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59)
몽주가 꿈에서 돌아온 지 사흘.
이제는 다급한 마음도 다소 가라앉았다. 하나 그만큼 피로가 쌓인 시간이 흐르기도 했으니, 몽주가 재상, 두신과 함께 ‘놀이’를 하는 회의실 내부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쌓이다 쓰러진 책들과 너저분하게 흩어진 자료들, 그리고 열심히 돌린 머리와 육체에 대한 보상이었던 식사와 간식의 잔해까지.
그중 테이블 위에는 화이트보드가 뉘여 있어, 그 위에는 모르는 이가 얼핏 보면 대체 뭘 그려 놓은 건지 모를 그림이 무수한 숫자 및 문자와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것은 요동성의 단면도.
‘ㅁ’자 외성의 좌측 아래편에 ‘ㄱ’자로 벽이 쌓여 작은 ‘ㅁ’자의 내성을 이루고 있고, 내성 안에는 이 층의 구성(舊城)과 삼 층의 주성(主城)이 나란히 있으며 내성의 동과 서, 그리고 외성의 동과 남에 각각 성문과 방어 시설을 겸한 누각이 설치된 성의 모습.
산원으로 임명된 충격에서 벗어난 후, 꿈에서 깨기 전까지 고려에서 보낸 사흘 동안 요동성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머릿속으로 암기한 요동성에 대한 정보를 그 지도에 쏟아 낸 것이었다.
“일단 인정할 건 인정하죠. 지금 이 시점, 나하추의 침범이 며칠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기기묘묘한 전략을 쓰거나 현대의 지식을 동원한 신무기를 이용할 방법은 없습니다.”
재상은 눈이 뻑뻑한지 눈매를 연신 문지르며 소전제를 깔았다. 그러자 두신이 근육이 불끈거리는 팔짱을 풀며 소전제에 추가하는 발언을 이었다.
“전수직장 서리라는 직위든, 정벌군의 산원이라는 직위든, 고려 정벌군의 전략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 또한 없겠지요.”
재상과 두신이 각각 제시한 소전제는 분명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소전제를 대전제와 결합하면, 즉, ‘요동성을 사수한다.’는 것과 맞대어 생각하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하고 냉정했다.
“따라서 몽주 씨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번에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혹여 군량 창고에 불이 나는 걸 막는 정도만 열심히 하고, 그 후에는 뭐, 기도나 하는 수밖에 없죠.”
재상의 시니컬한 결론에 몽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잠에서 깬 후 꼬박 나흘 동안 자료를 뒤지고 골머리를 앓으면서 세 사람이 고심을 했건만, 결론은 그렇게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몽주의 모습을 본 재상이 실소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이미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최선은 대전제를 바꾸는 겁니다. 요동성을 지키든 말든 일단 나는 살자, 로 말이죠.”
물론, 살 것이다. 몽주가 원하는 사수는 죽을힘을 다해 지키자는 것이지, 자신을 희생하여 지키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래도 요동성을 지키고 싶어요.”
그럼에도 결국 몽주가 고집을 피워 한 말에,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시 원점이 되었다.
재상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턱을 쥐어짜듯 잡았고, 두신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두 사람에게 말했던 것이지만, 몽주는 진심으로 요동성을 지켜 내고 싶었다.
처음 요동성에 입성하고 양초를 하역할 때만 해도, 요동성을 점령하여 지켜 내는 것에 호불호가 없었던 몽주였으며, 내심 요동성을 지켜 역사와 큰 궤에서 달라지는 걸 바라지 않는 마음도 컸다.
하나 사흘간 요동성에 머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 된 이유를 굳이 꼽자면 두 가지였으니 하나는 요동성에서 바라본 드넓은 대지에 대한 감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성계와의 대화를 통해 엿본 지휘부의 의지였다.
산원 임명의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 요동성 외성의 서문 누각에 올랐을 때, 몽주는 보고야 말았다. 요동성에 딸린 영토가 얼마나 드넓은지를.
요동성에서 동쪽이 아닌 서쪽과 북쪽,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지평선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끝도 없는 평야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미 이전 천몽에서 초원의 진면목을 경험했던 그였기에 그것은 오히려 낯선 경험이었다.
부족장의 아들이었던 시절, 초원은 드넓되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부족의 영역은 있었지만, 부족장을 포함하여 그 어떤 부족 구성원도 그 대지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기부터 저기까지 우리의 땅이라고 여기지 않았었다. 대지는 대지일 뿐이고,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모두의 것이라고.
그것은 현대인의 속내를 가지고 있던 몽주에게도 그러했다. 물론, 그때야 그게 그저 꿈에 불과하다고 여겼기에 부족민의 정서와 생각에 쉽게 동화된 탓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요동성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 넓은 땅은 그 순간 고려의 것이었다.
요동성을 쥐고 있는 한 그 땅은 영원히 고려의 것이라는 것 또한 생각하자, 몽주는 가슴이 절로 설렐 수밖에 없었다.
그가 두 번째 천몽을 시작한 이유, 현대에서 논의 끝에 제주로 나아가 그곳에서 동양판 대항해시대를 시작하겠노라 작정한 이유는 오로지 한국의 역사를 뒤집어엎고 더 나은 역사를 쟁취하기 위함일 뿐, 역사 변화의 주인공이 꼭 그 자신일 필요는 없었다.
요동을 점령하고 그 점령의 기간을 한없이 늘려 영구적인 민족의 영토로 포용하는 데 성공한다면, 한국의 역사는 지금 현대 한국이 가진 것과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만약 몽주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요동을 얻은 고려는 적어도 역사 변화에 있어 최후의 보루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요동성을 나하추로부터 지키는 것과 요동을 민족 영토화시키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요동성을 잃는다면 그 격차를 이겨 낼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지는 것 아닌가.
게다가 몽주는 요동성과 그 주변의 영역을 항구적인 고려의 영토로 만들 가능성을, 현대의 재상과 두신이 추정하고 계산한 것보다 더 크게 보고 있었다.
그 이유이자, 몽주로 하여금 요동성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고려 정벌군 지휘부의 혜안과 각오였다.
요동성에 머물게 된 후, 몽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성계 장군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몽주와의 만남에 놀라워하면서도 반갑게 맞이했는데, 지난날 자신의 당여를 희생하여 살린 인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게다가 몽주가 크게 군량미를 바친 사실을 은근히 알리자, 대단히 기특하고 고마워하기도 했다.
물론 그 와중에 신돈의 수하와 다름없어졌음을 짐작하고 다소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날에 그저 요승이요, 간신이라고만 여겼던 신돈이 이번 정벌에 크게 기여한 사실이 있기에, 예전보다는 신돈을 경계하고 혐오하는 정도가 많이 누그러진 상태라 몽주를 반가워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성계는 몽주와의 대화에 수차례에 걸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사실 몽주가 요동성 이곳저곳을 살피며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이성계의 동행 덕이요, 그가 편의를 봐준 덕이었다.
그런 까닭에 자연히 이성계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중에는 정치 외교적인 혜안과 각오에 대한 것도 있었다.
“요성은 요동의 입구일세. 이곳을 장악함은 요동을 장악함이니 가깝게는 요하 유역을 쥘 것이요, 멀게는 옛 고려와 발해의 영토마저 얻을 것이야.”
고려뿐만 아니라 그 시대 중국에게 있어 요동은 크게 두 가지 의미였다. 하나는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인 작은 의미의 요동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만주 지역까지 포괄하는 큰 의미의 요동이 그것이었다.
만주(滿洲)라는 명칭은 훗날 청국으로 발전할 여진의 할거 이후에나 비로소 주창된 것이니,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이성계를 비롯한 고려 정벌군 지휘부는 요동성 점령의 영토적 의미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요성을 가짐으로써 요동을 얻고, 나아가 훗날 만주까지 얻는다는 것.
게다가 요동의 정치적 상황 또한 확실히 알고 그것이 기회임도 깨닫고 있었다.
“왜구가 창궐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음을 알면서도, 무신들이 금상의 욕심에 크게 반발하지 않고, 앞장서 정벌에 임한 것은 단지 군공을 탐함에 있지 않아. 그것은 지금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임을 알기 때문일세. 원이 중원에서 쫓겨 북방으로 갔음에도 중원을 장악한 명은 북원을 채 이기지 못하고 있지. 상황을 면밀히 보면 결코 짧은 시기에 명이 이곳에 시선을 돌릴 수 없음은 명백하니, 고려가 진정한 고려의 품위를 되찾기 위해서는 당면한 중원과 요동의 사정을 이용해야 할 것이야. 비록 훗날 명이 북원을 몰락시킨다 하더라도, 혹은 그 반대라 하더라도, 그사이 고려는 중원의 경계심을 이용하여 이 땅의 영유권을 확정 지을 수 있을 것이고, 반드시 그러해야 할 것이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하추부터 물리쳐야겠지.”
고려의 지휘부는 정세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고, 몽주는 이성계를 통해 그것을 엿볼 수 있었다.
몽주로선 현대에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제1차 요동 정벌, 혹은 동녕부 정벌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때, 그것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고려가 부린 욕심이 만든 우연하고 단순한 해프닝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을 크게 고쳐야만 했다.
의도가 분명했고, 의지가 확실했다. 나아가 훗날에 대한 포석 또한 정확했다.
이성계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가 후에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을 아는 몽주로서는 아이러니함과 동시에 당연함 또한 느꼈다.
위화도에서 이성계는 지난날 유일했던 기회를 놓치고, 시간이 흘러 강성한 명을 상대로 요동을 수복해야 함에 크게 좌절하고 임금과 고려 도당을 원망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역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말머리를 돌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몽주의 머릿속에 이성계가 해 준 또 다른 말도 떠올랐다.
“나는 석 아우가 이곳에 있는 것이 좋아. 지난날 부처님께서 크게 안배하여 자네를 살린 걸 보면 쉬이 죽지 않을 것이니, 이 요성 또한 더불어 역경을 이겨 내지 않겠나.”
그런 말과 함께 이성계는 그의 사병인 가별초(家別抄) 오십 인을 떼어 몽주를 따르게 하였다. 그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부처에게 의지해서라도 요성을 지켜 내고 싶은 그의 진심도 느껴졌으니, 그에 영향을 받은 몽주 또한 더욱 요동성을 지켜 내고 싶은 마음이 커졌던 것이다.
몽주가 한참이나 머릿속으로 고려에서의 심적 변화를 회고하고 요동성 사수의 의지를 되새길 때, 문득 두신이 몸을 일으켜 화이트보드 위 요동성 단면도 중 어느 곳을 짚으며 말문을 열었다.
“이곳이 정방이랬죠?”
“네.”
“아주 오래된 곳이라고도 했고요?”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방(淨房)은 변소를 의미하는데, 요동성 외성 동문 근처에 오래된 정방이 있었다. 다만 그 정방은 사람이 일일이 드나드는 변소가 아니라 성의 곳곳에서 나온 오물을 투척하여 모은 곳으로, 고려 정벌군이 만든 게 아닌 본래 원의 주둔군이 땅을 파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이었다.
두신은 문득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뭐, 어차피 대세에 크게 영향을 줄 건 아니지만, 최악의 경우 이쪽 성문이 돌파되었을 때를 대비한 잔꾀 하나 정도는 마련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겪은 일인데, 우리 중대가 있던 진지가 되게 낡았었거든요. 거기에도 진짜 오래전부터 쓰던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고요. 진짜 거기서 대변이라도 보면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냄새가 지독했었죠. 그런데 한번은 새로 온 중대장이 그 변소를 보고는 냄새가 너무 난다고 하면서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두신의 이야기는 이어졌고, 그럴 심정이 아님에도 몽주와 재상은 종종 실소 내지 대소를 터뜨리며 재밌게 들었다. 물론 그 재밌는 이야기를 통해 두신이 말한 잔꾀가 무엇인지도 알아들었다.
“그런 게 통할 정도면 요동성은 이미 망했지, 쨔샤.”
재상은 별로 통할 꾀가 아니라고 여긴 듯했고, 사실 몽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나,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 * *
“단단히 박아라. 후에 쉬이 쓰러지면 크게 경을 칠 것이다!”
“예!”
‘산원 나리’ 몽주의 으름장에 창름군(倉廩軍) 별동대의 병졸들이 일제히 대답하였다.
처음 창름군, 즉, 창고 지키는 부대의 산원이 되었을 때, 백면의 장사치가 산원이 되었다 하여 질투하고 무시하기도 했는데, 이성계가 가별초 오십 인을 따로 떼어 준 뒤로는 그런 분위기가 일소되었다.
그런 병졸들의 변화는 당장 몽주의 명을 이성계의 명처럼 받드는, 군기 엄정하고 무위가 탄탄한 가별초 병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고, 일개 나부랭이인 줄 알았던 몽주가 이성계 장군과 연이 닿았음을 알고 크게 놀란 탓이기도 했다.
몽주가 창름군 별동대 병졸들에게 명한 것은 그가 담당한 제2창름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창름군 본대는 내성 안의 제1창름을, 몽주가 이끄는 별동대는 외성 안의 제2창름을 지키게 되어 있었다.
내성에 위치한 제1창름에 비해 외성의 제2창름은 수성의 여파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 자칫 아군의 실수로 불이 옮길 수도 있기에, 그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해당 창름에서 열 보 떨어진 외곽에 목책을 설치하여 가까이 올 수 없게 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창름군 자체도 목책 안에는 일절 화기(火氣)를 두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사실 일개 산원으로서 그런 명을 단독으로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수문낭장(守門郎將) 노을준이라는 자가 지난밤에 붉은 기운이 성을 엄습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요성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주장한 덕에, 몽주의 직속상관인 창름군 별장(別將)이 그의 건의를 쉽게 받아 주어 실행할 수 있었다.
붉은 기운이라는 게 아무래도 불의 기운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낭장 노을준은 겁을 먹고 헛된 보고로 군기를 문란케 하였다는 죄목으로 태만 얻어맞았다.
처음 그가 그런 벌을 받은 것을 두고 몽주는 지난날 자신이 태를 맞은 경험을 떠올리며 과한 벌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와 보면 결코 무거운 벌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산원 나리, 우리가 나하추로부터 요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예감이 영 좋지 않습니다. 붉은 기운이 성을 침범했다지 않습니까. 이는 부처님이 화를 피하라고 징조를 보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며,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는 별동대 대정(隊正) 놈을 보면 분명 그러했다.
미신이 널리 통용되는 세상. 장수라면 특히 전투를 앞두고 그 입을 방정맞게 놀려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다.
“자네도 매를 맞고 싶은 겐가?”
“아, 아닙니다.”
몽주의 차가운 대응에 대정 놈은 고개를 흔들며 짐짓 찌그러드나 싶더니, 이내 다시 말을 붙여 왔다.
“하면, 나하추와 담판을 지으러 간 일에 대해서는 혹여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몽주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처음 창름군 산원이 되었을 때는 대단한 무인인 양 그를 무시하던 놈이 이제는 가장 겁쟁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다 이놈이 대정씩이나 되었을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 꺼지라고 대꾸하고 싶으나, 아닌 듯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다른 창름군 별동대 병졸과 이성계의 가별초 병졸 때문에라도 아는 바를 말해 주기로 하였다.
“나하추가 이성계 장군을 존경한다 하나, 그가 북원의 장수인 이상 대한(大汗)의 명을 거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었다면 이성계 장군의 필설을 보기 전에 방을 보고서 군을 움직이지 않았을 게 아니냐.”
“과연 그러합니다.”
몇 년 전, 나하추는 동북면을 침범했다가 이성계에게 대회전(大會戰)에서 참패하였고, 그 후 화친을 맺으며 이성계에게 존경을 표한 바 있었다. 또 그는 고려로부터 정1품의 관위를 받기도 했다.
하나 고려의 동녕부 정벌에 대한 나하추의 대응은 그의 결정 이전에 북원 대칸의 명에 의한 것이니, 정벌군 지휘부가 신속하게, 가까운 북원 군벌인 우승(右丞) 에센 부카와 태위(太衛) 나하추와의 전란을 방비하기 위해 주변에 방문을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계가 친필로 사정을 적어 나하추에게 보내 설득하려 했음에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몽주는 문득 목책 공사에 임하는 병졸들을 살피다가 비단 대정 놈 외에도 많은 이들이 동요하는 기색임을 알아차렸다. 이성계의 가별초들은 태연한 데 비해, 창름군 별동대들은 모두 지원군으로 온 정정들로 전투의 경험이 일천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두려운 게냐?”
“…….”
나도 두렵다…… 는 말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지만, 그래도 산원인 신분에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무엇이 두려울 게 있더냐. 이 요성에 우군이 6만이 넘거늘!”
“하나, 나하추가 10만의 군세를 이끌고 온다지 않습니까.”
또 그 대정 놈이 입방정이었다.
“그거 다 구…… 허장성세일 뿐이다. 실제로는 그보다 작을 것이야.”
“그래도 고려군보다 많은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이놈아, 우리는 수성을 하는 것이요, 저들은 공성을 해야 함이니, 수성에 임하면 세 배나 많은 군세도 막아 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게냐?”
“그게 참말입니까?”
“어찌 군사를 앞에 두고 거짓을 말하겠느냐.”
정말 수성의 이점을 몰랐던 것인지, 몽주의 말에 창름군 병졸들의 안색이 조금 환하게 풀렸다.
사실 요동성이 그만큼 수성에 아주 큰 이점이 있는 성이라곤 볼 수 없었다. 약간 높은 지형에 서 있기는 하나 산성(山城)은 아니기에 사방으로 공격을 당할 수 있어, 지휘의 정밀함이 없다면 생각보다 쉽게 떨어질 수도 있는 성이었다. 그나마 성벽 자체는 제법 높고 항복을 받아 낸 덕에 상한 곳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삼키며 사기를 돈독하게 하고 있을 때, 문득 내성 쪽에서 십여 대의 수레들이 창름군 쪽으로 왔다.
“산원 나리, 주정을 받아 왔습니다요.”
또 다른 대정이 신나게 달려와 보고하였다. 앞서 그를 내성 제1창름에 있는 별장에게 보내 주정(酒精)을 받아 오게 하였다.
주정은 곧 에탄올이었는데, 정벌군의 보급품으로 상당량의 주정이 있었다. 이는 술을 만들기 위함으로, 술 자체를 보내는 것보다 주정만 보내어 필요할 때 따로 만들어 쓰도록 한 것이었다.
“산원 나리, 정말 이 많은 주정을 모두 정방에 뿌리실 겁니까?”
내성에 다녀온 대정의 물음에 몽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창름 별장에 고하여 주정을 받아 온 명분은, 정방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사사로이 술을 취하였다가는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그래도 술이 고프더냐.”
그럴 리야 있겠는가. 주정이 아깝고 술이 고프다 한들 목숨보다 좋을 리는 없으니, 대정을 비롯하여 주정 향에 혹한 병졸들이 시무룩해졌다.
몽주는 그 모습이 다소 안쓰럽기는 했지만 주정을 빼돌릴 순 없었다. 지용수 원수는 군기의 엄정함에 어긋나는 언행을 용서치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건 이미 노을준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몽주는 병졸들로 하여금 주정 수레들을 이끌게 하고 외성 동문 쪽으로 향했다.
제2창름이 외성의 동문과 내성의 동문을 연결하는 선의 가운데에서 약간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터라, 외성의 동문까지는 금세 갈 수 있었다.
정방은 변소라고는 하나 일반 변소와는 크기가 완전히 달랐다. 정방을 감싸고 있는, 지푸라기를 묶은 목책은 사방으로 십여 장에 이르렀는데, 그 안 정방 자체도 사방 열 장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엉성한 목조 건물에는 남북으로 두 개의 출입구가 있는데, 정방 건물을 관통하여 두 문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양쪽으로 구멍이 크게 뚫려 있어 거기에 오수(汚水)를 버리는 것이었다.
“크으으!”
처음으로 정방 안에 들어선 순간 몽주는 기절할 것 같았다. 코끝을 강타한 그 매캐함이란 지독한 수준을 넘었던 것이다.
목책 너머에서는 냄새가 좀 난다 싶은 정도였고, 목책 안으로 와서는 냄새가 심하다 수준이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코를 쥐어 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부어라.”
얼른 명령을 내리곤, 몽주는 서둘러 나왔다. 열 대가 넘는 수레마다 어른이 들어가도 될 만큼 큰 항아리가 여덟 개씩 실려 있었으니, 한창 부어야 할 만큼 주정이 많았다.
하나 그런 양에도 불구하고, 몽주는 과연 그 정도로 이 오래된 정방에서 풍기는 매캐함을 지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수십 년 전, 아직 원이 강성하던 시절에 만들어 지난 세월 동안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 때로는 수만의 병사들이 대소변을 버렸고, 모르긴 몰라도 말의 오수와 그 밖에 다른 더러운 것들을 버리는 데 이용했을 정방은, 그럼에도 아직 버릴 공간이 남았을 만큼 깊고도 커다랗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정말 될지도 모르겠군.”
몽주는 두신이 ‘놀이’ 중에 그가 겪은 군대의 일화를 예로 들며 제시한 잔꾀가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잔꾀는 쓸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는 의미일 터이니.
북원의 나하추가 스스로 10만의 군세라 주장하는 대군을 이끌고 요성 근방에 다다른 건, 채 만 이틀이 되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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