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70)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것은 형광등이 아니라, 몇 개인지 한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크고 작은 화면들이었다.
그리 작지 않은 그 방의 세 면을 감싼 채, 무언가 자료와 정보들을 연신 쏟아 내고 있는 화면들은 한 사내를 향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상 위에 양팔을 걸쳐 놓고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그 사내의 표정은 몹시 음울해 보였다.
‘절대 핵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박사님은 박사님의 일에나 열중하십시오.’
‘상관없습니다. 쏘라면 쏘라지요. 우리 고려는 결코 공포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요격 체제는 완벽합니다. 수백 발의 핵 유도탄[=미사일]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 우리는 선방했습니다. 우리보다 적이 훨씬 더 큰 피해…….’
‘희생양은 정해졌습니다. 이미 외교적으로 비밀리에 합의가 된 상황입니다. 다만, 권위자가 필요합니다. 저희는 박사님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전 정권과의 갈등은 잊어 주시고,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지난 1년간, 고려 정부로부터 그가 들은 이야기들의 핵심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 굳이 고려가 참여할 필요가 없었던 전쟁에 끼어든 전 정권에 그는 과학 기술 자문위원으로서 고려의 참여로 인한 확전, 그것도 핵전쟁으로 확산될 것을 몇 번이나 경고하였다.
양자물리학자로서 양자계산궤의 개발과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그는 양자계산궤를 통한 불확실성의 감소에 노력하는 중이었고, 그의 개발단이 만들어 낸 양자계산궤는 핵확산 금지 조약이 무위로 돌아간 현실에서 대규모 전쟁이 핵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이 점쳤던 것이다.
문제는 정치와 외교는 계산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정치와 외교를 주도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영역에 계산궤가 발을 디디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별히 이상하거나 어이없는 일은 아니었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계산궤를 통한 결정이나 그 결론에 대한 참고가 권위를 도전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박사가 몹시 분노했던 것은 그것이 다른 것도 아닌 핵전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게 전쟁이고, 그것도 인류 존망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핵전쟁인데, 그저 자신들의 좁은 예측과 시야에만 매몰되어, 사실상 감(感)이나 점(占)에 다를 바 없는 선택으로 국가와 세계의 안위를 두고 도박을 하는 것에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박사는 자신이 무시당한 뒤에도 그와 그의 계산궤가 내놓은 예측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분노로 인해 정권의 선택이 틀리길 바라기에는 너무나 큰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불행히도 그는 옳았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핵의 사용은 없을 것이라고 외쳤건만, 전황의 위태로움 앞에 적은 넘어서면 안 되는 선을 넘고 말았다.
공공선 연방 몇 개국의 몇 도시가 무너지고, 고려 본토에 떨어진 핵탄두에 요동군에 주둔하던 연방군 1개 군단이 증발해 버린 뒤, 전쟁은 더 이상 이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더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논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전쟁의 당사자들은 서로를 향해 증오를 뿜어내기에 바빴으니, 일주일 사이에 수백 발의 핵유도탄이 천공과 우주의 사이를 가로질러 오대양 육대주를 날았다.
강대국들이 저마다 자랑했던 요격 체계는 제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자연히 하나의 핵유도탄마다 더 많은 요격 유도탄을 배정하면서 요격 체계에 과부하가 발생하였다.
자연히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곳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곳이 나뉘게 되었으니, 그제야 인류 사이에 횡행하던 증오 어린 복수심을 멸망이란 공포가 이기기 시작했다.
같은 국민, 우리 편이 당한 것에 대한 복수심보다 나와 내 가족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세계 곳곳에서 반전 시위를 불러왔고, 그제야 정치인들도 협상석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마련된 얼마간의 휴전 기간에 고려 연방은 전쟁으로 미뤘던 하원 의원 선거를 급히 치렀고, 그 결과 비둘기파 위주의 연립 정부가 들어서면서 고려, 그리고 세계는 종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나, 문제는 너무나 큰 피해로 인해 무작정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모든 전쟁 당사국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땅 위, 하늘 위에서 일어난 백수십 발의 핵폭발로 인해 전세계에 있는 수많은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 중에는 복수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자들도 적지 않았으니, 빠르게 종전을 위한 협상석을 마련하지 못하면 도로 전쟁 분위기가 끓어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정부발 기사 하나가 모든 상황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연방군 헌병국, 방위산업체 검순(劍楯)의 사장 고야성호 씨 긴급 체포.’
‘고야 박사 개발단, 핵유도탄 운영 체제의 심각한 결함을 무시한 정황 드러나.’
‘오류가 있는 핵유도탄 운영 체제, 핵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나.’
그 기사를 시작으로 망상에 온갖 유언비어가 판을 쳤으니, 그중 주된 내용은 핵유도탄 운영 체제의 결함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핵전쟁이 시작되었고 확산되었다는 것이었다.
삐이-!
알림음과 함께 얼마 전을 떠올리고 있던 사내의 머릿속이 현실로 돌아왔다.
– 박사님, 총리실에서 통화를 청하…….
“연결해 주게.”
잠시 후 전화기를 든 황갈수 박사의 귀에 그리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 박사는 음울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몇 번의 끄덕임과 알았다는 말 한 마디를 뒤로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 *
변호사와 함께 만난 고야성호는 초췌했다.
황 박사는 그를 잠시 훑어보듯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원한다면, 자네의 무고를 세상에 알리겠네.”
“……그러지 말게.”
고야 사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부터 세상사에서 초연해진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자네는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던 악마로 남을 수도 있어.”
“뭐, 아주 죄가 없는 건 아니잖은가.”
“사과 하나를 훔친 거에 고려 전당을 턴 죄를 뒤집어씌울 때는 죄의 유무를 따질 게 아니지.”
“내 실수로 인해 적어도 몇 개의 대도시가 백 년 동안은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어. 사과 하나 훔친 죄와는 거리가 너무 멀지.”
“고려 전당을 턴 죄도 세상을 멸망시킬 뻔한 죄와는 아주 달라.”
“말장난은 그만하세. 난 죽을 만한 죄를 지은 사람이야.”
고야 사장의 말에 황 박사는 문득 뱃속에서 솟구치는 분노를 뜨겁게 느꼈다.
그래서 직후에 내뱉는 말의 언성은 높지 않았지만, 그 낮은 음성만으로도 분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 착해빠진 겐가? 왜 늘 그렇게 당하고만 사는 거야?”
“…….”
같은 대학, 같은 학번, 같은 공과대학에 같은 동아리 출신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만났고, 대학 시절 절친한 사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졸업 이후, 고야성호가 도전회사(벤처회사)를 차리고, 황갈수가 계속 석박사 학위에 도전하면서 잠시 소원해지기도 했지만, 서로 기반이 잡힌 뒤에는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 인연은 충분히 깊어졌다.
그렇기에 황 박사는 친구 고야성호를 두고 냉정하게 평가할 자격이 있었다.
순진하다 못해 착해빠진 녀석.
싸우기보다 피하려 하고 그래서 늘 손해를 보는 바보 같은 놈.
“자네의 잘못이 있다면, 그건 핵전쟁을 일으킨 일이 아니라, 모든 핵유도탄을 요격하지 못한 거야. 한데, 그건 애초에 기술적으로 담보하지도 않은 부분이지. 그리고 뱅갈에 검순의 온봄 체제를 수출하도록 강요한 정치인들은 어째서 아무런 비난도 안 받는 건데? 아니, 사실 핵전쟁은 기술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잖아, 안 그래? 그냥 저 윗대가리들이 엉망진창으로 결정내린 게 원죄인 거야. 한데, 왜 네가 희생양이 되려는 건데? 네가 무슨 부처라도 되는 거야?”
“……부처라면 거래를 하진 않으셨겠지.”
“거래?”
“장부를 조작했네. 아니었다면, 우리 회사는 이미 도산했을 거야.”
“…….”
“내가 희생양이 되는 대신, 우리 회사는 해체했다가 다시 정부 투자 기업으로 회생하기로 되어 있네. 게다가 아내와 아이들 앞으로 20억 원이 배달되었네. 모두 현금으로 말이야.”
“넌 죽을…….”
사형당할 수도 있다고, 죽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천성에도 안 맞는 사업을 하면서 그가 회사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야말로 잘 알고 있었다.
예정에도 없던 방산업체로 변신하면서까지 그의 운영 체제[=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살리고 발전시키던 그에게 회사의 몰락은 죽음이나 다름없었을 테니…….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있었다.
“나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건 자네에게도 유리해. 자네도 다시 핵전쟁이 재개되는 걸 바라지는 않지 않나. 현재의 방공 체제에서 재돌입하는 건 물론, 성층권 너머의 유도탄도 완벽하게 요격하는 건 불가능해. 지금까지 막아 낸 것도 운이 좋은 편이야.”
고야 사장의 말마따나, 세계는 지상에서만 수십 방의 핵폭을 당했지만, 그래도 운 좋게 선방했다.
그건 선제 핵공격을 한 나라의 유도탄 수준이 떨어진 덕이기도 했고, 핵방공에 나선 선진국들의 요격 체계가 기량 이상의 성과를 얻은 덕이기도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오발탄과 격추되지 못한 피요격 유도탄들이 한 지역에 몰아 떨어져 호중 대륙에 거대한 죽음의 지역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천야주처럼 아예 방어를 포기하다시피 한 지역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최소의 피해로 막았다 할 만했다.
하나, 그렇다고 세계를 핵전쟁으로 몰아간 자들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가장 큰 죄는 무장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뒤 감히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뱅갈(현 방글라데시 지역)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다만, 소수의 무장 세력에게 당한 무능력한 뱅갈의 기존 정권이나, 공공선 연방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그런 뱅갈 정권의 핵무장을 지원하고자, 철저히 검증된 연방국과 동맹국에만 제공하던 검순의 온봄 체제를 제공한 고려의 정치권도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뱅갈의 혁명 정권이 설마 했던 핵공격을 감행하자, 히스테리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에 나서며 핵전쟁을 확산시킨 공공선 연방이나, 종교적 근본주의 열풍에 휩싸인 채 뱅갈을 지지하며 공공선 연방과 동맹국들을 공격한 남감태 대륙 동부와 아시아 지역[=현 중동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 그리고 공공선 연방 내에 잠재하고 있었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내란 시도와 이때다 싶어 양쪽에 무기와 보급품을 매매하거나 직접 개입하여 전쟁의 불씨를 부채질한 유럽과 북감태 대륙의 국가들까지.
인간이 지은 죄들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 그런 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검순의 온봄 체제의 결함으로 그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게 가능…….
‘……가능하겠지.’
세상을 전부 속이는 건 불가능하나, 세상이 속아 줄 작정을 하고 있는 지금, 전부 속은 척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명학상 수상자인 자네가 나서서 나를 비난하면 다들 속아 줄 걸세. 그러니 내가 부탁하네. 날 밟고 이 망할 싸움을 멈춰 주게.”
황 박사와 고야 사장의 대화는 얼마간 더 이어졌지만, 실제적인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만, 고야 사장이 마지막에 황 박사에게 던진 말이 그로 하여금 인생을 바꾸게 만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인간은 참 불완전해. 정말 완벽히 인간을 위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되는 게 전제 조건일지도 몰라.”
그 말은 황 박사가 인생의 후반에 걸쳐 고민한 화두나 다름없었다.
인간을 위한 정치가 반드시 인간에 의한 정치와 같지는 않다.
중요한 건 결과가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역사적으로 그리 길지 않은 시점에 고스란히 드러날 그 우습지도 않은 조작에 앞장서면서 고려 연방 정부에 대가로 요구한 정치 입문의 이유와 이후 정치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 * *
‘화덕진군의 정수(精髓)’가 발견된 건, 핵전쟁이자 4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4년째 되는 해였으며, 황갈수 박사가 하원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지 2년째 되는 해였다.
발견된 장소는 요동 청야주의 핵폭 지역이자, 그 전에 세계 최대의 입자 가속기가 건설된 곳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쟁 위기로 인해 가동이 중단되고, 모든 직원이 철수된 청야주 앙갈시(현 러시아 브라츠크)에 있는 입자 가속기에서 이상한 잡현(雜懸)이 포착된다는 과학기술지원국의 보고가 있었다.
그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방사능 경고 지역으로 파견된 소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입자 가속기 안에서 듣도 보도 못한 입자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후에 ‘화덕진군의 정수’라 불리며 인류 문명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된 신물질이었다.
황 박사가 그 신물질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 직후였다. 하원 과학기술상임위원회 소속이었기에 곧바로 보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처음에는 그도 그리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 입자의 발견 과정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전기도, 다른 역원도 없는 입자 가속기 안에서 잡현이 발견되고, 그 잡현이 이제껏 세상에 없던 입자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합리를 따르는 과학자의 머리로는 수긍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몇 개월 뒤, 과거 그의 연구단에 속해 있던 후배 물리학자가 그 신물질에 대한 보고서를 그에게 전하면서 그도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입자라는, 이제껏 양자역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은 설령 세계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하는 말일지라도, 물리학자로서 한 번쯤은 확인해 봐야 할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한 확 박사는 하원의원으로서 가진 권한과 물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총동원하여 그 새로운 입자의 연구를 지원하였다.
고려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다분히 황 박사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그 일은 금세기 최고의 정책적 선택이 되었다.
‘화덕진군의 정수’라는 별칭이 정해진 새로운 물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이제껏 양자계산궤랍시고 등장했던 모든 양자계산궤를 장난감처럼 보이게 만드는 엄청난 성능의 양자계산궤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그날은 명학상 물리학 부분 수상자의 발표일이었다.
탐라특별시 고도재단 소유의 숙관에는 해당 수상 후보자들이 초빙되어 각자의 객실에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5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진 명학(名學)상은 해왕의 아들 고도왕 시절에 제정된 상으로, 해왕 시절부터 있었던 명장(名匠) 지정 제도에 더해, 학문적인 업적을 크게 세운 자들을 치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후, 고도왕이 탐라상단의 일부 회사를 매각하며 얻은 재정으로 왕립 재단을 세워 명학, 명장에게 금전적인 포상도 더하게 하였으니,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포상금의 규모로도 세계에 있는 여타의 모든 학문적 시상식의 상금을 압도하고 있었다.
시작은 고려 제국의 학자들을 위한 것이었고, 이제는 공공선 연방 전체의 학자들을 위한 것이며, 특별 부문으로 전 세계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시상하고 있기도 한 명학상 중 가장 주목받는 물리학 부분의 수상자가 발표되기 직전이었다.
당연히 그 후보에 오른 자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저희가 이 자리에 온 것만으로도 박사님의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무슨 소리, 자네들이 힘껏 노력한 결과일 뿐, 나는 그저 거들었을 뿐이네. 그리고 감사의 말은 수상자로 확정되고 나면 듣도록 하지.”
“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후우, 떨리네요.”
최고급 객실에 있던 이수찬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축하 방문한 황갈수 의원을 공손히 대하였다.
황 박사의 전폭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화덕진군의 정수’가 빛을 보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 포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신 좋은 말들이 오가자 분위기도 풀어졌다.
이수찬 박사는 황 박사에게 그의 이름도 함께 수상 후보에 오를 수 있었음을 언급하며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황 박사는 연구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몇몇 중요한 조언을 해 주며, 10년 전 양자역학 연구를 통해 명학상을 받았던 사람의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하하, 명학상이 어디 한 사람에게 두 번이나 수상의 영광을 허락하겠나.”
5백 년 가까운 역사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 그럴 만한 위인이 없기도 했지만, 애초에 명학상이 업적을 평가하는 상임과 동시에 학자들에게 연구의 열정을 가지게 만들기 위한 상이기에, 중복으로 수상하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가 수상하는 게 상의 취지에 맞는 것이었다.
“이 박사, 잠시 나와 긴히 이야기 좀 하세.”
약한 술을 나누며 여러 사람과 대화를 이어 가던 황 박사는 이 박사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조용히 그를 객실 내 내밈층대[=베란다]로 불러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지금 하고 있는 게 기상청 계산 체제지?”
“예, 이미 어느 정도 목표 성과를 이루긴 했습니다만, 조금 더 발전시켜 볼 생각입니다.”
새로운 양자계산궤의 적용 분야는 무궁무진했지만, 정부의 지원과 요청에 따라 기상청에 가장 먼저 접목시키고 있었다.
하여, 이미 실험적인 상황에서 96.2백분율[=퍼센트]이라는 믿기 힘든 정확도로 날씨를 예측해 내고 있었으니, 그마저도 굉장히 까다로운 기준으로 시험한 것이기에, 일반인의 체감 기준으로는 사실상 완벽하게 예측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자네의 연구단에게 맡기고, 자네는 소수의 인원과 함께 다른 연구를 해 보는 건 어떻겠나?”
“무슨 연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인간 행동과 사회에 대한 평가와 예측이라고 말하고 싶네.”
“……?”
이 박사가 표정에 물음표를 띄우는 순간, 갑자기 객실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
“단장님! 저희랍니다! 저희가 수상자랍니다!”
달려온 연구원이 소리침에 이 박사는 조금 전까지 아리송하던 표정을 지우고 환희에 가득 찼다.
“축하하네. 정말 잘되었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은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박사님의 조언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돌아가서 즐기게.”
“예!”
이수찬 박사는 평소의 얌전한 언행과 달리, 다급히 뛰어가 그의 연구원들과 얼싸안으며 기쁨에 날뛰었다.
이후, 들이닥친 기자들에 둘러싸여 수상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후배들을 본 황 박사는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하였다.
* * *
황 박사는 수행원과 함께 특실전용 승강기에 올랐다가 승강기 벽면에 시선이 박혔다.
특이하게도 그 승강기의 내부 치장은 동판에 양각된 세계지도이었다.
그 세계 지도의 정중앙에 고려가 있었다. 황실 본령을 포함한 황도와 탐라국과 요동국과 유구국, 그리고 대내국[=오우치령]이 보였고, 적도 부근에 향도국[=향신료 제도]과 말라가국이 있었으며, 대해의 남쪽에 호중 대륙과 수많은 섬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고려는 실로 컸다.
요동국은 북중국이라 불리는 대연중화왕국의 북부를 가로질러, 바이갈 대호 너머에 있는 동패강(凍浿江:현 예니세이 강)을 경계로 북극까지 걸친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
탐라국은 요동국보다 더 했다.
북쪽에 동금주와 연해주, 그리고 대림주[=동시베리아]라는 요동국 못지않은 거대한 땅이 도가시해(현 베링해)까지 퍼져 있었지만, 그 거대한 땅도 대해를 장악한 탐라국에서는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이주와 여송이 있고, 부루내와 태마식 반도의 남부가 있으며, 무엇보다 호중 대륙이라는 하나의 대륙마저 홀로 차지하고 있는 게 바로 탐라국이었다.
게다가 대해 안에 있는 그 수많은 섬들 대부분이 탐라국에 속해 있으니, 사실상 대해는 고려와 탐라의 호수라는 세간의 평도 아주 큰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거기에다 공공선 연방이 있었다.
그냥 중국, 혹은 남중국이라 부르는 중화민주주의공화국의 주변과 대해의 서쪽 주변, 그리고 인도양에 걸쳐 존재하는 오래된 연방의 가입국들과 북감태, 남감태 대륙의 서안에 걸쳐 있는 비교적 새로운 가입국들까지 37개의 나라들이 공공선 연방을 이루고 있었고, 당연히 고려는 그들을 이끄는 수장국이었다.
고려만으로도 세계에서 첫째로 꼽힐 강대국이었고, 공공선 연방까지 생각하면, 세계의 일부라는 표현이 뭔가 폄하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존재감이 있었다.
‘이만하면 바꿀 만한 자격이 있겠지.’
결과로써 인간을 위한 정치와 외교의 세상.
그것을 위해 세계 전체에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나라는 실로 극소수일 것이니, 다행히도 고려는 그중 하나였고, 황 박사는 그런 고려의 국민이었다.
그리고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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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국어가 별로 쓰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지적에 한 말씀 드리자면, 일단 한자어도 엄연히 한국어임을 먼저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삼국시대에 한국어의 관념어 중 대부분이 한자어로 교체되었습니다. 고려 말을 시작점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관념어가 순한국어로 돌아가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럽겠지요.
그걸 감안해도 한자어가 많아 보이는 건, 라디오, 티브이, 컴퓨터 같은 외래어를 한국어로서의 한자어인 관념어로 바꾼 탓일 겁니다.
근현대적 문물 중 많은 것들을 스스로 발명하였으니, 자연히 작명도 한국어로 했을 것이고, 또 문화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고려라면 외국 문물을 들여옴에 있어 외래 표기 대신 한국어 표기로 교체했을 것이라는 가정과 전제에 따른 것입니다.
에필로그 2는 이번 회로 마감합니다.
에필로그 3은 고려의 국력이 가장 약했던 시절을 다루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하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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