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61)
내성 창름(倉廩)은 21개의 양고와 7개의 창고가 있었고, 다른 군자(軍資)를 제외한 양곡의 규모만 해도 4만 명이 한 달을 너끈히 먹을 정도였다.
그런 대형 창름을 불태우는 것에는 엄연히 주저함이 있어야 인지상정이겠으나, 두어 다리의 군령을 거쳐 그대로 시행된 것은 총사령관과 부원수의 직인이 차례로 찍힌 영장에 의한 군령이기 때문이며, 그 영장에 쓰인 내용이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적의 내습에 대비하야 철저히 방화(放火)토록 하라
임견미의 의도야 적의 공격에 의해 창름에 불이 나는 걸 주의하라는 것이었지만, 방(放) 자로 인해 적의 내습으로 창름을 빼앗기지 않도록 불태우라는 명령으로 완전히 오도(誤導)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성의 창름이 구성(舊城)과 주성(主城)에서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했다는 점이었으니, 창름에 불이 붙자 놀란 장수들이 급히 나서 진화를 명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첫 명은 이인임 수문하시중으로부터 나왔다.
본래 구성의 전각 2층에 있던 그는 전투 중 홀로 평안히 내실에 있는 것이 미안한 마음에, 또 전투의 승패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내성 안을 시찰하다가 내성 창름에 불이 붙은 것을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것이었다.
경악한 그가 급히 불을 끄도록 명령하는 한편, 스스로도 물지게를 지고 물을 뿌리며 진화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니, 내성 안은 창름의 불을 끄느라 금세 난리 통이 되었다.
임견미 부원수는 살귀(殺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내성의 지휘부가 모두 내성 창름으로 몰려갔을 때 발맞춰 뛰어나갔으나, 그가 한 것은 진화(鎭火)가 아닌 살인멸구(殺人滅口)였다.
창름에 아군이 스스로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살기 위해선 영장을 회수하고 이를 본 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판단을 그대로 실행한 것이었다.
하여 내성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창름으로 향해 있을 때 부관과 더불어 종횡무진(縱橫無盡)하여, 비경군의 중랑장 외 4인의 하급 무관들을 참하였다. 명분은 군령을 곡해, 호도했다는 것이었다.
“여기 영장이 있사옵니다.”
다행히도 영장은 아직 주서(注書)에게 넘어가지 않고 중랑장의 품에 남아 있었다.
정벌군의 모든 명령은 사초(史草)에 남고, 모든 영장은 시행 후 문하주서(門下注書)에게로 넘어가도록 되어 있어, 혹여나 그리되었다면 살인멸구는 물 건너갈 것이기에 내심 초조했었는데, 임견미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면, 이제 영장을 본 자들은 모두 죽은 것이더냐?”
임견미가 영장을 접어 품에 갈무리하며 묻자, 부관은 표정을 굳건히 하며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하늘이 도왔군. 너도 수고가 많았다. 내 네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감사하……?!”
푹.
예를 취하던 부관이 문득 서늘한 느낌에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배에 칼이 깊숙이 박혔다.
“영장을 본 자가 하나 더 있지 않더냐.”
“이, 이……!”
복부에서 전해지는 고통과, 마음속에서 전해지는 배신감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붉게 달아오른 부관은 임견미를 향해 손을 뻗어 미미한 보복이라도 하려 하였으나, 다음 순간 거칠게 뽑힌 칼에 피를 뿜으며 외로 쓰러졌다.
임견미는 칼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 내고, 다른 손으로 얼굴에 튄 핏물을 훑어 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졸들과 하급 무관들을 위한 병막(兵幕) 사이에서 일어난 일. 창름이 불탄 뒤 모조리 진화 작업에 나선 상황이라 눈에 띄는 자는 없었다.
임견미는 마른침을 삼키며 재빠르게 창름으로 달려갔다. 이미 늦었으나 진화 작업하는 중에 얼굴이라도 비쳐야 했다.
한데 창름 근처에 막 이르렀을 때, 양고 중 하나가 불길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게 보였다.
근처에서 물을 뿌리던 이들이 그 무너진 더미에 깔렸으니 비명이 울리고, 그들을 구하려는 이들의 다급한 목소리 또한 솟아났다.
“시중께서 깔리셨다! 어서 구하라!”
그중 임견미의 심장을 철렁거리게 할 소리도 있었으니, 그는 그 다급한 외침을 듣자마자 근처의 병졸이 들고 있던 물통을 빼앗아 자기 몸에 끼얹고는, 시중이 사고당한 곳으로 몸을 날리듯 달렸다.
시중을 구해야 한다.
그를 구하면 살고, 구하지 못하면 죽으리라.
* * *
몽주의 패기 넘치는 외침은 사기(士氣)를 가져왔으나, 싸움을 막지는 못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말을 할 겨를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러나 그에 대한 의문은, 노을준이 분기에 넘쳐 몽주를 죽이라고 명령한 순간부터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노을준이 데려온 군병들은 동문에 배치된 병졸들 중 정예였다. 비록 몽주의 선언에 명예를 잃은 낭장 노을준의 명일지언정, 그의 군령에 따라 즉각적으로 창름군 별동대와 가별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몽주를 따르는 병졸들도 이백 오십여 명에 이르렀으나, 그중 가별초 오십 인을 제외하면 일반 장정과 다를 바 없는 잡병들이었으니, 노을준의 일천 정예병을 막기에는 여러모로 손색이 많았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세워둔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목책이 튼튼하게 버티고 있어 가별초를 중심으로 입구를 틀어막는 식으로 힘겹게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목책이 흔들려 쓰러지고 그 틈으로 노을준의 군병들이 들이닥쳐 싸움의 양상이 난전(亂戰)으로 흐르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개싸움으로 변했다.
같은 고려군이라는 허상의 울타리는 그 싸움의 잔인성을 낮추지 못했으니, 노을준의 명에 움직이는 병졸들에게 몽주와 창름군은 그저 반도(叛徒)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일각도 되지 않아 창름군 대부분이 사상(死傷)당하거나 항복하여 묶였고, 가별초 중 살아남은 이들과 몽주만이 노을준의 군병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몽주 또한 칼을 들고 싸웠는데, 생각보다 잘 싸웠다. 물론 기대치가 워낙 낮았기에 그보다는 나았다는 말이다.
여린 손목과 얄팍한 다리를 가진 몽주로서는 창검을 힘겹게 막아 낼 때마다 칼자루를 놓칠 것 같았고, 힘에 밀려 휘청대기 일쑤였다.
그나마 이전 천몽에서의 경험으로 ‘싸우는 법’은 알고 있어, 땅바닥을 구르고 몸을 날려 피한 덕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초원의 지배자’였던 시절, 몽주는 비록 천몽의 초창기를 제외하곤 직접 전투를 치른 적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전사들의 존경을 유지하기 위해 가끔은 유리한 전투 속에 끼어들어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기’ 정도는 했었고, 전사들의 훈련 중에 참여하여 ‘안전한 대련’ 또한 해 줘야 했었다.
그 덕에 적아가 뒤엉켜 난장판이 가운데에서도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목숨을 부지하는 꼼수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런 꼼수 아닌 꼼수도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밀려 슬슬 통하지 않기 시작했고, 특히나 낭장 노을준이 다른 방해를 뚫고 오직 몽주만을 노리고 죽이려 들자, 몽주의 목숨은 그야말로 칼날 위에 선 지경에 이르렀다.
“네놈은 내 칼에 도륙되리라!”
성난 음성을 토하며 대도를 찍듯 내려치는 걸 바닥을 굴러 겨우 피한 몽주는 급히 일어났으나, 이미 혼신의 힘을 다한 후라 제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비틀거렸다.
“네놈같이 부실한 자가 감히 나를 겁쟁이로 몰다니,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음이야!”
“씨발, 겁쟁이를 겁쟁이라 한 게 뭐가 잘못이냐!”
그쯤에서 몽주는 말투를 옛 식으로 고칠 여력도 없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알아듣지 못할 말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그쯤에서 목구멍을 나오는 말과 외침은 표정과 억양 같은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도 충분히 통하고 있었다.
“잔말 말고, 그만 죽어라! 내 너를 죽여 군령의 지엄함을 바로 세우리라!”
다시 검풍(劍風)이 쇄도하며 몽주의 눈앞으로 죽음이 엄습했다. 겁쟁이는 겁쟁이이되, 힘은 무관답게 장사인 겁쟁이였다.
피할 겨를도 없어 겨우 쥐고 있는 검을 간신히 노을준의 검로(劍路)에 두었지만, 칼날의 격돌과 함께 몽주의 칼은 반 토막이 나 버렸고,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몽주도 나가떨어졌다.
핫옷(포袍, 겉옷) 형태의 갑옷은 없었지만, 그래도 산원에 임하면서 복박(覆膊, 일종의 견갑, 어깨 가리개) 형태를 한 작은 사이즈의 찰갑(札甲, 작은 비늘을 꿰어 만든 갑옷)을 입게 되어, 어깨와 상체 일부를 막을 수 있던 덕에, 몽주는 노을준의 칼에 크게 베이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찰나의 죽음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죽음이 목전에 이른 건 변함이 없었다. 깊진 않았지만 상처까지 입고 바닥에 널브러진 몽주는, 도저히 다음번 노을준의 칼을 막을 수 없었다.
겨우 부상을 입지 않은 쪽 팔로 바닥을 질질 끌며 움직이려는데, 노을준이 낄낄 비웃음을 흘리며 칼을 치켜들었다.
“죽어라, 이 반역도야!”
칼이 허공을 가르려는 그 찰나, 몽주의 손끝에 닿은 무엇가가 있었으니, 그것은 부러진 칼날이었다.
손바닥만 한 길이의 칼날을 쥔 몽주는 자신이 이전 천몽에서 비도(飛刀)를 제법 다루었던 걸 떠올렸고, 노을준의 칼이 쇄도하는 그 찰나 속의 찰나, 남은 온 힘을 다 쥐어짜서 팔을 휘둘렀다.
큰 기대는 없었다.
이전 천몽에서도 단지 가까운 곳에서 적과 사투를 벌이기 싫다는 이유로, 그럼에도 뭔가 전사들에게 자랑할 만한 기술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긴 시일에 걸쳐 익힌 그 기술을, 지금 몽린의 몸으로 제대로 재현한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하나, 가끔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마음가짐이 기적을 만드는 법이었다.
“컥!”
칼을 휘두르던 노을준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양 멈칫했으니, 그의 목에는 몽주가 던진 부러진 칼날이 박혀 있었다.
노을준은 칼을 놓고 양손으로 목을 감쌌다.
부러진 칼날을 고통 속에서 뽑자, 노을준의 목에서 피 분수가 터져 온 사방에 핏물을 뿌려 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꾸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걸 마지막으로 몽주도 완전히 땅바닥에 누워 버렸다. 주변은 아직도 싸움이 한창이나, 몽주는 진실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부러진 칼날을 던지다 베인 손바닥에서, 여기저기 잔상처에서, 노을준의 칼에 부딪쳐 쪼개진 찰갑 안에서 핏물이 흘러 자신의 몸을 불쾌한 기분으로 적시는 걸 느끼며, 몽주는 온몸에서 힘을 뺐다.
이대로라면 무명소졸(無名小卒)이라도 다가와 칼을 가벼이 놀리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번 천몽은 허무하게 끝이 나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내 몽주는 정신을 잃었다.
* * *
몽주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거의 이틀이 흐른 후였다. 깨어난 곳은 그의 군막이 아닌 주성 내 이성계의 거처였다.
시중을 든 병졸에 물어 사연을 알아보니, 수성 중 성내 소란이 일었음을 보고받은 이성계 장군이 외성 창름에서 큰 싸움이 난 것을 알고, 싸움을 금하라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후에 몽주가 크게 상한 것을 알고 자신의 거처까지 내주며 반드시 살려 내라 명하였다고도 했다.
자신이 죽다 산 연유를 안 몽주는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물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엉켜 있었으나, 다만 안타까운 건 나쁜 일이 더 크고 중대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좋은 일은 지난 수성에 성공하였다는 것이 첫째였으니, 몽주가 정신을 잃되 요성 안에서 깨어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두 번째 좋은 일은 외성의 창름을 지켜 냈고, 내성의 창름 또한 결사적으로 화재를 진압하여 삼분지 이의 양곡을 구하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전체 양곡 중 육분지 일이 소실되었다는 나쁜 일이기도 했지만, 상황상 그 정도의 피해로 막아 낸 것 자체는 분명 호사(好事)였다.
좋은 일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나쁜 일은 가짓수로나 파급력으로나 더 컸으니, 가장 먼저 수문하시중 이인임이 크게 다쳐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성 창름의 진화에 몸소 나섰다가 무너진 양고에 깔려 다리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만약 임견미 부원수가 얼굴에 화상을 입는 걸 무릅쓰고 구하지 않았다면 고스란히 타 죽었을 것이라 하였다.
한데 임견미 부원수에 대해, 비록 그가 시중을 구한 대공(大功)이 있어 지금은 다들 쉬쉬하나, 잘못된 영장을 내려 군내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킨 원흉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현재 고려군 지휘부 안팎이 크게 어수선한 상태라고 하였다.
이 또한 나쁜 일이라 할 것이었으니, 대과(大過)가 있는 자에게 그에 걸맞은 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자체가 군기를 문란케 하는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나쁜 일은 물론 비교적 소소한 것이었다.
시중이 중한 자라 하나 당장의 군사(軍事)에 각별히 필요한 자는 아니며, 임견미가 부원수라고는 하나 현재의 지휘 체계에서 따로 떨어져 나간 상태라 군병들을 다룸에 있어 크게 방해가 되진 않기 때문이었다.
하나 다른 문제가 연이어 있었으니, 일만의 군을 이끌고 간 양백안 부원수가 에센 부카의 매복에 걸려 대패도주하였고, 살아 돌아온 병력이 채 이천에도 미치지 못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는 에센 부카가 따로 기마 이만만 이끌고 요하를 따라 빠르게 남하하여 근방의 마을부터 약탈함을 알지 못하였고, 그저 계획에 따라 크게 돌아 북상(北上)하다가 에센 부카의 본대를 조우, 전력이 생각보다 낮은 것을 보고 방심하여 공격했다.
하나 그때 이미 에센 부카가 양백안군을 뒤따르고 있었으니, 대단위 몽고마(蒙古馬)를 운영하는 몽골의 군대만이 할 수 있는 ‘지평선 매복’ 즉, 보통 매복이 어려운 평원에서 마치 지평선처럼 보일 정도로 먼 곳에 숨어 있다가 기회를 보아 기마로 달려, 먼 거리를 빠르게 좁혀 공격하는 매복 전술에 당하여 포위 궤멸당한 것이었다.
키와 몸집이 작은 몽고마를 타는 북원군의 특징과 전술을 제대로 경계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렇듯 일만의 군을 잃은 고려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건, 에센 부카가 군을 몰아 나하추와 합군한 것이었다.
비록 따로 진지를 마련하여 요성의 동문 쪽에 자리 잡았으나 장차 공성을 할 때는 합심할 것이 분명하니, 다음번 공성에서의 선전을 장담하지 못할 상황인 것이다.
“열이 하도 심하여 살기가 어렵지 않나 싶었건만, 과연 부처께서 보살피는 자네답군.”
말간 죽으로 굶은 속을 달래 놓자, 이성계가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한 말이었다. 몽주는 쓰게 웃어야 했다.
“그 전에 노을준의 칼에 맞아 죽었어도 이상하진 않았겠지요.”
“하하, 그 역도 놈이야 자네가 처치하지 않았나. 대단하이. 덕분에 양초를 지켰으니, 내 반드시 자네의 공을 상전하여 크게 상을 받도록 할 것일세.”
“그거야 살아남은 후에야 하실 말씀이지요. 지금은 정말로 창름을 불태워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아닙니까.”
앞서 몽주는 잠시 밖을 내다보았는데, 외성 창름의 양곡을 내성 안으로 옮기는 게 보였었다. 그건 외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대비한 것이 분명했다.
이성계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옅은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알고 있었군. 맞네. 에센 부카가 오만의 군세를 몰아 왔으니, 나하추의 군과 합하여 십만에 이르지. 게다가 지난 동안 나무를 베어 와 공성을 위한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으니, 다음번 수성이 몹시도 위태롭네.”
몽주도 나란히 안색을 어둡게 하고, 눈을 감은 채 따로 고심하였다.
말을 해야 할까.
괜히 했다가 훗날 별 효용이 없다면 난감한 질책을 받는 건 아닐까.
고심의 결론은 당장 죽게 생겼으니, 나중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제가 듣기로, 장군께서는 다방면에 걸쳐 무예가 출중하나 그중 제일은 궁술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운을 띄우자, 이성계가 어두운 표정 중에도 문득 눈빛을 발하며 자긍심을 내비쳤다.
“내 겸손한 척을 버리자면, 적어도 궁법에 있어서는 고려 제일이라 자부하고 있네.”
“하면, 제 이야기를 듣고 이를 가납하여 주십시오.”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는 겐가.”
이성계의 표정에 순수한 호기심이 어렸다.
결코 중인 출신 일개 산원의 말이라 무시하는 기색은 없었다. 하기야 부처의 안배를 얻은 사람이라 찰떡같이 믿고 있으니, 몽주의 말을 무시할 리는 없었다.
“만약 상황이 어려워져 외성을 지키기가 어려워진다면, 동문을 허락하십시오.”
“……?”
“이후 병졸을 내성으로 대피시키면서 장군께서는 상황을 보아 외성 안에 적이 대거 난입할 때, 불화살을 쏘아 정방을 불태우십시오. 미리 정방의 지붕에 기름을 끼얹어 놓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정방이라…… 그곳을 불태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몽주는 잠시 말문을 닫았다. 화학적으로 설명할 이유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좋은 핑계거리는 있지 않은가.
“부처께서 그리하라 하셨다는 겐가?”
믿기 어렵다는 이성계의 말투에, 몽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안배는 기이막측(奇異莫測)하여 감히 중생이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따른다 하더라도 크게 실할 것은 없으니, 따르시라 말씀을 올릴 뿐입니다.”
어차피 성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정방에 불을 지른다고 손해 볼 건 없지 않냐는 말이었다. 그에 이성계 또한 과연 그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처님을 따름에 어찌 주저함이 있겠는가.”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가급적 아군이 근처에 없고 장군께서도 멀리 떨어지셨을 때 불을 지피십시오. 제 느낌일 뿐입니다만, 뭔가 큰일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 알겠네. 내 잊지 않음세. 내 무산한풍이면 불을 붙인 화살도 족히 이백 보 이상 날릴 수 있으니, 내성 동벽에서도 관중할 수 있을 것일세.”
무산한풍(無算寒風)은 이성계의 활로 그 이름이 유명했다. 평범한 자는 활시위를 거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강궁에다, 명사수로 이름 높은 이성계라면 그의 말마따나 불화살도 이백 보(약 360미터)를 능히 넘기고 목표를 적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재개된 수성전은 몹시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북면과 동문을 동시에 공격당하는 와중 마침내 동문이 뚫렸는데, 그것이 몽주의 조언을 따른 이성계의 명에 의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외성의 고려군이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내성의 동문으로, 혹은 성벽 위로 급히 물러난 후에, 내성 동면에서 불화살 한 발이 홀로 허공을 가로질러 정방 위에 떨어졌다.
기름에 적신 지붕 탓에 금세 정방이 타들어 갔지만, 성을 범한 흥분에 젖은 북원군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삽시간에 외성 안으로 물밀 듯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폭발이 있었으니, 정방을 중심으로 사방 백 장의 공간이 삽시간에 불길과 폭압의 엄습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폭발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았다. 수십 번이나 크고 작은 폭발이 이어지며 공중으로 불똥을 뿌려 댔고, 문자 그대로 불붙은 똥 덩어리의 폭격을 받아 외성 안은 불지옥으로 변했다.
그 불지옥 안에 있던 거의 대부분 북원군인 인간들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는, 폭발이 끝난 후 오래토록 이어진 훈육(燻肉)의 냄새로도 짐작이 가능했다.
훗날 고려사(高麗史)에 남은 폭발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화룡이 난입하여 횡포를 부림에, 성을 범한 무수한 적병들 중 불에 타지 않은 자들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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