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58)
고얀지고…….
왕은 실수인 양 자신의 몸을 만지는 궁녀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실소했다.
무엄하게도, 옷을 입히는 일을 하는 천한 여인이 손끝으로 연신 왕의 욕구를 자극하려 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노하여 궁녀를 벌할 마음은 없었다. 이 또한 대비마마께옵서, 어떻게든 후사를 잇게 하려는 마음에서 사주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불행히도, 색기 어린 눈매를 가진 궁녀의 자극에도 왕의 양기(陽氣)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으니, 그의 마음속에서 여인에 대한 흥취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이 천한 계집 따위가 아니라, 그의 침소 방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비빈(妃嬪)들을 찾았을 것이다.
하나 그것들은 다 장신구며, 노리개 같은 것들에 불과하지…….
간간이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며 시선으로 매달리는 듯한 그 멍청하면서 동시에 욕심 많은 얼굴들은 마치 지겹고 귀찮은, 그리고 동시에 무섭기까지 한 마구니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든 왕자 하나를 생산하여 권력을 손에 넣고 싶어 안달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죽은 공주의 반만큼만 닮은 년이 있었다면…….
왕후가 그리웠다. 고려를 지배하는 자신을 지배했던 여인. 왕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고 꾸짖음과 함께 채찍질까지 했던 제국의 공주. 동시에 누구보다 자신의 연약한 본성을 꿰뚫어 보고, 말과 몸짓으로 심약함을 단련시켜 주었던 진정한 반려.
호호탕탕했던 노국공주를 생각하자 왕의 양기가 꿈틀거렸다. 단 한번만 그녀를 만질 수만 있다면, 그녀의 발가락만이라도 핥을 수 있다면, 남은 생명을 버려도 여한이 없을 것을…….
그녀에 비하면 다른 세상천지 모든 계집들은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하여, 왕은 차라리 남색(男色)을 구하였다. 간악한 속셈을 가진 계집들보다야 차라리 음지에 머물기를 자청하는 남아들이 가까이 두기에 훨씬 나았음이다.
문득 궁녀의 손길이 과감해졌음을 느꼈다. 왕은 그녀를 다시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다시 볼 수 없는 공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또, 어제 품었던 자제위위(子弟衛衛)를 생각함 때문에 그런 것을 두고, 자신의 유혹이 통했다고 여긴 멍청한 년이었다.
찰싹.
왕이 손을 휘두름에 궁녀가 얼굴을 감싸 쥐고 쓰러졌다가 서둘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물러가라.”
“하, 하오나, 아직 채…….”
의전(依典)은 대충 정돈하였으나, 수염과 손톱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는 말일 것이다.
“꺼지라 하였다.”
하나 왕의 음성은 차가웠다. 오만한 짓거리를 한 궁녀를 포함하여 상의국(尙衣局) 소속 궁녀들이 서둘러 물러났다.
직후, 영도첨의사사가 대기하고 있음을 알리는 내관의 음성이 들렸다.
“들라 하라.”
“어제도 자제위를 침소에 들이셨던가.”
침전 밖에서 대기하던 신돈의 물음에 내관이 주위를 슬쩍 살피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 모니노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실 생각이신가.
신돈은 훗날의 풍파가 연상되자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손만 뻗으면 안길 비빈들과 궁녀들이 많음에도 금상께서 남색을 찾으시는 이유를, 그는 모니노의 후계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라 여기고 있었다.
문제는 모니노의 생모가 천한 계집인 데다 궁의 무수리조차도 아닌, 자신의 시비였다는 점이었다.
훗날 이를 두고 얼마나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올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특히나 모니노의 혈통에 대한 의심까지 있을 것이고, 그건 신돈 자신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트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불안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문득 침전의 외문이 열리며 나인들이 빠져나왔다. 평소보다 의전이 빠른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신돈은 내관에게 그가 밖에 있음을 알리게 하였다.
“들라 하라.”
상의 허락과 함께 신돈이 침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제조상궁이 차와 다기를 들고 따랐다.
잠시 후, 신돈은 임금을 앞에 두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 물론 한 상에 앉아 마신 것이 아닌, 임금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공손히 무릎을 꿇은 채 작은 다기만을 앞에 두고 마시는 것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불러 스승님을 불편하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천둥 번개가 치고 호우가 몰아치는 한밤중이더라도, 부르신다면 어김없이 올 것이옵니다.”
“하하,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역시 스승뿐이십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호출한 것을 두고 껄껄 웃음을 흘린 왕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른 말을 꺼내었다.
“그거 아십니까. 요사이 상소문이 확연히 줄었습니다. 언제는 스승을 참하라 난리치던 자들이 이제는 입을 다물고 있기도 하지요. 허구한 날 듣던 소리를 안 들으니, 내심 섭섭할 정도입니다.”
“…….”
자신을 죽이라는 상소문이 없는 것이 섭섭하다는 임금의 말이 신돈에게는 섭섭했다. 하나, 그 농담 같은 말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이미 깨닫고 있는 신돈은 그 섭섭함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대체 어찌하신 겁니까. 이 고려를 쥐고 있는 그자들은 마음이 좁쌀과 같고, 성미는 이리와 같아서 자기들의 이익에 반하는 스승에 대한 참소를 쉬이 포기할 자들이 아닌데 말입니다.”
“소신이 주제를 알고 지난날의 오만함을 버리니, 그들이라고 언제까지나 험담을 늘어놓을 수야 있겠나이까.”
“하하, 그야 그렇기도 하군요. 세상에 누가 있어 국정에 자산을 남김없이 쏟아붓는 이가 있을 것이며, 그 많은 공을 앞세우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정 스승께서는 고려 도당의 본보기요, 기둥이십니다. 과인은 예전부터 그리 알고 있었지요.”
“…….”
신돈은 왕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숙였다.
하기야, 임금의 흉심에 서서히 커져 가는 자신에 대한 견제심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금상이 허한 조하(朝賀)와 의위(儀威)를 자진하여 폐함은 물론, 전통의 세족들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재산마저도 모조리 바친 것도 사실이었다. 또 임금이 내린 임무에 충실한 정도를 넘어 그 이상으로 해내기도 했다.
그러니 그가 한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빗발치던 상소가 줄어든 건 신돈의 대답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경시감을 세우고 3경 1부의 물산을 손에 쥔 것에 더해, 고려 내 대보(大寶) 네 곳의 문권을 손에 넣고 사원을 중심으로 세족과 유자들까지도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 만든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사실 왕 또한 신돈의 대답이 전부라 여기지는 않았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지만, 정적들이 쉬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신돈이 약점을 잡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좋다. 왕은 돌아가는 사정이 나쁘지 않다 여겼다. 오만하던 시절의 신돈조차도 자신의 흉심을 잘 읽을 줄 알아 왕으로서 기꺼웠는데, 이제 오만함을 버리고 정적들을 다루는 능력까지 얻었으니, 이제껏 그러했듯 그를 통해 국정을 쉽게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신돈은 비록 상황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자신의 지지가 없으면 끈 떨어진 연의 신세가 될 자이니, 충분히 쉽게 다룰 수 있다 믿고 있었다.
“과인은 늘 스승께 의지하고 있음을 잘 아실 겁니다. 지난번 장궤를 받아 보고 참으로 흡족했지요. 문무백관 중 누가 있어 그처럼 많은 양초를 모을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이번 정벌에서 얻고자 하는 바를 얻는다면 단연컨대 일등 공신은 스승이실 겁니까.”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
신돈은 고개를 연거푸 숙이며 왕의 말에 감사를 표하였다. 그 또한 임금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본래 기대했던 바를 월등히 넘은 양초를 모은 것은 물론, 비록 잡병이라고 하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장정들을 모아 북방으로 향하게 한 것 또한 그의 공이라 할 수 있었다.
징집에 크게 성공한 것은 신돈이 가산을 바쳐 나라와 정벌군에 쓰게 한 것에 힘입었으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공이 그처럼 애를 쓰는데, 다른 관원들도 무어라도 바쳐야지 결코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당에 나오는 이들 중 상당수가 고려 내에 내로라하는 세족 출신인 바, 그들이 못마땅하나마 내놓은 재산과 가복을 긁어모으니 수천의 병력을 꾸릴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양초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돈의 경시감은 물산을 관장하여 물류를 간파했으니, 양곡을 끌어오는 것이 그 전에 비해 몇 갑절은 손쉬워졌다.
게다가 그 녀석이 제법 큰 군량을 가져다 바치기도 했으니…….
신돈은 문득 떠오른 얼굴 때문에 그만 실소를 흘려야 했다.
“어찌 웃으십니까. 무슨 재미난 이야기라도 떠오르신 겝니까.”
왕의 물음에, 신돈은 먼저 실례를 범한 것에 사과를 올렸다.
“근자에 인연이 닿은 장사치가 하나 있어, 그를 문득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나오고 말았사옵니다.”
“장사치?”
“그러하옵니다. 아직 채 약관에 이르지 못한 젊은이이며,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기도 합니다. 다만, 나름 영민함이 있어 소신 또한 약간의 도움을 받았사옵니다.”
“허허, 스승께서 도움을 얻었다 하니 그자에 대해 궁금함이 생기는군요. 대체 어떤 자이기에 스승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겝니까.”
“아직 전하의 의중에 들 만한 자는 아니옵니다. 저 또한 아직 시험코자 할 뿐입니다.”
“시험이라면 혹시…….”
“그렇사옵니다.”
“허허, 스승께서도 짓궂은 면이 있으십니다. 듣자 하니 아직 어린아이인 듯한데 죽을 수도 있는 자리로 보내시다니요. 하하하! 하긴 그렇지요. 사람을 쉬이 믿어서야 되겠습니까. 모름지기 크게 믿을 자는 죽음의 고비에 넣어 두고 그 사람됨을 가늠해야 하는 법이지요. 으하하하!”
“…….”
과하게 즐거워하는 임금을 보며, 마주 웃던 신돈은 문득 그 웃음의 정체를 깨닫고는 표정이 굳었다. 물론 직후에 다시 표정을 관리하였으나 속마음은 편치 못했다.
신돈이 언급한 장사치를 두고 한 임금의 웃음과 그 웃음 사이의 말들은, 임금이 자신에게 한 것에 대한 말과도 같았다.
그 또한 축출의 위기 앞에서 겨우 살아나 왕의 신임을 다시 얻었음을, 왕은 신돈이 시험하고자 하는 장사치의 일에 비교하며 웃음을 터뜨린 것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신돈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의 찻물을 삼켰다. 전라도 패주(貝州, 보성)지방에서 공납으로 올라온 최고급 찻물이 문득 쓰게 느껴지고 있었다.
누구든 죽을 수도 있는 자리에서 산다면 운명을 역전하여 중용(重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 * *
바람이 차다. 대기 중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얼음 알갱이가 있어, 그것들이 바람에 밀려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대설(大雪)에 이르러 북방에 닿으니 목화솜을 넣어 기운 옷을 세 겹이나 입었음에도, 그래서 겉보기에 두 배쯤 덩치가 커졌음에도 따뜻함은커녕 뼈마디까지 시릴 지경이었다.
참고로 목화는 그 유명한 ‘목화씨 밀수범 문 모씨’ 이전에도 이미 고려에서 재배 중이었다. 다만 그 품종이 열대에 적합하여 고려 땅 남부에서만 조금 생산될 뿐이라 몹시도 비쌀 뿐이었다. 물론, 부자 집안의 몽주에게는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다.
그렇게 비싸게 마련한 솜옷의 성능이 여러 겹을 껴입어도 현대의 패딩 점퍼 하나만도 못한 것에 투덜대며, 몽주는 압록 북쪽 기슭에 쭈그리고 앉아 부교 위를 위태롭게 건너는 수레와 병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강(渡江)의 편의를 위해 부교를 설치한 곳은 다름 아닌 위화도(威化島). 미래의 역사를 알고 있는 몽주의 입장에선 대단한 역사의 현장에 있는 셈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직 오지 않은 역사이며, 어쩌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역사니, 오직 그에게만 의미 있는 장소였다.
이 주변 모든 이들에게 의미 있는 건 저 어마어마한 양의 양초일 뿐이었다.
저 수레들 중 백 수레는 내 것이겠지.
줄지은 수레들을 보면서 몽주는 아까운 마음을 가졌다. 경상도 상주를 비롯하여 남부 몇 곳에, 석 호장이 세를 받는 대신 창고를 지어 구휼미로써 보관하고 있던 양곡들 중 무려 일천 섬을 군량미로 내놓았다.
석 호장을 설득하여 그러기로 결정했을 때는 아까운 마음이 없었는데, 막상 그 어마어마한 양을 눈으로 셈할 수 있게 되자 그런 마음이 든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몽주는 이번 천몽에서도 제법 괜찮은 집안을 배경으로 시작한 셈이었다. 백 수레 분량의 양곡을 바쳐도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부자가 아닌가.
물론 그거야 이미 처음부터, 거의 2년 전쯤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문서로 보거나 말로 전해 듣는 것과 눈으로 확인하는 것 사이에서는 체감상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에서야 남양 석씨 가문의 재력을 새삼 깨달은 것이었다.
그렇게 황소 한 마리와 징집된 장정 4인이 수레마다 붙어, 밀고 끌며 부교를 지나는 걸 보던 몽주는 문득 시전 상황에 생각이 닿았다.
이미 한양 별시에 시전 자리를 얻으면서, 비노와 선로의 공식적인 생산과 판매가 시작된 지 오래(?)였다.
향희를 포함한 노기(老妓)들을 중심으로 애월루의 기생 예닐곱 명이 몽주의 집과 시전의 작업장에서 비노와 선로를 생산하고 있었고, 석삼이가 다른 솔거노비 둘과 함께 이를 감독하면서 시전에서의 판매를 담당하고 있었다.
장사는 아주 잘되고 있었다. 한양부 내에서의 수요야 두말할 것 없고, 다른 별시의 상인들은 물론 지방으로 상행하는 보부상들까지도 재고를 확보하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비노와 선로는 본래 생각했던 제값 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살짝 문제였다.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게 장사가 잘되고 있고, 고려 내에 좀 사는 집안 여인들 중 비노와 선로를 쓰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가 타고 있으니, 자연히 힘깨나 쓰는 권세가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직은 몽주가 특별히 선정하여 비노와 선로를 값싸게 밀어주고 있는 몇몇 고관댁 부인들이 편의를 봐주고 있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비노와 선로를 바라는 여인들이 많아질수록 그런 차별적인 지원이 오히려 투기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여 일단 몽주가 얻는 수익의 절반을 뇌물로 뿌리게 함으로써 고관들의 개입을 막는 식으로 무마하고 있긴 하나, 비노와 선로의 공급량을 서둘러 늘리지 않고서는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에 몽주는 자신이 한양부에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북방에 있었고,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먼 상태였다. 물론, 한양부로 돌아가는 건 더, 더 먼 상태였고.
그나마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그가 한양부 별시 전수직장 서리라는 점이었다.
한미하다는 표현도 아까울 만큼 낮은 직책이나, 영공 신돈이 꽂아 줬다는 것 자체가 지위의 낮음을 감쇄하고도 남았다.
적어도 그것이, 설령 당장 몽주의 시전을 어떻게 해 볼 마음이 있는 권세가들을 주저하게 만들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문득 뒤쪽에서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는 그렇게 챙겨 입고도 추워서 엄살인 겐가. 다른 이들은 홑겹에 지푸라기 옷을 입어도 당당한데, 자네는 어찌 그리 웅크리고 있는 겐가. 그렇게 추우면 저기 관원들을 위해 마련한 임시 군막이 있으니 거기 가서 있게.”
그 목소리, 한양 별시 전수직장 오 아무개의 말에 몽주는 속으로 실소하였다. 모난 말투에 비해, 군막에 가서 쉬라는 뜻 자체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별시 전수직장은 몽주를 몹시도 미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몽주가 그의 서리로 임명된 것과 동시에, 복마군을 따라 북방으로 군종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명령에 몽주도 함께 가라는 명도 있었기에, 그는 눈치 좋게도 몽주 때문에 자신이 군종하게 된 것이라 추측했으니 충분히 미울 만도 했다.
하나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과 동시에 그는 몽주를 무시할 수 없었고, 심지어 고마워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몽주를 그의 서리로 임명케 한 자가 영공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지 못했고, 몽주가 그에게 뇌물을 크게 써 주었기에 고마워하기도 한 것이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영공의 낙하산’ 몽주가 서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만불손하게 행동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오히려 뇌물을 주고 공손한 태도로 임하니 절로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조만간 도강이 끝날 듯하니, 굳이 군막에 찾아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흠흠, 뭐 그렇다면야 마음대로 하게.”
딴에는 몽주를 위해서 권한 것인데 거부당하자 괜히 헛기침을 하며 멀어져 갔다.
몽주는 또 피식 웃으며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앵도는 잘 있으려나. 따라온다고 난리를 치는 걸 겨우 떼어 놓고 왔는데, 날이 추워질수록 앵도의 따스한 가슴팍이 그리워졌다.
도강이 완료되고 얼마간의 휴식 시간마저 지나자, 군막 쪽에서 복마군 겸 지원군을 이끄는 홍인계 비장(洪仁桂 裨將)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출발하자는 명이었다.
압록강을 건너고, 진창길과 눈길 위를 걷기를 보름이 지나서야 복마군은 목표하였던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렀다. 그곳은 요동성에서 이틀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고려의 정벌군 주둔지가 바로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나 막상 도착해 보니 주둔지에 남은 군사는 소수에 불과했었다. 이미 요동성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한 것이었다.
그에 복마군을 이끈 홍인계 비장이 전공을 세울 기회를 잃었음에 크게 한탄하였다.
몽주는 현대에서 받아 본 보고서에서 그가 요동성 점령에 있어 기병을 이끌고 크게 활약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쉽겠군. 복마군을 무탈하게 이끌어온 것 또한 군공이겠지만, 전장에 나아가 적을 물리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닐 테니, 홍인계 비장으로서는 장수로서 이름을 높일 기회를 잃은 셈이었다.
그나저나 요동성 점령에 문제는 없겠지.
빈 군막을 받아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쉬던 몽주는 점령전의 결과가 다소 걱정되긴 했다. 본래 역사에서 동녕부의 이원경(李原景)과 처명(處明)의 투항을 통해 비교적 손쉽게 요동성을 얻었던 고려군이었다.
“하긴 그자들을 투항시킨 이성계는 있으니까, 뭐…….”
어차피 몽주가 이번 전쟁에서 뭐라도 할 건 없었다. 이제 조금 쉬다가 양초의 하적을 지휘하여 일을 마친 후, 냅다 고려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후, 주둔지 내 창고에 가져온 양초의 하적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반쯤 작업이 진행되었을 때쯤, 몽주가 곧 따뜻한 남쪽 나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뭉클뭉클 솟아날 바로 그때, 전령이 주둔지로 달려들었다.
“승전이오! 요성이 문을 열어 항복하였고, 기사인테무르의 목이 잘렸소!”
전령의 고함 소리가 있은 후, 주둔지 내 함성 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천세, 천세!
그 사이로, 몽주도 함께 손을 들었다 올리며 천세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원래의 역사보다 더 대단한 승전인 것 같다는 판단을 검토하느라 바빴다.
현대에서 확인한 역사적 사실에서, 요성(요동성)은 고려군의 공격에 점령당한 것이지 항복한 것이 아니었다. 또, 기사인테무르는 살아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었다. 그 때문에 요동성 점령 직후 밀직부사(密直副使) 배언이 지금의 센양 근처인 석상을 공격하는 무리도 감행해야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더 나은 승전을 거둔 것이다. 이런 결과가 장차 요동성 수성에 어떤 영향을 줄…….
“서리 나리, 하역하던 건 어찌할깝쇼?”
“일단 정지…… 아니, 도로 싣게.”
굳이 주둔지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요동성으로의 이동 명령이 있었다.
사흘 후에 도착한 요동성은 과연 항복한 것이 확실한 듯, 겉으로 보기에 전투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곳에서 다시 하적 작업을 하며 군졸들로부터 어찌 된 것인지를 확인해 보았더니, 이성계가 동녕부의 요격군 장수 처명을 투항시킨 것까지는 같으나, 그 후가 달랐다.
투항한 처명이 요성에 항복을 권하자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기사인테무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동녕부를 석권하고 있던 김백안이 그의 목을 잘라 바치며 항복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김백안은 항장으로서 대우받는 걸 넘어, 본디 고려인으로서 공신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소문마저 있었다.
원래 점령 후 붙잡혀 죄인으로 끌려가다 지용수(池龍壽) 원수에 의해 참해졌던 자였으니, 김백안의 운명도 많이 바뀐 것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고려군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여 요동성을 점령하였고, 기사인테무르의 죽음으로 인해 주변 지역의 불온한 움직임도 잠재우게 되었다.
애초에 역사적으로 추정한 5만 군세보다 약 1만 5천명이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까지 생각해 보면, 요동성 방어력은 본래 역사의 기록보다 거의 갑절은 더 나은 상태라 할 수 있었다.
몽주는 이러다가 정말 고려가 요동성을 사수하는 데 성공하는 것 아닌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하였다.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벌써부터 너무 많이 바뀌는 것에 대해 걱정하였고, 현대 한국인들 중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요동 땅을 얻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기대하였던 것이다.
물론 어찌 되건 몽주가 개입할 상황도, 그럴 만한 곳도 아니었다. 삼 일이 미뤄졌지만, 양초의 하적 작업을 마치면 그는 한양으로 발걸음도 가벼이 돌아갈 것이다.
“서리 나리, 홍 장군께서 찾으십니다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부름이었다.
몽주는 애써 그 예감을 털어 내려 노력하며 서둘러 홍 장군에게로 걸음 하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말 한 마디 나누기는커녕 눈길도 못 받았던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왜 부르는 것일까. 그래, 아마도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일 게다. 홍 장군 앞에 복마군을 도운 관원들이 모여 있어 수고 많았노라 한 마디 해 주려는 것일 게 분명…….
“자네가 석몽린인가.”
“……그렇습니다.”
홍인계 비장의 군막에 다른 복마군 관원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몽주의 이름을 정확히 불러 물었다. 그것이 몽주로 하여금 한결 더 불안하게 하였다.
“영공 저하와는 어떤 인연인 겐가.”
“……그저 인사를 두어 번 드렸을 뿐입니다.”
몽주는 겸양하여 고하였다. 그 묻는 저의가 궁금했고 걱정스러웠으나, 그가 알기로 홍 장군은 신돈과 척을 진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신돈과의 인연이 있다 하여 해코지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대답을 들은 홍 장군의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그건 어떻게 봐도 비웃음에 가까운 것이라 몽주는 속으로 가슴이 철렁하였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저하께 미운털이 박힌 모양인 듯하군.”
“……?”
“영공 저하께서 특별히 영장(令狀)을 내려 자네를 바로 귀환시키지 말고, 다음번 복마군을 따라 귀환하게 하라 하셨네. 또 자네를 군량 창고를 지키는 무관으로 임명하라고도 하셨지. ……이보게, 듣고 있는 겐가?”
듣고는 있었다. 다만 눈앞이 컴컴해졌을 뿐이었다.
잠시 후, 홍 장군 앞에서 물러난 몽주에게는 하나의 직책이 생겼다.
정8품의 산원(散員). 봉직의 명분은 복마군의 행차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었고, 주어진 임무는 이미 들은 대로 군량 창고 방위였다.
정8품이라, 나름 출세한 셈인가.
몽주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다.
신돈,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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