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57)
* * *
강남이나 홍대 같은 번화가는 아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밤거리도 충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경기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정세가 어떻고, 수많은 목소리들이 마치 말세를 사는 느낌을 주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었다.
“어떤 모습일까, 천몽 이후에는?”
조금 떨어진 통유리 너머로 비치는 거리를 바라보던 재상의 물음에 두신은 바로 답하는 대신 손에 쥔 칵테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정말 딱 한 잔만 하자는 재상의 제안에 정말 딱 한 잔만 할 생각으로 칵테일 바로 들어오긴 했지만, 정작 그가 마시는 칵테일은 두 잔째였다.
어쨌든 입에 머금은 액체를 목 너머로 넘긴 뒤 두신은 한 박자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세상 누구도.”
세상 누구라는 광범위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애초에 천몽의 존재를 아는 자는 아마도 셋에 불과할 것이고, 그나마도 두 사람은 마음속에 천몽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별 의미가 없었다.
“정말 천몽이 끝나가는 걸까?”
“그것도 모르지, 세상 누구도.”
그건 진짜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지어 천몽의 당사자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나, 직전 회의 때 몽주가 천몽의 종료를 언급하면서 두 사람도 천몽이 끝나 감을 강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예전에 몽주 씨가 그랬잖아. 천몽이 끝날 무렵에 끝난다는 느낌이 있다고. 뭔가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긴 했지만, 아직 느낌은 없다니까, 아직은 아니라고 봐야지.”
“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어차피 몽주 씨도 천몽을 한 번밖에 해 보지 않았는데, 매번 같은 식일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 무엇보다 몽주 씨의 천몽 속 나이가 곧 환갑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그 나이면 갑자기 세상을 떠도 크게 이상한 건 아니지.”
그러고 보면 그랬다.
이전에도 천몽의 종료나 그 후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 있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 천몽의 종료를 강하게 인식하는 건 천몽 속 몽주의 나이가 충분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껏 병치레도 없었고, 지금도 아픈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그건 몽주가 가지고 있는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는 ‘종특’에 기인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몽주가 7, 80살까지 살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만약에 정말 몽주 씨가 곧 죽을 거라면, 그러니까 천몽 속에서 그럴 거라면, 그래서 한 2년밖에 안 남았다면, 이제 몽주 씨는 뭘 해야 하지?”
“글쎄다.”
재상과 두신이 잠시 각자 고민해 보았으니, 잠시 뒤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비슷했다.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작위(作爲)는 더 이상 의미가 없지.”
“그렇지. 지금 펼쳐 놓은 일을 마무리하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지.”
물론, 이미 아들에게 많은 일들을 맡긴 상태이긴 했다. 하나, 그건 아들의 뒤에서 몽주가 조언을 하면서 배후 조종자로서 탐라와 고려를 경영하며 후계 체제로 연착륙시키려 한 것일 뿐, 천몽 속 활동을 끝내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정한 바는 없지만, 지난 여러 번의 회의 속에서 그 기간을 대략 10년쯤으로 묵인하에 예정하고 있었다.
한데 2년밖에, 아니 2년보다는 길더라도 기대했던 만큼의 삶이 몽주에게 남아 있지 않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남은 천몽에 대한 구상을 통째로 수정해야 할 판이었다.
“일단 연방의 확대는 스톱이겠지?”
“어, 몽주 씨가 판단을 잘했지. 새로이 들어오는 가입국은 그 제안과 교섭 중에 탐라공이 바뀌면 신뢰를 잃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몽주 씨 아들이 연방을 선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니, 연방이 흐지부지될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그렇지.”
그 날 낮에 있었던 회의는 뭔가 기운이 빠진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천몽의 주인공인 몽주가 그 종료를 언급한 만큼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원동력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던 탓이다.
때문에 상황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며칠 뒤, 다시 천몽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하고 비교적 빠르게 회의를 마감했었다.
그렇게 별 논의 없이 회의를 파하고 나서일까, 논의하기에 적합지 않은 자리임에도 재상과 두신은 곧잘 천몽을 논하기 시작했다.
“연방에서 연상되는 건데, 천몽이 끝날 때 탐라와 고려의 영토는 어느 정도가 가장 적합할까.”
“그런 질문보다는 지금의 영토가 만족할 만한가라는 물음이 더 적합하겠지. 어차피 몽주 씨 아들에 의한 연방 확대를 제외하면 고려의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해 뭔가 하기 애매하잖아.”
재상은 두신의 질문을 바꾸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맨 처음 우리가 고려에 의한 대항해 시대를 언급하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몽주 씨가 천몽 속에서 확보한 탐라국과 고려의 영토는 예상은 물론이고, 기대도 많이 넘어선 게 틀림없어.”
“동의.”
“중앙집권적 체제하에 고려가 한 덩이로 똘똘 뭉쳐 있다면 좀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사정에서 그만한 영토를, 그것도 바다 너머로 급격히 확장한 결과물인 그 거대한 영토를 중앙에서 완벽하게 컨트롤하길 바라는 건 과욕이겠지.”
“사실 고려 전체가 아니라 탐라국만 따져도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워. 적어도 반도 국가로서 등 터지는 새우 꼴에서는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아, 물론 그 영토가 현대까지 이어진다면 말이지.”
재상이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탐라국은 반도 국가로서의 한계를 크게 극복한 상태였다. 해양 세력으로서 입지가 확고함은 물론, 남면이나 동금주같이 대륙에도 큰 영토를 쥐고 있었다.
“근데 엄격하게 따지면, 지금 탐라국의 영토 중에 본토라고 할 만한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아.”
“그렇지. 이제 개국 30년도 안 된 나라임을 감안하면 엄격하게 볼 때, 탐라섬만 본토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체제적인 안정성을 감안하면 남면과 동금주, 그리고 구주까지는 본토라고 취급할 만해.”
재상은 다시 동의하는 고갯짓을 주억거리다가 이주에 대해 물었다.
“이주를 본토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거의 확고한 탐라국의 영토임에는 틀림없지. 한데, 중국이 너무 가까워. 아무리 정치경제적으로 이주를 얽어매었다고 해도 민족주의가 일찍 발현된다면 상당히 불안정해질 수도 있어.”
“흠, 대만섬을 잃는다면 여송섬도 불안해지겠는데?”
하나, 재상의 말에는 그리 심각함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건 또 다르지. 일단 민족주의적인 불안정성이 생긴다고 해도 이주섬이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보장은 없어. 그보다는 제노사이드(Genocide) 사태나 중국의 침공이 우려스러운 거지. 한데, 탐라국의 국력과 군력으로 한 번만 잘 버텨낸다면 이주섬의 종주권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여송섬의 안정이 이주섬의 안정에 종속되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여송섬은 민족적으로 그 자체적 완결성이 있으니까. 정치경제적인 접착력만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면, 지금 여송섬 북부가 사실상 탐라국의 영토가 된 것처럼 여송섬 전체와 그 주변의 도서 전체를 얻고 지킬 수 있을 거야.”
“그건 보르네오 섬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그렇겠지. 아, 물론 서부 한정. 동부의 힌두교 세력이나 야만인들은 좀 더 상황을 두고 봐야겠지. 몽주 씨도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고. 더 정확히 말하면 대순다 열도 전체가 그렇지. 연방으로 품을 세력을 선택하고 그들을 앞세워 너무 큰 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찢어야겠지. 솔직히 대순다 열도 지역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봐. 경쟁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탐라국이 의지만 보이면 무슨 문제든 해소가 가능할 거야. 아, 한 가지 전제 조건은 있겠지. 싱가포르를 계속 확보할 수 있느냐는 것 말이야. 사실 탐라국의 본토, 그러니까 탐라섬이나 동금주, 그리고 구주를 제외하고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곳은 싱가포르야. 거길 계속 점유하고 나아가 영토로써 종주권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지. 거기에 주변에 방패와 아군의 역할을 해 줄 연방 가입국들을 다수 유지할 수 있다면 사실 지금 탐라국의 영토 전반은 상실될 가능성이 거의…… 뭐야, 왜 그렇게 웃어?”
한참 동안 머릿속에 흘러다니는 천몽 속 정세를 검토하며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두신은 문득 자신을 보며 실소를 거듭 짓고 있는 재상을 보았다.
“크흐흐, 현 백수이자 작가 지망생에 불과한 나랑, 유기장인인 네가 마치 장자방과 한신처럼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게 문득 우습네.”
“치, 뭐 나도 가끔 쪽 팔린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두신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으니, 그 민망함의 기원은 그가 논리와 정세로 내뱉는 이야기들이 몽주를 통해 천몽에서 수십, 수백만의 인간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 영향이라는 것이 삶의 미세한 부분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니, 지금처럼 취한 밤거리에 칵테일을 세 잔째 마시며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무게는 아니었다.
“뭐, 어차피 우리가 직접 천몽 안에 사는 것도 아니니, 그냥 삼국지 보고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듯 해도 상관없지. 몽주 씨도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양반도 아니고.”
“그치?”
“그래도 여기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고, 아까 이야기 나왔던 거나 재검토해 보자.”
“뭐? 세계 지도?”
“아, 그거야 이미 정해진 거 아닌가. 우리도 달리 반대할 이유가 없고.”
낮에 있었던 회의에서 주로 상황 정리에 중점을 둔 만큼, 몽주가 아들의 건의를 받아 세계 지도를 편찬해 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태평양의 전모에 대한 부분, 그리고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모습을 밝히기로 했으니, 혹여 그로 인해 고려나 탐라국에게 손해가 생길 가능성이 있을까 함께 고민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아메리카 대륙을 넣을 것도 아니니까. 그럼 뭘 말한 거야?”
“몽주 씨가 가장 먼저 처리하겠다고 하는 거 말이야. 지원세.”
“아, 그것도 이미 더 논의할 게 없잖아? 이미 고려에서도 몽주 씨 동생이 이론적으로 완성했고, 말 그대로 시행만 앞둔 상황에서 시행의 시기를 몽주 씨의 치세로 당기는 정도인데?”
“다른 건 아니고, 우리가 이미 염려했던 부분을 다시 말하려는 거야. 천몽의 당대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지원세를 바탕으로 한 조세 제도에 별문제가 없을 거라 봐. 거기에 조정이 정치를 잘한다면, 조세에 의한 경제적 왜곡이 적은 만큼 경제 발전에도 긍정적이겠지. 다만, 사회가 분화되고 경제가 더 복잡해지면 지원세만으로는 조세 형평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어.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오늘날 현대 경제학자들이 가장 크게 지적하는 게 그거니까. 그리고 또 하나 우려되는 건 상속과 증여에 대한 세금도 없는 만큼 부의 세습이 심각해질 수 있다는 거야. 지가 상승을 통한 축부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부유한 자가 더 부유해지는 흐름은 탐라국도 마찬가지일 텐데, 지원세로 그 흐름을 제어하는 건 정말 어렵지 않겠어? 자칫 너무 큰 빈부 격차가 생기면 그 자체로도 나라가 흔들릴 수 있음을 경계해야지.”
“음, 방법은?”
“생각해 본 건 있는데,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 * *
귀국하자마자 뭔가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탐라공으로 인해 탐라국 조정도 덩달아 급해졌으니, 그중 가장 급해진 관부는 재관부와 체관부였다.
재관부가 바빠진 이유는 지원세의 시행령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으니, 본디 강중의 업적으로 삼기 위해 천천히 시행하려 했던 일이 재촉된 탓이었다.
그래도 재관부는 새로운 부분도 있다곤 하지만 어느 정도 준비된 사안을 앞당기는 수준인데 비해, 체관부의 경우는 예정에 없던 지도 편찬과 그 보급으로 인한 일감이 생긴 것이었으니, 탐라공가에 비밀 소장되었던 걸로 알려진 지도가 체관부 고위 관리들에게 공개되면서 그를 비탕으로 한 지도를 제작하는 것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 지리적인 지식의 확장이 실로 어마어마하여 세상이 갑자기 두 배 이상 커지는 꼴이었으니, 먼저 알게 된 체관대신 및 고위 관리들도 진정 공개해도 될지, 백성들이 받을 충격이나 그 지도가 외국으로 흘러 들어갈 경우 생길 파급력에 대해 여러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결론은 대대적인 공개였다. 이미 빼야 할 부분은 빠졌고, 페르시아 지역 이서 지역부터는 지리적인 부정확함과 오류를 일부러 넣어 두었기에 큰 타격이 올 만한 지리 지식은 감추었다.
대신, 그만큼 세상이 넓다는 것을 고려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개척과 도전의 정신을 일깨우고, 유지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쓰고자 하였다.
다만, 강중에게만큼은 조금 더 정확한 지리 정보를 알렸으니,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물론,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정확히 대해의 너머에 대륙이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저 경도에 따른 시간의 차이와, 지구설에 따라 추정되는 지구의 둘레 길이를 비교하여 감안할 때 대해가 그저 대해만으로 존재하기에는 너무 클 수 있음을 언급하며 대해 중에 새로운 대륙이나 큰 섬들이 존재할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게 유도한 것이었다.
하여, 훗날 만약 고려와 탐라의 탐험에 대한 열기가 식을 경우, 그리고 당연히 대해 안에 새로운 땅에 대한 학문적인 추정과 관측이 없을 경우, 강중으로 하여금 그에 대한 이야기를 흘려 고려의 확장력을 새롭게 다지는 데 쓰게 하려는 안배였다.
다행히 훗날의 상황을 보면, 그건 몽주의 기우에 불과했다.
대해 안에 새로운 대륙의 존재를 의심하기에 앞서, 지구설에 따라 대해 너머 존재하고 있을 유럽으로 곧장 이어지는 항로를 개척하려는 탐라 탐험가들의 열정이 더 앞섰던 것이다.
즉, 역사에서 인도를 향한 유럽 탐험가들의 열정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만들었다면, 천몽 속에서는 탐라 탐험가들의 유럽을 향한 도전이 또 하나의 신대륙을 발견하는 차이를 만든 것이었다.
* * *
“내가 한번 몰아 보지.”
재관, 체관 두 관부를 비롯하여 탐라 조정을 한층 더 바쁘게 만든 몽주는 나름 기다리던 물산이 생산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였다.
그것은 바로 신형 족교였다. 아니, 더 이상 족교라 불리지 않고 있었으니, 자전교(自轉轎)라 불리는 탈것이었다.
쇠띠의 ‘아이디어’를 내주고, 공관부 공소에서 고무로 된 바퀴를 선보이자, 저전교는 흔히 아는 자전거의 모습과 유사한 형태로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서둘러 한 대 구하여 오게 하여, 자전교를 직접 확인하였는데, 의외로 자전교의 크기가 크고 상당히 무거워 현대에서는 더는 찾아보기 어려운 ‘짐발이 자전거’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어이구야…….”
주변의 걱정스러운 시선 속에 몸소 자전교를 몰아 보니, 겉보기로도 짐작할 수 있었듯 몰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다.
몽주의 몸이 가진 근력이 약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데 훨씬 큰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에어리스 타이어’ 형태의 바퀴가 ‘튜브’형 바퀴에 비해 지면과 마찰력이 커서 바퀴를 돌리는 데 더 많은 힘이 들게 만들고 있었다.
“후우, 후우!”
몇 번이나 비틀거리다가 땅에 발을 디디며 버티던 몽주가 약간의 요량을 터득하여 본격적으로 자전교를 몰기 시작하였다.
“저하, 대단하십니다!”
비서원 관리가 아부 같은 말로 환호하였는데, 그저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자전교의 원형인 족교부터가 거의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백성 대부분은 전후 일렬의 바퀴를 가진 ‘자전거’를 몰아 볼 염두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 중에 탐라공이 앞장서 자전교를 모는 데에 성공하니, 다들 신기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그만해야겠군.”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전거를 호위군병에게 넘긴 몽주는 뻐근한 허벅지를 손으로 만져대며 땀을 식혔다.
“이보게, 철 소장.”
“예, 저하.”
고무바퀴를 만드는 일을 했던 철덕진 소장이 얼른 답하며 다가왔으니,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나름 나쁘진 않지만, 아직도 고무바퀴가 너무 약한 것 같아. 무게를 이기는 힘도 약하고 바닥과의 마찰에 대한 내구력도 그렇고.”
“예, 저희도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책망하는 건 아니고, 앞으로도 고무바퀴의 개량에 힘쓰라 부탁하려는 걸세. 자동차에 달아도 이상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힘껏 노력할 것입니다.”
자동차를 언급하긴 했지만, 몽주가 가시적으로 기대하는 건 역시나 자전교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나온 자전교도 서서히 쓰이게 될 것이고, 조금만 더 가볍게 몰 수 있게 된다면 아주 광범위하게 쓰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금 탐라와 고려는 그 기술적인 수준과 시대적 상황에 비해 도로가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고, 하여 우마차의 이동과 쓰임이 매우 컸다.
한데, 우마차는 아무래도 대량의 짐과 승객이 이동하는 데 쓸 수밖에 없었으니, 상대적으로 적은 짐이나 개인을 위한 탈것은 여전히 말이 전부였다.
말도 대량으로 목마(牧馬)하면서 과거에 비해서는 구하기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말을 소지하고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으니, 결국 백성들은 좋은 여건의 도로 위를 여전히 도보로 이동하고, 짐지게와 보따리로 짐을 옮길 뿐이었다.
그런데 만약 쓸 만한 자전교가 나온다면, 지금보다 좀 더 쉽게 몰 수 있고 가격도 좀 더 낮아진다면 분명 만백성들이 널리 쓰게 될 것이고, 물산의 유통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백성 개개인의 교통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고을의 양적 발전에도 기여할 게 틀림없었다.
몽주는 아무래도 짐을 옮기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초기형 자전교를 보며, 빠른 시일 안에 자전교가 기술적으로 발전하고 더 다양한 목적으로 상품화되길 바랐다.
몽주가 자전교의 등장에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낀 그날, 재관부에서 지원세에 기반한 시행령의 초안을 완성하였다.
지원세 자체에 관한 부분은 이미 예전에 거의 확정되었던 것에서 거의 달라진 게 없었지만, 시행령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에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조세의 제도는 두 번 세 번 강조함에도 모자람이니, 시국의 흐름에 맞춰 항상 수정할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로다. 이에, 현재의 조세를 과신하지 말 것이고, 그 효용을 주시하며, 언제든 보다 나은 조세의 제도를 위해 개혁함을 주저하지 말 것이로다.’
언제고 지원세로 한정된 조세 제도가 한계에 부딪칠 때를 예비한 문구였으니, 현대에서 재상, 두신과 더불어 논의한 것으로, 그 문장의 성격을 두고도 꽤 논쟁이 있었다.
개선해도 좋다는 수준의 ‘뉘앙스’부터 반드시 개선하라는 내용까지 조세 제도에 대한 수정의 강도를 조율하는 논쟁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제법 강도 놓은 개선을 요구하는 문장이 선택되었다.
아무래도 탐라공이 가진 위명으로 인해 몽주가 세운 제도를 고치는 데 후대인들이 큰 부담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조금 과하게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는 게 낫다는 데 중지를 모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세 제도의 시행령에 있어 새로운 부분이 더해졌으니, 간단히 설명하고자 하면 상속세의 설치였다.
다만, 흔히 여겨지는 상속세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세금이라기보다는 벌금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상속세의 대상은 상속 재산 전체가 아니라, 단일 상속의 경우나, 다수 상속이더라도 특정인에게 상속에 집중되는 경우에 그 차별된 재산에 과세하는 것이었다.
이는 준비 중인 혼인 제도의 정비와 연관된 조치이자, 부(富)의 과도한 집중을 막기 위한 조치로써 지원세가 가질 수 있는 단점을 보강하려는 것으로, 재산이 계속 단일한 상속자에게 유전되면서 지속적으로 집중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재상의 ‘아이디어’에서 기안한 것으로, 어차피 상속은 형제들 간에 나누는 것이라 부의 분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었지만, 세대가 지남에 따라 형제가 사촌이 되고, 사촌이 팔촌이 되면서 혈연에 의한 부의 연결고리가 미약해지는 걸 노렸다.
‘특히 큰 부자일수록 더 효과적일 겁니다. 현대 한국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죠. 상속을 두고 형제자매들끼리도 원수처럼 싸우곤 하잖아요.’
상속이 공정하든, 누군가에게 더 큰 유산이 쥐어져 상속세의 부가가 있든, 결과적으로 불만을 가지는 자가 나올 것이고, 이는 곧 그만큼 부가 나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리였다.
거대한 재산이 만들어 내는 가족 내의 불화를 노림수로 쓰는 못된 심보를 가진 법령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토지를 통해 부의 원천과 집중을 미리 약화시킨 지원세 위주의 조세 제도에서 새로운 직접세를 가하기 어려운 만큼 조세 제도와 분리된 상속 제도를 이용하여 부의 분배…… 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의 분할을 유도하는 데에는 효용성은 있겠다는 결론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탐라 조정에서 그와 같은 상속세의 도입을 논의하면서 그 세율에 대해 논쟁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몽주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낮은 1할로 결정되었다.
즉, 단일한 상속의 경우에도 전체 재산 중 1할 만큼만 벌금을 내면 되는 셈이었다.
이렇게 낮은 세율이 책정된 것은 다분히 탐라상단을 의식한 탓이었다.
탐라상단이 분할되는 걸 저어하는 탐라 조정의 입장에서 세액을 크게 높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특별권력관계로서 탐라공가에 예외를 둘 수도 있지만, 그런 예외를 탐라공이 꺼려 하는 만큼, 차라리 단일 상속을 감당할 만큼의 세액을 책정하자는 게 신료들의 판단이었다.
만약 탐라상단이 개인적인 재산에 불과했다면, 몽주는 이에 크게 반대하였을 테지만, 아직은 국가적인 사업을 위해 탐라상단이 크게 존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만큼 결국 신료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할 정도(?)의 벌금이야 어차피 탐라 상단 내 회사들 중 더는 굳이 탐라공이 관리할 필요가 없는 분야의 회사들은 매각할 계획이 있는 만큼 상속세의 지불을 그 계기로 삼으면 되는 일이었다.
“강영이가 크게 실망할 수도 있어요.”
이후 공택에서 상속세에 대해 전해 들은 앵도가 지적하였으나, 몽주는 유덕사의 창설과 발전을 위해 쏟아부은 투자와 탐라상단의 자산을 생각하면 이미 강영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한 셈이라 여겼다.
“강영이도 그렇게 여길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혹 딴소리를 하면 제가 단단히 혼을 내줄게요.”
앵도의 농담에 몽주는 미소를 보였지만, 어쩌면 새로운 상속 제도의 못된 심보가 그의 자녀들에게도 효력을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씁쓸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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