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67)
* * *
최무선에 대한 호칭은 화극 어른으로 결론지었다. 화극(火克)은 그가 새로 지은 호라고 하였으니, ‘불 화’에 ‘이길 극’ 자를 쓴 그 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 가능하였다.
그를 폭죽을 관리하는 이로 명에 데려가기로 하자, 몹시도 기뻐하였는데, 최무선은 자신이 화약의 제조법을 알아냈다는 걸 서슴없이 밝히기도 하였다.
하나, 함토에서 염초를 추출하는 법은 아나, 아직 초전(硝田 : 염초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했는데, 그는 어떻게든 염초를 대량으로 생산할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아마 이번 명국행이 그 기회가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으리라.
몽주로서는 아직 최무선과 고려의 화약 보유에 대한 방침을 두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이번 기회에 최무선과 교류하면서 그 가닥을 잡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잘하면 고려의 화약 보유 시점을 조절하면서 동시에 최무선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듯싶었다.
“허허, 자네 포은 선생과도 안면이 있는 겐가.”
그와 후에 다시 만나기를 약조하면서 정몽주를 찾아갈 참이라고 밝히자, 최무선이 반색하였다.
“안면이 있기는 하나, 인연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어허.”
안타까워하는 폼이, 몽주가 정몽주와 친분이 있다 하면 따라나설 참인 듯했다.
“포은 선생이 이번 사신단의 서장관을 담당하시기에 지난날 저와 작은 오해가 있던 것을 풀려 함이니, 화극 어른과 같이 가기 어려운 점을 이해하여 주십시오.”
“아닐세. 어차피 사신단에 동행하면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니, 개의치 말게. 그나저나 이렇게 조카사위를 만나게 되고, 또 좋은 인연이 생겨 기쁘기 하염없군. 하하하.”
그렇게 최무선과 일단 헤어졌다. 돌이켜 보면, 최무선을 영입(?)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었다.
그가 처가댁과 멀게나마 혈연이 닿은 덕이기도 했고, 또 화약 제조법을 알되 대량 생산 비법까지는 알지 못한 덕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고려에 화약 제조법을 재촉하는 것보다 그 제조법을 더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공돌이 심정’을 최무선이 가지고 있던 덕이었다.
“탁기, 길을 잡으시게.”
“예, 따르십시오.”
몽주가 최무선과 마방(馬房 : 마구간도 갖춘 큰 주막)의 봉놋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탁기는 정몽주의 자택 위치를 알아 두었다.
꽃샘추위도 숨을 죽인, 오후의 따뜻한 볕 아래 길을 걷던 몽주는 생각을 하다가 탁기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만약 명국이 요동을 취하려 하고, 고려가 그에 저항하려 한다면, 과연 지켜 낼 수 있을까?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전장이 아닌 곳에서 감히 병가(兵家)의 일을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아무래도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명국이 중원을 차지하고 승천 중이라고 하나, 아직 지난날 원이 가졌던 모든 영토를 얻은 것은 아니며, 변방에서 명의 주권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세력도 적지 않지 않은가. 게다가 원이 북방으로 쫓겨났으나, 이제 다시 세력을 정비하여 강대한 군력을 회복하였으니, 명국이 요성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지 않겠나. 또, 요성의 고려군은 숱한 나날에 호인(胡人)들과 싸우며 정예로 거듭난 자들이고, 범처럼 용맹한 장수들이 그들을 이끌고 있으니, 나아가 무찌르지는 못하더라도 수성하여 상황을 보전(保全)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몽주가 일부러 이해 못하겠다는 듯 반론하자, 탁기는 의외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리께서 주신 것에 따르면, 연(燕 : 연국, 북경 일대)만으로도 고려 전체를 노려볼만 하니, 만약 강남(江南 : 양쯔강 이남)에서 양초만 제대로 지원한다면 다른 지방의 군사를 동원할 필요 없이, 족히 10만의 정벌군이 몰려올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요성군도 감당하기 어려움은 물론, 앞으로 군세가 줄어들 걸 생각하면 요동을 지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할 것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 시점이 몇 년 후여야 한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할 뿐이었다. 명도 지금 당장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만약 요동의 점유를 영구화하자면, 그 소중한 시간이 흐르기 전에 명국으로부터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다.
“자네, 생각보다 열심히 공부하였군. 급하게 물은 것인데도 막힘이 없어.”
그에 탁기가 뻣뻣하던 표정을 풀며 살짝 웃었다.
“주신 서책들과 전도(戰圖)가 몹시 흥미로워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덕입니다.”
“하하, 그러한가. 다행이군. 앞으로도 틈틈이 병서(兵書)와 지도를 줄 터이니, 배우고 익힘에 소홀치 말게. 장차 크게 쓸모가 있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북방으로 가기 전에, 탁기에게 공부를 권하면서 여러 병서들과 직접 그린 지도를 건넨 바 있었다.
병서야 이곳 고려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나, 지도는 아니었으니, 현대에서 연구하며 보았던 것들을 대략이나마 떠올려 그린 것으로 당대 중원과 고려의 군사 정보가 제법 충실히 적혀 있었다. 아마 고려에서는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제대로 된 전도(戰圖)일 것이었다.
그렇게 탁기와 간간이 말을 나누며 발걸음을 놀린 끝에 마침내 정몽주의 자택 앞에 이르렀다.
포은의 집은 제법 크고 단정하였으니, 그가 ‘도덕의 으뜸’이라 칭송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태어나길 유복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몽주는 포은의 자택 앞에서 잠시 서 있었다. 이미 이곳에 온 목적은 분명했으나, 그것이 과연 최선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으므로 포은을 다시 만나는 것에 주저함이 있은 탓이었다.
그를 만나는 건 쉽게 말해서 ‘양다리’를 걸치기 위함이었다.
한 다리를 신돈에 걸쳐 두고, 다른 다리는 포은에게 나아가 이성계에게 두는 것이었으니, 신돈을 뒷배로 하되, 그가 몰락할 가능성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이미 역사와 많이 달라져, 신돈은 예전의 신돈이 아니었다.
역사에 비해 그의 당여들이 더 많아졌고, 경시감의 장악을 통해 고려의 물산을 쥐어 국가 단위의 금력 또한 갖추었다.
게다가 몽주가 도운 덕에 보의 문권을 이용, 정적들의 공세를 줄였으니, 왕이 신돈의 축출을 결심한다 하더라도 역사처럼 쉽게 이룰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나, 분명한 건 머지않아, 왕은 신돈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건 신돈이 국익을 저버리면서까지 왕에 반하는 움직임을 준비하는 것만 보더라도 분명했다.
공민왕과 신돈의 충돌.
당대에서 그 결론을 짐작하는 건 쉽지 않으나, 아무래도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는 몽주로서는 신돈의 손을 선뜻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포은을 찾았으니, 이는 결코 신돈의 정사(政事)를 방해하려 함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가 부사를 이용하여 고려의 실질적인 군력에 대한 사실을 명에 전하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신돈이 몽주에게 바란 것은 직접 이번 사신 행차를 망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맡은 부사를 관찰 내지,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이 고려의 요동 점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자 할 뿐이었다.
몽주가 가지고 있는 방책은 그런 의도를 결과로 확실하게 만들 만하다 할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경향을 가지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탁기가 앞서 했던 말을 역으로 생각해, 연이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고, 강남이 이를 지원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포은이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터인데…….”
몽주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대문 앞에 서서 포은의 종복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 * *
정몽주가 열혈남인 게 다행이었다.
좀스럽게 토라지기보다, 차라리 면전에서 화를 터뜨리는 그의 성품 덕에, 몽주는 포은과 비교적 쉽게 재회할 수 있었다.
물론, 분위기가 그리 화기애애하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한양부에서 좋지 못한 만남을 가졌던 탓에 포은의 반응은 불퉁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석 승이 찾아올 줄은 몰랐소. 추대현에서는 냉랭하더니, 어찌 이곳 개경까지 찾은 게요?”
몽주는 우선 그의 성난 마음부터 달랠까 하였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본론으로 직행하기로 하였다.
어차피 포은이라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 것이고, 나아가 몽주가 하는 조언이 맘에 든다면 과거지사는 금세 잊을 대인군자(大人君子)이기 때문이었다.
“그날에는 송구하였습니다. 사정이 있어 마음을 열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그날 미처 밝히지 못했던 말씀을 올리기 위함입니다.”
“음…….”
포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수염을 매만지자, 몽주는 그가 이제는 들을 필요 없다고 자신을 내칠까 살짝 마음을 졸였다.
하나, 그러기에는 그의 호기심이 더 큰 모양이었다.
“할 말이란 게 무엇이오?”
마침내 포은이 기다리던 질문을 던지자, 몽주는 우선 그가 차기 대명사신단의 수행원 중 하나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렇소?”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었는데, 얼핏 쓴웃음이 스친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그 미묘한 변화의 이유가 궁금했으나, 그렇다고 포은이 몽주가 사신단에 합류하게 된 내막(內幕)을 짐작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설령 몽주가 신돈과 가깝다는 걸 알고, 신돈에 의해 그가 사신단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 요성 공략을 지원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던 신돈이었으니, 그가 사신단의 목적을 방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는 건, 제아무리 포은이라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날, 한양부에서 말씀드린 건 사성 나리께서 이미 말씀하셨듯 지극히 원론적이고, 부족한 부분이 분명한 방책들이었습니다. 하나, 그 방책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명분이니, 그것들은 고려에게는 물론, 명에게도 좋은 핑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핑계라고 함은, 명이 그 주장들의 미비함을 알고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고려의 군력이 중원에 퍼진 소문에 비해 부족하다는 점을 명이 알고, 또 그렇기에 고려와 손을 잡고 북원에 대항하는 것이 생각보다 실익이 없다는 걸 명이 눈치챈다 하더라도, 명 황실은 고려가 내세운 명분을 이유로 고려와 손을 잡게 될 것이니, 여기에는 한 가지 변수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 변수라는 것이 무엇이오?”
잠시 생각을 하다, 끝내 묻고 만 포은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묻어 있었다.
몽주 또한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며 뜸을 들였다. 이제부터 해야 할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작년에 홍무제가 태자를 제외한 황자들 여럿에게 번왕(藩王)의 위를 내렸음을 아실 것입니다. 특히 그중 황위와 가까운 이남부터 사남까지는 북방의 번국을 내려 명의 변방을 책임지게 하였으니, 진민왕 주상(秦愍王 朱樉), 진공왕 주강(晉恭王 朱棡), 연왕 주체(燕王 朱棣)가 그들이며, 각각의 번들은 태원(太原), 서안(西安), 북평(北平)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
“만약 명이 요동을 벌하려 한다면 연국(燕國)이 군사의 중심이 될 것이니, 연왕이 이를 원하겠습니까?”
“홍무제의 심기를 거스르기 원치 않는다면 마땅히 명에 따라야 하지 않겠소?”
“연왕이 스스로 공을 세울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 지금 연왕의 나이는 고작 열둘. 번왕위를 받았으나 여전히 남경에 머물고 있으니, 그가 작은 야망이라도 있는 자라면 자신이 번왕으로 다스리기 전에 연국이 상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 몽주가 포은에게 생각을 설파하니, 포은으로부터 의문과 감탄, 그리고 신중과 결의의 반응이 연이어 보였다.
“자칫 크게 경을 칠 수도 있는 계책이오.”
“이는 모두 차선의 방책일 뿐입니다. 일단 정공법을 시행하시되, 상황을 보아 임기응변의 필요성이 있을 때 택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문득 포은이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것이 석 승이 본 고려의 천운이오?”
“적어도 고려를 스치는 천운은 될 것이니, 그 천운을 잡는 건 사람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어찌 세상의 일을 하늘에만 맡기겠소.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해야 하는 법이지.”
포은이 마무리하며 크게 한숨을 쉬니, 그의 안색이 조금은 환해진 듯하였다.
실제로 명국으로의 행차가 결정되고, 고려의 요동 점유를 인정받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인지한 이래로, 그 해결책을 모색하느라 심중의 부담이 커질 대로 커져 있었다.
한데 오늘 석 승이 찾아와 새로운 방책을 제시하니, 설령 그것이 완벽이 아닐지언정, 그의 심적 체증(滯症)을 완화시키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원함을 느끼던 포은은, 문득 실소하며 말문을 열었다.
“석 승, 우리 솔직해져 봅시다.”
“……?”
“그대는 신돈의 당여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몽주는 당황하기보다 과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개와 호방함이 넘쳐 의문을 두고 돌려 말함이 없는 포은의 모습이 예상했던 것과 같아 차라리 반가웠던 것이다.
몽주 또한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합니다.”
“어찌 그대와 같은 자가 한낱 요승이고, 간신인 적자(賊子)를 받드는 것이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도로써 군주를 섬기되, 그것이 불가하면 섬김을 그만둔다(大臣者 以道事君 不可則止 : 대신자 이도사군 불가즉지) 하였소. 신돈을 따른다 함은 그대가 신돈을 군주로 모신다 함일 것이오. 하나, 신돈은 도로써 받들 만한 자가 아니니, 그대 또한 신돈을 따름을 멈추는 것이 어떻겠소?”
“포은 나리의 말씀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돈을 도로써 받든다는 건 우스개일 것입니다. 하나, 소인은 유자(儒者)가 아니며, 한낱 장사치에 불과하니, 도보다는 리(利)를 따를 것입니다.”
“어찌 도를 버리고, 리를 따른다 함이오! 사사로운 이익에 취하여 도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간신의 길임을 모르는 것이오!”
예상했듯 포은이 불같이 화를 내었으니, 유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나리께서는 제 말씀을 왜곡하시지 마십시오. 소인은 사사로운 이익을 따른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언급한 리는 나라의 리. 이를 국익이라 한다면, 국익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 또한 궤변이오. 그대의 말대로라면 신돈을 따름이 국익을 따름이라는 말이지 않소.”
“적어도 당금에 이르기까지는 다르지 않다 여기고 있습니다.”
“뭣이……!”
“신돈이 아니었다면, 억울하게 노비가 된 그 많은 이들이 양민에 복원되었겠습니까? 신돈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농민들이 빼앗긴 땅을 회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신돈이 아니었다면 지난 정벌 때, 이만에 가까운 군병을 더하고, 육만이 넘는 군병들을 먹일 양초를 연이어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신돈의 공이며, 나라의 이익이니, 나리께서는 그것들이 모두 부도(不道)함이라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몽주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늘어놓으니, 포은 또한 곧바로 반론치 못하였다.
사실, 정벌에 기여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그 또한 세족의 일원으로서 신돈이 권세 이래 행한 일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할 만했지만, 몽주는 지난날 서원에서 유생들이 논쟁하며 신돈의 정책에, 이론에 기반하여, 찬성하였던 것을 떠올리며 과감히 지적한 것이었다.
포은이 동방 이학의 비조이며 도덕의 으뜸이라 칭송받는 자가 분명하다면, 그 또한 억울한 노비를 방량(放良)하게 하고, 빼앗긴 토지를 회복하여 나라의 근간이 되는 농민을 늘리는 게 의(義)이고, 도(道)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라 믿은 것이었다.
과연 포은의 입에서는 차마 그를 부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잠시 후 대소가 터졌고, 웃음이 커지다 못해 포은은 보료를 손으로 두드리고 박장(拍掌)하였다.
“하하하! 어찌 장군께서 자네를 두둔하고 감명 깊어 하셨는지 알 것 같군. 혀에 기름을 두른 듯하니 한우충동(汗牛充棟 : 많은 책)을 독파했음에도 선뜻 반문하지 못하게 하지 않은가. 하나……!”
웃음 속에 감탄하다 문득 포은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으니, 언뜻 살벌한 기색마저 느껴졌다.
“석 승은 스스로 한 말에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오. 훗날 신돈이 나라의 이익을 저버렸을 때, 그대의 선택을 내가 지켜볼 것이오. 이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니, 지금 그대의 말이 진심이어야 하며, 결코 간신이 추궁을 회피하기 위해 혀를 놀린 것에 불과해서는 안 될 것이오.”
몽주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였다. 대장군처럼 기세를 드높여 으름장을 놓는 포은의 모습이 조금 두렵기도 했으니, 그가 문무겸비의 천재라 불리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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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사(臨時使)로서 진주사(陳奏使)가 명으로 떠난 것은 입하(立夏 : 양력 5월 5, 6일)즈음이었다.
사신단은 요동을 거쳐 배를 타고 산동으로 건너간 후 남경으로 향하기로 되었으니, 길고도 험한 노정임에 틀림없었다.
“아,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탁기와 화극 어른(최무선) 등을 일행으로 부사의 보좌로서 사신 행차에 임한 몽주는 원로의 시작부터 찝찝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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