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64)
손끝으로 만지작거림에 앵도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분명 자고 있음에도 지아비의 손길이 익숙하고, 그것이 자못 기뻐 잠결에도 웃음을 흘리는 모양이었다.
몽주는 이불 아래에서 손을 놀려 앵도를 매만지면서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신혼에 떠나 있기를 4개월.
그녀의 서방에 대한 연정은 그 시간 동안에도 더 깊어졌으니, 지아비가 군공을 세운 것에 기뻐하기보다 자칫 크게 상할 수도,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에 놀라 눈물을 보이기도 했었다.
흑나찰이란 별명이 무색한 모습이었지만, 몽주에게는 그만큼 앵도가 더 어여뻐졌을 뿐이었다.
몽주는 새벽 닭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고양이를 희롱하듯 잠자는 앵도를 괴롭히다가 방을 나섰다.
사랑채로 넘어와 보료 위에 앉아 서궤(書几)를 당긴 몽주가 먼저 서궤 위에 펼친 건 장부였다. 몽주의 한양부 시전에 대한 대차대조표인 셈인데, 석삼이가 적은 것으로, 문자 대신 그림으로 표기된 것이었다.
점 세 개는 비노요, 물결은 선로였으니, 제대로 된 장부는 언감생심이겠으나 몽주가 없는 동안 시전의 상거래 현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파악이 가능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몽주의 가게는 대박이었다. 장부로 보건대, 몽주는 고려에 이처럼 사치품을 소비할 부유층이 많았는지 상상도 못했다.
가격 또한 몽주가 북방으로 가기 전에 비해 세 배 이상 올랐음에도 시전에 재고가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는 단순히 비노와 선로에 대한 기본적인 수요 이상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먼저 작은 이유는, 너무 작은 생산 규모로 인해 종종 공급이 끊기자 사재기하려는 자들이 생긴 것인데, 특히 지방으로 상행을 나가는 보부상들이 비노와 선로의 지방 수요를 체감한 후부터 그리된 경향이 강했다.
하나, 이 작은 이유는 큰 이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에서 비노와 선로를 크게 구해 간 것인데, 명의 홍무(洪武) 연호를 쓰기로 결정한 것을 알리기 위한 고려의 대명(代明) 사신단에 비노와 선로가 공물로 포함된 탓이었다.
신돈의 호의가 있었는지, 나라에서 강탈하는 대신 저렴하게나마 대금을 지불하고 사 가자, 안 그래도 유명한 비노와 선로의 사치품으로서의 수요가 더욱 폭증한 것이었다.
“꼭 북한 같네…….”
몽주는 장부를 덮으며 실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북한에서 김씨 독재자의 취향이 북한 주민들 사이의 유행이 되는 것처럼, 고려 또한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비노와 선로를 취하자, 그 가치가 훨씬 고평가된 것이었다.
하기야 어떤 사회든 지배층의 소비 행태가 전체 민중의 소비 기준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할 것이었다.
어쨌거나 몽주는 고려 내에 숨어 있는 상업력을 비노와 선로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으니, 앞으로 고려의 발전에 기대가 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도 가졌다.
재물을 숨기고, 쌓아 두는 행태를 벗어나, 자금을 시중에 회전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게 장려하고, 그를 위한 제도적인 뒷받침만 있다면, 고려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가 될 터인데…….
“후우.”
몽주는 깊게 숨을 골라 내쉬었다.
남쪽 끄트머리 땅에서 일주일 만에 한양부로 가다랑어를 가져올 수 있는 수운 능력 즉, 생각보다 뛰어난 유통과 통신 능력도 연이어 떠올리며 고려라는 전근대 국가 속에 새싹처럼 돋아 있는 근대 국가로의 발전 가능성이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에서 사는 동안, 근대 국가로의 변화에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들 중 17, 18세기라는 시점에 이르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몽주는 내심 조급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나,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전 천몽 이전의 역사에서도, 그리고 지금 현대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역사에서도, 제아무리 발빠른 선진 국가라고 하더라도 근대 국가로 성장하는 타이밍은 공히 17세기 이후였다.
이는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 있어, 근대 사회를 낳기 위한 갈등과 봉합, 그 후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필요한 시간을 전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번 천몽 속에서도 마찬가지니, 아무리 몽주 자신이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려 하더라도, 그 어마어마한 변화를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조금만 당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김’의 주체가 고려이고, 고려인이면 되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 속에 파묻혀 썩고 있는 새싹을 조심스레 키워 그 뿌리가 단단히 땅 속에 자리를 잡게 만드는 것.
그것이 몽주가 이번 천몽 속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해야겠지만, 일단은…….”
몽주는 다시 중얼거리며 서궤 위에 새로운 것을 올려 펼쳤다.
그것은 포은 정몽주가 보낸 두 번째 서찰이었는데, 내용은 간단했다.
이틀 후에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찰은 이틀 전에 온 것이니, 다른 일이 없다면 정몽주는 오늘 몽주 앞에 등장할 참이었다.
짧은 서찰을 눈으로 금세 훑은 몽주는 이내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다.
정몽주(鄭夢周)라는 고려 말 희대의 천재를 만나는 건 내심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가 지난 서찰에서 밝힌 ‘중대사에 대한 논의’에 대해 짐작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다시 꿈속으로 오기 전, 현대에서 재상, 두신과 그에 대해 연구를 해 보았지만, 여러 가능성들이 제시되었음에도 ‘이거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아마 그 얘기는 나오겠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이른 봄의 새벽, 몽주의 고민은 날이 밝도록 이어졌다.
* * *
포은이 말에 올라 집을 나선 시각은 예정보다 다소 늦어졌다. 지우(知友) 삼봉(三峰)이 어제 찾아와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인 탓이었다.
늘 세상의 모든 고민을 떠안고 사는 삼봉이었지만, 어제 술안주로 특별히 삼은 것은 동녕부 정벌에 관한 고민이었다.
성균관 사예(司藝)인 그가 생도들과 요성 정복 결과에 대해 논함에 있어, 그 자신의 생각이 먼저 확고히 결정되지 않아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옛 고려의 영토였고, 오늘날 상께서 천명하신 반원 정책의 백미이며, 요동에 떠밀려 살고 있는 고려민들을 나라 안에 포용하게 된 요성점령은 어떻게 보더라도 위대한 업적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왜구의 득세로 남방이 위태로운 차에 북방에 수만의 군병들이 묶여 있어, 남쪽의 백성들이 고난을 겪는 것과 더불어 군세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재정을 소모하고 있는 것은 사대부로서 결코 마땅하게 여길 수 없는 법이었으니, 삼봉이 그리 혼란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밖으로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중화 정통 제국인 명과의 외교 관계에 있어, 고려의 요동 점령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 또한, 친명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그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봉이 겪고 있는 심란(心難)은 고스란히 정몽주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했다.
“서둘러라. 유시(오후 다섯 시~일곱 시)가 되기 전에 한양부에 갈 것이다.”
정몽주는 삼봉으로부터 전염된 듯한 고민을 떨쳐 낼 겸, 따르는 호위와 종복들에게 소리쳐 명하였다.
일행들이 탄 말들의 발굽 소리가 좀 더 경쾌해졌기에 정몽주는 잠시 승마의 흥겨움으로 머릿속을 비울 수 있었지만, 그 또한 이내 익숙해지면서 다시 그의 머릿속에서는 고민이 이어졌다.
안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지금 만나러 가는 석 산원, 아니 석 승(丞) 또한 크게 보면 어제 삼봉과 나눈 고민과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당에서 명으로 보낼 사신단 중에 포은 선생을 선택할 것은 자명한 바, 선생께서는 아국이 점유한 요하 이동 지역을 명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사력을 다해야 할 것이외다.홍무제는 동방의 사정에 어두워 아국의 군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를 이용해야 할 것이며, 더불어 과거 원 황실과 요동 심왕의 연대에 비추어, 명과 고려의 상부상조 가능한 관계를 홍무제에게 알려 깨닫게 해야 할 것이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동방 이학의 비조(鼻祖)로 명망 높으신 포은 선생이시라면 해내실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위하여 내 선생께 한 사람을 천거하려 하오……(중략)…… 사정이 있어,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밝히지 못하였으나, 석 산원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큰 공을 세웠으니, 그가 비록 이학에 밝지 못한 장사치 출신이라 하나, 그의 안목을 무시하지 말고, 그의 조언을 심사숙고하길 바라오.
더불어 포은 선생께서도 석 산원과 친분을 두어 그의 행실과 속내를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길 기대하는 바이오. 기우일 수 있으나, 그의 운명이 어쩌면 범인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만장(萬丈)할 수 있음을 예감하였기 때문이오.]
이성계 장군으로부터 전해진 서찰의 내용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으니, 이미 예고된 명으로의 사신단으로서 책무해야 할 사안에 대한 확인과 석몽린이라는 자에 대한 추천 내지, 경계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앞의 것이야 정벌군이 북방으로 향한 이후부터 고민해 왔던 부분이나, 뒤의 것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서찰의 내용으로 살피건대, 이성계는 석몽린이라는 자에게 크게 감명받은 기색이었다.
이는 정몽주에게도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그는 이성계가 장차 고려를 되살리고 지탱할 기둥이라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가 자칫 괴인(怪人)에 현혹되어 엉뚱한 망상을 할까 저어한 것이다.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고려에 귀순한 이래로, 이성계가 고려에 적응하고 완전히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자신을 벗하여 자신의 조언을 천금처럼 여겼으니, 정몽주로서는 동북면의 정예를 이끌고 있는 실력자인 이성계를 장차 고려의 변혁에 필요한 무력으로서 손잡고자 했다.
한데,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가 이성계에게 영향을 주어,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이성계를 이끈다면, 정몽주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고려의 미래를 제대로 얻을 수 없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여,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석몽린이라는 자가 궁금했고, 그자에 대한 불안감과 동시에 고려에 대한 걱정도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안감은 결코 헛된 것도 아니었고, 이성계를 두고 질투를 함도 아니었으니, 석몽린이라는 자에 대해 알아보자, 금세 그가 영공 신돈과 선이 닿은 자임을 알 수 있었다.
본디, 한때 당여로 오해를 받을 만큼 신돈의 권세 초창기에는 정몽주와 신돈의 관계는 돈독하였는데, 이는 반원 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의기투합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상께서 왕후를 잃은 후 크게 실의하면서 신돈의 독재가 이어짐에, 중화로부터 ‘권왕(權王)’이라고까지 칭할 정도가 되자 정몽주는 신돈 또한 요승이요, 간신이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러니, 신돈의 당여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자가 이성계의 마음에 든 것을 두고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 장군께 경계심이 남아 있으시니, 다행이라 할 것이야…….”
정몽주의 중얼거림은 말굽 소리에 파묻혀 다른 이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 * *
정몽주가 석몽린의 집에 닿은 것은 아직 해가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공손히 상호 간에 인사를 나누어 첫 만남을 조심스레 시작하니, 아직 저녁 식사를 할 때는 되지 않아, 먼저 사랑채에서 차를 나누었다.
요성에서 몽주가 세운 군공에 대한 사례(謝禮)를 시작으로 대화가 이어졌고, 이성계 장군에 대한 가벼운 대화도 있었는데, 몽주는 정몽주의 물음에 몹시도 형식적으로만 대답하였다.
그것이 답답했던 것인지, 정몽주는 찻물을 들이켜곤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들어오며 보니, 뒤꼍이 소란스럽더이다. 집을 넓히는 것이오?”
“조촐한 살림에 집을 넓힐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만, 소인이 시전의 장사치이기도 하기에, 시전에 댈 물건을 만들 공소를 곁에 지을 따름입니다.”
비노와 선로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공장을 짓고자 하였는데, 복잡한 시전에 지을 수는 없었기에 차라리 집에 붙여 짓는 게 낫다 여겨 그리 진행하고 있었다.
몽주의 대답을 들은 포은이 문득 무릎을 치며 잘되었다는 듯 말하였다.
“안 그래도 석 승이 나라 안에 소문이 파다한 비노와 선로를 만들어 판다 하여 부탁할 것이 있었소.”
“부탁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하명하십시오, 사성 나리.”
“하면 편히 말하겠소. 지난번 명국으로 행차한 사신단에 비노와 선로가 공물로 실려 간 것을 아실 것이오. 한데, 그 물건들이 명국에서 평이 좋았는지 명 황실에서 다음 사신단에 비노와 선로를 대량으로 가져올 것을 요구하였소.”
“…….”
“아, 물론 공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은 아니오. 다만, 다음 사신단의 행차는 매우 중대한 것이기에 공물의 양 또한 크게 할 것이므로, 비노와 선로의 양 또한 이전에 비해 크게 늘 것이니, 그 준비에 차질이 없게 해 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손한 대답 후, 몽주가 시선을 아래로 깔고 가만히 있자, 정몽주는 답답한 마음이 한결 심해졌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대화도 길지 않았으나, 그는 석몽린에게서 특별한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이성계라는 실력자가 매료될 만큼의 무언가가 전혀 엿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이성계가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감탄할 리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몽주는 자신이 석몽린의 탁월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거나, 반대로 석몽린이 감추려 노력하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크흠…….”
정몽주는 다시금 찻물을 들이켰다.
현대에서 정몽주가 언급한 ‘중대사’를 두고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대신 몽주는 정몽주라는 인물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문무겸비의 천재, 동방 이학의 비조, 기개 넘치고 호방한 성품.
현대에서 그저 충신의 아이콘 정도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고려 당대에서 정몽주는 그야말로 ‘먼치킨’이었다.
정몽주의 고려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 외에도 적지 않았던 충신들 중 유독 그가 고려 존속의 상징이 되었던 것은, 그만큼 그가 탁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지를 얻는 것과 아닌 것 사이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기에, 역사 속에서 이성계가 그렇게나 정몽주에게 집착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렇다고 정몽주가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건 아니었다.
학자이고, 관료이며, 정치가인 그는 완벽일지언정, 자연인으로서의 정몽주는 ‘다혈질’이며 ‘청개구리’인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고려 말 또 하나의 선각자(先覺者)였던 삼봉 정도전이 ‘좀생이’이며 ‘덜렁이’였던 것과 비교되는데, 아무리 한 사회를 변화시키고, 혹은 반대로 지탱하는 천재들이라고 해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어딘가 모자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마 세상의 거의 모든 천재들도 이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에서 재상, 두신과 연구한 끝에 그런 결론을 얻었기에 몽주는 일부러 지극히 평범한 장사치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중대사’가 무엇인지 모르고, 정몽주의 의도도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굳이 먼저 의중을 드러내 낭중지추(囊中之錐)가 될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정몽주가 다혈질이 분명하다면, 그리고 속내에 자신을 두고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면, 이처럼 아무것도 선보이지 않는 자신에 대해 답답함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지금 몽주의 눈에 언뜻 비치는 정몽주의 모습, 그러니까 한 손으로 연신 수염을 쓰다듬고, 다른 손으로는 도포 자락 아래로 버선발을 계속 주무르고 있는 모습에서 갑갑한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이성계가 분명 정몽주에게 자신에 대해 무언가 언질을 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뜬금없이 자신과 중대사를 논하라고 하였다 한들 정몽주가 그리 순순히 따르지 않을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다.
아닌 게 아니라, 문득 정몽주가 입을 열어 몽주의 가슴이 철렁거릴 말을 하였다.
“직설하여 묻겠소. 석 승은 정녕 천운을 읽을 수 있소?”
“소인이 근자에 행한 몇몇 지레짐작에 운이 따른 건 사실이나, 그것을 두고 천운을 읽는다는 건 과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나 이성계는 비밀로 해 달라는 몽주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정몽주에게 몽주의 ‘특별함’에 대해 슬쩍 밝힌 모양이었다.
다만, 부처의 계시자나, 안배에 대해 운운하지 않는 걸 볼 때, 유자(儒者)인 정몽주를 생각하여 천운이라 돌려 말한 듯했다.
몽주가 놀란 마음을 잘 감추고 준비하고 있던 대답을 담담히 하자, 정몽주의 이맛살이 한층 더 구겨졌다.
이성계는 석몽린이 천운을 볼 줄 안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례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나, 석몽린이 알려진 것보다 더 큰 군공을 세웠다는 건 밝혔으니, 정몽주는 그것이 정벌군의 장궤 안에 적힌 정체 모를 폭발과 연관이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험난한 중에 창름을 지킨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공인데, 그것보다 더 큰 공이 있다하면 달리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 눈앞의 약골이 큰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살상했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떤 수단을 동원했든 혹은 장궤의 표현 그대로 ‘화룡’을 불러들인 것이든, 석몽린이 그와 연관이 있다면 이성계 장군이 충분히 감명받을 만했다.
그러므로 정몽주는 한 번 더 단도직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운이 좋다하니, 내 석 승에게 조언을 구하겠소. 이번에 명에 행차할 사신단은 진주사(陳奏使 : 황제에게 통고하기 위한 사신)이나 주청사(奏請使 : 국사에 대해 황제에게 청하기 위한 사신)의 역할도 할 참이오. 이는 그대도 참여했던 요동 정벌과 관련하여 점령한 요동 일대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기 위함이오. 하나, 이는 결코 쉬이 이뤄지기 어려운 일임이 자명한 바, 석 승은 이 곤란한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시오?”
“지고한 국정에 소인 같이 모자란 자가 감히 조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짧은 생각이나마 말씀드린다면, 옛 고려의 무쌍함을 두고 중원에 퍼진 소문을 이용하여 홍무제가 고려에 대해 고평가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며, 아직 건재한 북원에 맞서 명과 고려의 연합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설득한다면 곤란한 현 정국을 타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정몽주의 수염을 쓰다듬는 속도가 빨라졌다.
확실히 어리석은 백성들과 달리 대국을 볼 줄 아는 자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래 봤자 특별한 건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석몽린이 밝힌 것은 이성계의 서찰에 담긴 것과 같았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도당의 외교 관료들도 다들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하여, 정몽주는 다시 말문을 열었는데, 목소리에 답답함이 완연히 묻어 있었다.
“그게 전부인 게요? 석 승의 말은 이미 알 만한 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오? 또, 그것들 모두 변변찮은 방책임을 모르는 것이오? 홍무제가 아무리 고려의 상황에 어둡다 한들, 하명하면 금세 청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며, 북원을 두고 명과 고려 간의 상부상조 관계를 추구케 하는 것은 고려의 나약함을 그가 깨닫게 되면 통할 리가 없지 않소. 하니, 다른 방법을 알고 있다면 거리낌 없이 밝혀 보시오.”
거리낌이 없을 리가 있나.
몽주의 머릿속에는 분명 다른 방법들이 있었다. 다만…….
‘이 떡밥을 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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