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60)
전날 내린 눈은 폭설은 아니었지만, 대지를 하얗게 물들이기에는 충분했다.
하나, 요동성의 고려군 병사들에게는 그 하얀 세상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눈을 배경으로 점점이 드러나는 북원군의 군세는 이내 고려군의 시야에서 하얀색을 바라볼 여유를 앗아 버렸다.
나하추의 주장으로는 10만, 고려 탐보병들의 추정으로는 7만에서 8만 정도.
10만이든 7만이든, 요동성의 북쪽 반나절 거리에 주둔지를 세운 북원군으로부터 전해지는 공세의 열기는 한겨울의 한기에도 후끈하고 쩌릿한 감각을 요동성에까지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서전(緖戰)의 승리는 고려의 것이었다.
이성계를 주장(主將)으로 하고, 홍인계와 최공초가 부장(副將)으로 보좌하는 4천의 기병이 출격하여 주둔지로 진군하던 나하추의 좌군을 급습, 수천의 적군을 살상하는 전공을 세운 것이었다.
물론 대세에 영향을 줄만큼 큰 전적은 아니었지만, 아군의 피해도 적어 초전의 승리를 통해 사기를 진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나 일단 북원군이 주둔지를 완성하고 공성의 준비를 마친 후부터는, 고려군 내에는 긴장이 서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면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고려군이 아주 위급한 국면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잡병들이 많다고는 하나, 6만여 군세 중 절반 이상이 북계와 동계에서 호인(胡人)들과 싸우길 밥 먹듯 하던 정예병들이었고, 높은 성벽에 의지하여 싸우는 것이니 고려군이 유리한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나하추의 군세가 10만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공세에 전념하다 실수라도 한다면 얼마든지 성문을 열고 수세를 공세로 반전할 정도의 병력은 되는 만큼, 북원군도 쉽사리 요동성을 넘볼 수 없었다.
“하나 나하추가 끝이 아니란 말이다. 개원의 에센 부카가 분명 출병하였거늘 그 행방을 모르고, 고가노(高家奴)와 유익(劉益)도 나하추에 협조할 것이 분명하며, 옷치긴 가의 요왕(遼王) 또한 대한의 명에 따라 창끝을 이쪽으로 돌릴 것이니, 지금의 유리한 형세가 얼마나 갈 수 있겠는가.”
외성 동문 누각에서 수문낭장 노을준이 잇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요동 방면 북원의, 혹은, 북원 출신의 군벌들은 예닐곱 개에 이르고, 나하추군은 그 성세가 큰 편이긴 하나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당장 에센 부카(也先不花)도 나하추에 못지않은 규모의 군을 이끌고 요동성으로 진군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비록 멀기는 하나 옷치긴 왕가의 요왕 아자스리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군벌들을 이용하여 요동의 고려군을 축출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과거 원제국의 동북 3왕가 중 하나였던 옷치긴 왕가. 비록 원이 무너지면서 동북 3왕가 또한 흐지부지되었으나, 옷치긴 왕가는 북원의 기둥으로서 아직 힘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나하추와 에센 부카에 옷치긴 왕가의 병력까지 합한다면 족히 20만, 어쩌면 30만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노을준은 그것을 생각하자 절로 가슴이 떨리고 토할 것 같은 심정이 들어, 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런 계산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임에도 불구하도, 식겁(食怯)한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그 최악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분명 붉은 기운을 보았거늘, 분명 부처께서 고려를 어여삐 여기시어 징조를 보이신 것이거늘, 어찌 상원수께서는 사사로운 전공에 목을 매시는 것인가.”
노을준은 주먹을 쥔 손으로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몇 번이나 두드렸다. 주변의 병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며 더불어 동요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려 좁아진 그의 시야에는 그런 모습들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는 지금이라도 내성으로 달려가 이인임 시중을 만나고 싶었다. 전공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힌 지용수 상원수보다는, 이인임 시중이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나 낭장에 불과한 그가 수문하시중을 단독으로 만난다는 건 불가능했고, 시도한다 하여도 지용수 상원수의 귀에 소식이 전해질 터.
같은 말을 다시 한다면 그때 받을 벌은 단지 태형에 그치지 않을 것이기에, 그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동쪽으로 진지를 옮겨야 함인데……!”
이를 가는 건지 중얼거리는 건지 헷갈릴 소리를 하며, 정벌군의 장수들 중 자신만이 유일하게 안계(眼界)를 지니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임견미(林堅味) 부원수는 지용수 원수보다는 이인임 수문하시중을 보좌하느라 바빴다.
이임임이 총사령관의 역을 지녔으나 군을 통솔하는 것은 지용수 상원수였으니, 자연히 쌍두(雙頭)의 위태로운 지휘 체계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하여 임견미로 하여금 쌍방 간의 원활한 의견 개진과 지휘 혼선에 대한 방비가 가능하도록 지용수 상원수가 배려하여 붙인 것이었다.
사실 그건 과한 배려였고, 너무 넘겨짚은 것이었다. 이인임은 자신이 총사령관이나 그의 역할은 정벌군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지위를 지켜 주는 것이지, 군사(軍事)에 개입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선 또한 실수였다. 붙임성이 좋고 상전에 대한 보좌에 능숙하다는 이유로 임견미를 수문하시중에게 붙였으나, 그가 가진 권세에 대한 탐욕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하여 그 탁월한 붙임성과 보좌 능력으로 혹여 이인임이 군사에 대해 개입하려 할 때, 그를 부드럽게 만류하게 하려 했던 지용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니, 오히려 반대로, 임견미는 이인임에 호가호위(狐假虎威)하여 마치 자신이 원수인 양 굴고자 하였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가 권세를 자랑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지용수 상원수를 비롯하여 휘하의 여러 장수들이 철두철미하게 군사를 행하였으니 끼어들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뭐라도 모자란 구석이 있어야 그를 빌미로 명을 내려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임견미는 살쾡이 눈을 하고 돌아다닌 끝에 겨우 트집 아닌 트집거리를 구하였다.
“지필묵을 가져오게.”
이인임의 거처를 나온 임견미 부원수는 부관이 가져온 지필묵을 들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스름을 떨고는 일필휘지로 글자를 적었다.
그러고는 근처의 문하주서(門下注書)에게 말하였다.
“주서는 내 말을 들으시오. 수문하시중을 설득하여 본인이 군사의 철저함을 보강하려 함이니, 이를 있는 그대로 적으셔야 할 것이오. 이 영장은 아군의 창름에 대한 각별한 방화를 지시한 것이오.”
그러면서 임견미는 앞서 내성의 동문에 올라 전황을 보다가 외성 밖에서 몇 대의 화살이 성벽을 넘는 것을 보았고, 혹여 불화살이 날아오면 창름에 불이 붙어 곤란할 수 있음에 대해 한참이나 설파하였다.
물론 적이 성벽을 점령하기 전에는 외성 창름까지 화살이 닿을 리가 없다는 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어쨌거나 주서가 그의 말에 따라 사초(史草)를 작성하자, 임견미는 만족스러워 하며 부관에게 일렀다.
“자네는 이 영장을 비경군에 보이고 그 중랑장에게 일러 휘하로 하여금 내성과 외성의 창름에 내 명을 시행케 하라.”
“알겠습니다.”
부관은 영장을 힐끗 보고는 이내 고개를 숙여 보이곤 물러났다.
임견미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일단 주서를 통해 자신의 공이 사초에 남은 것이 기뻤고, 무어라도 명을 내려 본 것이 좋았다. 하나 가장 즐거운 것은 영장을 작성했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는 본디 문신을 혐오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문자에 박식하지 못한 스스로의 자격지심에 기인한 것이었으니, 그런 그가 연습한 대로 영장을 쓴 것 자체가 기분 좋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는 영장에 적힌 글자 중 한 자가 잘못 쓰였음을 알지 못했다.
‘防’과 ‘放’.
얼핏 보기에는 비슷하나 의미는 전혀 다른 두 자였다.
* * *
우아아아!
성난 고함 소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창름군과 함께 양고를 지키고 있던 몽주의 소감은…….
“심심하네.”
솔직히 그런 심정이었다. 성벽 위에선 고려군 2만여 명이 성벽을 공격하는 북원군에 대항하느라 분명 사투를 벌이고 있음에도, 그리 가까운 곳은 아니기에 그 살육의 현장이 보이지 않고 그저 먼 곳 메아리 같은 함성만 들릴 뿐이니, 긴장감도 이미 가신 지 오래였다.
게다가 이전 천몽에서 수많은 전투를 지휘한 바 있기에 조금은 더 여유로울 수 있었다.
비록 이전 천몽에서의 전투 혹은 전쟁이라는 게 당면한 전투에 비해 그 규모가 많이 못 미치기는 했다.
그러나 눈으로 전투의 참상을 확인하며, 그의 지휘에 따라 많은 전사들의 목숨이 오가는 막중한 책임감을 경험했던 몽주였으니, 바로 곁에서 체감되지 않으며 책임에 대한 압박도 없는 전투는 싱거운 느낌마저 들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난 야전 정도는 돼야 긴장할 것 같군.”
피식.
문득 들린 실소음에 보니, 방정맞던 대정 놈이 입가를 씰룩이고 있었다. 대충 짐작컨대, 녀석의 귀에 심심하니, 야전이 아니라 긴장이 안 되니…… 하는 몽주의 말이 어이없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를 비롯한 주변의 창름군에게 몽주는 그저 연줄 좀 잘 잡은 장사치 출신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물론, 대정 놈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겨 주긴 하였다.
한 차례 공성을 시도한 나하추의 북원군은 불과 한 시진 반 만에 군을 물렸으니, 북원군은 수천의 병졸들이 상했을 뿐 아무런 전황의 이점도 얻지 못하였다.
일차적으로 수성에 성공한 고려군 지휘부는 크게 기뻐하며 나하추가 쉽게 다시 성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라 예측하였고, 지금의 기회를 보아 행방이 묘연한 에센 부카의 군세를 찾기 위한 별동대를 파견하기로 하였다.
에센 부카가 진군했다는 정보는 이미 확실했으니, 자칫 가만히 두었다가 나하추와 합군하여 공성에 임하면 크게 우려스러운 일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나하추가 공성을 집중한 북면이 아닌, 외성 동문 쪽 방어를 지휘하던 양백안(楊伯顔) 부원수로 하여금 일군을 이끌고 나아가 에센 부카의 행방을 탐보하게 하였다.
상황을 보아 나하추군과 접선하기 전에 먼저 에센 부카 군세를 찾아 일격을 가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나 지휘부의 이런 계획은 양백안이 1만의 군을 이끌고 성의 남문으로 나간 직후, 크게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다.
쉬이 공성을 재개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나하추가 금세 다시 군을 몰아 성을 공격했던 것이다.
양백안에게 정예병 1만이 주어졌기에, 비록 징집된 병력으로 성벽에 같은 수를 보충하였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방어 전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하추군의 공세도 더욱 거세졌기에, 멀찍이서 보는 몽주의 눈에도 이번 수성의 곤란함이 이전에 비해 심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낙성(落城)을 허락하기야 하겠는가…… 라는 심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며, 그저 고생하고 몸이 상할 병졸들에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쯤 몽주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곤경이 찾아왔다.
“이보게, 진 산원. 나와서 당장 군령을 받게.”
보니, 내성 안에서 비상시를 대비하는 지원군에 해당하는 비경군(備警軍)의 어느 산원이 이십여 휘하 병졸들과 함께 온 것이었다.
근데 웬 군령? 몽주는 이 시국에 창름군에 군령을 보낼 이유가 있나 싶으면서도 일단 군령을 받으러 그의 앞으로 나아갔다.
“총사령관님의 명이시네. 창름에 불을 질러 적의 수중에 넘어갈 것을 방비해야 하니, 자네도 서둘러 준비하게.”
“……예?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몽주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지만, 오히려 군령을 가벼이 듣는 것이냐는 핀잔을 받았다. 그러면서 불씨를 가져와 불을 지피려 하니, 몽주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멈추시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소! 어찌 멀쩡한 양고에 불을 지른다는 말이오?!”
“어허! 군령을 거부하는 겐가! 내 직접 영장을 보아 방화토록 하라는 내용을, 수문하시중과 임견미 부원수의 직인과 함께 확인하였네. 그러니 잔말 말고 군령을 따르게!”
비경군 산원이 그리 호통을 치곤 재차 불을 지펴 창름의 목책 안으로 들어서려 하였다.
몽주는 찰나의 고민에 빠져야 했다.
군령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보통의 경우라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이번은 쉬이 따를 수 없었다.
외성의 창름은 내성의 창름과 함께 양곡을 포함한 요동성의 군수품을 절반씩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으니, 이곳이 불탄다면 절반의 군수품이 재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몽주로서는 아무리 군령이라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창름이 불타면 수성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요동에서 군세를 유지하기 어려운 건 당연하다.
뭔가 잘못되었다. 군령에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영장이 잘못 쓰였……!
몽주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비경군 산원의 앞을 가로막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멈추시오!”
“아니, 이자가 진정……! 죽고 싶어 환장하였는가! 군령의 지엄함을 모르는 게야!”
비경군 산원이 눈을 부라리며 칼을 뽑았고, 그의 휘하들 또한 무기를 들어 살기를 피웠다.
“하나만 묻겠소! 진정 영장을 확인하셨소? 혹여 글자를 잘못 본 게 아니오?”
방화는 방화(放火)일 수도 있으나, 방화(防火)일 수도 있었기에 몽주는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하나 그 말에 비경군 산원이 오히려 격분하였다.
“누굴 글도 모르는 무지렁이로 아는가! 불을 지피라는 명을 분명히 받았음이니, 당장 물러나라! 이미 내성의 창름에도 같은 명이 전해졌을 터, 이곳 또한 지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함치며 그는 당장이라도 칼을 휘둘러 몽주를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몽주는 한층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 방화(放火)의 군령이 있었다는 것에서 그랬고, 외성의 창름만이 아니라 내성의 창름마저 불태운다는 것에서 더욱 그랬다.
그건 고려 정벌군 모두가 함께 굶어 죽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몽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정상이 아니었다. 실수든, 오해든, 음모든! 무어라도 고려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게 확실했다.
“전대, 전투 준비하라!”
척, 처척!
몽주의 명과 함께 주변에 있던 오십 인의 이성계 가별초들이 일제히 창을 내밀어 자세를 취하였고, 다른 창름군 별동대들도 얼결에 전투 진형을 갖추었다.
“네 이놈!”
비경군 산원이 발연대노하여 고함을 질렀지만,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와 그의 휘하들보다 창름군 별동대의 수가 훨씬 많았으니, 군령을 강제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에 좌우로 가별초 군병들의 엄호를 받는 몽주가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 나라고 군령의 지엄함을 모르겠소! 하나, 자네 산원도 생각을 해 보시오. 요동성의 두 창름을 모조리 태운다면 당장 오늘 저녁부터 우군 장령(將領)과 병졸 모두가 굶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제대로 된 군령이라 할 것이오. 분명 실수나 오해가 있을 것이니, 자네 산원은 다시 군령을 확인해 보시오. 그럼에도 같은 군령이 있다면 내 반드시 따를 것이고, 더불어 지금의 항명에 대한 벌 또한 달게 받을 것이오.”
뒷말은 괜히 했나. 몽주는 벌을 자청하겠다며 얼결에 말한 것을 살짝 후회했으나, 그 말을 하든 안 하든 군령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처벌이 떨어질 건 매한가지였기에, 표정 관리를 하며 비경군 산원을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색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하였으나, 눈알이 돌아가는 걸 보니 고민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분명 비경군 산원은 고민하고 있었다. 군령의 시행이 급하다 하여 중랑장이 보여 준 영장(令狀)을 확인하자마자 달려왔는데, 지금 창름군 산원의 말을 듣고 생각을 가다듬자니, 확실히 군령이 이상했던 것이다.
하여 그는 칼끝을 내렸고, 뒷걸음질을 하였다.
“만약 군령이 정확하다면,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네가 지어야 할 것이오.”
그에 몽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휘하와 함께 내성 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 하였다. 하나 그전에 외성 동문 쪽에서 일단의 군세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멈춰라! 당장 발걸음을 멈추어라! 수문낭장의 명이시다!”
동문 쪽 수문낭장이면 노을준이 아닌가.
몽주는 불길한 예감에 인상을 쓰며 목책 입구로 몰려오는 군병들을 노려보았다.
붉은 기운을 보았다고 입을 놀려 태를 맞았다는 낭장 노을준(盧乙俊).
그에 대한 유감이 있기 전에, 당장 수성전이 이어지고 있는 중 맡은 바 성문의 누각을 벗어나 이곳까지 온 그의 행동이 여간 수상쩍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적병의 공성이 북면에 집중되고 있다고는 하나, 나하추의 명 한 마디에 얼마든지 동문으로 북원군이 짓쳐 들 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런 가운데 수문낭장이라는 자가 딱 봐도 일천은 족히 될 군병들을 떼어 데려온다는 게 제대로 된 장수의 할 짓인지 의심스러웠다.
경번갑(鏡幡甲)의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낭장은 먼저, 되돌아가다가 발을 멈춘 비경군 산원에게 다가갔다.
철썩!
낭장에게 얻어맞은 산원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이런 멍청한 작자를 보았나! 어찌 지엄한 군령을 두고 흥정을 하는 것이냐!”
“하, 하오나…… 군령에 분명 미심쩍은…… 억!”
이번에는 발길질에 산원이 얻어맞아 결국 땅을 구르고야 말았다.
“네 이놈! 네놈이 무엇이기에 총사령관과 부원수의 명을 가늠하는 것이냐! 여봐라, 당장 이자를 묶어 끌고 가라!”
낭장의 명에 그가 데려온 병졸들이, 막 몸을 가누던 비경군 산원에게 포승을 가하였다.
그 모습을 보던 몽주 또한 얼굴빛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저렇게 당하는데 자신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니.
그사이 낭장 노을준이 목책 입구 너머로 몽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흥 하며 콧소리를 내더니, 손을 들어 내성 쪽을 가리켰다.
몽주와 창름군은 물론 근처 모든 병졸들이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으니, 내성 한가운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내성에 적병이 침입하지 않은 한 그 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를 수 없었다.
내성의 창름에 불을 지른 것이리라.
몽주는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으로 시선을 돌려 노을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마주 보는 낭장의 충혈된 눈이 희번덕거리고 있었고, 그의 손이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네놈은 감히 군령을 거부하였으니 살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어라. 그리하면 네놈의 부하들은 살려 줄 것이다!”
그 말에 창름군이 일제히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하나 몽주는 그런 분위기에 흔들림 없이 오직 노을준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그리할 수 없노라 결정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다만, 저 낭장 작자가 왜 저리 멍청하게 구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안색이며, 눈빛이며, 정상이 아니다.
지난 2년 동안 경험한 고려의 사람들은 지식이 모자랄지언정 지성과 지혜가 모자라지는 않았다.
아무리 명에 죽고 명에 사는 군대의 일이라 하나 앞서 산원이 그러했듯, 석연찮은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 봐야 한다는 판단쯤은 능히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내성에 돌아가 군령을 확인하는 데에는 일각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 이처럼 창름을 태우는 명마저도 앞뒤 생각 없이 따를 필요는 없었다.
역시 그건가.
이전 천몽에서도 은근히 자주 보았던 자들의 모습이 노을준에게 투영되고 있었다.
“으하하하!”
약간의 과장이 섞인 모습으로 몽주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겁쟁이 같은 자를 어찌 고려의 장수라 하겠는가! 양고를 태워 버리면 철군하여 네 목숨을 구할 것 같더냐!”
이제껏 보인 바 없던 몽주의 우렁찬 목소리에 한 번 놀라고, 그 목소리에 담긴 말의 의미에 또 한 번 놀란 창름군 병졸들이 일제히 노을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은 불그죽죽하게 변해 있었고, 와락 일그러진 표정은 금방이라도 몽주를 참하라 소리쳐 명령할 듯했다.
하나, 그보다는 몽주의 고함이 먼저였다.
“산원! 석! 몽! 린! 본졸이 받은 유일한 명은 창름을 사수하라는 것! 그 명을 지킴에 있어 물러섬이 없을 것이외다! 들어라! 이곳마저 불탄다면 너희들은 굶주린 채 저 눈밭을 달려 도망쳐야 할 것이다! 또한, 채 고려에 닿기도 전에 굶어 죽든, 호인에게 맞아 죽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고려 육만 군의 목숨! 이를 지키는 것은 가장 큰 대의이니, 결코 물러서지 마라!”
절절한 목소리에 담긴 몽주의 압도적인 의지에, 가별초들과 창름군 별동대의 병졸들이 일제히 복명(復命)하여 기합과 함께 불퇴(不退)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들의 가운데에서 몽주는 실로 오랜만에 ‘초원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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