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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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 사람은 뭘 보고 몽주 씨에게 자길 맡긴다는 겁니까?”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묻는 재상의 태도에선 ‘또 조미료 치는 거냐?’는 핀잔을 엿볼 수 있었다.
“비누랑 로션 때문이죠.”
“그거 가지고 먼 곳을 보고 있느니 어쩌니, 대사를 이끄니 마니 했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그 제품들 자체가 아니라, 그 제품들을 권세가에 뿌리는 걸 보고 추리한 거죠.”
“말이 될 듯하면서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재상은 여전히 못마땅한 모습이었다.
그의 입장에선 이제는 제법 애정이 붙은 ‘놀이’에 자꾸 무리한 설정이 붙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만큼 탁기의 자청은 뜬금없는 일이었고, 정확한 속내를 알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애월루에 있으면서, 애월루를 통해 몽주 씨가 고려 권세가의 여인들에게 비누와 로션을 뿌리다시피 파는 것을 보고, 몽주 씨가 권세가의 여인들을 통해 무언가를 획책하는 것이라 추측하고 그에 동참하고자 한다는 것이죠?”
“에, 뭐, 그런 셈이죠.”
두신의 요약에 더해 비누와 로션에 대한 탁기의 매우 긍정적인 평가와, 뇌물 수수와 로비가 만연한 정국 속에서 여인들의 베갯머리송사가 한자리를 마련해 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그의 판단까지. 그런 전제들이 종합적으로 탁기로 하여금 몽주의 수하됨을 자청하게 만든 것이었다.
적어도 꿈속에서 탁기와 대화를 하며 몽주가 알아낸 이유는 그랬다.
“허허, 진짜 말이 될 듯하면서 안 되는 것 같고,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하고, 뭐 좀 그러네요.”
두신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딱히 호불호 없이 얼버무렸다.
“뭐, 정히 그 사람을 받아들이겠다면야, 저희로서는 조심하고 쉽게 믿음을 주지는 말라는 정도의 조언밖에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그야 그렇죠.”
당연한 말이고, 심지어 탁기조차도 그 당연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믿어 달라 하지 않고 대신 두고 보아 믿을 만한지를 봐 달라 청한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 능력은 어때요? 굉장한 유명한 장군 후손이고, 왕년에 군부에서 잘나가던 집안 출신이랬죠?”
혈통이야 그랬다. 하나 사람이 가축도 아니고, 품종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법.
“그 유명한 장군이래야 200여 년 전의 사람이라니, 이제 와서 집안을 따질 건 아닌 것 같고요. 일단 그 사람이 싸우는 걸 본 사람들은 다 대단하다고들 하더군요. 흔히 얘기하듯 17대1로 싸워 이겼다는 식으로요.”
17대1 소리에 두신이나 재상이나 낄낄 웃었다.
“뭐, 조건만 맞는다면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죠. 근데 실제로 싸우는 거나 무예를 선보이는 걸 보진 못했고요?”
“네, 그건 아직.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런 걸 시키기 좀 그래서요. 근데 겉보기에 포스가 있긴 해요. 그 왜, 운동 오래하거나 무술 잘하는 사람들은 서 있을 때도 뭔가 반듯하고 단단한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근데, 그 사람 집안의 유명한 장군이 누군가요? 역사에 남을 만큼 대단한 장군이었을까요?”
두신이 문득 궁금한 듯 물어 왔고, 그에 재상이 곧바로 ‘으이고.’하며 핀잔하듯 먼저 대답했다.
“아까 그랬잖아. 성이 탁, 이름이 기라고. 고려 시대 유명 장수 중 탁씨가 있냐?”
“그래도 모르지…….”
두신이 재상의 핀잔에 쑥스런 표정을 하면서도 몽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유명한 장수라는 이에 대해 알려 달라는 시선이었다.
“잘 모르는 이름이던데…… 준경이랬던가. 더 이상은 몰라요. 이름만 알려 주곤 더는……? 왜 그래요?”
몽주는 말을 하다 말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허허, 정말 그 사람이 준경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장수의 후손이랍니까.”
“예, 탁준경. 유명한 장수예요?”
“탁준경은 안 유명하죠. 하지만, 척준경은 나름 유명하죠. 모르세요?”
음?
탁에서 척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탁준경이라고 할 때는 전혀 모를 이름이, 척준경이라 하자 문득 눈에 익은 느낌이었다.
“진짜 척준경 몰라요?”
“모르면 이상할 정도로 유명한 장수인가요? 책에서 본 듯하긴 한데. 제가 확실하게 안다고 할 수 있는 장군들은 아주 유명한 사람들 뿐이라서요. 이순신, 권율, 강감찬, 김유신, 계백…… 에, 뭐 많지는 않네요.”
몽주가 아는 장수들은 적어도 역사 교과서에 존재감이 뚜렷한 이들뿐이었다. 6, 7년 전부터 새로운 역사를 배운 그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잘 모를 수도 있겠죠. 척준경은 한국 역사에 기록된 장수들 중에서 최고의 맹장이라 할 만한 분이지만, 보통은 윤관이나 이자겸의 이름 옆에 스치듯 지나가는 이름에 불과하니까요.”
윤관이나 이자겸의 이름은 바로 알 만했다. 각각 동북 9성 개척과 이자겸의 난으로 교과서에 존재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그 척준경이 탁준경이에요?”
“네, 척(拓) 자는 탁 자로도 읽거든요. 사실 성씨로 읽을 때는 탁 자가 맞다는 주장도 있어요. 다만, 척씨가 맞다고 해도 척준경의 몰락 이후, 성을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두신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동안, 재상이 배시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그건 마치 다 알고 척준경의 후손을 끄집어낸 거면서 괜히 모른 척이냐는 듯했다.
“허허, 근데 소드마스터 척준경의 후손이면 좀 기대가 되네요. DNA를 좀 많이 받았으려나.”
“글쎄요…….”
몽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드마스터라 부르고 DNA까지 운운하는 걸 보면 탁기의 선조가 대단히 용맹하기로 유명한 장수인 모양인데, 탁기에게는 그리 큰 기대가 들진 않았다.
몽주의 입장에서야 풍기는 기세만 봐도 상당한 무인이라 생각되지만, 객관적으로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을 붙여도 될 것 같진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여인에게도 당했으니까.
비록 정면으로 대결한 것도 아니고 도망치다가 날아온 단검에 당한 거라곤 하지만, 또 단검을 던진 여인이 보통 여인은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정말 굉장한 무인이라면 그런 창피한 부상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모르죠. 최앵도 씨가 정말 나찰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무예를 갖고 있다면, 뭐…….”
“…….”
이미 여인의 한계를 넘어선 게 분명해 보이는 예비 아내였지만,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없길 간절히 바랐다.
어쨌든 ‘놀이’의 주제는 다시 혼인과 부인으로 넘어갔다.
“그래도 괴물 같은 생김새는 아닌 모양이군요.”
“당대인들에게는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키가 175센티미터 정도인 모양인데, 대충 지금 여자 배구 선수들 보는 느낌이지 않을까요.”
“헐, 요즘 배구 선수들이 얼마나 예쁜데요. 거요미처럼 크지만 귀여운 선수도 있거든요.”
“아니, 제 말은 키 차이…… 로 인한 느낌이 그렇다고요.”
괜히 배구 선수에 비유했다가 두신의 핀잔만 먹었다.
“고려의 몽주 씨 키가 170 정도니까, 마누라가 더 크겠네요. 뭐, 그럴 수도 있죠. 다만 그 큰 덩치를 가진 아내의 실력이 도망치는 무사에게 단검을 던져 부상을 입힐 정도라면……. 캬아, 진정한 의미의 공처가가 나올 듯하군요.”
“…….”
공처가(恐妻家).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편.
상황을 아는 이는 누구나, 심지어 몽주마저 짐작이 가능한 그의 미래였다.
혼인 초일(婚姻 初日)
처마 밑에 달린 풍경(風磬)의 추(錘) 모양이 초승달이었다. 아니, 그믐달인가.
바람에 찰랑 소리를 내며 연신 움직이는 터라 초승달과 그믐달을 구별하는 게 의미 없었다.
“……하여, 한번 쓰기 시작한 부인들 중 다시 부르지 않은 이가 손에 꼽히더이다.”
몽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풍경의 모양과 소리도 정다웠지만, 그 소리 사이로 들린 말소리 또한 달콤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애월루의 주인인 홍매였다.
물론 중년의 나이도 훌쩍 지나 퇴기라기보다는 할멈의 영역에 가까운 그녀이기에, 외모가 어여뻐 목소리도 달콤하게 들린 건 아니었다.
달콤한 건 그 목소리에 담긴 내용이었다.
“얻은 건 은병 다섯, 소은병 열여덟, 그리고 오종포와 개경목이 각각 서른아홉 필과 서른세 필. 여기에 쌀과 잡곡이 합하여 예순여섯 섬입니다.”
몽주가 석삼과 함께 고생하여 만든 비노와 선로 전체 중 거의 사분지 일을 팔아 번 재물의 양이 그러했다.
많다면 많은 것이지만, 실제 비노와 선로를 만드는 데에 들어간 비용을 제하고 나면 남는 이문이 있을까.
아무래도 사향노루의 냄새 주머니를 잔뜩 구입하는 데 쓴 비용이 큰 탓이었다.
아, 물론 이 또한 애월루와 기녀들에게 충분히 몫을 떼어 준 탓도 있었다.
뭐, 이문 따위야 아무렴 어떠랴.
이문에 목매려면 처음 비노와 선로를 뿌릴 때 공짜나 다름없이 팔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관댁과 부유층 부인들이 다시 비노와 선로를 찾을 때도 싸게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시작이 좋은 것에 다행스럽고 만족스러울 뿐이고, 진짜로 중요한 건 지금부터 잘해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에 대해 물은 부인들이 몇몇 있었다지요?”
비노와 선로의 성능에 감탄한 부인들 중 몇몇이 그 제조법이나 제조한 장인에 대해 물은 이들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몇 분은 호기심을 가지시더군요.”
“그중 한양부 사록댁 부인이 가장 적극적이라고요?”
이미 기녀들로부터 들은 게 있어 확인하는 차원의 물음이었고, 홍매 또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사록 나리와 그 부인의 성품은 어떠한가요?”
“호호, 아이들에게서 들어 다 아시면서 괜히 여쭈십니다.”
“들은 건 있지만, 홍매의 말씀으로 듣고 싶군요.”
“특별히 들려 드릴 건 없군요. 그 댁 내외의 오지랖이야 소문이 날 만큼 났으니까요.”
여기서 오지랖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부정부패를 비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기야 사록이니 발이 넓기야 하겠군요. 후후.”
사록(司錄)은 보통 정7품 안팎의 품계 낮은 벼슬로, 폭넓은 임무를 담당하는 지방 직책이었다.
치안과 군사 업무에다 역과 조세, 그리고 향리 인사에 대한 관할 관리를 하였고, 제사나 사신 접대 또한 맡아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업무는 속현 속읍의 행정을 감독하고 향리들이 결탁하는 폐단을 막는 것이었다.
하나 워낙에 업무의 범위가 넓다 보니 아무래도 담당 지역 사회 이곳저곳에 발을 뻗기가 쉬웠고, 그렇게 여러 사람들과 인연이 얽히기 쉽다 보니 자연히 부패할 여지도 컸다.
그래서 보통 제술과 급제자에게 초직(初職)으로 부여하던 벼슬이기도 했다.
하나 초직이든 아니든 부패할 자는 부패했고, 근자에 이르러서는 그나마 초직도 아닌 자들이 사록의 지위를 얻어 부정부패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 한양부 사록 오임수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그치들에게 접근하고자 하십니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몽주는 홍매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다 그렇게 대답했다.
“나쁜 선택은 아닐 겁니다. 단순한 자들이니까요.”
“단순하다 하면…….”
“재물을 앞에 두면 재물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게지요.”
흡족한 정보였다. 눈앞에 재물을 보고도 그 뒤를 볼 줄 아는 이라면 뇌물을 줘도 오히려 당하는 수가 있는 법이다.
몽주는 저자에 떠도는 소문과, 기녀들 및 홍매로부터 얻은 정보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오 사록을 타깃으로 확정했다.
그러고 보니 아주 마음에 드는 목표였다.
너무 지체 높은 지위도 아니면서도, 얽힌 곳이 많아 돈으로 매어 놓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듯싶었다.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 이 늙은이로선 감이 없지만, 그래도 천천히 가세요. 진수성찬 받으려 재촉하다 제사상을 먼저 받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은근히 살벌한 이야기였지만, 좋은 충고이기도 했다.
“유념하죠.”
“자, 이 늙은 기녀의 술 한 잔을 받으시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애월루의 식모가 술상을 가져다 놓았었다.
술 주전자를 든 홍매는 몽주의 잔을 채워 주었고, 몽주는 곧바로 마셨다. 무슨 술인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하게 넘어간 술이 이내 든든한 열기를 뱃속에서 만들어 내었다.
“도령께서 희한하게도 고초를 원하신다는 소문이 있어, 안주에 고초를 넣으라 하였지요. 도령께서 안 드시면 누구도 안 먹을 음식이니 다 드셔야 합니다. 호호.”
웃음을 흘리며 괜히 술상을 몽주 쪽으로 슬쩍 미는 홍매에게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어째 고초(苦椒)의 향이 난다 했더니 술상 위에 놓인 안주거리에 여러 종의 고초들이 가미된 모양이었다.
술상 위의 안주를 잠시 훑어본 몽주는 실소와 함께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초는 고추, 하나, 이미 고추가 고려에는 없다는 걸 확인하였다.
다만, 그렇다고 고초라는 단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중국 전국시대 역사서에 전차(戰車)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현대 육군의 전차가 아닌 것처럼, 고초 또한 말만 같을 뿐 다른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었다.
즉, 쓰거나 매워서 사람에게 괴로움(苦)을 주는 운향과(蕓香科) 관목이나 그를 이용한, 혹은 그와 비슷한 효과의 향신료 일체를 가리키는 데에 고초라는 말이 쓰이고 있었다.
산초, 호초(후추) 등, 쓰거나 매운 향신료의 집합명사가 고초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홍매의 말에 몽주는 잠시 설렜었다.
아무래도 매운맛 자체에, 혹은 매운맛을 즐기는 한국인의 명성에 애정과 자부심(?)이 없지 않은 입장에서, 이왕이면 아주 오래전부터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매운맛을 즐기고 매운맛에 강했길 바라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고려에서 살아갈 새털 같이 많은 날 중 매운맛을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 또한 찰나지간 설레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나, 그런 기대감과 염원이 현실을 바꾸진 않는 법.
이미 현대에서 알아본바, 한국 고추의 원류가 신대륙에서 초기에 흘러나온 3종 고추의 분화종임이 드러나 있었다. 생물학적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고추 야생종 26종의 자생지는 모두 중남미라는 게 밝혀져 있으니, 이 시대 고려에서 몽주가 바라는 ‘고초’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뭐,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고 안주만 봐도, 안주에서 흘러나오는 향만 느껴 봐도, 이 고초가 그 고추가 아님은 확실했다.
그래도 몽주는 안주를 맛보았다. 정말 혹시 모르니까, 고추 맛은 아니더라도 그의 입맛에 맞는 매운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
“……!”
“호호호.”
어느 순간 바뀌는 몽주의 안색에 홍매가 무릎까지 살짝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사람 놀려 먹는 재미가 아주 진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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