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72)
사막의 훈기를 담은 서풍이 스치기에 서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보이는 건 굳건한 탐라군병들의 날선 기세들뿐이었다.
풍경을 보려 하니 좀 비켜 달라 말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를 보호하는 데 만전을 기하고 있는 그들의 노고를 알기에 그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말뿐이었다.
앗 수웨즈.
이제부턴 아수애군이라 불릴 곳도 사막의 황량함이 묻긴 매한가지인 곳이었다.
다만, 남쪽으로 길게 뻗은 만의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 큰 호수가 있어 땅이 만들어 낸 무미건조함을 씻어 내고 있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추정하기로 15년은 족히 필요하다 합니다.”
바다와 호수를 보고 떠올리며 시선을 옮기던 고도왕의 물음에 곁에서 긴히 보좌하고 있던 외관대신 김종서가 답하였다.
“15년이라…… 너무 길군.”
“단지 바다를 잇는 것이라면 그보다 빠를 수 있겠으나…….”
“큰 배를 통하게 하려면 어쩔 수 없겠지.”
“그렇습니다.”
고도왕은 좀 아쉬웠다. 그의 생전에 두 바다가 이어지는 진경을, 사람이 땅을 갈라 배를 움직이게 하는 기적을 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뭐, 별 상관없겠지.”
잠깐의 아쉬움은 아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일이라도, 그가 이 자리에 서 있기까지의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므로.
선왕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신 뒤 3년여 간은 고도왕은 내치에 집중해야 했다.
특별히 수상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선왕의 빈 자리가 큰 터라, 그 부재에 대한 백성들의 상실감을 달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를 반란의 씨앗이 어디선가 자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고도왕은 탐라국의 전토를 돌아가며 방문하고, 탐라군의 기강을 단단히 잡아 그의 치세적 기반을 확실히 챙겼다.
그렇게 내실을 다진 고도왕은 그 후에는 외정에 훨씬 더 집중하였다.
사실상 그의 최초 업적이자, 아마도 최고의 업적이 될 공공선 연방의 안정과 확장에 집중한 것이다.
공공선 연방의 확대는 자연히 서방을 향하여야 했으니, 고도왕은 태마식에 향서진력해왕상을 세워 그의 각오를 피력하고, 나라 안의 여론을 서방 진출에 응하도록 하였다.
서방을 향한 첫 큰 걸음은 남인도 코테국의 연방 가입이었다.
세력 19년에 코테국의 연방 가입을 확정 지은 것인데, 필연적으로 그 결정은 전쟁으로 직결되었다.
인도 지역의 강국인 비자야나가르 왕조가 오래전부터 ‘인도의 눈물’(스리랑카 섬) 지역에 눈독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년간 비자야나가르와 탐라 사이에 외교적인 대화가 오갔으나, 사실상 전쟁의 명분을 쌓기 위한 과정이었다.
결국 세력 21년에 비자야나가르는 10만의 군병과 2천 척의 배를 동원하여 침공에 나섰다.
그에 맞서 탐라국은 3만의 군병과 5백 척의 배를 파견해 두었으니, 코테 왕국의 병력을 더해도 크게 열세였다.
하나, 양적인 비교가 무색하게, 그 전쟁의 결과는 탐라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전쟁 초반 비자야나가르군은 연륙된 좁은 땅을 통해 북부의 자프나 왕국, 즉 바지야나가르의 괴뢰국에 성공적으로 상륙하면서 전쟁은 이미 끝났다고 자신만만했다.
하나, 탐라와 코테의 반격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으니, 곧이어 탐라수군이 바다에서 크게 승리하면서 제해권을 확보하자, 자프나에 있는 비자야나가르의 10만 대군은 곧바로 보급 문제에 직면했다.
이에, 비자야나가르가 서둘러 진공하여 코테를 석권함으로써 전쟁을 빠르게 종결지으려 하고, 동시에 바다에서 모든 전함을 총집결시켜 탐라수군으로부터 제해권을 되찾으려 하였다.
먼저 그 결전의 결과가 드러난 것은 바다였다.
1천 척이 넘는 비자야나가르의 대함대는, 그들도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적은 탐라수군에 괴멸되고 말았다.
화포가 있다곤 하나, 탐라수군의 화포에 성능적으로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전투 교리나 기강 및 경험 등 전투력을 가늠하는 모든 잣대에서 비자야나가르 수군이 감히 견줄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육지에서의 결전은 그 결과를 확인하기까지 좀 더 시간이 걸렸다.
하나, 그건 육전의 특성상 단번에 괴멸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랬을 뿐, 전세의 흐름은 첫 전투에서 정해졌다.
비자야나가르군은 해안을 따라 동남쪽으로 향했는데, 수전이 벌어진 곳이 그 근방 연안인 탓에 비자야나가르 수군의 괴멸을 눈으로 본 육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한데, 그 와중에 마음이 더 급해진 장수들이 코테 왕국으로 쾌속 진격하다가 탐라육군이 잔뜩 전력을 몰아 둔 함정에 제 발로 뛰어들고 만 것이다.
그들로서는 생전 경험한 바 없는 수준의 화포 공격에 혼비백산한 것을 넘어 육신마저 녹아 버렸다.
고작 2만 여의 패잔병들이 근처 산악으로 도주하였으니, 육전에서의 승리를 선언하기까지 그 패잔병들을 추포하느라 시간이 들었을 뿐,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탐라와 비자야나가르 간의 전쟁은 단순히 양국만의 결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탐라의 입장에서는 인도 지역에서 공공선 연방을 크게 확대할 수 있는 계기였으니, 아닌 게 아니라, 이후 비자야나가르에게 압박받거나 사실상 병탄되었던 남인도의 소왕국들이 연이어 공공선 연방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비자야나가르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되었다.
역사대로라면 서북방의 오리사 지방까지 석권하며 왕국 제1의 전성기를 맞이했어야 할 때, 전쟁의 패배로 인해 생긴 전력의 공백으로 오히려 여러 정복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시달려야 했고, 훗날 왕국의 때이른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남인도에 성공적으로 공공선 연방이 진출한 뒤, 고도왕이 다시 서쪽으로 시선을 둔 것은 5년이 지나 세력 26년이었다.
목표는 티무르의 페르시아였다.
다만, 티무르 왕조와의 싸움은 아니었다.
이미 그간 수집해 놓은 정보를 통해 티무르조가 겉으로는 융성하고 있으나, 내부적으로 힘든 지경임을 알고 있었으니, 그 점을 노려 티무르와의 충돌 없이 티무르의 땅을 얻고자 함이었다.
당대 티무르 왕조의 왕은 ‘샤 루흐’로, 역사와 비슷하게 즉위하여 당대까지 티무르 조를 이끌고 있었다.
샤 루흐는 티무르조의 전성기에 역임한 왕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내부적으로 평안한 건 아니었다.
창건자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사방 정복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인해 샤 루흐는 사마르칸트에서 제대로 정무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늘 원정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탐라는 티무르와 협상의 여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할릴이 있기 때문이었다.
선왕의 약조는 비록 그 기한을 훨씬 넘기는 했지만, 고도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먼저 탐라수군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티무르 조에 할릴의 귀환을 통보하였다.
당시 할릴의 아비는 살아 있기는 했으나, 영지를 빼앗긴 채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하나, 그는 엄연히 공식적이고 명목적으로 티무르 왕조의 대영주였다.
탐라군을 등에 업은 할릴은 먼저 샤 루흐에게 아버지의 승계자로서 대영주의 권한을 요구하였다. 당연히 샤 루흐는 크게 반발하였다.
할릴이 요구한 땅이 반란으로 반쯤은 티무르조에서 이탈한 곳이긴 하지만, 그가 형식적으로나마 압수한 땅을 할릴에게 허락하는 순간부터 그의 권위가 크게 상할 것은 자명했으니까.
하나, 동시에 무작정 거부하기도 곤란했으니, 만약 할릴이 탐라군의 힘을 빌려 무력으로 그의 권리를 되찾으면, 샤 루흐로서는 그를 정벌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연속된 반란들을 정리하는 것도 힘겨운 중에, 한눈에 봐도 정예 강군임에 분명한 탐라군과 부딪치는 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하여, 겉으로는 절대 불가함을 천명함에도 물밑에서는 신하들을 통해 할릴과 협상에 나섰으니, 서로 공갈과 허세를 나누며 한 치의 이득이라도 더 얻기 위해 노력한 끝에 마침내 두 달 만에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티무르는 자그로스 산맥 이남의 영토을 할릴에게 양도하고 할릴은 티무르에 조공하는 신하국이자 아우국으로서의 왕조를 세우기로 했다.
자그로스 산맥 이남 지역은 형식상 티무르 왕조의 영토이긴 하나, 사실상 통치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반란의 도가니이기도 하거니와, 서쪽 ‘이라크’ 지역에 있는 잘라이르 왕조와 휴전하면서 일종의 중간 지역으로 놔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샤 루흐는 할릴의 왕조를 잘라이르조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을 속셈이었고, 대신 할릴에게 그의 아버지가 통치하던 ‘이라크’ 북부와 ‘아제르바이잔’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길 요구하였다.
얼핏 티무르 왕조에게 훨씬 유리한 제안인 것처럼 보인 그 제안에 할릴과 탐라는 응하였으니, 애초에 할릴과 탐라가 원한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도왕은 이미 선왕에게 들은 게 있어, 과거 할릴의 아버지인 미란샤의 영토가 두 개의 바람 부족인 북풍 왕조와 남풍 왕조, 그리고 더 후에는 오스만튀르크의 강대한 압박에 직면할 곳이기에 그보다는 페르시아 지역을 얻는 게 더 나았던 것이다.
참고로 북풍 왕조와 남풍 왕조는 역사에 흑양 왕조와 백양 왕조라 기록되었는데, 당대 바람을 뜻하는 ‘코윤(koyun)’라는 단어가 후대 터키어로 양을 뜻하는 단어 와 같은 탓에 오역된 것이고, 흑과 백 또한 북과 남을 의미하기도 하여 역시나 오인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자그로스 산맥 이남 지역을 허락 받은 할릴은 탐라군의 힘을 빌려 그 지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간 독자적인 독립성을 누리던 토호들의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그들이 독립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행운에 불과했던 것임을 증명하듯, 탐라군은 고작 5천의 육군과 탐라수군 1개 함대만으로 토호들을 격파해 냈다.
그렇게 반년 만에 호르무즈 해협 연안부터 페르시아만 깊숙한 곳의 아바즈까지 주요 고을을 정복한 뒤, 본보기 삼아 반항하는 토호들 몇몇 가문을 지워 버리고 나자, 이후 자그로스 산맥 이남에서 할릴의 통치에 저항하는 자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의아했던 것은 잘라이르 왕조가 그들의 턱밑에 할릴이 왕조를 세우는 것을 방해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우려했던 것에 비해, 정작 그들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싸움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고 넘어가긴 했지만, 나중에 당시 잘라이르 왕조가 오스만튀르크의 빠른 부상을 경계하느라 그랬음을 알게 되었다.
역사보다 오스만튀르크가 빠른 시기에 전성기에 들어섰던 것이니, 그 또한 고려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고, 후에 탐라국이 오스만튀르크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배경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할릴이 페르시아 남서쪽 연안 지역에 그의 왕조를 세우기 전부터 탐라국은 따로 아라비아 반도의 남동쪽에 위치한 오마니드 왕조와 접선하였다.
이바디파 무슬림 왕국인 오마니드는 수니파나 시아파보다 훨씬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호르무즈 해협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기본적으로 해양 세력에 기반한 나라인 만큼, 일찌감치 공공선 연방에 포섭할 대상이었다.
그들은 안 그래도 종파가 다른 무슬림 왕국의 견제와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중에 탐라국의 손길이 달갑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탐라국이 지속적으로 그 지역에 힘을 투사할 능력이 있는지가 관건이었는데, 탐라가 할릴 왕조를 세움으로써 그 능력을 증명하자, 오마니드와의 협상은 순풍을 타게 되었다.
하여, 상당히 빠르게 협상에 타결점을 찾았으니, 오마니드의 카슘섬과 호르무즈섬 정복을 돕되, 영구적으로 탐라군항을 빌리기로 하고, 오마니드를 공공선 연방에 가입시켰다.
그렇게 탐라국이 할릴조와 오만조라는 두 개의 연방국을 확정적으로 얻게 된 것은 세력 30년이었다.
* * *
“선왕께서는 실로 위대하셨지.”
고도왕의 말투에는 취기가 가득했지만, 그 말은 정상적으로 통역되었다.
“여기 있는 나의 신하들에게 나를 부처라 부르라 하면 따를 수는 있어도, 내가 선왕보다 낫다고 말하라 하면 거부할 자들이 수두룩할 것이야. 그렇지 않나?”
“…….”
고도왕의 말에 그 연회석에 있는 탐라의 신하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오히려 다른 나라에서 온 자들은 크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그들이 보기에는 탐라왕이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고, 신하들이 그 시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탐라인들에게 고도왕의 말은 태양이 동쪽에서 뜨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였으니, 태양이 서쪽에서 뜬다고 말하라 강요하면 그가 왕이든 아니든 그의 잘못인 법이었다.
“나는 늘 선왕에 못지않은 왕이 되고자 하였지. 그리고 그 방도가 선왕께서 남기신 뜻을 완수하는 것이라 여겼네.”
고도왕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훑어보았다.
새로 지은 성, 수말성의 내부는 얼핏 화려하지 않은 듯하면서도 섣불리 폄하하기 어려운 고귀함이 있었다. 특히 동양의 문화를 모르는 아시아[중동을 의미]와 유럽에서 온 자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될 만 했다.
“이곳은 선왕께서 오시길 바라셨던 곳…… 사실 이곳이 진정 선왕께서 가리키셨던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왕께서 내게 취하라 말씀하신 곳 중 가장 서쪽 끝이니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서게 되었어.”
감개무량한 표정이던 고도왕은 문득 한 곳을 직시하더니 손짓을 하며 말하였다.
“오스만의 신하는 이리 오라.”
그러자 한쪽에 무뚝뚝한 표정이던 자들이 짐짓 놀라며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주시하자, 그중 수북한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도왕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감에 호위군병 두 명이 그의 양쪽에 서 노려보듯 그를 주목하였으니, 마치 섣부른 짓을 하는 순간 그를 베어 버릴 듯했다.
하나, 정작 고도왕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가까이 다가온 오스만의 신하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며 어깨동무를 취하였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자는 오스만 술탄의 조카이오. 그리 대단한 자리가 아닌 곳에도 왕족을 보내 주다니 오스만의 술탄은 참으로 자애로운 자가 아니겠소?”
고도왕의 말에 그 오스만의 신하는 덥수룩한 수염에도 불구하고 벌게진 얼굴색을 감추지 못했고, 유럽에서 온 사신들도 헛기침을 하며 민망한 상황을 외면하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그 오스만의 신하이자 왕족이라는 자 ‘무라트’는 실제로 현 술탄의 조카이긴 하나, 사실상 왕족에서 거세된 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비 슐레이만이 오스만의 왕좌를 두고 현 술탄과 경쟁을 하다가 망했으니, 무라트가 살아남은 것도 술탄의 자비 덕이었고, 지금은 그저 오스만의 관리로 살아남은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지금 그 자리처럼 오스만으로서는 구차하고 위험한 자리에 오스만의 대표로 오게 된 것이었다.
“어찌 그리 몸을 떠는가? 내 말에 틀림이 있나?”
“아닙니다. 그저 대왕의 곁에 나란히 서게 된 것에 몸 둘 바를 모를 따름입니다.”
고도왕은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정말 무라트의 심정은 모르고 있고, 그저 좋은 말에 기분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자네가 맘에 들어. 내 어디선가 듣기로, 자네는 전에 우리 탐라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자 술탄에게 청했다지?”
“……!”
“술탄이 자비로운 걸 넘어 현명하기까지 하였다면, 탐라와 오스만은 좀 더 좋은 이웃이 되었을 터인데 말이야.”
“…….”
무라트의 몸은 계속 떨렸다.
그건 고도왕이 은근히 오스만을 모욕하는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오스만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것에 놀랐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나는 술탄에게 자네를 가자의 총독으로 천거해 볼 생각이네. 자네라면 앞으로 우리 탐라와 오스만 간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나?”
“……!”
무라트의 떨리던 몸이 경직되었다.
가자(Gaza)의 총독.
탐라의 아수애군과 맞닿은 곳은 아니지만, 가자는 가장 남쪽에 있는, 그래서 아수애군과 가장 가까운 오스만 수군 기지가 위치한 곳이었다.
즉, 가자는 군사적으로는 가장 근접한 곳이랄 수 있으며, 그곳의 총독은 사실상 가나안 지방을 통치하는 작은 왕좌라 할 수 있었다.
그곳이라면 권력에서 거세된 왕족으로서, 반역이 아닌 한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는 권좌라 할 수 있었으니, 무라트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술탄이 탐라왕의 천거를 어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무라트가 짧게 생각해 보기에, 쉽게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의 양국 관계에서 오스만이 그 정도의 ‘부탁’은 받아 줘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앞날은 모르는 일이나, 만약 그리된다면 이 외신 양국의 발전과 우호를 위하여 진심을 다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탐라가 홍해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력 37년이었다. 할릴조와 오마니드가 공공선 연방에 연착륙하는 것을 도우며 탐라는 남아시아[아라비아 반도 지역을 의미]에서의 외교 정책을 강구하였으니, 그 기본은 ‘예멘 죽이기’였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예멘은 여러 이웃을 두고 있었으니, 그중 우호적인 곳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경쟁하는 세력들이었다.
하여, 탐라는 해로와 육로를 통해 예멘 주변의 세력들을 규합하였으니, 예멘을 노나 가지자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게 하여 예멘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었으니, 탐라는 수군만을 동원하면서도 오마니드나 동아프리카의 아달 등의 군병을 이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예멘을 정복할 수 있었다.
전쟁 끝에 탐라는 예멘의 영토를 단 한 점도 취하지 않고, 동맹과 연방국에게 영토를 양도하였으니, 그 결과 오마니드는 예멘의 남쪽 해안 지대와 소코트라 섬을 얻게 되었고, 아달은 홍해 입구의 아프리카 지방이자 예멘의 보호를 받고 있던 지부티의 토호국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예멘의 북부는 헤자즈 지방에 있던 토호국이 차지하면서 예멘은 멸망했다.
물론, 그렇다고 탐라가 아무것도 얻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숙원이었던 지부티 지방을 얻은 아달은 탐라국의 힘과 자비에 감격하여 공공선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으니, 탐라는 마침내 목표로 했던 앗 수웨즈 지방으로 향하는 길을 완벽하게 열게 되었다.
그리고 오스만튀르크와의 갈등은 그때부터였으니, 역사보다 오스만튀르크가 훨씬 일찍 강대해진 탓이었다.
역사대로라면, 이제 티무르와의 충돌로 빚어진 혼란을 정리하고 다시 정진하려 할 참으로, 이집트는커녕 가나안 지방에도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을 터였다.
한데 티무르와의 충돌로 인한 피해가 훨씬 적었고, 그로 인한 혼란기도 없었기에 일찌감치 오스만튀르크는 그들의 잠재력을 폭발시켜 발칸 반도를 제패하고, 동로마 제국을 도시 국가 수준으로 짓눌러 버린 뒤, 가나안 지방까지 석권한 상태였다.
사실 오스만튀르크는 머나먼 고려에서 시작된 역사의 변화로 인해 상당히 큰 이득을 얻은 세력이었고, 그 덕에 역사보다 일찌감치 강대한 세력을 일으킬 수 있었다.
동방으로부터 초원과 비단길을 통해 들어오는 물산의 양과 질이 확연히 좋아진 이유가 탐라국의 산업에 있었고, 그 물산들이 서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교역의 이득을 크게 끌어모을 수 있는 자리에 바로 오스만튀르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워낙에 먼 곳이라 정확히 그 교역의 전모를 알지 못하기에 오스만도 탐라도 그런 인과관계를 알지는 못했다.
어쨌든 기세등등한 오스만튀르크가 그들의 다음 번 목표 중 하나인 이집트로 향하는 길목인 앗 수웨즈 지방에 뜬금없이 탐라가 발을 디디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하여, 탐라국은 앗 수웨즈 지방을 소유하기보다는 오스만튀르크의 종주권을 인정하되 운하의 건설과 운용에 대한 권리 요구와 제반 시설을 위한 약간의 영토 조차를 담은 제안을 하였다.
하나, 그 제안은 일거에 거부당했으니, 그때부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사이에 전운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선왕의 뜻을 받들고 있는 데다가, 앗 수웨즈 지방의 운하 건설에 대한 미래성을 확신하고 있던 고도왕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전운이 일찌감치 감돌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실제로 전쟁이 발생하기까지는 거의 4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나 먼 원정길로 인한 준비 시간이 그만큼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스만과의 전쟁을 계기로 유럽 제국(諸國)과의 관계 개선, 앗 수웨즈 운하의 건설, 그리고 운영에 대한 외교적 양해와 합의를 한 번에 얻어 낼 의도 때문이었다.
하여, 탐라국은 먼저 이집트 지방에 있던, 맘루크의 부패한 대귀족을 구워삶아 통행권을 확보한 뒤, 이집트와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 지역에 접하였다.
본디 가장 먼저 접선한 곳은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이었으나, 왕가가 교체되면서 혼란한 정국이었으므로 오스만에 함께 대항하자는 탐라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탈리아 북부의 크고 작은 왕국들도 비슷했고, 오스만의 발칸 반도 진출로 인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때마침 오스만튀르크가 기어이 콘스탄티노플을 역사보다 10년 일찍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자, 상황이 달라졌다.
유럽은 오스만에 대항하기 위해 누구의 도움이라도 더 절실해졌고, 때마침 ‘듣보잡’ 취급했던 탐라국이 연신 사신을 보내 여러 물산과 무기를 자랑하며 국력을 피력하자, 탐라의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에 걸쳐 대 오스만 동맹이 체결되었고, 그 와중에 운하 건설에 대한 합의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앗 수웨즈 운하의 건설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유럽 제국들은 거의 없었다.
건설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는 곳이 많았고, 건설이 되더라도 제대로 운용되거나 이득을 취하리라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베네치아와 제노아같이 상업에 집중한 공화국들이 약간의 투자를 약속했는데, 그것도 운하의 미래를 보았다기보다는 오스만과의 싸움에서 탐라국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일환이자, 차후에 탐라국과 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고, 특히 제노아는 라이벌인 베네치아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발휘된 탓이었다.
전쟁은 시작되었고, 오스만은 그들의 엄청난 국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를 위시한 유럽 제국들이 발칸 반도를 압박하고, 탐라가 1년에 걸쳐 집결시킨 15만의 군병을 앗 수웨즈 지방에 상륙시킨 것에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두 개의 전선에 총합 35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상대하였고, 심지어 발칸 반도 방향에서는 초전부터 승리하여 기세를 가져오기까지 하였다.
대신, 탐라군은 굉장히 신중하게 오스만을 상대하였으니, 아무리 사전에 정보를 구하고 교육을 시켰다곤 하나, 전혀 낯선 사막 지대에서 섣불리 전투에 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고의로 후퇴하며 최전에 적합한 곳에서 싸우길 기도하였는데, 오스만군의 장수들도 영민하게 반응하여 그들이 불리할 수 있는 전장을 계속 회피하였다.
그렇게 발칸 반도에서는 몇 번의 큰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서로 견제만 하던 탐라군과 오스만군이 마침내 충돌하게 된 건 엉뚱하게도 맘루크의 알렉산드리아 근방이었다.
이는 오스만의 술탄을 비롯한 최상위 권력층의 오만과 오판에 의한 것이었다.
맘루크는 탐라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과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고, 그저 시나이 반도쪽 국경을 탐라군이 넘나드는 걸 못 본 척하는 정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한데, 오스만은 맘루크가 탐라를 돕는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맘루크도 침공할 생각이니 이참에 함께 정리하자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맘루크를 선제공격하려 하였다.
게다가 그 오만인지, 오판인지 모를 결정에 따라 탐라군과 빈틈없는 견제전을 벌이고 있던 시나이 반도의 오스만군마저 이집트 지역으로 진격하였으니, 자연히 탐라군은 오스만군의 진격로를 속속들이 예측할 수 있었고, 적합한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쥐게 되었다.
그렇게 오스만의 장수들이 후방과 매복을 걱정하며 이집트의 국경을 넘어간 어느 날 밤, 탐라군은 며칠 동안 준비한 포위망을 완성하였고, 해안 방향인 북쪽만 조금 열어 둔 채 일제히 화포망을 개방하였다.
동원된 화포의 수만 따지면 오래전 명나라와의 전쟁보다는 적었지만, 그간 여러 발명과 개량을 거듭한 탐라의 화포들은 그 시절보다 더 강력한 화력을 선보였다.
어쩌면 탐라의 포위망이 완성된 순간, 아니 오스만의 궁정에서 잘못된 명령을 내린 순간, 이미 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오스만군은 순순히 몰락하지 않았으니,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자랑하는 화포로 대응 사격하여 탐라군에 작지 않은 피해를 안겨 주기도 하였다.
덕분에 그저 승패를 확인하는 선에서 끝날 수도 있었던 그 싸움은 끝장을 보는 싸움으로 번졌고, 탐라군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화약과 포탄을 소모해야 했다.
물론, 그 싸움에서 거둔 승리는 탐라군이 가지고 있던 화약과 포탄을 모조리 써 버린 것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다.
오스만의 가나안 방면 군력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탓에, 맘루크의 지중해 연안을 노리던 오스만의 수군은 육군의 호응이 없자 도로 바다로 물러나 버렸다.
게다가 전쟁에 개입할 의지가 없던 맘루크가 오스만의 오만함에 놀라고 분노하여 탐라군의 편으로 참전하였으니, 전체적으로 비등한 중에 우세하다고 맘 편히 있던 오스만의 궁정이 단숨에 뒤집혀 버렸다.
이제는 유럽 방면에서 승전보가 와도 중요한 게 아닌 게 되어 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탐라군은 맘루크군과 함께 과거 맘루크가 영위하던 영토를 하나둘 회복시키며 가나안 지방을 거슬러 진군하기 시작했다.
유럽 방면에서 군사를 빼기 어려웠던 오스만은 급하게 모은 군병을 파병하여 어떻게든 탐라군의 진군을 막으려 하였지만, 신출내기와 노병으로 구성된 군대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탐라군이 가나안 지방과 경계를 이루는 아나톨리아의 지방인 카라만 지방에까지 이르자, 오스만은 마침내 휴전 협상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탐라군은 이미 원하던 바를 협상을 통해 얻을 수 있게 된 그 즈음에 휴전 협정에 적극적으로 임하려 하였지만, 유럽 제국들이나 맘루크가 욕심을 부렸다.
유럽 제국들은 헝가리 방면의 몇몇 거대 영지를 회복하려 했고, 맘루크는 가나안의 영토를 되찾으려 했으니, 오스만도 그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
결국 휴전 협상의 여지가 남은 채 다시 1년여의 긴 싸움이 이어졌으니, 그렇게 서로 비축했던 힘을 다 쓰고 난 뒤에야 간신히 협상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휴전 협정의 주요 사안은 오스만이 점령했던 헝가리의 페스트 지방을 토해 내고, 과거 베네치아의 점유지였던 아드리아해 쪽 몇몇 섬을 돌려주는 것과 맘루크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하는 것, 그리고 탐라국의 아수애군 설치를 공인하는 것 등이었다.
다만, 다른 나라는 주요 사안이 아니라 보았지만, 훗날 가장 중요해진 조항은 아수애 운하에 관한 것이었다.
탐라국은 운하의 건설과 운영을 위한 회사를 세우면서 전쟁의 주요 당사국들을 끌어들였으니, 유럽이나 맘루크는 물론 오스만튀르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탐라국이 그 회사의 최대 주주로서 75백분율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오스만이 10백분율, 맘루크와 베네치아 그리고 제노아가 각각 3백분율씩 그리고 유럽의 제국들이 저마다 1, 2백분율의 작은 지분을 차지하며 투자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 나라들을 동참시킴으로써 훗날의 정치외교적인 변화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의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졌음은 훗날의 역사가 증명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국적 투자로 형성된 회사는 ‘아수애 운하 운영 회사’라는 이름으로 이제 운하 건설에 나서고자 하였으니, 오늘 고도왕 앞에 수많은 외신들이 모인 것도 그 최종적인 결정을 위함이었다.
* * *
“언젠가부터 동물들이 나를 따르지 않아.”
고도왕의 술주정 아닌 술주정은 외신들과의 연회가 파한 뒤에도 얼마간 이어졌으니, 뜬금없이 신하들을 몰아 성벽 위로 올라가게 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앞만 보고 달린 탓인가 싶네. 그 와중에 피를 뒤집어써도 너무 많이 뒤집어썼지.”
밤이 깊어 가는 중에 떠오른 샛별을 보며 고도왕이 뱉어 낸 말에 신하들 모두가 안쓰러운 시선을 건넸다.
그들 모두가 왕이 선왕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리고 선왕의 그림자를 벗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하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내 나이도 선왕께서 졸하신 나이를 넘었네. 그래서 이제 와 문득 드는 생각이네만, 선왕께서는 나를 어찌 보고 계실까 싶어.”
“해왕께서도 전하의 노고를 이해하고, 높이 세우신 업적을 치하하실 겁니다.”
황희가 위로하듯 말하였다. 그는 직전까지 전당청을 역임하였다가 운하 운영사의 초대 사장으로 임명되어 고도왕과 함께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 말년을 이유로 은퇴를 청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말년에 더 힘든 일을 떠맡은 셈이었다.
“허허, 고맙우이. 나도 황 영감의 노고를 잘 알고 있고, 지금까지 세운 공업과 앞으로 세울 공업에 치하를 보냄세.”
“예, 감사드립니다.”
어째 감사하다고는 하지만, 뭔가 찝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수염을 쓰다듬는 황희였다.
“그나저나 세자 녀석은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녀석이 누굴 닮았는지 좀 능글맞은 경향이 있지 않은가.”
“좋게 보면 유연하다고 할 만하지요.”
“외관대신이 보기에 신후가 이 나라 탐라가 어떤 나라인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소?”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외관대신 김종서가 하는 말은 단지 세자를 감싸기 위함이 아니었다.
“비록 세자 저하의 품행이 가볍다고는 하나, 막상 국무를 다룬 것을 살펴보면, 뭐랄까…….”
“뭐랄까?”
“……실전에 강하다고 하는 게 맞을 듯싶습니다.”
“오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러니 세자 저하에 관해 너무 걱정 마십시오. 결코 선왕과 전하께서 이룬 이 나라를 저해시킬 분은 아닙니다.”
김종서의 인물평에 다른 신하들도 대략 동의하는 기색이자, 그제야 고도왕도 조금은 가벼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이왕이면 형걸이도, 형걸의 아이들도,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계속 잘했으면 좋겠어.”
형걸은 신후의 장남이자, 고도왕의 장손이었다.
“너무 욕심이 큰가?”
“나라를 걱정하시는 것을 어찌 욕심이라 하겠습니까.”
“욕심이더라도 이것만은 하늘이 좀 봐줬으면 싶네.”
수말성의 성벽 위에서 술기운을 떨치듯 고도왕이 크게 숨을 내쉬며 한 말이 대기에 퍼졌다.
남쪽 먼 곳에 홍해의 검은 바다가 길게 펼쳐진 채, 하늘의 별을 끌어내려 물 위에 수놓고 있었다.
세월이 얼마나 흘러도 변치 않을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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