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71)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팔청춘에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수많은 사내들이 저마다 연정을 절절히 드러내며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였다.
하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그 시절부터 한 남자만을 향하였다. 소꿉놀이 시절부터 함께 커 온 친구는 어느새 그녀와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약혼자를 시기하는 남자들과 그녀를 질투하는 여자들이 무어라 하든, 그녀는 약혼자와 행복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 탓에 약혼자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3년간의 단기 직업군인이 되었다.
군 복무 중 혜택을 통해 전문학교[칼리지(College) 정도의 개념]에 진학하여, 졸업과 전역 후에 더 나은 직업을 가지기 위함이었다.
3년 후 결혼하기로 약속한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함께 설계했는데, 너무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산 탓일까, 하늘은 그들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약혼자가 전문학교 졸업을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예상치 못한 전쟁이 터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약혼자도 전선으로 향해야 했다.
그녀는 약혼자가 전선으로 떠난 뒤, 매일같이 사원에 들러 그의 무사귀환을 기원하였다.
하나, 상황은 그녀가 원하는 바와는 오히려 정반대로 흘러갔다.
예상치 못하긴 했어도, 중화사회주의인민공화국과의 흔하디흔한 분쟁이어야 했던 그 전쟁은 의외로 확전되어 훗날 2차 세계대전으로 명명될 정도로 큰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세상에 경쟁국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고려의 국력은 어느새 쇠락해 있었던 것이다.
2년간 비보와 패전보가 무수히 들린 끝에, 고려는 종전 협상장에서 패전국의 낙인을 받았고, 공공선 연방은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인도와 아시아(중동을 의미) 지역 그리고 감태 대륙에 있던 해외 영토를 모조리 뱉어 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1년 가까이 연락이 끊긴 그녀의 약혼자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닌 군번줄로.
평범할 뻔했던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꽃도 시드면 자존심을 꺾는 법입니다.”
“…….”
“그리고 칼은 오래될수록 위험해지죠. 녹이 슬거든요.”
“…….”
포마드로 정갈하게 넘긴 머리를 한 자는 그의 표정처럼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어렵게 명성을 쌓았고, 이렇게 멋진 사롱도 가지시게 되었는데, 여기서 무너지는 건 너무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절 무너뜨리려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겠지요.”
“아니죠, 오히려 번창하실 수 있게 도우려는 겁니다. 다만, 조건이 있을 뿐이죠.”
“흥, 그 조건이라는 게 여인의 몸이라니 우습군요. 나랏일씩이나 하시는 분…….”
쾅!
여인의 비아냥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포마드 사내가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덕분에 정갈했던 그의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이마 위를 덮었다.
“후우, 쓸데없는 말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 각하와 국가를 위한 일이니까요.”
채홍사로 일하는 것이 확실히 자존심이 상하기는 한 듯, 소위 한 과장이 불리는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애써 포장하고 있었다.
한 과장의 주먹질에 놀랐던 여인은 이내 다시 표정에 조소를 띠운 채 그를 노려보았다.
한 과장도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각하의 인내심은 크지 않습니다. 아마 다음 번이 마지막 권유가 될 겁니다. 그 후에는 저희도 마냥 신사적일 수 없으니,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 과장은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방을 나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그가 몸을 드러내자, 수군수군하던 1층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1층은 여인이 운영하는 사롱이었으니, 이십여 명의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지금은 2층에 모습을 드러낸 한 과장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한심한 작자들…….’
세상과 예술을 논한답시고, 사롱에서 죽치고 있는 그들이 한 과장에게는 잉여인간들처럼 보였다.
국운이 위태로운 지금의 고려에서 모든 국민들이 각하의 뜻을 따라 일치단결하여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진력해야 하거늘…….
계단을 천천히 뚜벅뚜벅 내려간 한 과장은 문득 사롱의 한 쪽에 놓인 커다란 흑백접화궤(흑백 TV) 앞으로 향했다.
색채접화궤의 시험 방송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건 모두 흑백접화궤였다.
접화궤의 전원을 넣은 한 과장은 수신선[=채널] 손잡이를 돌려 국영 방송에 맞췄다.
흑백의 영상과 함께 소리가 흘러나오니, 때마침 어느 중년의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위대한 고려! 오, 나의 고려! 이 푸른 낙원에 높은 탑을 세우리! 위대한 해왕! 오, 나의 해왕! 그 높은 뜻을 이은 그를 따르리!’
소위 건전 가요라고 지정된 ‘그를 따르리’라는 노래의 곡조는 군가에 가까웠다.
그 노래가 사롱을 가득 채우는 중에 한 과장은 예술가라 자칭하는 쓰레기들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러 사롱의 현관을 나섰다.
‘겁쟁이 새끼들, 한 마디 항의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세상을 논해.’
한 과장은 건전 가요라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각하를 존경하는 것과 무관하게, 각하께 아부하려는 자들이 하는 행태는 정말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따르리’라는 노래는 그중에서도 크게 거슬리는 것이었다.
고려와 해왕을 찬양하면서 은근슬쩍 각하가 고려의 주인이자 해왕의 후예인 양 포장하고 있었으니, 그가 보기에 그건 오히려 각하를 엿먹이는 짓이었다.
하나, 불행히도 각하께서는 간신들의 아첨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한 과장이 가지는 각하에 대한 유일한 불만이었다.
“후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연기를 마셨다가 내뿜은 한 과장은 기다리고 있던 국가안전부의 관용차에 올라탔다.
* * *
“후우…….”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긴 담배가 반쯤 타들어 갔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인이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문은 조심스럽게 열렸다.
“괜찮습니까.”
“…….”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의 표정은 별로 괜찮지 않았다.
그사이 문틈에 서 있던 사내는 방 안으로 들어와 창턱에 기대어 앉았다.
얼마 간 침묵이, 서로 생각이 깊은 시간이 흘렀다.
“내 약혼자가 전쟁에서 죽어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죽었어요. 아무것에도 미련이 없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아무것도 원하고 가져서는 안 된다고 여기게 되었죠.”
“…….”
“글을 쓰게 된 건 우연……. 아니, 그냥 넋두리 같은 거였어요. 내 팔자의 서러움을 어디에라도 풀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았거든요. 한데, 그 글이 사람들의 환호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가 넋두리 삼아 쓴 글은 당시 그녀가 운영하던 다점의 단골이었던 어느 출판사의 사원을 통해 ‘전쟁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전쟁으로 약혼자를 잃은 한 여인의 전쟁 같은 삶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은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개 다점 주인이었던 여인, 윤의심애는 여류 소설가 윤의심애라 불리게 되었다.
약혼자가 죽은 뒤, 심애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녀를 노리는 사내들로부터의 도망이었다.
패전으로 재정적 어려움이 봉착한 고려 정부는 치안 예산마저 줄였고, 그 와중에 패배적 사회 분위기로 인해 만들어진 ‘될 대로 되라’식 시민 정신의 약화는 그녀의 신변을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외출할 때마다 추파와 추행에 시달렸고, 몇 번은 그녀의 집안까지 침탈당한 적 있었으니, 그녀가 몹쓸 짓을 당하지 않은 건 그녀가 힘껏 저항한 덕이자,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부모를 대신하여 그녀를 길러 준 작은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어느 부유한 상인과 혼인을 하게 되었으니, 그녀도 어느 정도는 ‘될 대로 되라’식의 마음가짐이었다.
마음이 없는 건 물론, 심지어 몇 번 만나 보지도 않고 한 혼인이었지만, 다행히 남편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비록 못생기고 수전노라는 손가락질까지 받는 자였지만,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누구보다 잘해 주었고 그녀를 보살펴주었다.
그렇게 그녀도 남편과의 삶에 만족감을 가지게 될 무렵, 하늘은 다시 그녀를 버렸다.
혼란한 고려의 시국에 구국의 명분을 내세우며 탐라군의 일개 장군이 군사 반란을 일으켰으니, 반란군과 진압군 사이의 교전 중에 그녀의 남편이 휘말려 죽고 만 것이었다.
미망인이 된 그녀의 삶은 과거로 돌아갔다, 아니, 전보다 더 엉망이 되었다.
이제는 남편을 잡아먹는 여자라는 손가락질까지 더해진 탓이었다.
수군거리던 비난이 대놓고 하는 욕설로 바뀌고, 그녀에게 향하던 추파에는 창녀라는 멸칭마저 더해졌다.
그녀는 남편이 남긴 유산으로 다시 연 다점을 대리인에게 맡긴 채 거의 칩거하다시피 하였고, 그 시절에 글을 쓰게 되었다.
“언젠가 칼로 내 얼굴을 그어 버리려 했어요. 이 얼굴이 제게는 짐이나 다름없거든요. 한데, 무서워서 못했죠. 제 소설이 출판된 뒤, 그렇게 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아니었다면, 제 소설이 그렇게 잘 팔리지 못했을 테니까요.”
우습게도 소설의 흥행은 표지에 박힌 그녀의 사진에 힘입은 것이었다.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 같은 비난은 어차피 근방 지역에나 통용될 뿐, 독자와는 책으로만 만날 수 있으니, 그녀의 미모가 득이 된 것이었다.
그녀의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그녀가 유명한 소설가로서 잡지와 음갑을 거쳐 접화궤에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녀도 다시 행복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하나, 그녀가 전국구로 유명해진 것은 그녀의 불행마저도 전국구로 커지게 만들었으니,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의 눈에 그녀가 든 것이었다.
군정 총리 백희수.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뒤,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고려 연방군 총사령관이자 동시에 총리의 지위까지 거머쥔 자였다.
국회는 그에 의해 한 번 해산되었다가, 그를 추종하는 자들로 다시 구성되었고, 법원의 판사들도 모두 충성 맹세를 한 자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정권을 잡은 지 10년이 흘러, 총칼이 두려워 머리를 숙인 자들마저도 이제는 그의 독재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독재 체제가 굳건해지면서 백희수는 그의 미약한 정통성만큼 타락했다.
접화궤에서는 늘 국민만을 생각하고 검소한 모습만 비쳤지만, 실제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화려한 연회를 열고, 수많은 여인들을 데려와 밤시중을 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밤시중용 여인들을 포섭하는 자가 앞서 심애가 압박했던 한 과장이라는 자였고, 지금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그러니까 백희수가 가장 품고자 애쓰고 있는 여인이 바로 심애였다.
“바란다면 없던 일로 해 주겠소.”
심애의 말에 귀 기울여 주던 사내 김경섭은 음울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다만, 그 제안과 같은 말은 실상 애원에 가까운 것이었다.
‘제발 없던 일로 해 주시오.’
하나, 심애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그럴 수는 없어요. 이 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는데요.”
“…….”
“그리고 그건 제게 어울리는 일일지도 몰라요. 나는 이제껏 죽을 명분을 얻기 위해 살고 있었던 거예요.”
“오, 제발! 그렇게 자신을 폄하하지 마시오. 당신은, 당신은 충분히 행복할…….”
경섭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도 기어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 대한 동정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품게 된 그녀에 대한 연심 탓이었고, 동시에 그럴 줄도 모르고, 그녀를 암살의 도구로 포섭한 그의 죄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경섭의 양 볼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에 들린 그의 시선 속에 그가 사랑하는 심애의 쓰디쓴 미소가 보였다.
“심애 씨, 날 사랑해 주…….”
“난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요.”
경섭은 끝내 그가 바라던 말을 듣지 못했다. 다만, 그 말이 끝난 직후에 심애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으니, 그 입맞춤이야말로 그녀가 그를 향해 보내는 일말의 동정이었다.
* * *
거의 반년 동안 뿌리친 덕일까, 그녀가 마침내 응하여 한 과장과 함께 탐라섬의 백사당을 방문할 때 의외로 별 검색을 받지 않았다.
작은 날붙이 정도는 충분히 감춰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삼키며, 그녀는 백사당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별채에 들어갔다.
백사당(白沙堂)은 탐라섬의 어느 해변가에 있는 독재자의 별장으로, 그가 국민들의 눈을 피해 유흥을 즐기고자 만든 곳이었다.
재밌는 건 눈을 피하고자 만든 것치고는 의외로 유명했고, 사람들도 많은 곳이었다.
물론, 그 많은 사람들이란 모두 백희수를 위해 준비해 둔 여인들이었다.
해변과 이어진 것처럼 만들어진 큰 수영장에서 거의 헐벗은 양 작은 수영복만을 입은 채 자기들끼리 물놀이를 즐기는 여인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뒤로하고, 심애는 홀로 별채에서 짐 정리를 한 뒤, 마음을 다졌다.
밤이 되자, 낮 동안 소란스러웠던 백사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조용해졌다.
야밤이 되어, 백희수가 탄 승용차와 경호원들이 들어온 뒤, 심애는 한 과장과 함께 백희수에게 향했다.
“특별히 할 건 없소. 그냥 각하께서 무얼 시키든 그대로 하고, 무얼 하시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오.”
“하나 마나 한 소리군요.”
“흥!”
심애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한 과장이 코웃음을 쳤다. 마치 네년도 결국 이 정도에 불과하구나 하며 비웃는 듯하였기에 그녀는 그 치욕감을 애써 삼켰다.
시작은 술자리였다.
이미 여러 여인들이 독재자의 하수인들 옆에 앉아 있었고, 심애가 뒤늦게 들어간 모양새였다.
“허허, 오늘은 기대해도 좋다더니, 과연이로군.”
환갑이 넘은 백희수는 심애를 보자마자 표정에 화색이 돌며 서둘러 곁으로 오라며 손짓을 하였다.
심애가 그의 곁에 앉자, 백희수는 대뜸 심애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가까이 당기곤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린 뒤, 마치 도자기를 감상하듯 이리저리 돌리며 뜯어보았다.
“이야, 역시 소문대로야. 올해로 마흔이던가? 다들 보게. 이 얼굴과 피부가 어디 그 나이로 보이나? 허허.”
“과연 그렇습니다. 하긴 저 정도는 되니까, 그렇게 콧대가 높았던 게지요. 하하하.”
그녀를 대상으로 진행된 품평회에서 심애는 그저 주먹을 꼭 쥔 채 불쾌감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애를 쓸 뿐이었다.
잠시 후, 악단이 등장하여 음악을 연주하였다.
하나같이 백희수가 정권을 잡은 뒤, 미풍양속과 국론 통합에 저해된다는 이유로 금지한 대중가요들이었다.
그 와중에 심애는 그야말로 술집 여자 취급이었다.
술을 따르고, 따라 준 술을 마셨다. 끌려 나가 백희수의 품에 안겨 춤을 추었다. 독재자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장난감 만지듯 마구 주무르는 것도 참았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의 연회가 끝나고 난 뒤, 그녀는 백희수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연회 동안 가까운 곳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던 경호원들도 침실에서만큼은 멀찍이 떨어졌다.
대략 한 시간 후, 그녀는 커다란 욕실 안 구석에 놓여 있는 작은 해왕상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었다.
‘해왕이시어, 부디 제게 용기와 행운을…….’
능욕당한 흔적을 가리지 못한 몸과 마음으로, 그녀는 그녀가 조금 전가지 기원을 드리던 해왕상의 목을 비틀었다.
동상처럼 보이던 그 해왕상은 의외로 쉽게 뒤틀리며 목이 떨어졌으니, 그 안에 작은 권총이 들어 있었다.
5식 권총이라 불리는, 보통 군용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지급되는 권총이었다.
10미 이상 떨어지면 조준이 의미 없다 할 정도로 명중률이 형편없어, 사실상 자살용이라는 평이 자자한 그런 권총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심애는 몸을 한 번 씻어 내곤, 큰 수건으로 몸을 감고 그 안에 권총을 숨겨 나왔다.
침대 위에는 백희수가 벌거벗은 채 직전에 즐겼던 유희의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뭘, 벌써 씻고 그러는 게냐. 옳지, 이리 오너라. 다시……!”
심애가 몸에 두른 수건을 떨어뜨려 몸매를 드러낼 때, 헤벌쭉 웃음 짓던 백희수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를 향해 겨눠진 권총의 총구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반사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 네 이년……!”
탕, 탕, 탕, 탕, 탕!
다섯 발의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그리고 총성에 놀란 경호원들이 달려와 문을 박차기 직전, 또 한 발의 총성이 있었다.
그 침실에 남은 건 두 남녀의 흐트러진 시신뿐이었다.
* * *
백희수 암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엇갈렸다.
백희수가 죽든 말든, 고려의 혼란은 계속되었고, 오히려 그 일로 말미암아 혼란이 더 가중되었다는 평가절하와 비록 그 일로 인해 고려가 당장 안정을 되찾은 건 아니지만, 이후 국제적인 정세에서 고려가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비등했던 것이다.
둘 다 일리가 있는 평이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백희수 정권이 무너진 덕에, 이후 3차 세계대전에서 고려가 연합군 측에 명목상이나마 참전할 수 있었음을 생각하면 그 암살 사건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백희수 정권은 3차 세계대전에서 주축국 동맹을 이룬 권위주의 국가들과 친밀했었으니, 그의 독재가 계속 이어졌다면, 고려도 주축국 동맹의 일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고려가 주축국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면 3차 세계대전의 향방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전쟁 말미로 갈수록 연합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음을 생각하면, 전쟁의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고, 고려는 주축국과 함께 엄청난 패배의 대가를 짊어졌을 것이다.
백희수의 암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 것과 달리, 윤의심애라는 여인에 대한 평가는 별 논란이 없었다.
그야말로 비련의 여인.
그녀의 자전적 소설인 ‘전쟁의 여인’의 여주인공이 그러하였듯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녀의 인생은 소설과 영화 등으로 수없이 회고되었고, 매년 10월이면 그녀의 가묘 앞에 수많은 추모객들이 방문하곤 했다.
다만, 윤의심애에 대한 그런 대중의 반응이 아주 순수하지마는 않았다.
당시 탐라왕실이 백수희 암살을 주도한 배후였고, 그 주요 인물 중 하나이며 당대 탐라왕의 외손이었던 김경섭이 윤의심애와 연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어, 왕실 차원에서 어떻게든 백희수에 대한 암살과 윤의심애라는 여인에 대한 세간의 평을 좋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본디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된 탐라왕실은 독재 정권 하에서도 그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백희수가 그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동금주의 무족계 소수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아 탄압하고, 그 탄압이 급기야 증거도 재판도 없는 무차별 사형 선고에까지 이르자 그것을 계기로 정치 무간섭 원칙에서 잠시 벗어나 백수희 암살에도 개입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여, 탐라왕실 측은 언젠가 왕실이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었음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김경섭과 윤의심애와의 관계도,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국민들에게 사실로 여겨질 테니, 왕실의 권위와 체면을 위해서라도 윤의심애를 단순한 암살범 이상의 인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고려는 역사의 고비에서 파탄을 면하였으니, 3차 세계대전에서 주요 강대국들이 국력을 낭비하고, 처음으로 핵무기가 실전에서 사용되는 피해까지 입으며 주춤거릴 때, 다시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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