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66)
“어서 오십시오. 작가님.”
“안녕하셨어요.”
환한 표정으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은 고려 굴지의 정보 회사인 창월사의 출판 부문 사장 신기수진과 소설가 슬현우였다.
“이런 누추한 자리에 사장님께서 다 와 주시니 영광입니다.”
“누추하다니요, 무슨 말씀을. 올해 최고 판매 작가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는 사인회인데, 저도 사인 받으러 와야죠.”
두 사람은 화목한 분위기에서 마주 앉았다.
한 층이 통째로 터 있는 중에 푹신한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이 시원했다.
“요즘 기분이 어떠세요? 좋으시죠?”
“그야 물론입니다. 좀 얼떨떨하기도 하고요. 이 정도로 호응이 좋을 줄 몰랐거든요. 초반에만 해도 사골을 삶는다고 비아냥거림이 대부분이었잖아요.”
“호호, 맞아요, 그랬죠. 하지만 좋은 소설은 결국 환영받는 법이죠. 현우 작가님의 글이 그러했듯이요.”
“감사합니다. 한데, 제 글이 화제가 된 건 글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금기를 건드린 덕이죠.”
“금기를 건드린다고 다 흥행한다면 진즉에 다들 건드렸겠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인데.”
현우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분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건 과장임에 틀림없었다.
그분의 시대로부터 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역사는 수많은 위인들을 낳았고, 그중 그분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끼친, 오늘의 사회를 만드는 데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위인들도 많았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세상을 바꾼 위인들에 대한 투표를 해 보면, 그분의 순위는 생각보다 낮았다.
하나, 적어도 고려인들에게는 언제나 그분이 가장 첫 번째였으며, 수진과 현우가 고려인인만큼 틀린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한데, 듣기로 1만 질이 거의 다 나갔다고 하더군요.”
꽤 궁금했던 듯 슬현우는 인사 분위기가 지나자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아, 저도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래서 알아봤는데, 여러 질을 사신 분들도 꽤 있고…… 특히 한 분이 1천 질을 구입하셨다더군요.”
“헐.”
현우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천 질이면 8천 권에 이르는데, 그 책값만 해도 장난으로 할 짓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대표로 산 거 아닐까요? 아니면, 되팔기 위해……?”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감사의 의미로 출판한 것마저 완판된다니, 저희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
기성서적으로서 종이책이 사라진 지도 벌써 백여 년.
책을 전자 종이에 띄워 보는 게 일상인 요즘에도 종이책 출간이 없진 않았다.
다만, 공식적으로 유통 매매되진 않고, 유명 작가나 최고 판매 순위에 든 서적에 한하여 서명회에서 쓰기 위해, 혹은 수집용으로 출간되는 게 거의 대부분이었다.
현우의 책도 마찬가지였고, 인기를 생각하여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책을 출간하였는데, 그게 다 매진되었으니, 놀랍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였다.
“설마하니 오늘 서명회에 수천 명이나 온 건 아니겠죠?”
“호호, 싫으세요? 팔 아플까 봐?”
“서명하다가 팔 아픈 건 오히려 반갑겠죠. 사실 너무 적게 와서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서명회를 연 게 민망해질까 걱정하는 중이에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가 살펴보니 망상(網上 : 온라인)에서 분위기는 좋았어요.”
그건 현우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망점(網店 : SNS)에도 꼭 서명회에 참석하겠다는 댓글들이 많았다.
하지만, 망상의 분위기가 실제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흔하지 않던가.
현우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기로 마음을 먹고 사장과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관계자들의 안내에 따라 그들이 머물고 있던 숙관(宿館 : 호텔) 99층의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탐라특별시 홍로 1동에 위치한 시론 숙관 본점은 고려 5대 숙관 상표 중 하나로, 상표 이름인 시론이 과거 유명 여성 작가라는 값을 하듯 문화 행사 유치에 열정을 보이는 곳이었다.
덕분에 창월사도 시론 숙관의 협찬을 받아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에 서명회를 열 수 있었다.
“우와.”
승강기를 통해 회장의 위층에서 내린 현우는 이내 아래층에 가득히 모인 인파를 확인하며 감탄하였다.
“현재까지 배부된 번호표가 935번이라더군요.”
“935요? 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1천 명이 넘는 건 확정이군요.”
“그러면 1천 번이나 서명을 해야 합니까?”
현우가 손목을 주무르며 걱정스레 묻자, 신기사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100번까지만 직접 서명하고, 그 뒤로는 서명 도장을 찍어 주시는 걸로 공지했어요.”
“아아.”
현우는 그제야 출판사 직원이 얼마 전에 자기 서명을 받아 간 것을 떠올리며 안도했다.
“그럼 시작하실까요? 독자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네요.”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아래층의 독자들이 위층에 현우가 등장한 것을 알고 손을 흔들며 환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현우는 그 환호에 손을 들어 화답하며 방긋 웃음을 지은 채 서명회장으로 내려갔다.
비단 독자들뿐만 아니라, 언론사에서도 취재를 많이 나왔는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중 부양 사진기와 영상기기들이 공중에서 그를 향해 불빛을 번쩍였다.
현우는 다소 긴장했지만, 곧이어 서명회가 시작되고, 그와의 만남을 반가워하는 독자들을 맞이하면서 금방 긴장을 풀고 오늘의 행사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차림을 한 사내를 맞이한 건 100번이 지난 뒤였다.
“반갑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진몽주입니다.”
“네, 진…… 몽…… 주…… 씨.”
현우는 ‘해왕(海王)’이라는 제목의 책 속지에 이름을 써 주고는 서명 도장, 도장이라기보다는 프린터에 가까운 작은 판을 들었다.
미리 고지한 대로 100번 이후로는 필기로 서명하는 대신 그 도장을 이용하고 있었다.
한데, 그 전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지만, 직접 서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게…….”
서명 한 번 해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에게 한 번 해 주면 이후 다른 독자들도 친필 서명을 요구할 것이기에 현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를 돕는 출판사 직원도 뒤에서 나서며 곤란한 요구를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그 사내는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펼쳐 보였다.
“위세를 부리는 건 아닙니다만, 1천 질이나 샀는데 예외를 적용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
현우는 스마트폰 위 입체화상[=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1천 질의 구매 영수증을 보곤 이어 몽주에게 시선을 옮겼다.
“많이 사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이런 식으로…….”
“아, 1천 질이나 사신 분이 누구신가 했더니, 이분이셨군요.”
현우의 입에서 다소 언짢은 말이 나갈 참에 문득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신기수진 사장이었다.
뒤쪽에서 다른 관계자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령 좋게 상황을 파악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렇게 하시지요. 지금 이곳에는 다른 분들도 계신 터라 친필 서명을 하기 어려우니, 저희가 따로 작가님의 친필 서명을 독자분께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몽주는 현우 작가를 잠시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서명 아래에 현재상이라는 이름을 써 주십시오.”
“성함이 진…… 몽주 씨라 하셨지 않습니까.”
“제 이름이 아니라, 그냥 현재상이라는 이름을 적어 주시길 바란다는 겁니다.”
현우 작가가 이상한 요구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신기 사장이 다시 끼어들었다.
“알겠습니다. 설마하니 금교사의 이사님께서 작가님께 해가 될 일을 하진 않으시겠지요.”
그 말에 현우 작가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사내 몽주는 쓴웃음을 보였다.
“오직 제 수집용으로만 간직할 테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하면 어디로…… 아…….”
서명을 보낼 곳을 물으려던 현우는 이내 굳이 주소를 물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신기 사장이 알고 있을 게 분명하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금교사의 이사직에 있는 진몽주라는 자에게 우편을 보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몽주는 다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 작가님.”
그대로 몸을 돌릴 것 같던 몽주의 부름에 현우가 그를 바라보았다.
“작가로서의 삶을 누리시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진심으로.”
“예…… 감사합니다.”
뭔가 이상하지만 꼭 이상하다고만 할 수 없는 그 인사에 현우는 어색하게 답례하였고, 몽주는 그 어색한 모습의 현우가 다음 번 독자를 맞이하는 모습을 눈에 담다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걸음 옮기던 몽주가 문득 멈칫하였으니, 승강기 쪽에서 한 가족이, 아주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포함된 가족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아빠, 현우 삼촌이 여기 있어?”
“어. 현우 삼촌이 여기서 서명회를 한대.”
“서명회가 뭔데?”
“사람들에게 서명을 해 주는 거야.”
“서명이 뭔데?”
“손으로 쓴 이름.”
“그걸 왜 사람들에게 해 줘?”
“그게…….”
몽주는 곁을 스쳐 가는 일가족, 덩치 큰 아버지가 아이를 안아 들고, 가녀린 체구의 아내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잘된 것 같군.’
전해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두신의 가족을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두신은 그의 바람대로 가족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산만 한 덩치를 지닌 그 사내의 뒷모습을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몽주는 미소를 띠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승강기 앞에서 선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뇨.”
몽주는 한 번 더 그가 아는 두 얼굴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고개를 저었다.
“한데, 현우 작가 열성[=팬]이었어요?”
“나름 응원하고 있죠. 그럼 가죠, 이만.”
승강기 문이 열렸고, 몽주는 연인이자 동료인 선영과 함께 승강기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스르릉.
이걸 배기음이라고 해야 할까.
압축되었던 공기를 배출하는 것이니 배기음이긴 하겠지만, 뭐라 부르든 어색한 건 매한가지였다.
아니, 배기음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색하기로 따지면 그보다 백배, 천배 더 한 것들이 세상에 널려 있었다.
몽주가 두 번의 천몽을 경험하기 전에 알고 있던 현대의 모습은 지금 그가 살아가는 현대 앞에서는 오래전 과거였다.
시간의 흐름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회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음갑(音匣 : 라디오)과 흑백접화궤(黑白接畵櫃 : 흑백 TV)는 세력 200년대(17세기) 후반의 산물이었고, 색채접화궤(色彩接畵櫃 : 컬러 TV)는 세력 300년대(18세기) 초반의 산물이었다.
전자계산궤(電子計算机 : 컴퓨터)의 시대는 세력 300년대 중후반이고, 전자계산궤라는 이름 대신 양자계산궤라는 이름이 보편적으로 쓰인 지도 거의 1백 년이 흘러 있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는 세력 200년대 중후반부터 300년대 초까지였고, 500년대(20세기)에 이르러서는 공산주의자를 찾아보기가 극히 어려워졌다.
자본주의가 가장 악랄하게 그 독니를 세운 건 200년대 초였고, 이후 몇 번의 수정과 반동 끝에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몽주가 아는 자본주의와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크게 달랐다.
세계의 주류 정치 체계는 대의민주주의였지만, 많은 정치 선진국에서는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를 보다 많이 확인할 수 있었고, 전체적으로 공화제보다 입헌군주제가 조금 더 늘어난 모습이었다.
혹시나 했던 세계 정부는 없었다.
여전히 파편화된 국가들이 저마다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국가들이 지역적으로 뭉쳐 정치경제적 대단위를 이루는 흐름이 최근 1세기 사이에 강세를 이루었으니, 비교하자면 ‘EU’와 같은 단체가 몇 개 더 존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고려가 있었고 공공선 연방이 있었으며, 연방의 규모는 몽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물론, 연방이 그와 같은 규모로 계속 성장하고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고려가 그 국력의 부침을 겪은 만큼, 공공선 연방도 기세와 규모에 변천을 겪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몽주는 그가 알고 있는 현대의 사실들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정신을 차린 뒤로 끝없이 되새김질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깜짝 놀랄 만한 사실들이 그의 머릿속 수면 아래에서 연신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 몽주로 하여금 가장 경악하게 만든 역사적 사실은 세계 대전이 무려 네다섯 번이나 있었다는 점이었다.
네 번인지, 다섯 번인지 정확하게 셈하지 않는 이유는 그중에 지역별로, 국가별로 세계 대전으로 치부하지 않기도 하는 전쟁이 하나 있기 때문으로, 그 또한 결국 세계구급 전쟁이었음을 생각하면 결국 세계 대전이 다섯 번이나 있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중 핵무기가 사용된 전쟁이 두 번이나 있었으며, 그중 한 번의 전쟁은 진정 지구 전체를 파탄지경에 빠뜨릴 정도의 핵전쟁이었다.
우습게도 정작 최후의 세계 대전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으니, 국가들이 거대한 집단으로 뭉친 상황에서 핵무기 사용에 대한 성급한 결정이 내부적으로 제어될 수 있었고, 핵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그만큼 커진 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지구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과 애정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전 핵전쟁으로 엄청난 면적의 대지가 불모지가 된 상황의 반작용으로 하나뿐인 지구에 대한 집착을 낳았던 것이다.
이는 우주 개척과 진출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이 기여한 면도 있었으니, ‘달나라’든 ‘화성’이든 그 어느 곳도 지구와 같은 곳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당시에 이미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미 거의 한 세기 전에 과학기술적으로 얼마든지 달이나 화성에 대규모 거주지 건설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화성이나 달에 거주하는 인간의 수는 채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으며, 그들 모두 특정 자원의 채취 때문에, 혹은 학술적 연구 때문에 거주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과 문화적인 흐름이 하나뿐인 지구를 아끼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 당연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몽주가 깨어난 세상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려의 세상이자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의 세상이었으니, 그 모습을 전 세계의 모습이라 예단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전 세계가 추구하는 모습임은 분명했다.
상공 1길미 높이에 있는 허구의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차 안에서 보는 세상의 모습은 소위 도심이라는 곳을 제외하면, 오히려 고려 시대보다도 숲과 초지가 많아 보였다.
자연보호주의가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게 되면서 고려인들은 인간의 거주지와 이용지를 극도로 제한하고, 자연을 자연스럽게 두길 원했으니, 그런 흐름이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끝에 도심과 그 외의 지역은 아주 극명히 대비되는 풍경을 지니게 되었다.
도심은 그야말로 마천루의 숲이었는데, 1백 층 건물은 흔하디흔한 수준이었고, 3백 층 1길미 높이의 건물 정도는 돼야 중간은 간다 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탐라특별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바다에서 바라보면 해안 전체가 마천루로 장벽을 쌓은 것 같은 수준이었고, 심지어 몇몇 곳은 아예 바다 위에 초고층 건물들을 올리기도 하였다.
하나, 정작 두무악을 중심으로 한 탐라섬의 내부는 원시림 수준의 숲이 가득했고, 도심의 지상도 마천루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에 비하면 초지와 수림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연광 대신 가시광선 영역의 빛을 발하는 조명 시설이 건물마다 의무적으로 배치된 덕이자, 그런 일이 가능할 정도로 역원(力源 : 에너지)의 생산 비용이 극히 적은 덕이었다.
그런 광경은 비단 탐라특별시뿐만 아니라, 고려의 모든 도시, 대도시와 중소 도시를 가릴 것 없이 동일했고, 지금 몽주가 도달하고 있는 진주특별시도 마찬가지였다.
반중력 기술, 핵융합 기술, 상온초전도체 기술, 양자계산궤 기술, 인공 지능 기술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이 그려 내고 있는 세상이었다.
* * *
몽주의 승용차가 바다 위 형체 없는 도로를 따라 진주시에 닿았고, 해안가 390층 건물의 상부 입구로 들어간 지 5분 뒤, 그는 금교사의 사장과 만날 수 있었다.
“왔어? 몸은 괜찮아?”
이제 갓 마흔에 이른 젊은 부자, 홍탄영 사장이 환한 미소를 띠며 몽주의 안부를 물었다.
“예, 괜찮아요. 걱정하실 거 없어요.”
몽주의 머리는 아니었지만, 몸에 익숙한 친근함은 홍 사장을 마치 친형처럼 대하게 하였다.
“다행이야. 난 또 네가 어찌 되나 싶어 걱정했지 뭐야.”
홍 사장은 몽주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함께 창가로 다가갔다.
“언제 봐도 아름답지 않냐?”
“아름답네요.”
진주시 해안, 천몽 이전으로 따지면 사천시의 해안 가장 바깥에 우뚝 선 건물에서 바라보는 남해안의 모습은 분명 아름다웠다.
“난 여러 가지 행운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중에서 최고의 행운은 고려에서 태어난 거라고 생각해. 덕분에 기술 하나로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지. 다른 나라였다면 진짜 고생했을 거야.”
“저도 동감입니다.”
몽주가 답하자, 가까운 곳에 있는 사장의 얼굴에 씽긋 웃음이 피었다.
그러곤 몽주의 어깨에 두른 팔을 풀더니, 갑자기 만세 하듯 손을 올리며 꽤 큰 소리로 외쳤다.
“해왕이시어, 우리를 보우하소서!”
“…….”
“뭐하냐?”
“예? 아…….”
홍 사장의 눈치에 몽주는 일순 의아하다가, 이내 같이 하자는 말임을 깨닫고는 얼결에 함께 손을 들었다.
“해왕이시어, 우리를 보우하소서!”
“해왕이시어, 우리를 보우하소서…….”
그건 약 10년 전 홍 사장이 몇몇 동료와 함께 도전회사[=벤처 기업]을 세워서 일할 때부터 흔히 하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 고려에서 특히 탐라국에서는 그들뿐만 아니라, 회사를 운영하거나 기술 연구에 종사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기복 신앙 내지 ‘세리머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다만, 몽주가 직접 하기에는 너무나 낯부끄러운 행동이었다.
“자, 이제 일 이야기 좀 해 볼까?”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고려 굴지의 대기업에서 경영 전문 이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몽주가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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