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69)
* * *
몽주와 선영이 호중 대륙을 떠나, 태마식에 당도하였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곳곳에 있는 입상(立像)들이었다.
그 입상들은 저마다 세워진 시기가 달라 보였고, 만들어진 재료도 차이가 있었으며, 각 시대별 미적 감각의 차이에 따라 생김새도 달랐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공통점이란 입상으로 형상화된 인물이 하나같이 서쪽을 향해 팔을 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서쪽을 향해 들고 있는 팔 끝의 모양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검지로 서향을 가리키거나. 서쪽을 향해 손바닥을 보이고 있거나.
“손바닥을 든 입상은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주로 세워졌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입상은 그 전 시대에 주로 세워졌다죠.”
“네, 아무래도 우리나라가 잘나가다가 어려웠던 때였으니까요.”
선영이 쉽게 답하듯 상식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고려가, 정확히는 고려제국이 전성기였던 시절, 즉 세력 1세기부터 3세기 중후반까지는 고려의 진출과 확장을 염원하고 기대하는 의미로 서향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입상이 세워졌다.
이후 고려의 국력이 저하되면서 영토를 지키는 데 주력하게 되자, 그때부터는 손바닥을 들어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를 담은 입상이 세워진 것이다.
비단 태마식에만 그런 입상이 세워진 건 아니지만, 해왕이 본토의 서쪽 끝자락으로 자리매김해 둔 태마식이기에 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입상들이, 마치 천몽 전 제주도에 돌하르방이 수두룩하듯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다만,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면, 사실 그 입상들은 한 종류가 아니라, 두 가지였다.
해왕상, 그리고 화덕진군상.
물론, 그게 그거였다.
몽주는 차를 빌려 타고 가면서 곳곳에 놓인 해왕상, 혹은 화덕진군상마다 시선을 두었다.
천몽이 끝난 지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그 자신과 해왕 석몽린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런 입상들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거나 반대로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입상 중 가장 큰 것은 무려 그 높이가 72미로, 세력 1세기 고도왕 시절에 선왕의 업적을 기념하고 그 뜻을 이어받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었으니, 태마식섬의 동남쪽 끝 해안의 돌섬에 우뚝 솟아 있었다.
마치 천몽 전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연상케 하는 그 거대한 입상은 특별히 ‘향서진력해왕상(向西盡力海王像)’이라 불리고 있고, 태마식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였다.
“좀 아쉽네요.”
“뭐가요?”
“저 해왕상의 의복요. 당시에는 저렇게 치렁치렁한 옷을 안 입었거든요.”
“아, 그래요? 난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하기야 어지간히 역사에 해박하지 않고서는 평범한 현대인들이 5, 6백 년 전 의복에 대해 잘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향서진력해왕상도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고 있는 형태였는데, 전반적인 모양이 그야말로 옛날식이었다. 특히, 소매통이 매우 커서 바닥까지 닿아 있을 정도였고, 몸에 걸친 의복도 고려 초창기 형태의 귀족 복식을 하고 있었다.
“음,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당시에 저렇게 팔을 직각으로 들고 있는 형태의 입상을 세우기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옛날 복장을 하게 한 것 같네요.”
“아, 그러고 보니, 저 소매통이 아니었으면 길게 나온 팔 부분이 불안정했겠어요.”
몽주의 눈에 치렁한 소맷자락이 바닥에 닿아 팔을 받치는 벽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자유의 여신상처럼 내부 전망대가 있는 건 아닌 터라, 해안 공원에서 한참 동안 해왕상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몽주와 선영은 그들이 있는 공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시야에 또 다른 입상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으니, 그건 해왕상도 화덕진군상도 아니었다.
“저 동상은…….”
“황갈수 박사님이시네요.”
“아…….”
몽주도 그 이름을 익히 아는 위인이었다.
소위 양자계산궤의 아버지라 불리는 과학자. 그리고 의외로 말년에 국회의원으로서 정치계에 발을 디뎠고, 나름 정치적인 족적도 뚜렷하게 남긴 자였다.
그의 대표적인 정치적 업적이란 ‘정견검토위원회’의 창설을 주도한 것이었다.
정견(政見)은 정치적 견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견검토위원회는 정치인의 판단을 검토하여 그 평가를 내놓는 위원회였고, 그 평가에 양자계산궤가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특정 정치적 판단과 그 판단에 기여한 정치인에 대한 사후적인 평가를 내놓는 위원회였는데, 그렇다고 그 시절에 그 평가를 통해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 같은 게 있지는 않았다.
당시 국민들의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염증과 혐오가 만들어 낸 여론의 힘으로 밀어붙여 억지로 만든 국회 내 부처였을 뿐, 고작 반세기 뒤에 그 위원회가 사실상 최고의 권력 기관으로 변모할 줄은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갈수 박사의 고향이 여기 태마식이잖아요. 그래서 황 박사의 동상도 상당히 많다고 들었어요.”
“……해왕은 결과로 말했다.”
“에? 아, 그 말도 유명하죠. 그 덕에 정견검토위가 설치되었으니까요.”
몽주가 순간 떠오른 말을 무심코 읊조리자, 선영이 이내 아는 체하였으니, 국회의원이 된 황갈수 박사가 정견검토위원회의 발족에 대한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중에 나온 말이었다.
실권이 있든 없든, 자기를 평가하는 위원회의 창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당시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국민 여론을 돌려 정견검토위원회의 발족을 무위로 돌리고자 하였다.
하여, 토론회에서 정견검토위원회 창설 법안을 제출한 소수의 국회의원들, 특히 황 박사를 엄청나게 공격했었는데, 그는 그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면서 국민 여론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당시 토론에서, 정치적 판단은 도덕적 판단과 유사하기에 그 동기 또한 중요한 만큼 결과만 두고 평가하는 정견검토위원회는 그 시작부터 옳을 수 없다는 주장이 반대 측의 최대 무기였다.
그에 법안에 동의하는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지막 발언자로 나선 게 바로 황갈수 박사였다.
황 박사는 정견검토위원회에서 온전히 결과만을 두고 평가하는 건 아님을 강조하되, 결과가 무엇보다 더 중요한 부분임도 지적하면서 앞서 몽주가 읊조렸던 말을 한 것이었다.
“여러분은 해왕께서 결과로 말씀하셨던 것을 잊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몽주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그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살짝 당황했다.
자신이 정말 결과로 말했던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 다음 순간 충분히 역사 그렇게 남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몽주의 천몽 속 삶은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그리고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한 노력들로 점철되어 있었고, 신하들에게도 그에 대해 수없이 강조한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 수준에 이른 사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견검토위원회에 관한 토론 당시에도 황 박사의 그 발언은 토론의 향배를 가늠하는 아주 중요한 승부수가 되었다는 평이었다.
즉, 정치적 판단이 도덕적 판단에 귀결된다는 반대 측 주장으로 크게 흔들릴 뻔했던 국민 여론을 다시 굳건하게 만든 게 황 박사의 반박이었고, 그중에서도 해왕을 언급한 부분이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황 박사와 정견검토위원회에 대한 ‘에피소드’는 태마식을 여행하는 내내 몽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백 년 뒤의 세상에서 자신이 위대한 위인으로 남을 수는 있으리라 여기긴 했지만, 그리고 천몽의 완료와 함께 만난 새 세상에서 그걸 확인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5백 년 후의 정치적 결정에서도 자신이 큰 영향을 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 조용해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오늘날의 정치 체제를 만드는 데에 일조했을 줄은…….
* * *
그날 밤, 숙관에서 휴식을 취하던 몽주는 접화궤[=TV]를 무심코 켠 뒤에야 요즘이 태마식시의 시장 선거 운동 기간임을 알게 되었다.
인구 1천만이 넘는 거대 도시의 시장 선거가 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시장 선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몽주의 머릿속에는 고려 국민들의 일반적인 투표율이 천몽 전 현대보다 오히려 높다는 사실이 들어 있었다.
오늘날의 투표가 문자 그대로 표를 함에 던져 넣는 게 아니라, 개인용 단말기나 휴대전화로 하는 것이라 투표율을 높이는 데 더 유리한 편이었지만 말이다.
더불어 선거권자들이 더 판단하기 편리하다는 장점도 있으니, 그 증거를 접화궤 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현직 시장과 다른 두 후보로 된 삼 인의 토론이 비치는 중에 동시성 정보 화면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국회 정치평가상임위원회에서 보장하는 ‘정치 견해 평점’에 관한 것이었다.
현직 시장은 시장 역임 중에 얻은 점수와 이번 선거에서 제시한 공약에 대한 점수를, 그리고 다른 공직에 있던 나머지 두 후보들은 그들이 본디 있던 직책을 수행하며 얻은 점수와 공약에 대한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점수는 아주 작은 차이가 아니라면, 곧 선거의 결과나 다름없었다.
“…….”
접화궤를 보며 몽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점수로 평가하는 정치.
심지어 미래 예측마저도 점수화되어 정책이 결정되는 정치.
천몽 전 현대인의 마음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드는 부분이었다. 누가, 무슨 기준으로 평가하고, 어떻게 공평성을 담보하느냐는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솟구친 것이다.
하나, 동시에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으로서는 그런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을 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양자계산궤가 얼마나 대단한 계산을 하는지는 둘째 치고, 지난 백 년간의 역사가 정견검토위원회, 그리고 정견검토위가 확대 개편된 정치평가상임위원회에서 평가하는 정치인과 정치적 판단이 우수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몰랐는데, 몽주씨는 의외로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은가 봐요.”
“아, 그래 보였어요? 꼭 그런 건 아닌데, 요즘은 좀 관심이 생기네요.”
먼저 씻으러 욕실로 갔던 선영이 돌아와 하는 말에 답하며 몽주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곤 다시 접화궤에 시선을 두었다.
“아니,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뭐가요?”
몽주는 계속 접화궤에 시선을 둔 채 대답하였는데, 다음 순간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는 따뜻한 팔이 느껴졌고, 은은한 향기도 그를 덮쳤다.
“원래라면 제가 씻는 중에 들이닥치거나, 적어도 지금쯤은 절 안아 들고 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특별한 속옷도 입고 있는데 몰라보고…….”
“…….”
그러고 보니, 선영의 속옷이 일반적인 게 아니었다.
앞서 호중 대륙을 여행할 때 몽주가 평소와 달리 잠자리에 적극적이지 않은 걸 느낀 선영이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효과가 없자, 그녀로서는 몽주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몽주는 계속 접화궤에서 나오는 시장 선거 토론에 집중하고 싶었던 터라, 씻고 나온 그녀를 보는 둥 마는 둥 했었다.
몽주는 그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당신의 남자가 별로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면 되는 건가요?”
“자신 있…… 꺄아아!”
몽주가 선영을 살짝 들었다가 침대 위로 함께 무너졌다.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지만, 숙관의 특실은 저절로 조명과 방음을 조절하며 연인이 가장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으니, 몽주도 그 밤 동안은 다른 복잡한 생각을 떨칠 수 있었다.
* * *
수에즈 운하.
구시대의 산물이라 폄하하기에는 아직도 사용 중이었다.
10년 전 대비 물동량이 십분지 일로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시야에 운하를 통과하는 화물선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몽주와 선영은 이제 관광의 용도로 변화를 꾀하고 있는 수에즈 운하 하변의 어느 찻집에 앉아, 공환기(空環器 : 에어컨)가 만들어 준 시원함 속에서 카화 한 잔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요? 아수애 운하를 가지고 있을 때, 아니면 지금?”
“절대치로 따지면 지금이겠지만, 상대치를 따지면 아수애 운하가 우리나라 거였을 때겠죠.”
예상한 그대로 선영이 답했다. 몽주가 배우고 익힌 역사의 평가도 그랬다.
세력 1세기 중반부터 세력 3세기 중반까지.
고려제국의 전성기였고, 아수애 운하가 개통되어 고려의 것, 정확히는 탐라상단의 것이었던 시절이다.
아수애 운하(訝水厓 運河)는 물론, 수에즈 운하의 옛 이름이었다.
그리고 수에즈 지방은 한때, 탐라국의 영토에 속했으니, 그 시절 이 지역의 명칭이 아수애군(訝水厓郡)으로, 당대 회회인들이 아수애군이 설치된 곳의 작은 항구 고을을 가리키는 지명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처음 설치 당시에도 아수애군은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후에 아수애 운하로 인해 특별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되긴 했지만, 그 전에도 그랬으니, 가장 가까운 고려제국의 영토인 태마식군이 무려 8천 길미 이상 떨어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공공선 연방의 이등 제후국들 중에 일등 제후국으로 승급하여 고려제국의 일원이 되면서 더 가까운 고려의 영토 지역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하여, 처음 아수애군을 설치할 때만 해도, 그렇게 동떨어진 곳에 영토를 두는 것을 가지고 말들이 무척 많았는데, 당시 탐라국의 고도왕 석강중이 스스로 세 번이나 아수애 지역을 방문하면서 기어이 아수애군을 탐라국과 고려의 영토로 만들어 내었다.
‘역시 은근히 고집이 있다니까.’
자기 아들이기도 한 고도왕의 업적에 몽주는 그 자신에 대한 역사적인 찬사보다도 오히려 더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다.
수에즈 운하에 대한 정보를 아들에게 남겨 주긴 했지만, 그 스스로도 그곳을 영토로 만들기보다는 공공선 연방국을 따로 두는 선택을, 좀 더 쉬운 선택을 했을 것임을 생각하면 강중이 이루어 낸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도왕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해왕에 비해 유명세가 약한 위인이었지만, 역사학적으로는 해왕 못지않은 조명을 받는 위대한 군주였다.
고려제국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로 그의 공업을 요약할 수 있었으니, 그 또한 아수애 운하와 연관이 있었다.
고도왕 말년에 착공하여, 다음 대인 신유왕(新流王) 대에 완공된 아수애 운하가 탐라국과 고려에 끊임없는 힘을 선사해 준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 세력 4세기 이후부터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중국과의 마찰로 인해 국력의 소모가 심화되었고, 해외 영토에 대한 주변국의 압력으로 인해, 그리고 결정적으로 2, 3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아수애군은 3백 년 가까운 지배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려의 품을 떠나게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아수애 운하와 고려의 연이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탐라상단은 수에즈 운하를 운영하는 이집트 국영 기업의 지분 중 일부를 가지고 있었으니, 고려의 소유였던 시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이득이지만, 객관적으로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익을 계속 안겨 주었다.
한데,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수에즈 운하도 반중력 기술의 개발과 함께 그 소용성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중력 기술의 비용이 워낙 커서 해상 운송량이 크게 줄지 않아 큰 영향이 없었지만, 금교사의 신기술로 인해 반중력 생성기의 가격이 급락한 최근 10년 사이에는 완연한 몰락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수에즈 운하를 떠난 몽주와 선영이 수에즈시로 돌아와서, 고려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에 구경한 것은 아수애군이 설치되었던 시절의 유적이었다.
‘수말성(手末)’이 바로 그곳이었으니, 고도왕이 선왕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 세운 성이라는 의미였다.
더 이상 고려의 영토가 아닌 지금도 수말이라는 이름은 남아, 그 근방 거리의 이름도 수말거리였다.
물론, 수말성은 단순히 오래된 성이라는 의미를 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고도왕이 두 번째 방문하였을 때, 직전에 전쟁을 치른 오스만 튀르크의 사신과 지중해 너머 여러 유럽 제후들의 사신들을 모아 두고 수에즈 지방에 대한 탐라국의 종주권을 확정 지은 외교전을 펼친 곳이 바로 수말성이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죠? 수에즈에 와서는 계속 싱글벙글이네요.”
“하하.”
이집트 지역을 향해 마수를 뻗치던 오스만 튀르크를 물리쳐 탐라와 고려의 위력과 명성을 아시아와 유럽에 떨친 뒤, 유럽의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도록 통보하여,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수에즈 지방의 종주권을 확답 받는 아들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으니, 몽주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 * *
고려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몽주는 계속 세계사의 흐름을 가다듬었다.
한때, 공공선 연방의 일원이었고, 이후 강제적으로 합병되었다가 독립한 일본에 대한 역사,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고려에 도전했던 중국의 역사, 사실상 해체되었다가 이후 다시 복원되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커진 오늘날 공공선 연방의 역사, 그리고 천몽 전 현대에는 있으나 지금은 없는 국가들이나, 반대로 천몽 전 현대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는 국가들에 대한 역사까지…….
천몽을 마치고 이 세상에서 깨어난 직후부터 했던 머릿속 작업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다만,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은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과거의 소란스러운 세상이, 그래서 전쟁과 같은 비극마저 크게, 혹은 작게 끊임없던 그 시절이 그에게는 더 정상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정작 혼란 속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면 전혀 다른 생각이 들었겠지만, 불확실성을 주파하던 삶을 여러 번 살았던 그로서는 지극히 예측 가능한 오늘날의 세상이 두려울 정도로 진부할 것 같았다.
‘아, 그 정도는 아닌가.’
문득 비행기 탑승 전에 홍 사장과 했던 통화 중에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려 정부가 우주 개척에 다시 힘을 쓰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입자복사기가 상용화될 것을 감안하면서 이제껏 우주 개발과 개척에 대한 부정적인 계산도 달라진 것이었다.
다만, 몽주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그 내용을 전한 홍 사장이 끝에 덧붙인 말이었다.
‘한데, 상임위의 평가가 좀 이상하더라. 긍정적인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대. 상임위가 추정의 형태로 평가를 내놓는 건 난생처음 봤다.’
적어도 최근 4, 50년 동안 정치평가상임위는 아무리 조심스러운 언사를 하더라도, 평가 자체는 확실하게 내리곤 했다.
상임위가 소유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양자계산궤가 그만큼 확실한 계산을 내놓은 덕이었다.
그런데 상임위가 이례적으로 추정에 가까운 평가를 한 것은 양자계산궤의 결과도 그렇게 애매하게 나온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다.
‘우주의 시대라…….’
하긴, 우주라면 다시 불확실한 것들이 우수수 등장할 것 같긴 했다.
몽주는 그게 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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