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45)
댕, 댕, 댕…….
멀리서 미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으니, 거래소 내부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의 바늘도 2라는 숫자와 ‘丑(축), 未(미)’라는 두 개의 한자 사이를 가리켰다.
훈식은 거래소 안에 놓인 긴 의자 중 한 곳에 앉은 채 거래소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미시 정각이 다가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거래소 안으로 들어왔고, 어느새 한산하던 거래소 내부에도 사람들이 제법 모였다.
하나, 훈식이 정작 기다리는 이는 아직 도착…….
“아, 형!”
“……어휴!”
훈식의 형 훈승은 어깨에 짊어진 가죽 가방을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오늘은 왜 이렇게 많아?”
“몰라. 아버지랑 훈여가 열심히 일했나 보지.”
훈승이 가져온 건, 조금 전 홍로 포구에 닿은 체관부 연락선을 통해 그들 앞으로 온 서편들이었다.
그리 작지 않은 가방에 가득한 서편들의 수만 해도 1천 점은 족히 될 듯했다.
어차피 종이 두 장과 밀봉된 겉봉투 정도로 이뤄진 서편들이긴 하지만 1천 점 정도 모이니 꽤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아싸, 천 원은 족히 벌겠네?”
“야야, 얼른 작업이나 하자.”
두 형제는 가방 안의 서편을 꺼내 풀어 거래 내용에 따라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주변에 그 형제들처럼 서편들을 쌓아 두고 분류 작업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야, 이 사람은 돈 좀 벌겠네. 형일 직물 주식을 500매나 파네. 한 장에 12원 정도 이득이니, 6천 원이야. 휘유.”
“형일 직물 주식 값이 그렇게 올랐어?”
무뚝뚝하게 서편을 고르고 있던 훈승이 동생의 말에 물었다.
“어, 아까 슬쩍 물어봤지. 그 회사가 요새 상승세잖아. 우리에게 위임한 손님들 중에 그 회사 주식을 가진 사람도 좀 있으니까.”
“…….”
매일 미시에 주식 시세가 발표되지만, 거래소 내부적으로는 보통 반 시진에서 한 식경 정도 먼저 결정된다.
자연히 거래소 직원들은 자기가 담당하는 회사의 시세를 미시 정각보다 좀 더 일찍 알게 되니, 안면이 어느 정도 트면 직원들에게 슬쩍 물어 먼저 시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고, 이 손님은 손해막심이네. 진즉에 팔았으면 적어도 손해는 안 봤을 텐데…….”
“조용히 일해라.”
훈식이 다시 서편을 보며 주절대자, 형이 핀잔을 주었다.
물론, 훈식이 말한 그 ‘손님’이 어느 회사로 인해 손해를 보았는지는 한눈에 확인했다.
‘대동 증기’라는 회사.
후국에 있는 몇 안 되는 주식회사 중 하나로, 증기를 이용한 기관을 제작하는 회사였다.
처음에 상당히 각광받은 회사로, 고려 전역에서 많은 투자를 받기도 했었는데, 사실 정작 대동 증기사가 내세운 증기 기관은 단 한 대도 팔린 게 없었다.
아니 실상은 시작부터 위태로웠다.
대동 증기의 사장이 그가 가진 기술에 자신감을 가지고 탐라공의 투자를 청하였는데, 효율이 낮다는 이유로 거부당한 것이었다.
대동 증기의 사장은 실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미 투자자들이 적지 않았기에 포기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 작은 크기의 증기 기관을 시연하여 같은 크기의 열기 기관에 비해 거의 세 배 가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선보이면서 대동 증기는 더 많은 투자와 함께 거래소에도 상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잘나가던 대동 증기였지만, 정작 그때도 증기 기관을 팔지는 못했다.
공관부와 기술청에 등록하여 판매가 가능했지만, 손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다들 그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열기 기관에 비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많은 연료를 소모하고, 소음도 엄청난 증기 기관을 당장 쓰려는 자는 없었던 것이다.
하여, 대동 증기 측은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을 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증기 기관 개발에 박차를 가했으니, 그 방향성은 뻔했다.
증기를 뿜는 ‘보일러’ 내부의 압력을 더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섣부른 시도는 결국 사고를 불러일으켰으니, 새로운 증기 기관이 시험 운전 중 폭발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대동 증기의 사장이 중상을 입은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게 약 두 달 전의 일이었으니, 그때부터 대동 증기는 추락만 거듭하고 있었다.
“으이그, 회사청에서 투자를 거부했을 때, 눈치껏 빠질 준비를 하셨어야지. 딱 보면 모르나.”
대동 증기의 주식을 큰 손해를 감수한 채 팔게 된 손님을 안타까워하며 훈식은 다시 열심히 손을 놀려 서편을 분류하였다.
그렇게 분류가 완료되자, 훈승, 훈식 형제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서편에 따라 특정 회사들의 주식을 사고 팔았다.
그렇게 한 시진 동안 거래소 안을 몇 바퀴 돌고 나자, 두 형제들은 다시 서편을 분류하였다.
“절반 정도 해결했네. 한 10건 정도 빼곤 며칠 안에 거래할 수 있을 것 같아.”
서편 안에는 주식 거래의 위임장이 들어 있었는데, 위임장이 있다고 해도 곧바로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시세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주식은 파는 자들이 드물고, 시세가 크게 하락하는 주식은 사는 자들이 드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전당으로 가자.”
훈승의 말에 따라 훈식이 두 개로 나뉜 작은 보따리를 들고 거래소를 빠져나갔다. 그러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립 고려 전당 홍로동점으로 들어갔다.
두 형제는 두 보따리 중 거래가 완료된 서편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전당에 제출하였고, 전당에서는 서편 안에 들어 있는 주식 거래 위임장을 확인하여, 위임자 예금의 납출 상황을 확정하였다.
그렇게 할 일을 하고 나오니, 어느새 저녁 하늘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형, 배고프지 않아? 저녁 뭐 먹을까? 형…… 형?”
“……어?”
“왜 그래, 아까부터?”
“아냐, 아무것도. 뭐라도 먹으러 가자.”
두 형제가 평범한 식당에 자리 잡은 건 잠시 뒤였다.
형은 생각에 잠겨 있고, 동생은 그런 형의 이상한 모습을 의아해 하느라 두 형제 간에는 대화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 의외로 형이 동생에게 말을 먼저 건넨 것은 식사를 거의 다 마칠 무렵이었다.
“우리 회사, 나쁘진 않지?”
“응? 갑자기 뭔 소리래? 뭐, 좋지. 주식 거래를 할 수 있는 물금첩을 가진, 몇 명 없는 자격을 갖춘 아버지 덕에 큰 벌이는 안 되어도 별 위험 없이 돈 벌이를 할 수 있잖아.”
그들이 속해 있는 ‘훈 주식’은 주식 위임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그들의 아버지가 초창기 거래소 시절에 직원으로 일하던 중 주식 거래가 점점 활성화되면서 주식 거래를 대리하는 자들이 생겼다.
나라에서 그 대리 거래를 합법화하는 조치로 허가제 형식의 주식 거래 대행 물금첩을 소수 발행하게 되었으니, 그 시절에 형제의 아버지가 거래소를 그만두고 그 물금첩 중 하나를 받아 회사를 세웠다.
물론, 경쟁이 없는 건 아니기에 아주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주식 거래 대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편 대리 거래의 경우 보통 1통에 1원 정도 남는 수준으로, 작년에 훈 주식은 4만 원가량의 이익을 거두었다.
탐라섬에서 성인이 일 년에 6~8천 원 정도 벌면 보통이라 평가받는 걸 감안하고, 훈 주식이 가족 회사로서 아버지와 삼 남매가 직원의 전부임을 생각하면, 평범한 월봉 일꾼보다는 많이 번 셈이지만, 나름 괜찮은 월봉을 받을 수 있었던 거래소를 나오면서 형제들의 아버지가 품었던 꿈에는 많이 못 미치는 수준인 셈이었다.
“주식을 보유하려는 사람들은 꾸준히 늘고 있으니, 우리 회사도 꾸준히 성장할 수 있겠지.”
훈식은 꽤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 느낌 체감도 그렇고, 나름 분석한 것도 그렇고, 주식은 전체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훈 주식의 손님들도 전체적으로는 이익을 얻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대의 주식 거래는 본의 아니게 가치투자적이었고 장기투자적이었다.
실시간 거래는커녕, 증시 자체가 하루에 한 번만 공시되는 상황, 그리고 대부분의 거래자들이 서편을 통해 ‘완행’으로 거래 대행을 하고 있는 와중에 주식으로 이득을 볼 방법은 잠재력 있는 회사를 골라내고, 그 회사에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방법뿐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주식을 상대로 투기적인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았고, 그만큼 주식은 예측 가능한 영역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훈승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으니, 뒤에 이어진 그의 말은 확실히 무거울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손님들의 돈으로 주식에 투자를 하면 어떨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손님들에게 일정 기간 뒤 일정한 이득을 약속해 주고, 그 이상의 차익은 우리가 먹는 거지.”
훈승의 생각은 간단했다.
예컨대 1천 원어치의 돈이나 주식을 받아서 반년 뒤, 1천 1백 원을 주겠노라 약속하는 것이다.
물론, 훈 주식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 돈과 주식을 다시 잘 굴려서 1백 원 이상의 차익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었다.
“손님들은 적어도 손해는 안 보니 좋고, 우리는 심부름 값 이상의 돈을 벌 기회를 가지니 좋지. 안 그래?”
“망할 수도 있는데?”
“가만히 있어도 망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 전신이라고 들어 봤어?”
훈식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고, 훈승은 그가 아는 대로 전신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남해를 가로질러 연결한다고?”
“어. 추자도를 거쳐 장흥시 쪽으로 연결된다는 게 소문이야.”
“그러면, 혹시……?”
“처음에는 탐라군에서만 쓰겠지만, 지금껏 많은 물산들이 그랬듯 곧 백성들 전체가 쓸 수 있겠지. 그리고 많은 것들이 바뀔 거야.”
“어떻게?”
“우리 입장에서 가장 큰 건, 우리가 필요 없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겠지.”
놀란 눈을 크게 뜬 훈식은 잠시 후 그 의미를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주식을 전신으로 산단 말이야? 그게 가능할까?”
“전신이 개통된다고 해서 곧바로 될 일은 아니지. 하지만 적어도 심부름 값은 곧바로 줄어들겠지. 그러니까 그때가 되어서 대응하려면 늦어. 10년 뒤라고 해도 지금부터 준비해야 돼.”
훈식은 형의 말을 듣고 정말 그렇게 될지를 고민해 보았다. 문득 맛있게 먹은 밥이 속에서 얹히는 듯했다.
두 형제는 며칠에 걸쳐 논의한 끝에 그들의 생각을 남면에 있는 아버지에게 알렸다.
아버지와 여동생 훈여는 남면에서 부유한 자들을 상대로 주식 투자를 권하며 훈 주식을 대리인으로 삼도록 ‘영업’을 뛰고 있었다.
당연히 아버지는 위험한 도전에 주저하였지만, 형제들은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으니, 훈 주식이 단순한 거래 대리인을 넘어 투자의 주체로 주식 시장에 뛰어든 건 1년 반 이후였다.
그 결정은 행운과 불행의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니, 불행은 그 시점에 그들과 같은 생각을 실천에 옮긴 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고, 행운은 그래도 늦지는 않아 최초의 본격적인 증권사 중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 * *
통무총리로서 강중의 일과는, 탐라상단주의 일까지 경임했던 그의 아버지의 일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도 군관부와 외관부의 일은 여전히 그의 아버지가 일임하고 있었으니, 분명 일의 양은 확실히 적었다.
하나, 탐라국을 다스리는 ‘초임자’의 입장은 마음만큼은 몹시 바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쁜 마음은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리면 더욱 심해졌다.
“그러니까 면직물의 생산을 늘리자는 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탐라국의 면옷과 직물은 모든 나라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생산하면 생산하는 대로 나라를 살찌우게 될 것입니다.”
상관대신의 보고에 강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근래에 이르러 면직물 관련 상품은 탐라국의 주요 교역품이었다.
과거 교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사치재도 유리와 거울을 위시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명 교역에서는 은이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사치재라기보다는 필수재로서의 물산이 비중을 늘리고 있었으니, 그중 면직물이 가장 선두에 있는 물산이었다.
물론, 면이 탐라에서만 생산되는 게 아닌 만큼, 탐라산 면직물은 고급 면직물로서의 수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탐라국이 이미 자동 방적기, 즉 실을 꼬는 기계를 사용하여 질 좋은 면실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는 덕이었다.
자동 방적기라는 명칭을 쓰기에는 다소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한 수준이지만, 물레로 실을 뽑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실을 생산할 수 있는 덕에 면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문제는 방적기(紡績機)가 발명되어 널리 쓰인 것에 비해 천을 짜내는 기계인 방직기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개발된 방직기가 베틀의 구조에 기계적인 동력을 가한 수준으로 북(shuttle)이라 불리는 부품을 사용하여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는 기계에 불과한 터라, 고장도 잦고 생산성도 그리 좋지 않아 여전히 많은 직조공들이 손수 천을 짜내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상관대신에게 건넨 강중의 질문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한데, 면직물의 생산을 늘리고자 한다면, 직조공의 수도 늘어나야 할 것인데, 만약 그러다가 새로운 방직기가 등장하면 상황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탐라국의 기조가 상업과 기술에 있는 만큼, 치세의 기준에서도 그 두 가지를 늘 염두에 두는 게 기본이었기에 마땅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첫 번째 방직기는 시장에서 실패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방직기의 개발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개선된 방직기가 실험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는데 새로운 착안이 있어 다시 개발에 착수하였다는 보고도 있었다.
“직조공은 쉬이 숙련되지 않습니다. 만약 당장 면직물의 생산을 늘리고자 직조공을 크게 양산했다가 새로운 방직기의 보급으로 직조공의 필요가 줄어든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야 그때는 직조공의 수를 줄이면 될 것입니다.”
“……그게 끝입니까?”
강중이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으니, 상관대신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무엇을 염려하시는 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자들이 업을 잃게 되는 것은 나라 안에 혼란을 만드는 일이지요. 하나, 다행히도 탐라국에는 많은 일 거리가 있습니다. 직조공들도 얼마든지 다른 일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강중은 상관대신의 말에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숙련되는 데 일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게 직조공일 터, 그렇게 어렵게 익힌 기술을 얼마 써먹지도 못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될 직조공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상관대신이 몰지각하거나 무감정한 자라서 그런 의견을 가진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당대 탐라국의 ‘노동 정책’이 굳이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고용 안정성보다는 노동 유연성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으로, 고용 안정성은 군무나 관직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 사실상 고용 보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즉, 장기에 걸친 고용 상태에 있을 수 있는 자는 특별한 기술을 갖추고, 그 기술이 내내 쓸모가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에 국한되어 있었고, 나머지 백성들 사이에서는 인생에 걸쳐 여러 가지 직업을 갈아 얻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유사 직종이거나 관련 직종 사이에서는 이직이 더욱 빈번했으니, 예컨대 어부였던 자가 노부가 되고, 다시 범선 선원이었다가 이후 포구 관리원이 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당대에서는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여, 회사나 상점 등에서 직원을 고용하고 해직함에 있어 상당히 자유로웠으니, 그저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을 뿐이었다.
그 제한 사항이란 최소 고용 기간을 명시하고 해직 시 1개월분의 월봉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과 최소 고용 기간도 없는 그야말로 임시 고용의 경우 월봉이나 일당을 십분지 일만큼 더 줘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물론, 이런 제한 사항도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럼에도 해직이나 실직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탐라국의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어 고용 시장 자체가 넓은 덕이었다.
이런 상황이기에 상관대신과 같은 판단은 충분히 일리 있고 합리적이었으니, 직조공이 비록 숙련에 시간이 필요한 직종이긴 하나, 그 수가 많아 희귀하지 않고 직물과 섬유 업종에서 이직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중의 우려는 직조공의 수가 많다는 점에 기인하였으니, 직조공의 기술이 희귀하든 아니든 한꺼번에 많은 자들이 새로운 직업을 구하려 들면 분명히 낙오자들이 발생할 것이고, 그로 인한 불만이 쌓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강중이 심기가 불편해진 채 오래 고민하고 침묵하자, 당당하던 상관대신도 총리로부터 전해지는 기세에 위축된 마음을 품어야 했다.
“총리 영감, 정 마뜩치 않으시다면 저하께 고문을 청하시지요.”
“음…….”
그 순간에 강중의 머릿속에 그의 아비가 해 준 말이 스쳤다.
“일하다 막히면 얼마든지 찾아와도 좋다. 근데 어지간해서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뭔가 모순적인 그 조언(?)이 걸리긴 했지만, 강중은 결국 아버지를 찾아 상의하기로 결정하였다.
* * *
‘이제는 제가 누군지 잘 아시겠지요? 어떠십니까? 노여우십니까?’
이미 몇 번 던져 본 질문이었다.
부모님의 영전(靈前), 그러니까 탐라공 석몽린의 부모님의 납골함 앞에 설 때마다 던진 질문이었다.
3년 전, 어머니 주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했고, 그로부터 1년에서 이틀 모자란 날에 아버지 해민이 돌아가셨을 때도 던졌다.
그리고 합동 추도식이 있는 날마다, 문득 부모님이 떠오를 때마다 속으로 던졌던 질문이었다.
그 질문을 들으실 수 있다면 해민과 주이 부부는 그들의 장남이 가진 정체성 또한 알고 있을 테니, 언제나 그에 대한 대답이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여긴 건 아니었으니, 늘 질문만 던진 채 돌아서야 했다.
탐라공가만을 위한 납골당을 나서자,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예상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의 곁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아들도 있었다.
“바쁠 텐데 어찌 온 게냐?”
부모님의 추도를 위해 온 것이지만, 오늘이 추도식 날은 아니었다.
조만간 남양으로 출항할 것이라, 미리 추모하러 온 것이었다.
“공무 중에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이 있어 상의를 청하고자 왔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있었느냐?”
그 질문을 하며 몽주는 좌측에 아내를 두고, 우측에 아들을 둔 채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들이 고민을 듣자니, 분명 고민할 거리가 충분했다, 특히 강중의 성품에서는.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상관대신의 뜻을 가납할 것이다.”
“……하나, 그리되면 머지않아 수많은 직조공들이 그들의 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직조공의 수가 많은데 더 늘렸다가 차후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
역사에서 지금 아들이 제기하는 문제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산업 혁명 시기, 영국의 직조공들이 방직기의 급격한 발전으로 대량 실업했을 때였다.
당시 직조공들이 단체 행동을 했고, 그것이 기계 파괴 운동(러다이트 운동)의 시작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 탐라국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랄 수도 있었다. 하나, 그 결과도 마찬가지일까라는 질문에는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다.
러다이트 운동은 결국 실직한 직조공들이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한 배경과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고용 상황이 훌륭하다 할 정도로 썩 좋은 탐라국은 전혀 다른 배경이기 때문이다.
“저는 좀 더 길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탐라국이 앞으로도 계속 승승장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내부적으로도 지금의 성세를 이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고 직업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을 날이 올 것이고, 직업을 구해도 제대로 된 대우를 얻을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면 다스리는 자로서 마땅히 대응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몽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들의 치자로서의 자세는 분명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너도 경로의존성이라는 개념을 알 것이다.”
몽주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강중은 그의 아버지가 하려는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다스려온 바가 있으니, 그대로 따르라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야 그렇지. 내가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은 만약 치세의 경로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앞으론 하나의 변화를 위해 다른 수없이 많은 변화를 대비해야 할 것이니, 심력을 다해 연구하고 고민해도 막상 실행하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강요하는 변화는 더욱 그렇지.”
“…….”
강중의 표정이 우울해졌고, 몽주는 그런 아들의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려 아내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혹시 자내가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은 없소?”
“호호, 내가요? 갑자기 왜 그래요?”
“명색이 국공 부인이고, 이 나라의 탐라공과 한 이불을 덮은 게 근 40년이 아니오? 해 줄 말이 없지는 않을 터인데…….”
그러자 앵도의 시선이 아들에게로 향했으니, 고민하는 표정의 아들을 잠시 안쓰럽게 보던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뭐라고 탁월한 조언을 해 주겠느냐. 다만, 네 아비라면 어떤 조언을 해 줬을지 짐작되는 건 있구나.”
“그게 뭡니까?”
“원할 만한 자가 원할 때를 기다리거라.”
아내는 말을 마치며 남편을 바라보았고, 몽주는 슬쩍 엄지를 세워 보였다.
사실 몽주가 그간 보인 치세와는 일치하지 않는 면이 많은 조언이긴 했다.
하나, 그럴 때는 대부분 치세의 경로를 바꾼다기보다는 없던 경로를 만드는 경우였고, 엄연히 경로의존성이 있는 분야에서는 몽주의 정치도 그 조언과 얼개가 같았다.
그렇기에 그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봐 온 아내도 그런 조언을 해 준 것이었다.
다만, 몽주는 굳이 강중에게 시시콜콜하게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알아서 깨달아야 했고, 강중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심사숙고해 보겠습니다.”
여전히 고민 많은 표정으로 아들은 돌아갔고, 두 부부는 마차에 올랐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무엇이 그렇소?”
“아들을 고민의 구렁텅이에 던져 놓고, 우리만 유유히 뱃놀이를 떠나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후후.”
이번 남양행에는 앵도도 동행하기로 하였으니, 이제 아들이 나라의 중심이 된 상황에서 좀 더 자유로이 부부동반으로 떠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물론, 이번 남양 행차도 뱃놀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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