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68)
영당각 내 고요함이 실로 무거웠다.
주인의 자리에 신돈이, 객의 자리에 이인임이 있었으니, 그들이 침묵한 채 마주한 것만으로도 범인들은 같은 자리에 있기 불편할 만큼 무거운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요성에서 크게 상하여 개경으로 돌아온 이인임은 즉시 부상을 이유로 수문하시중의 지위를 내려놓았다.
왕은 그를 한 차례 위로한 뒤에 그의 사직을 받아들였었다.
왕은 이인임에게 하루 속히 쾌차하여 수시중의 자리에 복귀하라 명하였으니, 수시중의 자리를 공석으로 둔 것만 봐도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나, 이인임은 자리에서 떨쳐 일어난 후에도 개경의 저택에 머문 채 두문불출하였고, 한 달이 넘어 왕이 사정을 물어 왔음에도 후유증을 빌미로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두고 충심을 의심할 수도 없었는데, 이인임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는 하나, 소문대로 한 다리가 크게 상하여 곧게 펴지 못하는 듯 크게 절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폐도 상한 듯 기침이 끊이지 않았고, 원기가 성치 않음을 보여 주듯 피골이 상접하기까지 하였으니, 제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그를 두고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인임이 신돈을 스스로 찾아 방문한 것은 실로 의외의 일이었다.
그건 그의 건강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몸이 성한 시절에도 신돈과 독대한 바 없었음을 두고 보면 더욱 그러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신돈과 금상의 복인인 이인임은 많은 일에서 손을 잡았음이 분명하건만, 정작 두 사람 간의 의견 조율은 사람을 두고 오가는 형식으로만 이뤄졌었으니, 평장사 정조송이 주로 그 역을 담당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인임이 신돈을 방문한 것 자체가 영당각 내를 얼어붙게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또, 지금 이인임이 성주 이씨 세족의 가주로서 여전히 권세가라 하나, 지금은 관직이 없는 야인(野人)의 신분이니만큼 오히려 이전에 비해 더 온화한 분위기인 게 맞았다.
그렇기에 처음 방문하여 인사의 말이 오간 끝에 이인임이 부탁이라면서, 혹여 자신이 수시중에 다시 임하거든 금상이 자신을 요성으로 또 보내려 할 때 그를 만류해 줄 것을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신돈은 그 후의 전개를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하나 이인임이 이어서 꺼낸 말은 신돈을 긴장하게, 아니 긴장 이상의 충격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신돈으로서도 제대로 들은 것이라 믿기 힘든 말이었던 것이다.
“나는 금상이 혐오스럽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신돈은 왕이 이인임을 시켜 또 자신을 시험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였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표현부터 너무 과격하였고 직설적이었으니, 설령 왕이 이임인을 사주하였다 하더라도, 이인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왕이 알게 된다면 분개할 정도의 과한 언사였던 것이다.
사실 지난 시절, 이인임이 왕의 의중을 빌려 신돈의 충심과 진심을 시험한다 여긴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에도 이인임이 직접 나선 적은 없었으니, 지금의 상황은 결코 그답지 않은 것이었다.
이인임은 한참이나 자신이 금상에게 실망한 점을 두고 설파하다 문득 신돈에게 물었다.
“저하께서는 정치가 무엇이라 여기십니까.”
쉽게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그건 질문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질문을 한 의도가 답을 듣기보다는 스스로 그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입신하기 전에는,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정치는 왕명을 받드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정치라는 놈은 천 개의 얼굴을 가진 괴물이라, 저마다 입장과 지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니, 백성이 보는 정치, 관리가 보는 정치, 권력자가 보는 정치가 다르므로, 그중에서도 저는 관리로서의 정치에 몰두해 왔었지요. 내 권세는 오직 왕으로부터 기인한다 여기며, 왕명이 올바르고 곧게, 그리고 권위 있게 바로 서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길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 말에 신돈은 이인임이 한 고백의 충격에서 벗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임이 한 말은 그가 봐 왔던 이인임의 처세와 일치하였던 것이다.
그 또한 금상의 정치에 영향을 준 적은 있으나, 그것은 금상이 바라는 바였으며,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금상의 위가 보다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나의 정치는 너무나 명쾌하고 분명했습니다. 금상이 마침내 결정하여 명하시는 것이 곧 법이요, 진리였으니, 나는 한 점의 의혹이나 고민 따위를 가질 필요가 없었지요. 하나…… 이제는 아닙니다. 관리로서의 정치를 바라며, 왕명에 기인한 정치의 실상을 깨달았음이니, 그건 결국 권력자 중에 권력자인 왕의 정치에 휘둘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왕의 정치라 하셨소? 대체 왕의 정치란 무엇이오?”
“왕의 정치는 문자 그대로 왕의 정치. 왕은 오직 하나요, 왕이 정치를 함에 협상과 타협은 필요 없으니, 세상의 모든 왕이 각각 왕의 정치를 가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금상의 정치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다시금 주변에 엿듣는 귀가 없는지를 살피게 만들 발언이 거침없이 이인임의 입 밖으로 나왔다.
하나, 그런 가슴 졸임은 오직 신돈만의 것이었는지 이인임은 과격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금상은 용기가 없으니, 이는 영공 저하께서 잘 아시는 바, 오로지 권세와 찬양만을 좇을 뿐이고, 스스로 역경과 비판을 앞장서 깨칠 마음이 전혀 없지요. 또 금상을 위해 심신을 다해 바친 신하조차도 단 일말의 권세와도 족히 바꿀 뿐, 그 가상(嘉尙)함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이 또한 저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금상의 부도덕함은…… 굳이 그 불결한 말을 입에 담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궁중에서 밤마다 벌어지는 짓은 이미 알고 계실 테니까요. 지난날 헛된 정치의 이상에 눈이 멀어 차마 직시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압니다. 금상의 정치는 혐오하지 않을 수 없고, 혐오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없이 빠져들 말이었으나, 신돈은 성급하게 굴지 않고, 스스로 자제하였다. 여기서 이인임을 꾸짖어 그의 발언에 거리를 두는 것이 마땅했으나, 실상 그의 말속에 거짓을 찾을 수 없기에, 다만 그저 그를 위로하되 동의를 표하지 않을 뿐이었다.
또, 아직 이인임이 진정 그리 생각한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듣자 하니, 요성에서 몸만 상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상한 듯하구려. 속내를 다스려 심중의 분기를 가라앉히시오. 오늘의 말은 없던 일로 할 터이니…….”
“내 심중에 분기가 있는 건 사실이나, 머릿속은 평소보다 더 차가우니, 오늘 한 말은 모두 진심입니다.”
“흐음…….”
신돈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이쯤에 이르자, 이제는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만이 그의 입술 위에서 움찔거렸다.
“도대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오? 내게 무엇을 바라기에 그런 외람된 말들을 늘어놓는 것이오?”
“나는 금상이 왕좌에 앉아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왕좌에 있어서는 안 될 자는 마땅히 내려와야 하는 법이고, 그것을 거부한다면 억지로라도 끌어내려야겠지요.”
‘맙소사…….’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탄식이 신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인임은 진심이었다.
차라리 작은 떨림이나 긴장, 혹은 두려움이라도 보였더라면 의심할 수 있었을 테지만, 너무나 담담히 반역을 입에 올리는 그의 모습은 일말의 의심조차 불허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이인임 이자가 무엇을 믿고 자신에게 그런 반역의 발언을 서슴없이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영공 저하께서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뜻이 같으니 힘을 합하여 그 뜻을 이룸이 어떠하십니까.”
신돈의 주먹이 질끈 움켜쥐어졌고, 그 주먹 안에 죄없는 보료의 비단이 구겨졌다.
“뭔가, 크게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명국으로 간 한공의에게 저하께서 어떤 명을 내렸는지 알고 있습니다.”
“……!”
“만약 그 의도가 그저 금상의 위신을 조금 깎는 것에 불과하다면, 고쳐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금상은 기어코 영공 저하를 쳐 내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미 알고 계실 테지요. 저하의 마음속 진심을 직시하셔야 할 때입니다.”
메말라 홀쭉한 이인임의 얼굴 위에서 유독 안광만이 희번덕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나는 조만간 다시 수시중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할 것이며, 썩은 나무에 물을 주어 완전히 문드러지게 할 것입니다. 그 썩은 나무를 쳐 내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정의요, 평온임을 인정하게 만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하하.”
그 웃음은 낮고 말라 있었으나, 그 어떤 광소보다도 시원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그건 위선을 버린 자의 해탈이거나 어쩌면 자포자기일 수도 있었다.
그쯤에서 신돈의 표정에도 이전과 달리 숨김이 없어졌다. 이는 이인임의 공세에 밀린 것이기 전에, 어쩌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결코 이 자리에서 뱉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질문이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중요한 건 폐위(廢位)보다 계위(繼位)가 아니겠소?”
“금지옥엽(金枝玉葉)을 쥐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
멈칫하던 신돈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이 흘렀다.
‘이인임…… 이자가 아주 작심을 하고 왔지 않은가.’
* * *
현대로 치면 중국 대련시(大連 : 다롄) 어디쯤 되는 곳에 고려촌이 있었다.
따로 이름은 없이 그저 고려민들이 만들었다 하여 고려촌이라 불렸다.
요동 지역에 고려촌이라 불리는 크고 작은 마을은 수십에 이르기에 따로 이름이 있다면 좋으련만, 언제 적도(賊徒)들을 피해 도망치고, 중화의 군병에 쫓겨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촌명(村名)까지 정하고 알리는 건 차라리 사치였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런 걱정을 덜고 있었다.
고려가 요성을 점령하고, 요하(遼河) 동쪽 지역 곳곳에 군진(軍陣)을 둔 덕으로, 고려촌은 물론 한족의 마을까지도 복속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고려촌도 고려의 요동 점유가 이어진다면, 곧 이름이 붙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쨌든 대략 일백 호가 넘는 작지 않은 그 마을에 고려의 진주사(陳奏使)가 머물기를 사흘째, 망종(芒種 : 양력 6월 5, 6일)에 이르러 온 장마로 인해 배를 타지 못하고 발이 묶여 있었던 것이었다.
몽주가 잠에서 깨어난 건, 고려촌 내 어느 주민의 집으로 사신단이 머무는 동안 빌린 곳이었다.
물론, 말이 빌린 것이지 실제로는 몰아낸 것이라 다소 미안한 마음이 있었으나, 이 시기에 왕명을 받드는 사신단이 지나는 군현의 모든 것을 이용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밤은 몽주에게 있어 일주일짜리 꿈이었다. 현대에 돌아갔다가 돌아온 탓이다.
“호접지몽(胡蝶之夢)이 따로 없군.”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혼란스러운 마음이 장자(莊子)의 고사와 같았으니, 첫 천몽에서 부족장의 삶을 꿈이라 여겼을 때는 몰랐던 것이었다.
이제 이 고려의 삶 또한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 현대인 진몽주가 석몽린을 꿈꾸는 것인지, 고려의 석몽린이 진몽주를 꿈꾸는 건지, 정신줄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자칫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삶은 언젠가 현대인 몽주가 가질 새로운 미래의 과거이며, 몽주는 몽주로서 석몽린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으니, 크게 혼동할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의복을 갖춰 입고 집을 나서자, 새벽녘 파리한 하늘이 그를 맞이하였다.
그 하늘을 보니 구름이 보이지 않아, 드디어 오늘은 배를 타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여, 그리 멀지 않은 나루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후 보인, 정박된 선박을 보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휴, 저걸 타고 바다로 나간다니…….”
나루터에 가녀리게 매달려 있는 그 목조선은 길이가 채 20미터에 못 미치는 작은 배였으나, 명색이 대선(大船)이라 불렸으니, 고려 수군의 것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도 겁이 나는 게 정상인 입장에서, 나룻배를 조금 크게 만든 수준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설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해(大海)가 아닌, 발해만(渤海灣)을 건너는 것뿐이고, 그마저도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사이에 줄지은 묘도 군도(廟島群島)를 따라 건너는 것이기에 비교적 안전한 항로였다.
그것이 진주사의 경로가 요동까지 와 산동으로 건너기로 결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역시나 구명조끼나 튜브를 마련해야겠지.”
이번에 현대에서 얻은 소득 중 하나가 정몽주가 조난당했다가 겨우 구함을 받은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으니, 처음 사신단에 합류하였을 때 중요한 것을 잊은 것처럼 찜찜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역사적으로 정몽주가 난파당했던 시기는 지금보다 거의 2년 후의 일이며, 숱하게 중원과 고려를 오갔던 그가 매번 조난을 당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번 사신 행차 때 난파당할 거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하나, 껄끄러운 것이 있었으니, 정몽주가 난파당했을 때도 서장관이었고, 정사(正使)가 홍사범이었다는 점이었다.
즉, 이번 사신단과 똑같은 구성인 것이었다.
실제로 홍사범은 수장(水葬)되어 죽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부사(副使) 한공의도 죽은 나이만 알 수 있을 뿐 어느 순간부터 사초에서 사라졌으니,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현대에서 재상과 두신으로부터 잔소리를 제법 들었어야 했는데, 이것을 핑계로 ‘놀이’를 그만두고 싶은 거냐는 오해도 샀었다.
물론, 죽어서 놀이를 중지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은 이유가 비단 조난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원과 고려의 현 상황 속에서 사신단에 합류한 것의 위험성을 두고 한 오해에 가까웠다.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상황이랬던가.’
어쨌든 이미 사신단에 동참한 몽주로서는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고, 당장 찜찜한 것부터 해결해야 했으니, 아무래도 고려촌 아이들이 차고 노는 돼지 오줌보라도 빼앗아 구명 튜브로 삼아야 할 듯했다.
“일찍 일어났군.”
나루 근방에 서서 생각의 흐름에 머릿속을 맡기다 보니,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기침하셨군요, 포은 나리.”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올리자, 포은은 성큼성큼 다가와 몽주의 곁에 서며 말문을 열었다.
“왕명을 수행함에 하루가 아까운데 이렇게 며칠 동안 발이 묶여 있으니, 심란한 마음에 절로 눈이 뜨이더군. 그래도 오늘은 배를 띄울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야.”
“네, 다행…… 입니다.”
그리 대꾸하곤 몽주는 곧바로 다시 마을로 돌아가 승선 준비를 할까 하였다. 한데, 갑작스런 포은의 물음 때문에 그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이보게, 석 승. 자네는 정치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물음을 던지는 투가 오늘 조식의 반찬이 무어냐고 묻는 듯 가벼웠건만, 정작 질문 자체는 무척 심각한 것이었다.
“소신이 답하기에는 너무…….”
“어제 이곳 촌장과 조촐하게 대작(對酌)하였네. 어찌 고려를 떠나 이곳에 정착하였는지를 묻자, 촌민들 저마다 사정이 다르나, 대개 학정(虐政)을 못 이겨 떠나왔다 하더군. 차라리 이곳에서 적도와 중화의 군병들에게 당하는 것이 고려의 탐관오리와 학리(虐吏) 아래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니, 이는 가혹한 정치는 사나운 범보다 무섭다는 공자의 고사가 재현된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 말을 하는 촌장은 이곳에 고려의 관리가 올까 두려워하는 기색이기도 했네.”
“…….”
“명색이 고려의 신하요, 성균사성에 직하고 있는 이로서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더군. 그리고 그 고민들은 모두 하나의 물음에 다다랐으니,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게 무엇이냐 함일세. 그러니…….”
말을 늘리며, 바다를 향하던 시선을 돌려 몽주를 본 포은이 다시 물었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 사양치 말고 말해 보게. 자네가 생각하기에 정치는 무엇인가?”
아무 거라도 답하라니, 무어라도 내뱉어야 했기에 몽주는 잠시 뜸들이다 입을 열었다.
“정치란 사람들에게 부족한 모든 것들을 배분하기 위해 일련의 권위적 행위와 제도를 통칭함이 아니겠습니까.”
그 대답은 고교 시절 교과서나 정치학개론 서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정치를 사회적 희소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정의한 것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나름 가장 정확한 정의라 여겨 말한 것이건만, 포은의 입가에는 실소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 답 또한 애매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정작 중요한 부분을 회피하는 말이니, 그 권위를 어디서, 어떻게 얻는다 함인가.”
“그야 물론…….”
그야 물론, 그 권위는 주권이니, 현대라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할 것이고, 국민이 일시적으로 선택한 대리자들이 그 권위를 행사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이 시대에서는 그저 허황된 소리에 불과했으니…….
“……왕이 아니겠습니까.”
“거 보게. 결국 정명론(正名論)에 불과하지 않은가. 군이군(君而君) 신이신(臣而臣) 민이민(民而民). 왕이 왕답게, 신하가 신하답게, 백성이 백성답게. 공자께서 천명하신 바이나 참으로 공허하지 않은가. 왕이 왕답지 않고, 신이 신답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때도 백성은 백성답게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칫 참람한 발언을 할 뻔했는지, 포은은 굳게 입술을 닫으며 잠시 크게 호흡하였다.
“후우, 아침 댓바람부터 격동할 뻔하였군. 미안하이. 많은 서책을 읽어도 현실의 한 줌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함에 가끔은 속이 끓어오르곤 하네. 이 또한 나의 부족함일 것이야.”
몽주는 연신 심호흡하며 심중의 화를 다스리는 포은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가 정치를 모른다고 하나, 적어도 그는 정치를 맡길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여, 몽주는 그를 위로하고픈 마음이 들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리 생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치(政治)는 정치(正治)하기 위한 도전과 노력이라고 말입니다.”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도전과 노력이라…… 거참, 편리한 변명일세.”
불퉁하게 대꾸하는 포은의 입가에 잠시나마 미소가 떠 있었다.
* * *
산동에 닿은 건 요동을 떠난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날이 좋은 편이었으나, 바람이 종종 강해져 제법 큰 파도에 선박이 크게 흔들렸으니, 그 덕에 몽주는 뱃멀미로 사람이 죽을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어쨌든 산송장의 모습으로 다시 육지를 밟게 되자, 절로 하늘에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기다리고 있던 명의 관원이 고려의 사신단을 마중 나왔다.
근처 군현의 장인 그 관원은 그의 관택(官宅)를 비워 사신단을 쉬게 하였는데 대접이 아주 좋았다.
하기야, 이 시절 외국의 사신을 대접함에 지극하였으니, 그것은 중화제국의 위신에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하여, 실상 중국도 외국의 사신이 자주 오는 걸 내심 꺼려 했으니, 그만큼 소모되는 비용이 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잘 대접받고 충분히 쉰 후, 다시 남경을 향해 여정을 떠날 참이었는데, 문득 일단의 군병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고려의 사신단을 포박하거나 겁박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분히 사나운 기세로 서둘러 남경으로 갈 것을 강요하더니, 마차 몇을 준비하여 사신단을 실어 급하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마차의 수가 부족하여 좁은 자리에 불편하게 앉은 탓에 실로 죄수를 호송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그런 불편함은 이내 별 게 아니게 되었다.
“우욱!”
뱃멀미를 다스렸더니, 마차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관도(官道)가 있으나, 현대의 도로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마차 또한 현대의 차량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길…… 좀 천천히 가자.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울상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명의 군병에 닿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 말이 들린다고 해도, 고려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었다.
다행히 남경까지 마차로 가는 건 아니었고, 대운하 덕에 몽주는 죽어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몸의 고됨이 사라지자, 심란(心難)이 찾아왔다. 대관절 어찌 이리 서둘러 남경으로 향할 것을 재촉하느냐는 것에 대한 물음이었다.
사신단이 논의를 해 보고, 역관(譯官)을 시켜 군병의 장에게 묻기도 했으나, 답을 구하지 못했다.
‘이러다 이 기세 그대로 주원장 앞에 내팽개쳐 취조를 당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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