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7)
“으음.”
이런 썩을! 오기로 몇 번 더 씹었다. 억지로 목구멍 너머로 넘겨 보려고도 했다. 하나, 뱃속이 거부했다.
“우욱.”
“낄낄, 내 이럴 줄 알았지요.”
홍매가 아들 손주에게 장난친 것처럼 가벼이 웃으면서도, 서둘러 빈 그릇을 대어 음식을 뱉도록 도와주었다.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매운맛을 모르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매운 요리는 매운 고통의 요리뿐인 것을…….
하기야 17세기 말에 나온 어느 요리책 속에 적힌 수많은 김치 요리법에 고춧가루는 한 톨도 쓰이지 않았고, 19세기 초 작성된 가정 살림책에 나오는 김치들 중에서도 실고추만 볼 수 있을 뿐, 여전히 고춧가루는 없었다고 했다.
고추가 전해진 이후에도 우리가 아는 한국의 매운맛은 한참 동안 개발(혹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고려 시대에 즐길 만한 매운맛이 개발되었길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고초를 원하신다 하여 세상에 그런 사람이 정말 있나 궁금했는데, 다 거짓이었나 봅니다. 호호.”
이 고초 말고, 고추!
“……그만 웃고 물이나 주시오.”
“여기, 받으시오.”
눈가가 촉촉해진 몽주는 손으로 코를 비비적거리곤 코끝에 남아 있는 아린 맛을 참으며 물을 마셨다.
잠에서 깨면 얼큰한 뭐라도 먹으러 가야겠다고 몽주는 다짐했다.
치사하게 코를 때린 것처럼 아픈 매운맛 말고, 혀끝부터 뱃속까지 묵직하게 전해지는 얼큰한 매운맛이 문득 그리웠다.
어쩌면 그 매운 무언가를 안주로 하여 술을 진탕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흑나찰과의 혼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 *
기억에 남길, 선두의 함진아비는 석삼이었을 것이다.
‘함들이’ 전통은 이때에도 이미 있었지만, 현대의 함들이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일단 신부 집 앞에서 돈을 얻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친구들이 함진아비가 되고 흥정꾼이 되는 현대의 함들이와 달리, 노비나 하인들이 함진아비가 되니 실랑이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또 애초에 함들이가 혼인 전날이 아닌 혼인 당일 오전에 있는 일이라, 함진아비가 뻗대며 사례를 요구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함들이라는 표현 대신 납폐(納幣)라 부르는 그 행사는 사실상 혼례의 시작인 셈이었는데, 몽주는 백마(!)를 타고 처가가 있는 마을 어귀부터 처의 조숙부 되시는 어른의 불편한 안내를 받으며 함들이를 따라 처가댁으로 들어섰다.
함이 먼저 들어가고, 해민이 신랑 측 혼주로서 채단(綵緞)과 혼서(婚書)를 신부 측 혼주이신 처 조부께 전하고, 예의상의 승인을 얻은 후에야 몽주는 목각 기러기를 들고 처의 직계를 처음 뵐 수 있었다.
사주를 전하면서 편지를 보내 글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실제로 얼굴을 대면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물론 어릴 적 만났을 수도 있지만, 기억에 남아 있진 않았다.
백발이 성성하고 조금 무뚝뚝한 느낌의 노인으로부터 몇 마디 조언이자 덕담을 들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산하며 잘 살고 손녀를 아껴 달라는 평범한 것이었다. 사실 처조부께서는 손녀사위보다는 사돈인 해민과의 대화에 더 열중한 터라 몽주와 나눈 이야기가 길진 않았었다.
개인 간의 결혼 이전에 가문의 결합이자 재산 상속 계획으로서의 중요성이 두드러진 그 결혼에서, 정작 결혼 당사자인 신랑 신부는 주인공이랄 수 없었다.
고려 말기인 터라 조선조의 혼례 방식과 매우 유사하였다.
전안례(奠雁禮)를 마치고 나온 몽주는 기다리고 있던 주이와 노비들에게 둘러싸여 사대관모를 정비하였다.
사대관모(紗帽冠帶)란 벼슬아치들이 쓰고 입던 모자와 관복을 가리키는데, 혼례 때만큼은 벼슬아치가 아닌 양민 남성들도 입을 수 있었다.
이미 명의 영향을 받아 관복 또한 명의 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 시점인 터라, 대례복(혼례복) 차림이 되니 조선 시대 대례복과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 공식적 기록에 명제(明制)를 받아들인 건 1380년대 후반이지만, 이미 이 시기에도 관료들은 흑립(黑笠)과 직령(直領) 대신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갖춰 입고 있었던 것이다.
차림을 마친 몽주는 신부댁 마당에 마련된 혼례청으로 들어갔고, 예에 따라 입장하여 대례상 동편에 섰다.
그리고 신부가 등장할 차례였다.
집례자가 홀기(笏記)에 따라 모두부출(姆導婦出)이라 부르자, 신부가 시모(侍姆)의 도움을 받아 혼례청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돌이켜봐도 그때 신부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큰 키를 감추려 함인지 허리를 꺾듯 숙이고 있는 데다 고개마저 더 숙이고 있으니, 몽주에게 보이는 건 얼굴 대신 족두리였다. 심지어 현대에서 보던 족두리보다 고려의 족두리가 커서, 좀 많이 숙이면 활옷의 소매와 함께 얼굴을 감추기에 아주 용이했다.
물론 몽주가 일부러 신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다면, 조금 우스운 모양을 감수했다면 얼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도투락댕기로 감춰지지 않은 목덜미에서 미처 화장으로 덮지 못한 짙은 피부색을 확인하자 탁기의 보고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그러자 굳이 얼굴을 확인하고픈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괜히 보고 실망한 표정을 혼례청에서 보일 수야 있나.
그때부터 몽주는 혼례식 내내 신부의 혼례복이나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면 군소리가 날까 싶었고, 딱히 신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꿈속. 아무리 생생해도 현대인인 몽주가 꾸는 꿈일 뿐. 굳이 신부의 미모를 두고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집례자의 홀기에 따라 술도 나눠 마시고 절도 2배, 4배를 각각 했다. 그 와중에 하객들의 ‘사내아이를 낳으면 육척 거인이겠네.’라든지, ‘밤에 신부를 찾으려면 많이 더듬어야겠네.’라든지, 혹은 ‘신부는 감투거리하들 마시오. 지아비 죽소!’라는 소리 따위를 덕담이랍시고 들었다. 참고로 감투거리는 ‘여성 상위’를 의미했다.
몽주의 귀는 그랬고, 그의 눈은 신부의 곤지-이마의 연지-가 생각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는 것과 신부의 활옷에 수놓은 모양이 십장생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업적을 세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곤지를 볼 정도니 얼굴도 살짝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기억에 없는 걸로 보아 정말 기대감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둘로 나눈 표주박으로 만든 잔에 술을 마시는 것으로 성혼을 알리면서 혼례는 끝났고 신부는 곧장 신방으로, 몽주는 손님들의 축하와 인사를 맞아 주며 한동안 잔치 속에서 흥겨움을 연기해야 했다.
……라는 것이 혼인 당일에 대한 대략적인 기억이었다.
뭔가 많이 빠진 듯하고, 그 빠진 부분이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지만, 다음 날 잠에서 깬 몽주의 기억은 그랬다.
“……잉?”
으윽. 놀란 표정으로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몽주는 이내 목덜미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에 침음을 흘렸다.
그건 마치 몽둥이로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뒤 한동안 남아 있는 타박증과 같았다.
왜 신방에서 잠을 깬 새신랑이 그런 통증을 가지고 있는지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 방안에 그 혼자인 것부터가 신경 쓰였다.
색시는 어디 갔는가.
손수 아침상을 해 오려고 일찍 일어나 나간 것일까.
보이지 않는 색시의 행방을 그렇게 추리하면서도, 몽주의 시선은 이부자리로 향해 있었다.
그가 누운 쪽은 사람이 잠들었던 태가 남아 있었지만, 아닌 쪽은 전혀 없었다.
결코 일어난 후 정돈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제야 중요한 문제를 깨달았다.
대체 첫날밤은 치르기는 한 것인가.
곧바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안 했다. 아니, 못했다.
사모관대만 없을 뿐 옷을 고스란히 입고 잠에서 깨었는데 무슨…….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에 몽주는 서둘러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도 한참 뒤, 어둠이 역력한 시간에야 몽주는 신방에 들어갔다.
주는 술 마다하지 않았고, 술을 주는 이들도 아낌이 없었던 덕에 신방 문을 열고 들어갈 때, 한참이나 비틀거리다가 겨우 들어갔던 것이다.
신방 안에는 안을 훔쳐보려는 자들 앞에서 새 신랑 신부가 실수할까 염려했던 모양인지 어울리지 않게 수렴이 쳐져 있었다.
그 수렴 너머에 흔들리는 촛불 옆 가만히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신부가 있었다.
몽주는 수렴을 쳐 내듯 걷고는 안으로 들어가 무너지듯 신부 앞에 주저앉았다.
그다음에 무어라 잠시 주절댔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들라는 말을 마지막에 한 것 같았고, 실제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부가 천천히 고개를 드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침내 보게 된 신부의 얼굴.
“어라……?”
몽주는 이부자리 위에 선 채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억 속에 신부의 얼굴은 없었다. 대신, 이해할 수 없는 감상만이 남아 있었다.
그 감상이란…….
“……예뻐?”
그러니까 그녀는 예뻤다.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 신부 얼굴에 대한 그의 첫 소감이었다.
텅.
조금 과격하게 방문을 밀치며 나간 몽주를 먼저 맞이한 건 예상보다 이른 시간대의 선선한 공기였다.
그리고 직후 목격한 건, 문 근처 마당 위에 쓰러져 있는 몇몇 사람들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놀라기도 전에, 서옥의 부엌에서 식모-로 보이는 어린 여노비-가 터벅터벅 마당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습니다요.”
“어…… 그러냐.”
공순한 인사와 함께 건너온 말에 얼결에 대꾸하고 나니, 말 자체는 공손하지 않은 듯했다.
하나 그보다는 당장 목각 인형처럼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더 궁금했고, 식모는 몽주의 시선을 의식하자마자 설명을 해 주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짓궂게 신방을 훔쳐보려는 사람들을 아가씨께서 못하게 막으신 겁니다.”
무뚝뚝한 듯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실려 설명이 전해졌지만, 전혀 설명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 아가씨라는 분이 제 부인 되실…… 아니, 내 부인이오?”
“네, 그렇습니다. 아, 혹시 절 기억하지 못하시는지요?”
끄덕끄덕. 누구세요.
“저는 새아기씨의 몸종인 점녀입니다. 오늘부터 이 서옥(壻屋)에서 식사와 청소를 담당할 것이고, 장차 한양부에도 따라갈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면, 내 편히 묻겠다. 이자들은 분명 어제 혼례청 주변에서 본 자들인 듯하니, 네 말대로 신방 훔쳐보기를 하려 모인 자들인 모양이구나. 한데…….”
몽주는 그중 가까운 곳에 외로 누워 있는 사내를 발끝으로 툭 쳐 보았다. 음냐음냐 하면서 엉덩이를 북북 긁는 걸로 볼 때 그냥 잠이 든 게 분명했고, 그건 이미 아까부터 들린 누군가의 코골이 소리와 숨 쉬느라 움직이는 가슴팍을 보면서 알고 있었다.
문제는…….
“네 말대로라면, 부인께서 이들을 재웠다는 건데…….”
말꼬리를 늘리며 몽주는 점녀를 보았다. 시선에 어떻게-라는 물음을 담았다. 자장가라도 불러 줬다는 건가.
“잘은 모르오나, 혈도를 짚으셨을 겁니다.”
“혀, 혈도?”
아니, 갑자기 왜 이야기가 무협으로 바뀌는 겐가.
아니, 아니, 그보다 문득 떠오른 기억의 단편에 몽주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어젯밤 색시의 얼굴을 처음 본 직후, 그는 예쁘다는 감상을 단지 속으로만 품은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입에 담아 말로 전했던 것 같다.
“우와, 내 색시, 예쁘다. 진짜 예쁘네.”
그렇게 얼간이처럼 중얼거렸던 것 같다.
한데 그 뒷 장면, 단 한 장의 그림처럼 남은 기억의 단편은, 일렁이는 불빛에 비친 색시의 분노 어린 표정이었다.
직후 촛불이 꺼졌고,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기억이 없었다. 그건 마치 기절 내지 졸도와 같은 느낌의 기억 단절이었다.
“설마, 내게도 점혈을 한 것인가.”
무협 영화나 소설에서나 보는 혈도 짚기가 실제로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왠지 자신이 첫날밤에 색시에게 수혈을 당하여 잠에 빠진 것인가 싶어 몽주는 처연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몽주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점녀가 한 마디 거들었다.
“혹시 새아기씨를 찾으시러 나오셨던 겝니까.”
“응? 아, 그래, 그랬지.”
“새아기씨는 뒷산에 오르셨습니다. 예닐곱 살 때부터 단 하루도 아침 연재를 쉰 적이 없으셨다지요.”
연재? 잠시 헷갈렸지만, 이내 수련을 의미하는 연재(鍊才)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침 운동을 하러 뒷산에 올랐다는 것인데…….
몽주는 마당 가운데로 나와 지붕 너머로 보이는 낮은 산을 바라보았다.
처가댁에서 몇 집이나 떨어진 외딴곳에 마련된 서옥. 그 서옥 뒤에 위치한 동산.
“저 작은 산이 부인의 연무장인 겐가?”
“네에.”
대답을 끌면서 빤히 바라보는 꼴이 색시 찾으러 안 가냐고 묻는 듯했다.
“내 저곳에 가서 부인을 데려올 터이니, 너는 여기 이 사람들이나 깨워 돌려보내어라.”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아 참, 올라가시면 종옥이란 계집도 있을 겁니다. 저와 같은 처지이니,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몸종을 하나 데리고 오른 모양이었다. 몽주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곤 서옥 뒷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뒤쪽에 촤악- 소리가 들려 힐끔 돌아보니, 점녀가 잠에 빠진 이들 위로 물을 냅다 끼얹어 깨우고 있는 게 보였다.
“…….”
터프한 계집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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