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50)
“할 수 있습니다.”
탁기가 열기를 뿜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가볍게 숙인 채 몽주에게 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을 이끌어 낸 질문은 어찌 보면 한심한 것이었다.
“그 여인들로부터 나를 지켜 줄 수 있겠나.”
질문 자체는 아닐지라도, 질문 속 여인들이 부인과 부인의 몸종이라는 점을 안다면 한심해지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가급적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지만 생각나는 게 없었다. 편지에 진심을 담아 전해 볼까라는 생각이 그를 고심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글 실력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내가 자신과 부모의 이름자나 쓸 정도의 수준이라는 걸 알고 나선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몽주든 탁기든 한심함은 걷어치운 채 진지하게 질의문답하였다.
몽주는 물론, 탁기 또한 앵도와 종옥의 실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탁기를 다시 부른 것은 한 달여 만이었다.
지난번 복속을 청할 때 몽주가 그에게 보인 반응은 알겠으니 기다려 보라 정도였고, 탁기 또한 사실상 초면인 사이에 곧바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지 않았던지 고분고분 따랐다.
사실 조금 더 두고 보면서 작은 일부터 실험 삼아 부려 볼 요량이었지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 큰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보자면, 탁기에서 처음 시키는 일이 상당히 큰일이었다.
다른 아닌 아내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무력 충돌에서 아내를 상대하는 것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아내를 상하게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버는, 어떻게 보면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탁기가 해낼 수 있을까. 몽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무예 시범을 보긴 했다. 지금 탁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열기는 그 시범의 여파였다.
애월루 남원에서 반 시진 동안 그가 보여 준 무예 실력은 몽주로 하여금 박수를 치게 만들 만했다.
턱이 빠져라 놀라지 않은 건 앵도와 종옥의 대련을 본 탓이었지, 그의 무력이 몽주의 눈에 차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나, 그렇다고 그의 실력이 두 여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순 없었다.
쉽다 어렵다, 혹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가늠하기에는 몽주의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이었다.
“믿겠습니다. 혹여 일이 일어난다면 더도 말고 딱 일각만 버텨 주십시오.”
“맡겨 주십시오.”
다행히도 탁기는 몽주의 청을 가벼이 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 다문 입술 안으로 이를 악무는 것이 턱 근육의 움직임으로 표출되는 걸로 볼 때, 외려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 또한 지난번 염탐 당시 앵도에게 당한 작은 부상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 갑시다.”
몽주는 앞장서 애월루를 나섰다.
* * *
“그자의 이름은 탁기. 소문으로는 대단한 무예를 갖춘 자라 합니다. 그…… 놈의 명을 고분고분 따르는 걸로 볼 때, 주종 관계를 맺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탁기 그자가 일전에 팔을 다친 적이 있다는데…….”
“내 비도에 첩객이 베인 때와 일치하겠지.”
주인이 말을 자르자, 종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앵도의 입가가 실룩이며 비웃음이 서렸다.
“아무래도 가주께서는 그자를…….”
“가주라고 하지 말랬잖아. 가주는 무슨…….”
“죄송합니다. 그…… 놈이 탁기라는 자를 데리고 서옥으로 오려는 모양입니다.”
“흥!”
앵도는 콧방귀를 뀌며 보이지 않는 곳의 남편, 아니, 그놈을 향해 적대감을 흘렸다.
오래 참는다 싶었다. 한 달이나 무시와 박대를 감수하기에 속으로 좀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밑바닥을 보일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앵도는 이미 그놈의 밑바닥을 알고 있었다.
아홉 살쯤이었다.
부모를 잃은 슬픔을 무예를 익히는 것으로 이겨 내던 그 시절,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있었다.
조부는 그 손들을 극진히 대했고, 그녀도 불러 인사를 올리게 했었다.
그때 손들이 데리고 온 사내 녀석이 하나 있었다. 나이가 예닐곱쯤 되어 보였는데, 희멀건 얼굴을 한 그 녀석은 그녀를 보자마자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앵도는 기분이 상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보다도 더 까맣던 어린 시절,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혀를 차는 자들을 적잖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나중에 후원에서 다시 수련 중일 때, 근처 담 위로 그 사내 녀석이 나타나더니, 그녀를 보며 ‘까마귀 계집’이라고 놀려 댔다. 심지어 한 번만 그런 것도 아니고, 몇 번이나 쫓아내도 다시 돌아와 놀려 대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다른 욕도 많았다. 마귀, 나찰, 도깨비…….
잊을 수 없는 치욕! 앵도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주먹이 절로 움켜쥐어졌다.
그 나쁜 사내놈의 이름이 몽린이었다.
그런 주제에 혼인 첫날부터 그녀를 보곤 예쁘다 하였다.
웃기는 소리.
앵도는 그 말에 일말의 기대도 버렸다. 변한 게 없는 자였다.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옛날처럼 골려 먹는 것이거나 목적이 있어 거짓을 꾸미는 것.
처음에는 놀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이나 버티는 걸 보며 따로 목적이 있어 참는 것이라는 생각이 짙어졌다.
목적은 뻔하다. 이 혼인의 특별함으로 인해 그놈의 집안으로 넘어갈, 자신에게 쥐어진 많은 재산이 그 목적일 것이다.
석 어른은 몰라도, 그놈은 그녀의 재산을 강탈하려 함이 분명했다.
뿌드득.
앵도의 이 가는 소리에 종옥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옥아.”
“말씀하십시오.”
“오늘 끝장을 보자꾸나. 피를 보아도 좋아.”
“……!”
종옥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어르신께서 노여워하실 겁니다. 어떻게든 참고 견디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토지는 이미 그…… 놈의 아비에게로 넘어간 상황입니다.”
“할아버님은 내가 설득할 수 있어. 자식은커녕 초야도 보내지 않았으니, 재산은 도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 해민이라는 자가 소문대로 정녕 신의가 있는 자라면 토지도 돌려주겠지. 그리고 옥아, 너무 걱정 마. 네가 한 일은 모두 내가 시킨 일이니 그로 인해 네가 다치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 줄게.”
앵도는 종옥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보내 주었다. 종옥도 고개를 숙이며 따를 것임을 피력하였다.
하나 종옥의 마음속에 번잡함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주인의 진심은 믿어 의심치 않으나, 그 다짐을 이루긴 어려울 것이다.
처음 새 가주에게 손을 쓰라는 주인의 명을 받들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했었다. 상전을 능멸한 강상죄(綱常罪)를 저지른 노비에게 떨어질 벌은 그뿐이었으니.
서옥이 연재장 기슭과 붙은 덕에, 그녀의 손속에 졸도한 새 가주를 업어 가는 걸 타인에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당사자인 가주가 알고 있으니 자신은 곧 죽은 목숨이라 여겼던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정신을 차린 가주는 그녀를 주인의 칼일 뿐이라 하곤, 죄를 물으려면 사람에게 해야지 도구에게 할 수는 없다 하며 오히려 안심시키는 말을 남겼다.
물론 이후에도 계속 주인을 대신하여 가주를 박대하자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것이 눈에 보이긴 했지만, 이미 종옥은 새 가주에게 놀랄 만큼 놀란 상태였다. 보살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 황망한 곤란을 한 달이나 참아 낸단 말인가.
하나 그녀가 새 가주에게 감동하는 것과 달리, 주인의 지아비에 대한 적대감은 점점 커졌다. 하기야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쓰는 것도 아니고, 틈이 날 때마다 반어적으로 주인의 외모를 비하하니 그럴 만도 했다.
가끔 새 가주가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어나. 가서 그놈이 어찌 나오는지 두고 보자. 그놈이 데려온 자를 박살 내고 그놈의 목에 칼을 대면 이 우스꽝스런 혼인도 끝나겠지.”
잇소리가 섞인 분기를 말로 토한 앵도는 먼저 걸음을 옮겨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슭 아래, 나무 사이로 서옥이 보였다.
* * *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노을도 사라질 참인 저녁 시간, 이미 불 밝힌 서옥의 마당에서 몽주는 우습게도 현대의 어느 영화 대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을 호위할 무사를 데려가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럴 것이기에 탁기를 데려온 것이지만, 그래도 앵도가 최악의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하나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뽑아 들었고, 살기를 뿌리는 걸 마다치 않았다.
“…….”
챙! 채챙!
몽주의 주변에서, 정말 아주 가까운 근처에서 금속음이 연신 터지고 있었다.
비수가 날아들고, 연검이 휘어져 베어 왔다. 그걸 묵직한 도가 연신 걷어 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거운 도(刀)로도 가벼운 검의 연이은 공격을 막아 내는 탁기의 빠른 손놀림에 진심으로 고마웠다.
꿀꺽.
긴장으로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탁기가 막아 주고 있지만 그 섬뜩한 날붙이들이 몸 주변 겨우 한 뼘, 혹은 몇 마디 떨어진 곳까지 쇄도하는 느낌이란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의 몽주로선 버티기가 어려웠다.
현대에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병기 간의 겨룸은 다 가짜다. 날붙이에 당하지 않아도 정신이 만신창이가 되는 그 기분을 가짜가 일말이라도 표현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첫 천몽에서 멀찌감치 부하를 부려 실행했던 그 엄엄한 전투도 살벌했었지만, 살기와 살초의 목표로서 직감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살기와 살초가 다름 아닌 아내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게 몽주의 마음을 한층 무겁게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지 않은가.
뭐가 못마땅한지 모르겠지만, 아니, 추측하는 건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검에 살의를 담아 휘두르다니…….
“큭!”
문득 들린 탁기의 신음에 몽주는 멍해지던 정신을 되잡았다. 탁기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몽주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먼저 막느라 자기를 향한 공격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고, 그걸 눈치챈 종옥이 기습적으로 탁기의 종아리를 걷어찬 것이었다.
그걸 보자니, 대체 종옥 저 계집은 뭘 믿고 저렇게 거침이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제 주인의 명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노비의 신분이거늘, 상전을 능멸하다 못해 가해하려고 난리라니.
차후의 삶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년인 듯했다.
상황이 호전될지라도 종옥은 크게 혼을 내야 할 듯했다. 비록 그녀가 앵도의 칼로서 한 짓이지만, 독이 스민 칼은 다시 담금질을 하든 아예 폐기하든 처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몽주는 탁기를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꽤 아픈 게 분명하건만, 탁기는 그 와중에도 몽주의 어깨에 닿을 뻔한 앵도의 검을 그의 도로 막아 내기까지 하였다.
기대 이상으로 믿을 만한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남편을 베려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 그러나 전혀 다르게 살벌한 상황에서, 대체 뭘 보았기에 자신을 따르고 지키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언제고 그에 관해 진지하게 대화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몽주는 지금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부인, 잠시 손속에 사정을 두고 내 말을 들어 보시오. 혹여 내가 한 언행 중 부인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이 있다면 먼저 사과드리겠소. 하나 그 모든 것에 진심 아닌 것이 없다는 건 부처님 앞에서 맹세할 수 있…….”
말을 하는 중에 몇 번이나 멈칫했다. 그때마다 여인들의 검날이 몸에 닿을 듯 가까이 쇄도했기 때문이며, 그 공세를 탁기가 막아 내며 터지는 금속음에 놀란 탓이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몸이 절로, 반사적으로 경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스악!
한데 첫 말을 막 마치려 할 때, 문득 피육(皮肉)이 갈라져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핏방울이 몽주에게까지 튀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비라도 내릴 참인가 싶었지만, 이내 탁기의 왼팔 상부가 붉게 물들어 가는 걸 보고 그가 베였음을, 종옥이 비수로 그었음을 깨달았다.
그보다 앞에 있기에 탁기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스듬히 엿볼 수 있는 그의 입가가 한껏 일그러져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의 고개가 고정된 방향으로 볼 때 종옥을 노려보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짧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당한 참이었으니, 분노가 솟구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하나 그는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그의 넓은 등은 몽주의 요처를 막아 주는 영원한 벽인 것처럼, 모든 위험과 안전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그 자신이 아닌, 몽주에 두고 있었다.
대신, 몽주가 화가 났다. 피를 봤으니까.
직접 흘린 피는 아니지만, ‘부부 싸움’을 이런 지경까지 확대하는 아내의 심보에 태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종옥의 손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애초에 무인을 대동한 것이 자신이라 할지라도, 몽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분기탱천한 몽주는 얼굴 바로 근처에서 검과 도가 부딪쳐 불똥이 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한걸음 다가가며 힘껏 소리쳤다.
“자내가 무인이라면, 무인의 도리를 따르시오!”
“…….”
험상한 가운데에서 두려워하면서도 설득조의 말을 잇던 몽주가 갑자기 고함을 쳐서 놀란 탓일까. 칼부림들이 일순 멈춰졌다.
갑작스런 적막 속에서 크게 숨을 고른 몽주는 이어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 전에 사람의 도리를 지키시오. 자내에게 검을 전수한 분들께서 이런 일에 검을 뽑으라, 기분 내키는 대로 휘두르라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오.”
“…….”
“어찌 부인은 남편 되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 것이오. 자내의 적개심과 박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처럼 연신 대화를 청하는 것을 보면, 내가 어떤 연유로 자내의 심기를 해쳤다 한들 내 해명 한 마디는 들어도 되지 않겠소? 나는 자내를 맞이한 뒤로 늘 진심으로 다가가려 했소. 우리의 혼인이 비록 연정에 의한 바가 아니고, 집안 간의 약속이며, 유산상속의 안전을 목표한 것이기는 하나! 그 어떤 명분이 뒤에 있든 인륜의 대사이며, 자내와 나의 인생에 있어 거대한 영향을 줄 전기임에 틀림없거늘, 그 시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칼을 손에 쥐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자내의 잘못이오. 그러니 내 부인에게 요구하겠소. 그 잘못을 고치시오!”
잠시 말을 끊었지만 앵도는 대답도, 대응도 없었다. 그저 입모(笠帽) 아래로 보이는 입술만을 다지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몽주의 기세에 눌린 듯, 예상외의 모습에 놀란 듯한 표정이었지만, 정확한 심정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몽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의 지아비요. 내 비록 약하고 자내보다 어리다고는 하나, 만인 앞에서 혼서를 밝힌 서방이란 말이오. 또 나는 데릴사위가 아니오. 데릴사위라고 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받아 주진 않을 것이오. 나의 인내심은 한계가 있고, 그 한계 또한 그리 크지 않소. 이미 말했듯 이 혼인이 그대와 내 뜻과는 상관없이 성사되었지만, 파혼은 내 뜻에 따를 수 있음을 명심하시오. 처가의 재산이야 나라에 뜯기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을 것이오. 다만, 자내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소. 검을 거두고 나와 일각의 대화를 하시오. 원치 않는다면 이대로 이 인연은 끝날 것이고, 자내의 가문과 우리 가문 또한 결별할 것이오.”
그쯤에 몽주는 이미 탁기보다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말을 마치자마자 두 여인 사이를 지나 서옥의 신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데 그 순간에 앵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한 가지 묻겠어요! 까마귀 계집이라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돌아서 앵도를 직시한 몽주는 정말 모르는 말이기에 당당히 되물었다. 그러자 앵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듯 날 선 시선을 던졌는데, 그녀의 표정에 새롭게 원망의 감정이 더해진 것 또한 보였다.
“……오래전에 당신이 내게 했던 말을 잊은 겁니까?”
“내가……? 미안하지만 기억에 없소.”
오래전이라 하니 혼인 이후를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에 어렴풋이 남은, 어릴 적 앵도를 보았던 때를 말하는 것일 터인데, 몽린의 기억에 남은 것 중 구체적인 건 없었다. 그저 앵도가 못생겼다는 감상만 있었을 뿐.
그래도 까마귀 계집이라는 것이 당시 몽린이 그녀에게 던져 상처를 준 말이라는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정말 그랬다면, 비록 몽주가 아닌 몽린이 저지른 일이지만, 조금은 미안한 맘이 들었다.
“……차분히 이야기를 할 시간을 주시오.”
“…….”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앵도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직후, 그녀가 먼저 몽주를 스쳐 서옥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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