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473)
해왕(석몽린) {최종 수정 : 세력 529(서기 1929). x. xx}
세력 전 47년~세력 14년
1. 소개
탐라국의 창업군주이자, 고려의 운명을 완전히 바꾼 고려사 최고의 위인.
지옥문이 열린 고려 말기에 뜬금없이 등장하여, 일개 서리직 관리에 불과한 백면서생에서 벼락 승진 끝에 귀족의 반열에 올라 고려를 좌지우지하는 권세마저 쥔 후, 탐라국을 개국한 일세의 천재다.
고려의 역사는 해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지금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알고 있는 조금 오래된 문물과 문화는 거의 모두 해왕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한글부터 그렇다.
거의 혼자서 고려라는 나라를 다시 세운 수준, 아니 다시 세우다 못해 하늘로 올려 보낸 수준의 전설적인 공로를 세운 위인이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과, 학살이나 다름없는 반란 제압을 여러 번 치르기도 하였음에도 그에 관한 원한이 거의 남지 않은 신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일개 도령에서 시작하여, 내외적과 맞서며 세력을 기른 끝에 결국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화덕진군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영원한 독재의 노욕에서도 초연하여 죽기 전에 왕좌에서 물러나기까지 그 인생 자체가 연속극의 주인공이었다.
1.1. 한양부 시절
본관은 남양 석씨로, 현 양주군 남서쪽 일대이다. 그런데 해왕이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그의 할아버지대로 무인정권기에 고려왕의 땅을 강매당하는 대가로 성씨를 얻었다.
해왕의 조부의 이름은 석구보.
석구보는 송나라와 교역하던 대상으로 굉장한 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해왕이 큰 뜻을 행함에 있어 마중물이 되어 준 재산은 모두 석구보가 모은 것이나 다름없다.
참고로 해왕의 처가도 석구보와 친하던 장사꾼 가문으로 처가 또한 엄청난 부자였고, 처가의 부도 결국 해왕의 창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남양 석씨 가문이 한양부에 자리잡은 건 해왕의 아버지 석혜민 시절로, 해왕도 한양부의 자택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극히 적으나, 매우 평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하디흔한? 출생 설화 같은 것도 없다.
훗날 해왕 최고의 신하 중 하나인 남석삼은 해왕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붙여 준 몸종이었다.
다만, 해왕은 몸종인 남석삼을 함부로 천대하지 않고 친구처럼 사귀었다 하니, 남다른 면모가 아주 없지는 않은 듯하다.
1.3. 호장 석혜민
해왕의 성장과 할거의 시작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분이 바로 아버지 석혜민이다.
석혜민은 한양부 일개 촌현의 호장으로, 속현의 수장이었다.
석혜민이 다스리는 현에서도 석혜민이 굉장한 부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그의 부유함을 상당히 감추고 있었다고 한다.
후에, 해왕에 대한 잡다한 사실을 담은, 세력 23년에 출판된 ‘해왕잡사’에 보면, 해왕도 거의 성인이 된 이후에야 그의 집안이 가진 재력을 제대로 깨닫고 크게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석혜민이 그의 재력을 크게 감추고 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즉 해왕의 조부가 왕토를 취득한 일로 인해 당시 개경 왕실과 실세 신돈의 눈총을 받고 있어 몸을 사리기 위함이었다.
석혜민은 그 부유함을 이용하여 한양부 내에 인망을 크게 샀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석혜민도 어느 정도 야망이 있었던 게 아닐까 추정된다.
1.4. 해왕의 성장
상술하였듯 해왕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석혜민이 몹시 아꼈다든가,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든가, 죽을 뻔했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그 정도야 흔한 이야기일 뿐이니….
다만, 16, 7세쯤에 기방에 출입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오늘날 기준이 아니라 그 당시로 따져도 상당히 이른 시기 이나, 그렇다고 해왕이 색주에 취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방을 통해 해왕이 본격적으로 그 뜻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기생들을 이용하여 첫 사업 을 펼치고, 고위관직자와 연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2. 신돈의 심복 시절
해왕이 본격적으로 운신하기 시작할 때, 남양 석씨의 땅을 노리던 신돈에게 걸려 크게 혼쭐이 났다. 함부로 나랏일에 훈수?를 두다가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빌미로 남양 석씨 소유의 땅 중 개경 일대에 있는 땅을 뱉어내야 했다.
재밌는 건 그로부터 1년 뒤쯤에 해왕은 명실상부 신돈의 심복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쉽게 신돈의 심복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니었고, 상당한 액수의 뇌물이 들어갔다고 한다.
한데, 그러고도 신돈은 해왕을 그냥 두지 않고 온갖 일을 맡겨 괴롭혔는데, 전장에 나서기도 하고 사이가 좋지 않던 명나라로 사신단의 일원이 되어 가기도 했다.
전쟁 참가와 사신행 모두 해왕에게 죽음의 고비를 선사하였는데, 자세한 사정은 후술…… 어쨌든 중요한 건 해왕이 죽음의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며 성장했다는 거다.
그렇게 난관을 이겨 낸 끝에 해왕은 신돈의 진정한 심복이 되었고, 마침내 제주현남의 지위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3. 전설적인 군주로서의 면모
3.1. 세력
제주현남이 되었지만, 순탄하게 탐라에 자리를 잡은 건 아니었다. 당시 탐라섬에는 구원을 추종하던 목호들이 반란을 일으킨 중이라, 그 토벌군의 일환으로 출병함으로써 겨우 입도할 수 있었다.
목호 토벌에 직면해서 해왕은 그가 숨겨 두었던 두 가지 면모를 드디어 드러냈는데, 하나는 그의 군주적인 자질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식과 그 지식을 사용하는 실천력이었다.
전자는 목호 토벌에 임하여 냉정하고 잔혹한 면모를 보임으로써 드러내었는데, 당시 반란에 가담한 목호들 거의 모두를 참해 버린 것이다. 탐라특별시 항파두리 해왕유적지에 가면 당시 참수당한 목호들이 화장당한 곳과 위령비를 볼 수 있다.(사적xxx호)
그리고 후자는 바로 화약 무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미 한양부 시절 비누와 선로의 발명으로 그 비범한 지식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실전에서 쓸 만한 수준의 폭죽이라는 형태의 무기를 개발하고 생산했다는 건 그가 단순히 똑똑한 수준이 아님을 보여 준다.
해왕은 목호 토벌을 통해 탐라에 완전히 눌러앉게 되는데, 사전에 신돈과 그에 관해 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교섭에서 남양 석씨의 땅을 신돈에게 거의 다 갖다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 신돈의 운명을 생각하면…….
이후, 해왕은 탐라섬을 기반으로 세력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3.2. 성장과 중국, 일본의 관계
해왕의 세력이 성장함에 있어서 고려보단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특히 해왕의 신문물에 대한 소비 시장으로서 당시 명나라나 일본 무로마치 막부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한데, 흥미로운 건 이미 그 때부터 해왕은 명나라나 일본을 상대로 여러 번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다.
물론, 대놓고 전면전을 치렀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명나라와 일본 막부 내 일부 세력을 상대로 은밀히 혹은 분리해서 싸움을 벌였다는 의미다.
가장 눈에 띠는 건 역시나 이인임의 몰락 시기 내전 상황에서 개입하려는 명나라군을 서해에서 수몰시킨 것으로, 80척이 넘는 명나라 대함대를 고작 십여 척으로 완승을 거두었음을 생각하면, 이미 그때에도 해왕의 세력이 굉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당시 명나라가 건국 초기고, 아직 구원 세력을 몰아내지 못한 상황이라, 어지간해서는 확전하지 못할 걸 알고 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후 명나라를 포함하여 중국의 나라들이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게 된 운명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구주를 얻게 된 전쟁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유학자들을 데리고 사신단으로 다녀온 것이 더 중요했다. 이후, 고려가 일본으로부터 고토를 야금야금 되찾을 수 있었던 외교적 다지기가 그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왕도 유학자들과 인연이 깊었다. 후에 요동국에서 유학자들이 크게 활약한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4. 탐라국 건국과 대헌장
(전략)
다만, 대헌장 체제가 신우의 폭정에 의해 돌발적으로 형성된 건지는 확실치 않다.
적어도 해왕의 속마음으로는 고려의 체제를 연방제로 확고히 다지려는 계획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특히, 요동실록 북지왕 일지에서 이성계가 대헌장 체제 논의에 대해 해왕과 나눈 이야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해왕은 탐라국을 넘어 고려가 법제에 의해 통치되고, 항구적으로 발전하고 안정되도록 만들기를 원했다고 하니, 대헌장 체제가 그 방법으로 강구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5. 선양과 갑작스러운 죽음
(생략)
6. 시호, 중호
시호는 영문예무인성해신대왕(英文睿武仁聖海神大王). 중호는 남해왕이다. 둘 다 바다의 왕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해왕의 세력이나 탐라국의 영토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7. 배우자와 자녀들
7.1. 정비 : 생검왕후 최앵도
개경의 거상 최하을의 손녀. 가문의 본관은 화극 최무선과 같은 영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아버지 최정첨을 여의고 할아버지의 손에 컸다. 최정첨과 그의 아우는 아내들과 함께 중국과 교역길에 올랐다가 사고로 한꺼번에 사망했다.
최정첨은 최무선과 먼 친척이지만 친구처럼 사귀었고, 후에 최무선이 해왕에게 귀의하게 된 데에도 그 인연 덕이 컸다.
생검왕후(生劍王后)라는 시호를 보면 알 수 있듯, 최앵도는 평범한 여인이기 전에 무인으로서 해왕을 가장 근접에서 호위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한양부 시절이자 신혼이던 때에 최앵도는 왜구로부터 해왕을 지키기 위해 피 칠갑이 될 정도로 싸운 적도 있다.
평생에 걸쳐 해왕과 금슬이 좋았다. 슬하에 1남 1녀뿐인 게 신기할 정도.
그런 만큼 해왕은 후비를 거두지 않았다.
(중략)
사실 최앵도가 진정 왕비로서 세운 최고의 공헌은 해왕의 사후 왕실의 분열을 막은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해왕의 사후 탐라왕실 내부적으로 분란이 있었는데, 해왕의 장녀인 신강공주 석강영이 해왕의 유산 상속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신강공주는 오늘날로 따지면, 여론전과 재판전을 준비하여 해왕의 막대한 재산 중 절반을 얻어내고자 하였는데, 그걸 사전에 막은 것이 생검왕후였다.
생검왕후는 신강공주가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자, 곧바로 요동국으로 건너가 딸과 사위를 상대로 담판을 벌였고, 신강공주가 하려 했던 모든 일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야사에 의하면 그때, 생검왕후가 공주에게 회초리질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 확인은 어렵다.
생검왕후 개인에 대한 평가와 행적은 아래
생검왕후 최앵도 문서 참고
8.2. 자녀
석강영 : 신강공주, 요동국 태염왕의 부경왕후. 천성이 굉장히 활발하고 욕심이 많았다. 해왕의 죽음 전후하여 유산에 욕심을 부린 탓에 대중적인 이미지는 좋지 않지만, 사실 요동왕가가 탐라왕가 못지않게 부유해진 건 대개 이분의 덕이다. 남편인 태염왕이 나라를 살찌웠다면 아내는 왕실을 살찌운 셈.
석강중 : 탐라국 2대 신유왕
신유왕 석강중 문서 참고
10. 전설적인 무용담? 따윈 없다. 다만…….
해왕에게 용력이나 무술 실력 따위가 없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데, 그렇다고 장수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의 유약한 인상 탓에 몇 번의 예외가 인구에 회자되는 편.
신돈의 당여 시절 요동 정벌에 참여했을 때, 산원의 신분으로 잘못된 명령에 저항하여 군량고를 지키려 하였고, 동요하는 수하들을 다독이고 독려하며 패기를 보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후에 요동국 북지왕이 되는 이성계는 요동성에서의 해왕에게 큰 인상을 받은 듯 그의 일기에 해왕의 활약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기도 하였다. 다만, 횟수에 비해 구체적인 내용은 다소 부족하다.
동금주에서 나하추와 싸우던 시절에 위험한 곳에 나아가 화살을 맞으면서까지 독전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해왕을 장수에 비유하자면, 용장이나 맹장은 아니더라도, 덕장이나 지장은 되는 셈.
11. 해왕이 시간여행자라는 의견에 대해
워낙에 갑작스럽게 역사에 등장하였고, 과학 기술을 급진전시킨 탓에 해왕을 두고 혹시 시간여행자가 아니냐는 말들이 많다.
확실히 시간 여행이 가능한 일인지를 차치하고 보면, 해왕을 시간여행자로 의심하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해왕 대에 탐라국에서 생산되거나 개량된 물건들 중에는 연구나 실험 과정이 없이 갑자기 해왕의 명령 내지 조언에 의해 개발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수은을 이용한 거울이나 열기반부 같은 게 대표적이고, 대장장이들을 불러서 강철에 대해 강의를 했다는 일화도 의심을 사기 충분하다.
또, 당대 고려에서 알기 어려운 먼 곳의 지리에 대해서도 해박했다는 기록이 숱하고, 타국의 역사나 인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증거가 적지 않으니, 확실히 수상한 면모가 있다.
하나, 애초에 시간 여행이라는 게 가능한 일이 아님을 생각하고 살피면, 위에 나열해 둔 시간여행자라는 증거들도 얼마든지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해왕이 강철에 대해 잘 아는 건 화극의 일기에도 나와 있듯 가문의 비서를 통해 안 것이고, 그 외 여러 발명들도 그 과정이 뚜렷하지 않은 건 그만큼 비밀리에 취급해야 할 보안상의 이유 때문일 거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지리나 인물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우리가 과거의 세상이 폐쇄적이라고 단정한 탓에 그렇게 느껴질 뿐, 그 시절에도 느리지만 세계는 통하고 있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해왕이 늘 깊은 밤까지 연구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는 탐라실록의 기록은 해왕의 지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반증이고, 해왕의 신문물 중 장인이나 학자들과 오랫동안 연구하였다는 기록 또한 수두룩하다.
12. 이야깃거리
미남이다. 사실 당시에는 유약해 보이는 외모였다. 하여 동전에 해왕의 얼굴을 새길 때 일부러 근엄하게 고쳐 넣기도 했다.
철에 대한 비밀이 담긴 가문의 비서가 있었다고 한다. 혹자는 시간여행자의 핑계라고도 하는데, 과거 고려반도 남부 지역이 철기 문명의 요람이었음을 생각하면 철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남아 전수되었다는 건 상상하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죽을 고비를 참 많이 넘겼다. 화약 개발 중에 폭발로 배에 어린아이 팔뚝만 한 나무 파편이 꽂힌 적도 있고, 요동성에서 칼부림 당한 적도 있으며, 서해에서 조난당해 물귀신이 될 뻔한 적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전장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많이 입은 기록이 남아 있으니, 생각해 보면 환갑을 넘긴 것도 대단한 일이다.
심지어 벼락을 맞고도 살았다. 벼락을 맞은 것 자체는 기록상 진짜인 걸로 보인다. 다만, 단순히 벼락을 맞은 걸 넘어 벼락을 불러 그 기운을 받았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는 벼락 맞고 산 걸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미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벼락을 맞은 뒤 한쪽 팔에 벼락의 흔적이 남아 밤에 빛을 발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다.
유약해 보이는 신체에도 불구하고……. 대물이라는 기록이 있다. 물론, 정사가 아닌 야사의 내용이지만, 처녀 시절 엄청난 무인이자 냉정한 성품이었던 부인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하고 금슬이 좋았던 걸 생각하면…….
사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학살자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도 많지만, 사실상 정복지 안정화 작업으로 죽음으로 내몰린 자들도 수만 혹은 십수만에 이를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해왕에게 당한 곳이 많음에도 원한이 남은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래도 한 번 매질한 뒤 약을 잘 발라 준 덕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다.
13. 외국의 평가
해왕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레이 델 마르 꼬레’, ‘코리아니쉬 지쾨닉’, ‘로드 오브 씨 프롬 코리아’ 같은 표현은 유럽에서도 흔히 통용되고,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곳에서는 아예 우리말 발음대로 해왕이라고 말해도 통한다.
만약 해왕을 듣도 보도 못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그 사람이 무식한 거다.
다만, 유명한 것과 높이 평가하는 건 다소 다르다. 유럽 쪽에서는 해왕보다 고도왕을 높이 평하는데 아무래도 그들 앞에 등장하여 충격을 선사한 인물이 고도왕이기 때문인 듯하다.
(후략)
14. 총평
너무 다양한 평가가 존재해 항목을 분리함.
해왕 석몽린/평가 문서 참고
15. 대중문화 속의 해왕
소설이나 영화에서 해왕이나 해왕의 시기를 다룬 것은 수도 없이 많다.
해왕의 사후, 나본과 그의 아들이 지은 탐라세기를 시작으로 소설류의 문화 상품은 족히 수백 종에 이를 것이다.
(중략)
고려나 연방 외 외국에서도 해왕이 등장하는 문화 상품은 많은데, 아무래도 악당역으로 등장하는 비중이 제법 큰 편이다.
특히, 최근에 남중국의 한 개발사에서 만들어 큰 반향을 일으킨 다중접속역할전자유희(MMORPG) ‘협계’에 등장하는 끝판왕의 이름이 ‘해마(海魔)’로 해왕을 빗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재밌는 건 해왕을 시간여행자로 가정한 외국 영화가 의외로 많은데, 그런 영화들 중 제대로 흥행한 게 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역사적 인물을 대상으로 시간 여행 같은 환상을 꾸미려니 제대로 이입이 될 리가 없기 탓인 듯하다.
16. 관련 문서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