 5개월 전부터 사실상 촬영이 시작되었으니, 처음 2개월 정도는 한국에서 출연진들이 범선에 적응 훈련하는 데 집중하였고, 최근 3개월 동안은 남태평양에서 촬영을 하였다.
물론, 범선 적응 훈련이라 봐야 뱃멀미를 떼고 범선 조작하는 것이 화면에 그럴싸하게 나올 수 있는 정도였고, 3개월간의 촬영도 실제로 촬영한 시간을 다 합치면 2주나 나올까 싶은 정도였다.
출연진 중에 지난 5개월을 통째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 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여유로운 이는 없었고, 진짜로 출연진들이 범선을 몰아 항해 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출연진들은 평소에 한국에 있다가 촬영 준비가 되면 그때 비행기와 배를 타고 촬영지로 향하였으니, 오히려 촬영에 협조하는 몽린 재단의 직원들이 남태평양에 더 오래 머물렀다.
직원들 중 오션스 일레븐의 촬영에 협조하는 이들은 서른 명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바당보름 출신이었고, 진주도 그중 한 명이었다.
다만, 다른 직원들이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과 그 주변 해역의 촬영지로 직접 범선을 몰아야 했기에 거의 상주한 것에 비해 진주는 다른 출연진처럼 한국과 현지를 수시로 오갔다.
그 와중에 몽주도 진주가 ‘여해적선장’이라는 ‘배역’을 맡았다는 걸 알긴 했지만, 시안이 자기보다 많이 나올 거라고 할 정도로 비중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어쨌든 가장 먼저 레드카펫을 통과한 탓에 가장 먼저 발표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홍시안은 회장 단상 뒤쪽 출연진 대기실로 향하였고, 남은 세 사람은 기자단석보다도 앞에 놓인 한 줄의 특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사장님!”
물론, 일반 관객석 한쪽에 모여 있는 재단 직원들의 고함 소리에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도 잊진 않았다.
덕분에 다른 관객들, 주로 출연진들의 팬들일 게 분명한 이들로부터 ‘쟤넨 뭔데, 차려입고 맨 앞에 앉는 거냐?’는 시선을 받아야 했다.
잠시 후 다른 출연진들도 하나둘씩 입장하였으니, 레드카펫을 통과한 순서대로였고, 뒤로 갈수록 인기와 인지도가 높은 셀러브리티였다.
바로 뒤로 들어온 출연진인 두 명의 아나운서들은 방영될 방송국의 전속 아나운서였으니, 남자 아나운서는 국민 사윗감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호감을 받고 있는 이였고, 여자 아나운서는 어지간한 여성 연예인들보다 남성팬이 많다는 스포츠 아나운서였다.
그들은 대기실 대신 진행석에 나란히 서서 곧 있을 발표회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그사이 다른 출연진들도 들어왔는데, 그때부터는 회장 안이 팬들의 고함 소리와 비명으로 떠들썩해졌다.
몇몇의 남녀 아이돌들이 들어왔고, 이어 배우들과 MC급 코미디언들도 들어왔으니, 그 면면은 어지간한 대형 시상식장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출연진들 대부분이 뒤쪽 대기실로 향하기 전에 몽주 쪽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인사의 대상은 몽주가 아니라 옆에 앉아 있는 진주였다.
“거 보시라니까요. 이제 이사장님의 명함에 진주의 애인이라고 박아 넣으셔야 할 겁니다.”
“선배, 가만히 좀 있어요!”
다시 지혁이 너스레를 떨자, 몽주의 눈치를 보던 진주가 소리는 작지만 이 가는 소리를 섞으면서 강하게 항의하였다.
“괜찮아요. 뭐 틀린 말도 아닌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면, 내가 진주 씨 애인이라는 게 알려지기 싫은 거예요? 허어, 아까 보니까, 크리스 오 씨랑 많이 친해진 모양이던데. 허, 설마?!”
“아오, 아니라고요.”
진주는 억울한 표정으로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였다.
크리스 오는 출연진 중 한 명인 남자 배우로 독일계 혼혈인데, 키가 190센티미터에 가깝고 어깨도 떡 벌어진 육체파 미남이었다.
그는 회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의 곧바로 진주에게 다가와서는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진주에게 악수를 청하는 듯하더니, 슬쩍 진주의 손등에 키스까지 남기고는 떠났다.
그렇게 진주가 안절부절못하는 중에 아나운서들의 정숙 요청이 있었고, 조용해진 회장 안이 암전되면서 정면의 스크린이 밝아졌다.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이라는 타이틀이 뜨고 제작 관련 인물들의 이름이 지나간 뒤, 본격적인 오션스 일레븐의 프로모션 영상이 시작되었다.
“헉!”
“헐…….”
“크크크.”
영상의 첫 장면이 드러나는 순간,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의 입에서는 저마다 다른 반응이 나왔다.
진주는 경악하고 직후에 부끄러워하며 몽주의 눈치를 보았고, 몽주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진주에게 실소를 보였으며, 지혁은 자신의 예언이 맞아 떨어질 것임을 확신하며 진주를 향해 놀림의 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첫 장면부터 진주가 등장, 그것도 단독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해적선으로 분한 양진이호의 선수에 한 다리를 올린 채 서서 외망원경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해적선장 진주의 모습이었다.
한데, 해적선장으로 분한 진주의 차림에 꽤 노출이 있었다.
이마에 비단 두건을 두른 것도 그렇고, 외투도 동양풍이긴 했지만, 사실상 씨스루 의상이나 다름없는 그 외투 안에는 정작 동양풍과는 거리가 먼 가죽 핫팬츠와 단추가 몇 개 풀려 가슴골이 드러나는 서양식 린넨 셔츠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저 잡종 의상은 대체 뭐야?’
몽주의 소감은 그러했지만, 의외로 회장 안의 반응은 꽤 좋았다.
오~ 하며 감탄하는 분위기 속에 양쪽 대각선 구석에 위치한 녹화 카메라들이 일제히 진주 쪽으로 향했으니, 진주가 등장하고 그녀의 뒤로 해적으로 분한 몽린 재단 직원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는 그 몇 초 동안은 진주에게 회장 안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진주는 그런 분위기가 감당이 안 되는 건지, 몽주의 팔짱을 끼며 고개를 숙이곤 중얼거렸다.
“그게, 촬영 때는 너무 더워서 저렇게 야하게 비칠지는 몰랐어요…….”
몽주는 다시 웃으며 한 손으로 자기 쪽으로 기댄 진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사이 화면이 다시 바뀌었고, 대형 범선 위에 등장한 출연진들이 하나둘씩 소개되었다.
출연진마다 캐릭터에 맞춘 영상이 흐른 뒤, 지금까지 촬영한 화면들을 보여 주며 프로그램의 성격과 내용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왔다.
‘항해’라는 타이틀이 점멸한 뒤로 항공캠과 헬리캠으로 찍은 대형범선의 항주 장면이 나오더니, 폭풍과 사투를 벌이는 출연진들의 모습이 정말 실제처럼 보였다.
물론, 진짜 폭풍 때 배를 띄울 리는 없었으니, 약간 기상이 좋지 않은 중에 카메라 워크와 후반 보정 작업으로 그럴싸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이어서 모험, 전투, 음모, 배신, 우정의 타이틀 뒤로 그에 맞춘 짧은 영상들이 흘러나왔고, 마지막으로 ‘사랑’이라는 타이틀이 떠올랐다.
“헉!”
“꺄아아악!”
진주가 깜짝 놀라는 음성이 터뜨리기 무섭게 일반 관객석에서 크리스 오의 팬들이 지르는 새된 비명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스크린에 크리스 오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여해적선장’을 바라보는 장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알 수 없지만, 얼핏 보면 크리스 오와 여해적 간에 로맨스가 있는 것처럼 해석될 만한 장면이었다.
“아니에요…… 저거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장면이 지나간 뒤 진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역죄인 모드로 변명을 흘렸다.
회장 안의 분위기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프로듀서의 표정을 보며 몽주는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 어지간한 여자 연예인보다 매력적이면서 대중에게 신선한 인물인 진주를 프로모션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편집으로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으나, 몽주는 괜히 심각한 표정으로 진주를 향해 말했다.
“진주 씨, 실망인데요.”
“……!”
“아무래도 크게 혼이 나야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따가 혼내야겠다고요. 엉덩이를 마구 때려 줄 거예요.”
“…….”
몽주는 자신의 어깨에 진주가 다시 머리를 기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끄덕끄덕.
그리고 그녀의 머리가 위아래로 조금 흔들거리는 것도.
* * *
“저더러 잘 놀다 가라더군요.”
몽주가 전한 무학 대사의 유언(?)을 들은 두신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스님은 진짜 뭘 알고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나도 몇 번이나 물어보고 싶었던 거지만 진짜 물을 수는 없었죠.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짓일 테니까요.”
“뭐, 요즘도 천기를 본다는 소리를 하는 자들이 많은데, 그 중도 그런 식이었겠지. 그냥 몽주 씨가 맘에 들지 않은 걸 자기 식으로 표현했고, 몽주 씨가 더 이상 배척할 수 없을 만큼 커지니까 그 마음을 결국 꺾은 거고.”
합리적으로 본다면 재상이 말을 받은 것이 맞을 듯했다.
설령 그게 아니고 무학이 진정 뭔가 짐작하는 게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그는 고인일 따름이었다.
“어쨌든 잘 놀다 가라니, 잘 놀아 봐야겠죠.”
“근데 지금까지도 잘 놀았잖아요. 앞으로 진짜 그냥 놀아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이미 한국사 최고의 위인이 되신 건데요.”
그러고 보면, 예전 회의가 놀이이던 시절에 재상이 내놓았던 발전안의 목표를 어느새 달성한 상태였다.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
싱가포르를 얻은 이상, 고려가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그것도 단지 배를 띄워 어느 곳에 닿는 수준이 아니라 실질적인 무역로를 개척하였고, 부루나이까지는 그 무역로의 가동으로 이미 이익을 얻고 있었다.
여송 파식군까지는 그곳의 인구가 가진 소비력만으로도 무역의 이점을 취할 수 있었고, 부루나이는 아직 소비 시장으로서 자리 잡진 못했지만, 대신 고무를 비롯한 몇몇 원자재의 생산기지로서 교역의 이득을 발생시키기에 충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은 아니지만, 지리적 이점을 생각하면 싱가포르와의 무역로 역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명 이득을, 아마도 아주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남쪽과 동쪽도 아시아의 영역권에서는 모두 발을 뻗었다 할 만했다.
아직 향신료 제도를 장악(?)하진 않았지만, 그건 정말 안 했을 뿐이지, 그곳의 향신료가 고려나 명나라 등지에서 좀 더 각광받는 것들이었다면, 이미 탐라국은 향신료 제도를 오가는 무역로를 완전히 독점했을 것이다.
물론, 서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민간에 의한 탐험 시도가 남쪽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이상, 몽주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향신료 제도 이남을 넘어 오세아니아 지역까지도 결국 탐라국을 중심으로 한 해양 네트워크의 일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쯤에서 몽주는 재상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쯤에서 멈출까요?”
천몽 동안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를 완성하는 것도 어렵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던 재상이었으니, 지금도 같은 생각이냐는 질문이었다.
재상의 고개는 잠깐의 텀을 두고 좌우로 돌아갔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제 예상은 예상일 뿐이었고, 천몽 속 세계가 가진 잠재력과 몽주씨의 능력이 제가 가늠한 것보다 더 크다는 게 드러난 만큼 멈출 이유가 없지요.”
그 대답에 몽주의 시선은 이번에는 두신을 향했고, 그에게도 질문이 던져졌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네, 가능하다고 봅니다.”
두신의 대답과 함께 세 사내의 시선들이 서로 뒤엉켰다.
몽주가 묻고, 두신이 답한 ‘그것’이란 바로 ‘수에즈 운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건설함으로써 주도적으로 서양과 접촉하고, 동서양의 교역 이익을 수에즈 운하를 통해 극대화하자는 것이었다.
즉, 두신이 오래전에 주장했던 ‘고려판 대항해 시대’의 완성을 수에즈 운하에 둔 것이었다.
직전 회의 때, 두신이 기어이 몽주에게 제시한 그 목표는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의 수에즈 운하야 19세기의 산물이지만, 수에즈에 운하를 뚫고자 하는 계획은 기원전 거의 2천 년 전부터 존재했고, 오랜 도전 끝에 기원전 6백 년 전쯤에 기어이 개통에 성공했다.
그 후, 천재지변과 전쟁으로 운하가 무너지고, 다시 복구되길 반복하며 기원후 7백여 년까지 1천 년 이상 유지되기도 했다.
물론, 그 고대의 수에즈 운하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 현재의 수에즈 운하와는 물론, 19세기 프랑스의 주도로 다시 개통된 당시의 수에즈 운하와도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인 수준이었다.
“고대인들이 해냈는데, 지금의 탐라국이 못할 이유는 없죠. 뭐, 고대의 수에즈 운하보다 더 넓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수고로운 건 마찬가지겠지만, 확실히 기술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누구도 기술이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나, 두신의 희망찬 주장은 여전히 회의적인 재상의 의견과 다시 부딪쳤다.
“네 말대로 고대의 수에즈 운하와 달리, 근대적인 수준의 수에즈 운하를 지어야 하는 만큼, 운하 공사 자체에 엄청난 비용이 투입되어야 할 거야. 게다가 지금 수에즈 지방은 맘루크 왕조의 지배 중일 테고, 특별히 역사가 크게 뒤틀리지 않는 이상 오스만투르크의 진격 앞에 놓일 거야. 뭐, 오스만투르크가 아니면 대신 강력해진 주변 다른 제국이 점령하려 들겠지. 역사적으로 원래 그 동네는 늘 그랬으니까. 그런 불안정한 지역에서 대규모 공사를 시도하려면 그 지역을 탐라국이 손에 넣는 건 물론, 외교적, 군사적으로 주변 세력들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건설 비용을 넘어 탐라국이 그야말로 국운을 걸고 덤벼들어야 할 일이라고, 수에즈 운하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수에즈 운하 건설은 지금이 최고의 적기야. 동서양의 교역적 잠재력은 곧 폭발하게 될 만큼 크게 부풀어 있고, 그 와중에 아직 누구도 수에즈 운하를 꿈꾸고 있지 않아. 그래, 물론 아주 위험하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같은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을게. 네 말대로 그 동네는 늘 혼란한 동네니까. 하나, 그게 겁나서 피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수에즈 운하에 도전할 수 없을 거고, 결국 수에즈 운하는 탐라국이 아닌 다른 나라나 세력의 것이 되어 버린다는 말이지. 물론, 그 거대한 교역적 폭발력도 탐라국과는 영영 바이바이일 테고.”
이집트와 그 근방의 교통과 물류에만 이점을 주었던 고대의 수에즈 운하와 달리, 근대의 수에즈 운하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 아니, 세계 전체의 교역 중심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수에즈 운하가 파생하는 교역적 이득은 언제나 천문학적일 수밖에 없다.
두신은 그쯤에서 재상이 아닌 몽주에게로 말을 옮겼다.
“몽주 씨는 그 매력을 포기하실 수 있습니까?”
그에 몽주가 무어라 답을 하려는데, 문득 재상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저도 포기하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
“거기에 너무 매몰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요. 반드시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겠다고 무작정 달려들면 될 일도 안 될 테니까요. 전에 말했듯 이제 몽주 씨도 천몽 속 삶을 연착륙시키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입니다.”
“예, 순리대로 움직여 보죠. 페르시아 지방까지는 어쨌든 가 볼 생각이니, 그곳에서는 좀 더 계산이 서겠죠.”
몽주는 씨익, 커다란 웃음을 입에 띠었다.
순리(順理)대로 그리고 순리(順利)대로 움직였다.
순리(順理)대로 시간이 흘렀고, 수많은 생명들이 사라지고 태어났다.
순리(順利)대로 탐라국의 국력은 단단해졌고, 그 영토와 세력권은 더 넓어졌다.
그렇게 15세기의 첫 10년째 해까지 모든 것이 순리대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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