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52)
홍로동은 지난 10여 년간 지속적으로 도로 확장 및 지목 정비 사업을 시행해 오고 있었다.
사실상 계획 도시로서 나름 체계적인 계획하에 건설된 홍로동이지만, 거대한 인구와 자본의 결집지가 되고 있는 홍로동의 발전은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으니, 그에 걸맞게 고을의 재구성도 진행하고 있었다.
긴 시간에 걸쳐 시행되는 것이라 잘 느끼지 못하는 자들도 있지만, 홍로동 정비 사업은 사실상 고을의 대부분을 갈아엎는 정도였으니, 만약 홍로동을 떠났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자가 있다면, 아마 자기 집을 찾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건 단순히 길이 달라졌다든지 주소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수준이 아니라, 그의 집이 아예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고을 내 주요 도로가 거의 두 배가량 넓어지고, 중심부에 상업 지역을, 주택 지역과 공소 지역은 외곽으로 나누는 사업의 흐름 속에서 백성들이 본래 살던 집을 지켰을 확률은 별로 없었다.
실제로 지난 10여 년 사이에 정비 사업으로 인해 집을 옮긴 호구는 2만에 이렀고, 앞으로도 거의 1만에 가까운 호구가 집을 옮기게 될 예정이었으니, 4만에 조금 못 미치는 호구를 가진 홍로동임을 생각하면 전체 동민들 중 사분지 삼이 거주지를 옮겼거나 앞으로 옮기게 되는 셈이었다.
한데, 그 정도로 거대한 사업임에도 혼란은 거의 없었다. 만약 현대 한국에서 같은 규모의 사업이 있었다면 토지 수용 과정과 손해 보상 책정 과정에서 난리가 났을 테지만, 홍로동 정비 사업은 거의 없는 일인 것처럼 조용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국토령 덕이었다. 토지 보상 자체가 필요 없고, 새 주택을 마련해 주는 것만으로도 동민들 중 대다수로 하여금 순순히 이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극히 일부가 욕심을 가지고 추가적인 보상을 요구하며 거주 이전을 거부하였는데, 그런 자들의 말로는 토지 임대 기간이 완료되고 연장이 거부된 이후 가옥의 보상도 없이 퇴출되는 것이었다.
사실 더 빠른 시간 내에 더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정비 사업이 지금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것도 거주지 이전을 거부하는 자들의 주택 토지 임대 기간이 완료되는 시간 때문이었다.
토지 임대 기간의 완료가 다가올 쯤에는 더 큰 보상을 요구하던 자들이 뒤늦게 거주 이전에 응한다고 하더라도 특정 기한을 지나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관청이 거부하였고, 순순히 이전한 백성들이 보상으로 받은 새로운 가옥이 전보다 훨씬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주 이전을 거부하는 자들은 없다시피 하였다.
오히려 정비 계획에 포함되지 않아 거주 이전할 필요가 없는 곳의 백성들이 아쉬워할 정도였다.
정비 사업이 최종적으로 완료되면 홍로동은 5개의 동내간선로(市內幹線路), 즉 1번 동내간선로부터 6번 동내간선로를 가지게 되는데, 홀수 간선로는 홍로동을 ‘川’의 형태로 남북으로 놓이고, 짝수 간선로는 ‘三’의 형태로 동서로 놓여 홍로동을 9개의 구역으로 나눈다.
그리고 간선로와 연결되는 지선로(支線路)도 얽히게 되니 그 수는 총 81로로 101번부터 181번까지 부여될 예정이었다.
간선로의 너비는 마차 10대가 동시에 지나갈 정도인데, 다만 길가 양쪽에 인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어 실제로 차량 전용 도로는 왕복 8차선이었다.
지선로의 너비도 마차 6대가 움직일 정도인데, 역시 인도의 설치로 인해 실제 도로는 왕복 4차선이었다.
도로가 넓어짐에 따라 건물이 들어설 면적이 줄어드는 건 당연했고, 이에 따라 고층 건물이 계속적으로 들어서고 있었으니, 정비 사업이 시행된 이후로 건축된 건물은 모두 최소 3층이었다.
가장 높은 건물은 6층이었는데, 체관부에 들어온 건축 신청 중에는 무려 10층짜리 건물도 있었다.
하나, 10층 건물을 지을 수 있을지와 무관하게, 승강기도 없는 상황에서, 또 설령 승강기를 어떻게 만든다고 해도 신뢰성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고층 건물의 건축은 그 이용성과 안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건축 신청은 반려되었다.
고층 건물들 대부분은 홍로동의 중심부, 특히 주식 거래소 근방에 지어졌으니, 몽주마저도 그곳에 가면 편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물론, 그 편안함이란 고층 빌딩에 단련된 현대인으로서의 감각으로 느끼는 익숙함에서 기인하는 편안함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불편함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그건 당대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제 15세기의 초입에서, 아무리 탐라공으로서 그런 ‘도심’을 지을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라지만, 3, 4, 5층짜리 건물들이 대로의 양쪽으로 줄지어 있는 거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에 대한 낯섦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높은 건물이 들어선 거리가 황량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공원이자 광장에 몽주가 서 있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완성된 곳은 아니지만, 옮겨 심느라 조경수들이 가지치기를 많이 당하여 다소 황량하게 느껴지는 걸 제외하면, 사실상 완공된 것이나 다름없는 그 공원을 몽주는 탐라공의 특권으로 먼저 들어왔다.
물론, 홀로 들어온 건 아니었고, 아들 강중과 함께 호위군병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원 내 벽돌 바닥으로 만들어진 광장 외곽에 설치된 널판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중은 몽주 내외보다 먼저 탐라섬으로 돌아와 있었다.
황도에서의 논의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강중이 오우치씨를 방문하는 시간이 예상보다 짧아지면서 그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강중이 오우치씨를 방문한 용건이 빠르게 마무리되었다는 의미였다.
“역시 수작(授爵)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랬겠지.”
“백국이라도 귀족의 지위에 영토와 배타적 통치까지 보장해 준다니 분위기가 확 바뀌더군요. 오우치씨로서는 노예 해방 정도만 껄끄러울 뿐 공공선 규정도 그리 부담스러운 게 아니니까요.”
과거 전대 오우치 가독 시절 몽주가 섭정일 때, 탐라국과의 교역에서 관세를 사실상 폐기한 바 있었고, 탐라국의 영향으로 명목적이긴 해도 재판 제도의 도입을 비롯한 법제의 개선도 있었으니, 공공선 규정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만했다.
어차피 큰 변화가 없는 중에 고려에 몇 안 되는 귀족 중 하나로 삼겠다고 하니, 안 그래도 고려와 왜국 사이에서 애매한 불안정을 느끼고, 근래에 구주의 실세인 ‘백부’의 욕심을 확인했던 그들로서는 반색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뭐라도 욕심을 부릴 생각으로 겉으로라도 못마땅한 척했을 법한데 잘 설득했구나. 잘했다.”
“…….”
강중이 쓴웃음을 지으니, 오우치씨와의 협상이 잘 진행된 건 그의 협상력이나 작전보다는 그가 가진 선천적인 능력에 기인한 면이 컸기 때문이었다.
어리지만 그래도 가독인 만큼 히토요시를 먼저 잘 구워삶을 작정을 애초에 하긴 했지만, 고작 하루 이틀 놀아줬을 뿐인데도 히토요시가 강중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게 된 건 강중의 친화력과 감화력 덕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히토요시가 협상장에서 대놓고 탐라국을, 아니 강중을 따르자고 ‘떼’를 쓰기에 이르렀고 가독의 어미나 오우치씨의 가신들이 달리 무슨 수를 쓸 여지가 사라졌던 것이다.
“한데, 연방군의 창설은 뒤로 미뤄지는 겁니까?”
“그럴 것 같구나.”
“어째서 그러는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어차피 대헌장의 기치를 따르기 위해서라도 일정 수준의 연방군을 두는 것이 나을 텐데요.”
“동시에 제후국의 군사권을 보장하는 것도 대헌장의 기치이기도 하지. 그래서 나도 좀 더 강권하지 못하는 게고. 물론, 그보다는 적극성이 전혀 없는 제후들을 억지로 끌고 가다가는 우리 탐라가 연방군의 부담을 너무 크게 짊어질 것 같다는 이유가 컸지.”
“어려운 일이군요.”
“어렵지. 그러니 잘해라.”
“…….”
당연하다는 듯 어려운 일을 자신에게 미루는 아버지의 말에 강중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부담이라는 게 날이 갈수록, 그리고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막중해졌다.
연방을 이끌고, 그 와중에 연방군 창설이라는 힘든 협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지만, 그보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여긴 수많은 일들을 해낸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신이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에 실패를 할까 두려운 마음이 진정한 부담이었다.
“두려우냐?”
“…….”
“나도 두렵다. 지금껏 계속 두려웠고, 아마 죽는 그날까지도 두려울 게다.”
“……?”
“아닌 것 같으냐? 너도 내가 늘 근심 걱정을 짊어지고 살았음을 몰랐느냐?”
“그건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게 두려움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들의 대답에 몽주가 다시 고소(苦笑)를 지었다.
천몽 속과 현대에 무관하게 지난 세월 내내 몽주를 지배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개 한량이던 시절에는 뭘 하기도 전에 망신할까 싶어 두려웠고, 한 줌의 권력을 쥔 뒤로는 고려의 간신들이 두려웠으며, 고려의 실세가 된 뒤로는 여러 외국이 두렵고, 요동국이 명나라의 줄을 잡을까 두려웠다.
고려를 장악하고 명나라마저도 별로 두렵지 않게 된 지금도 두려움은 불분명한 후회라는 토양 위에서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고려와 탐라국을 강국으로 성장시키긴 했지만, 자신이 지난 세월 중에 했던 여러 선택들이 자신의 사후에 고려의 분열과 멸망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지, 그래서 천몽이 끝나는 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지는 건 아닌지 그 결과를 짐작할 수 없는 후회가 두려움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너나 나뿐만이 아니다, 만인이 부러워하고 만인을 부릴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속으로 부담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는 한둘이 아닐 게다. 요동공도 그랬던 모양이고.”
“……?”
“정말이다. 황도에서 방원이 제 아비의 서찰을 전해 주더군. 서찰이라기엔 너무 짧았지. 가물가물한 와중에 구술한 것이라고 하더구나. 그 글의 끝에 이런 물음이 있었다. 자신이 좋은 군주였냐고.”
“좋은 군주…….”
“그래, 나는 그 물음으로 그도 큰 부담을 짊어진 채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
몽주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 답을 그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그가 정확하게 제시할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역사 속 조선 태조 이성계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을지도 알 수 없었다.
개인적인 삶은 적어도 아들들이 상잔하는 꼴은 보지 않았으니 더 나은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일국의 군주로서는 몽주의 광명에 빛이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몽주 개인적으로는 이성계가 그만큼이라도 해 준 것이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그는 요동을 바쳐 명나라의 제후가 될 수도 있었고, 몽주에게 시기와 질투를 가져 고려를 분열시킬 수도 있었으며, 새로운 시대와 제도를 여는 과정에서 몽주의 것을 따르기보다 유학에 매몰될 수도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요동국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고려의 요동을 만드는 주도자로서 잘해 주었으니, 가끔 몽주가 지난날 무리를 해서라도 요동국을 두지 말고 고려로 일통할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들 때마다 그 후회를 삭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요동공은 좋은 군주였습니까?”
문득 강중의 물음이 있어, 몽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들을 보다가 이내 실소하였다.
“왜, 나는 몰라도 요동공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 아닙니다.”
머리를 긁적거리는 아들을 보며 좀 더 웃던 몽주는 아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전대의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는 없다. 나의 시대와 너의 시대는 다르고, 정치와 경제의 목적도 다르다. 만약 네가 나름으로 정한 그 목표에 대해 치세의 말미에 스스로 평가하여 만족할 만하다면 너는 좋은 군주였을 것이다. 물론, 진정한 평가는 백성의 몫이고 역사의 몫이겠지만 말이야.”
‘그러고 보면 다 마찬가지로군, 천몽의 신비로 군주가 된 나나, 세상의 다른 모든 군주들이나 결국 역사의 준엄한 평가 앞에 놓이는 건 말이야.’
* * *
선상에서 축배를 올린 지도 수 일이 흘렀다.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거창한 명분부터 탐라로 돌아가면 큰 상금과 명성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탐욕스러운 명분까지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기쁨의 축배였다.
그들은 분명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
망망대해 속에서 남하를 계속하면서 불안을 키워 가던 어느 날에 겨우 발견한 땅.
크지만 결국 섬이라는 걸 깨닫는 것과 동시에 남쪽에 또 다른 땅이 있음을 알았고, 다시 희망을 품고 그 땅에 닿았다.
그리고 그 땅의 서쪽으로 연안을 따라 항해한 지 나흘 만에 결코 작은 섬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연안 항로가 보여 주는 섬의 모양을 볼 때, 이곳이 아니면 그 많은 원주민들이 말하던 남쪽의 거대한 땅이 존재할 리가 없다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상에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 다음 날부터 다시 며칠간 서안을 따라 계속 이동하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슬슬 선원들 사이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감태 대장이 도무지 회항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선원들이 보기에 그 정도면 소문의 거대한 땅을 발견했음을 증명할 수 있으니, 혹여 다른 누군가가 그사이에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돌아가 보고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따라가고 있는 연안의 환경이 몹시 좋지 않은 것도 작은 이유가 되었다.
처음 발견한 곳도 척박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서안으로 항해하면서 어느 순간 연안의 환경이 그야말로 황무지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바다로 항해하고 육지에 오르는 건 드무니 별 상관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간간이 상륙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식수를 구하는 데에 있다는 점이 문제였으니, 사실상 사막과 같은 곳에서 물을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여, 감태가 식수 절약마저 명하자, 이미 성취감을 채운 선원들이 갈수록 불안감을 키워 가고 동시에 그만큼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렇게 불만이 쌓이다 쌓인 끝에 선원들이 일제히 감태에게 몰려와 항의한 건 서안 항해에 나선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뒤였다.
어찌 보면 거친 선원들이 꽤 많이 참은 셈이었으니, 감태 대장이 전쟁 영웅이었고 탐라공이나 남양 대사와도 친분이 있는 등 나름의 권위가 높은 덕이었다.
“좋아. 딱 하루만 더 서항하고 돌아가도록 하지.”
감태는 선원들의 항거(?)에 그리 노여워하지 않았다. 마치 선원들이 크게 항의하면 뱃머리를 돌릴 작정을 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감태가 곧바로 자신들의 요구에 수긍하자, 반란까지 작정했던 선원들은 다행스러워하며 본업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그건 감태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단 하루의 추가 서항 끝에 서남쪽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연안이 그날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완전히 꺾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약 한 달에 걸쳐 2천 길미나 되는 연안을 따라 항주한 끝에 얻어 낸 소중한 발견이었다.
그렇게 감태도 선원들도 만족스럽게 회항길에 올랐는데, 그때부터 감태의 탐험대는 고생길을 밟기 시작했다.
내내 평온하던 바다가, 폭풍은커녕 물결이 거친 날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던 바다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으니, 이틀이 멀다 하고 궂은 날씨 속에서 폭풍도 두 차례나 만났고, 그때마다 탐험대가 괴멸될 위기에 빠졌다.
게다가 처음 대륙에 닿았던 지점에 닿을 즈음 두 번째로 만난 폭풍 탓에 선박의 수리를 위해 상륙했을 때, 원주민과 조우하였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는 와중에 원주민 전사들의 공격까지 받고 말았다.
여러모로 월등한 무장을 갖춘 탐험대였지만, 궂은 날씨의 연속 속에서 화약이 모두 젖어 버려 냉병기로만 대응할 수밖에 없었으니, 수적으로 불리한 탐험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상당한 동료 선원들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결국 온갖 고생 끝에 티모르 섬으로 귀환했을 때, 세 척의 배들 중 중함선인 기함만이 남았고, 총 97명의 선원들 중 20명이나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하나, 그들의 불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휴식 후 여송섬으로 돌아갔을 때 최악의 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미 한발 먼저 새로운 대륙의 발견을 보고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여송 파식군의 체관부 관리가 비공식 인정 상태로 고려 조정에 장계를 올리면서 이미 파식군 내에 파다해진 그 소문의 주인공은 심지어 감태도 잘 아는 자였다.
바로 감태가 신대륙의 탐험을 떠나기 전에 파파섬(뉴기니섬)의 일주를 위해 분대로 떼어 놓았던 바로 그들이 신대륙 발견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파파섬의 일주를 위해 남하하던 중에 그들은 남쪽으로 섬들을 발견하였으니, 그 섬들의 남쪽에 신대륙이 있었던 것이다.
소문의 진위를 따지기 위해 파식군에 파견된 체관부 관리와 씨름하던 감태는 분노와 억울함을 품고 그가 직접 분대장으로 임명한 자를 찾아갔다.
“호중! 자네가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는 겐가?!”
이미 감태가 찾아올 줄 알고 미리 분대의 대원들을 모아 두고 있던 아호중은 굳은 얼굴로 그를 맞이하며 인사부터 올렸다.
“죄송합니다. 하나, 신대륙을 발견한 건 저희 탐험대입니다.”
“저희 탐험대?!”
“예, 호중 탐험대지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너는 내 탐험대 소속이고, 너희는 이 감태 탐험대의 대원들이지 않은가?!”
“아닙니다. 저희는 이미 선배의 탐험대를 탈퇴하였고, 새로운 탐험대를 결성한 후에 신대륙의 발견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니 저희 호중 탐험대가 새로운 대륙의 발견자들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감태는 더 이상 치밀 것 같지 않던 화가 머리끝까지, 아니 머리를 뚫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시야마저 붉어질 정도로 분노한 감태는 호중을 향해, 그를 죽여 버릴 작정으로 달려들었지만, 그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감태만 그의 대원이었던 자들의 손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른 대원들과 함께 왔다면 싸움이라도 제대로 해 봤을 것이건만, 분대가 먼저 신대륙을 발견하여 보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감태의 대원들이 그를 비난하며 흩어진 상태라 그럴 수도 없었다.
하여, 홀로 들이닥쳤다가 호중의 대원들에게 손발이 구속된 감태 앞에 호중은 앞서 굳었던 표정을 풀고 여유롭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저희가 기록한 신대륙의 연안이 너무 짧아 자칫 신대륙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였는데, 선배께서 그곳이 대륙임을 확인할 만큼 탐험하신 덕에 저희도 인정받기 용이해졌습니다. 이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이……!”
“저희는 조만간 탐라섬으로 갈 예정입니다. 마땅히 저희가 누려야 할 것을 누리기 위해서죠. 혹시 같이 가실 의향이 있으시면 그러십시오. 저희도 어느 정도 예우할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신대륙 발견의 영광을 양보할 수는 없다는 뜻이 명백하기도 한 말이었다.
“너무 억울해 하진 마십시오. 선배도 저희가 이틀 먼저 신대륙을 발견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네놈이 항로 일지를 조작했겠지!”
“아닙니다. 저희는 조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계속 믿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이미 저희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모든 것이 감태에게 불리했다.
증거도, 따르는 자의 수도, 발견 보고의 선후도.
그에 따라 세상도 승자를 가름하였다.
호중의 발견에 대한 장계가 탐라 조정에 닿은 즉시, 호외로 발간된 순보를 통해 탐라국과 고려 전역에 알려졌으니, 탐라 백성들은 탐험의 시대를 절감하며 호중과 그의 탐험대를 영웅이라 인정하였다.
간간이 감태의 탐험대도 언급되기도 했지만, 그 언급의 방향은 안타까운 이인자에 대한 동정과 조롱이거나, 호중이 발견한 땅이 진정 대륙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언급하는 과정에 스치듯 나오는 것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감태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고려 조정에서 신대륙의 이름을 ‘호중 아대륙(浩仲 亞大陸)’으로 정한 것이었다.
사실 고려 조정에서 공식화하기 전에 이미 백성들이 먼저 신대륙을 호중 대륙이라 칭하고 있었다.
워낙 백성들 사이에서 대대적으로 회자되는 명칭인 데다가, 섬도 아니고 대륙인 만큼 발견한 업적을 기리는 방법으로 호중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 조정 내 여론도 긍정적이었으니, 호중 아대륙이라는 명칭으로 손쉽게 중지가 모아진 것이었다.
다만, 대륙인 것 같기는 한데, 아직 그 크기가 정말 대륙이라 칭할 만한 건지 확정할 수는 없어, 일단 대륙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아대륙이라는 이름을 쓴 게 다를 뿐이었다.
그렇게 호중과 그의 탐험대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영웅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있을 때, 감태는 여송섬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정신적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가 훗날 가졌던 대표적인 별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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