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5)
* * *
다시 꿈속으로 들어갔을 때, 몽주를 찾아온 첫 소식은 혼인날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처가가 될 쪽에서 사주를 맞춰 약 석 달 후에 혼인하자고 제안하였고, 해민과 주이가 그에 응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일의 진척이 빠르자, 몽주는 솔직히 조바심이 생겼다.
아무리 목적이 있는 삶이고 현대의 삶을 기준으로 할 때 꿈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꿈속이라도 수십 년을 함께 살아야 할 여인과의 혼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인에 대한 소문이 영 좋지 못하니, 아무리 태연하려고 해도 불행한 미래에 대한 불안한 상상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 몽주는 애월루의 주인을 통해 사람을 구하여, 개경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건 보름 뒤였다.
달 밝은 밤, 애월루 내 남원(南園)에 놓인 정자에는 자그마하게 술상이 놓여 있었다.
그 술상 앞에는 몽주가 홀로 앉아 술잔을 채웠다 비웠다를 반복하였다.
먼 곳에서 누군가 보고 있다면 달과 술, 그리고 사색을 즐기는 모습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몽주의 속마음은 달랐다.
‘아 씨, 무서운데 빨리 좀 오지.’
시킨 일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다른 이는 아무도 부르지 않은 탓에, 아무리 달 밝은 밤이라고 해도 컴컴한 정자에 불을 켜고 홀로 있자니 솔직히 무서웠다.
그래서 별로 즐기지도 않는 술을 연신 홀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네 번째 잔을 입에 대고 목을 꺾어 넘겼다가 다시 돌리는 순간, 아무도 없던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헉…… 콜록콜록!”
깜짝 놀라 사레가 든 바람에 몽주는 한참이나 기침을 해야 했다.
그 동안에도 갑자기 등장한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앞에 부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쿨럭, 큼큼, 아이고…….”
“…….”
음?
목이 따가워서 난 눈물을 훔치며 사내를 본 몽주는 문득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팔을 다치신 것이오?”
마치 팔이라도 부러진 것처럼 천으로 팔을 묶어 고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몽주는 문득 ‘설마…….’하면서도 한 가지 추정이 떠올랐다.
“혹시 그 팔을 다치게 한 것이 그 여인이오?”
끄덕.
이번에도 사내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살짝 고개를 숙이며 외로 돌리는 것이, 창피함을 감추는 기색도 엿보였다.
몽주는 그 사내를 보며 아연함을 애써 눌렀다.
애월루의 주인으로부터 그 사내를 소개받으며 들은 말이 있었다.
‘오래전 유명했던 장수의 후손으로, 그 집안이 한때는 군부의 큰 세력이었다지요. 하나 지금은 몰락하여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지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 넘어, 집안 내력 탓에 힘과 용맹이 탁월한 그가 오히려 장수가 되지 못하였다고 했다.
탁기라 불리는 그는 좌우위(左右衛)의 병졸로 몇 년을 있다가, 자신은 종9품의 최하급 군관인 대정(隊正)조차 될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여진과의 전투 중 얻은 작은 부상을 핑계로 군을 나와 떠돌다가 애월루의 객이 되었다.
애월루의 주인이 말하길 칼과 몽둥이를 든 십여 명의 왈짜패들을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이겠지만 어쨌든 분위기부터 남다른 기도가 있는 자였다.
물론 몽주가 그를 사서 ‘흑나찰’을 정탐하게 하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아오게 한 것은 무술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입이 무겁고 믿을 만한 자라는 애월루 주인의 장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예비 아내의 뒷조사를 하는 일이니만큼 혹여 소문이 퍼지는 일이 있으면 후에 곤란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사내 탁기는 팔을 다쳐 온 데다 흑나찰에게 당했다고 하니, 소문이 나는 걸 넘어 아예 본인에게 들키기까지 해 버린 것이다.
“끄응. 설마하니 내 이름까지 토설한 것은 아니겠지요?”
솔직히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친 것 또한 도망치던 중 날아온 단검에 스친 것일 뿐, 흑나찰은 제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안 정도에 불과합니다.”
“다행이…….”
안도하다가 문득 몽주는 그가 흑나찰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였다. 실제로 본 이도 흑나찰이라고 자연스레 부를만한 여인인 것인가.
“하면, 이제 말씀을 해 주시오. 그 여인이 정말 그렇게…… 무시무시한 외모를 가졌소?”
“제가 보기에 무시무시한 건 외모 이전에 실력인 듯합니다만, 답하자면 안타깝게도 어여쁜 생김새는 아니었습니다. 하나, 그렇다고 흑나찰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어 탁기로부터 전해진 설명은 이러했다.
그녀의 몸집은 매우 크다. 키는 탁기보다 조금 더 컸으니 5척 6촌에 이를 것이고, 검술을 연마하느라 무복으로 입은 답호(褡穫) 차림 중 대략 감안할 수 있던 허리와 다리의 굵기는 어지간한 남정네 이상이라 하였다.
다만 소문 속 그 솥뚜껑만 한 손은 과장이었고, 그저 손가락이 길고 상처가 다소 있을 뿐이라 하였다. 또, 피부가 짙기는 하나 검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 하였다.
“성미 또한 들리는 소문과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사냥하여 얻은 산짐승과 날짐승을 저자의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자주 목격되었고, 상가의 노비들 중 철없던 시절 괴롭힘을 당한 이는 있었지만 근자에 같은 일을 겪은 이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으음.”
자기 걸 나눠 줄 줄 아는 여인이 ‘나찰’일 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인의 몸으로 사냥을 하러 나간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몽주는 중요한 부분을 물었다.
“사람의 목숨을 취한 적이 있다는 소문도 확인해 보았소?”
끄덕.
“사실이오?”
끄덕.
“저런…….”
몽주는 절로 혀를 차게 되었다. 정말 나찰 같은 여인네인 것인가.
“하나…….”
부정적인 예측이 몽주의 머릿속에 가득할 때, 탁기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죽인 자들은 모두 왜구라 합니다. 왜구 일곱을 베어 양인 서른 이상을 살렸다지요. 그중 태반이 여인들이거나 아이들이었다고도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왜구로부터 도망치던 여인들을 구한 것이 바로 그분이셨다는 겁니다.”
“…….”
마치 성급하게 결론짓지 말라는 듯 강조가 들어 있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끝에 흑나찰을 ‘분’으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정말 왜구들뿐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분이 비록 여느 여인네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듯하나, 결국은 여인이기에 만날 수 있는 세상이 그리 넓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정말 죽일 만한 자들, 죽여도 될 만한 자들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요.”
“허어…….”
죽일 만하고 죽여도 될 만한 자들이라는 표현이 몽주에게는 참 낯익음과 낯섦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지난 천몽 덕에 낯익었고, 현대의 삶 덕에 낯설었다.
절대 군주였던 시절, 비록 그저 꿈이라 여긴 탓이었지만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고, 살리고 죽이는 기준은 야만에 가까웠었다.
반대로, 현대에서도 죽이겠다는 표현의 욕설이나 협박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지금 탁기의 말속에 담긴 그 표현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대수롭지 않게 나온 말은 단지 탁기만의 생각이 아닌 이 시대 보편적인 사고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몽주는 궁금했던 것을 얼추 다 묻자, 그만 탁기에게 물러가라 일렀다.
그는 소은병 세 알이 담긴 주머니를 받고 정자에서 내려서다 문득 몽주를 돌아보았다.
“혹시 파혼을 생각하십니까.”
“…….”
난감한 질문이며, 들으리라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다. 특히 탁기 같은 사내가 해서는 안 될 물음이었다.
하나, 그래서 궁금했다.
“왜 묻는 겐가.”
“만약 그렇다면, 이놈이 한번 노려보고자 하니까요.”
“……!”
발끈하게 만들 대답이었다. 하나 그 전에 탁기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정혼자에게 파혼당한다면, 저 같은 놈도 감히 바라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혼약자에게 버림받아 흠이 생긴 여자니, 자기가 아내로 취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분기가 돈 몽주는 잠시 탁기를 노려보았다. 한데 외로 선 채 자신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의 눈빛은 의외로 청명하게 느껴졌다.
그저 정자 안 몇 곳에 놓인 촛불의 빛이 반사된 덕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나 할까.
물론 그건 그저 아주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느낌일 뿐이었다. 대낮에 가까이 마주하고도 판별하기 어려운 눈빛을 밤중에 보고 어떤 의미를 찾는다는 건 얼핏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몽주는 발끈하던 마음을 달래고 탁기의 말을 곱씹어 보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나 같은 놈도…… 라.
생각하느라 잠시 시선을 돌렸던 몽주는 다시 탁기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맑은 빛이 감도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절대로 남의 여인에 대한 욕심이 있는 자가 보일 만한 눈빛은 아니었다.
“우선 대답부터 하지. 불행히도 자네에게 기회는 없을 것일세. 나는 혼인을 물릴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으니까. 비록 그 소문이 좋지 못하나, 실제로는 측은지심이 있는 데다가 정의를 따라 행동하며 그 행동에 걸맞은 능력까지 있으니, 나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여자라 할 것일세.”
“…….”
반응이 없었다. 실망이나 분개 같은 감정, 포기나 체념을 엿볼 표정이나 태도도 없었다.
그냥 몽주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군.”
“하실 말씀이 남으셨습니까.”
마치 몰랐다는 양 태연히 할 말을 기다리는 탁기였다.
“이제 와서야 이상하게 여기는 거네만, 왜 그렇게 내게 존대를 하는 게지?”
탁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알았냐고 묻는 듯한 미소였다.
처음 이상하다 여긴 건, 그가 나 같은 놈을 운운하며 스스로를 비하한 것이었다.
그가 비록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로 기방의 기도 역할을 하고 있는 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몽주와 일방적으로 존대와 하대의 관계를 맺을 이유는 없었다.
특히나 몰락했다고는 하나 성을 가지고 있었고, 한때 대단한 권력을 가졌던 군부 가문의 자손인 탁기라면, 비록 몽주가 시키는 일을 할지언정 허리와 무릎을 굽힐 필요는 없었다.
하물며 향리의 딸조차도 아니고, 그저 본가에 연이어 과거 급제자가 나는 덕에 방계인 그들의 집안도 최씨 성을 받게 된 예비 처가댁 정도라면, 애초에 ‘나 같은 놈’도 들이대는 데에 신분적으로 문제될 건 없었다. 물론, 처가에서 환영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한데 탁기는 처음 소개로 만났을 때부터 부복하여 몽주의 명을 받았고, 오늘 본 후로도 내내 아랫것을 자처하고 있었으며, 급기야 더 그럴 필요 없는 자신의 예비 처가에까지 굽실거린 것이다.
턱턱.
그때, 문득 탁기가 다시 정자 위로 올라왔다. 아까와는 달리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몽주로부터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꿀꺽.
몽주는 솔직히 속으로 긴장감이 솟아올랐다.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애써 참았다. 그럴 이유가 없지만, 만약 탁기가 자신을 해하려 한다면 몽주는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가 문득 안색과 기세를 달리하고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자, 속내로 당황하고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 다음 순간, 그것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쿵.
탁기가 몽주 앞에 다시 무릎 꿇고 앉았고, 이어 허리 숙여 부복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왜 또……?”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저를 수하로 받아 주십시오.”
“……에?”
갑작스러운 청에 너무 놀라 촌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말았지만, 탁기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약간 든 채 다시 말문을 열었다.
“먼 곳을 보시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이 시절에 대사를 이끌어 가시려면 곁에 믿고 맡길 만한 칼 한 자루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두고 쓰십시오. 머지않아 믿을 수 있는 칼 한 자루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몽주는 한참이나 눈만 끔벅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