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7)
“그것이 구작의 것이었습니까?”
중랑장의 추임새에 신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부들이 나라를 휘두른 시간은 무려 백 년에 이르렀으니, 구작과 그의 후손들이 왕명으로 그의 토지를 보호받기 시작한 지도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왕의 명은 하늘과 같으나, 선대왕의 명만큼은 꺾기 힘든 법. 그것도 몇 대조를 거쳐야 다다를 수 있을 정도의 선대왕께서 허하신 일을 후대의 임금이 뒤집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구작의 후손들은 그들의 토지를 계속 소유할 수 있었다. 왕실이 그들로부터 토지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들이 죄를 지을 때뿐이었기에 오랫동안 그들을 주시하였다. 하나, 구작의 후손들은 다들 구작을 닮았는지 요사하게도 뇌물로 성씨를 사고 개경에서 벗어나 남경에 터전을 잡고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다.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노력은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아이고!”
그때, 먼 곳에서 새된 비명이 들려오자, 신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구작의 요망한 피가 옅어질 때도 되었지. 선대의 잔꾀조차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후손이 나올 때도 된 것이다.”
“하면, 이참에 석 호장네 토지를 모조리 압류하실 요량이십니까?”
중랑장의 물음에 신돈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먼 곳의 토지는 왕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명분도 부족하고. 그저 개경과 그 주변의 것이면 충분하다. 어차피 구작이 사들인 공전 대부분은 그곳에 있으니까. 어쨌거나 오늘부로 남양 석씨가 가진 개경 땅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신돈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의 일이 그에 대한 임금의 신임을 한층 두텁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의 미소 띤 얼굴 아래로 옅은 그림자가 스쳤다.
‘기반이 없다라……. 그도 그렇군.’
어리석은 젊은이의 말이었지만, 신돈의 머릿속에 남은 말도 있었다.
임금의 마음이 떠난다면 그는 당장 무너질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맞다. 임금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신은 당장 단매에 맞아 죽을 것이다.
세족들이, 유학자들이, 중들이 그를 향해 칼을 갈고, 몽둥이를 깎고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바였다.
그걸 알기에 임금으로부터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리라.’는 맹세문을 얻었으며, 역모가 아니면 벌을 주지 않겠노라 다짐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이 만사형통케 하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꺼어어―!”
그 순간, 또다시 숨넘어가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기에 신돈도 씁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열 장만 치라 하여라. 죽어도 곤란하니.”
“명을 전하겠습니다.”
김일기 중랑장이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신돈은 다시 그와 임금, 그리고 훗날에 대한 생각에 침전하였다.
* * *
태형(笞刑).
곤장을 맞는 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나오는 형벌이며, 오형(五刑) 가운데 장형과 함께 가장 가벼운 벌이었다.
하나, 가장 가볍다는 건 다른 형벌에 비해서 그렇다는 의미다.
죽거나(死刑), 귀양 가거나(流刑), 중노동하는(徒刑) 것보다는 나을 테니.
몽주는 열 장을 맞았다…… 고 했다.
다섯 장을 맞을 때, 이미 정신 줄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곤장과 달리, 고려의 태형은 대쪽으로 물을 뿌린 볼기의 맨살을 쳤다.
여기서 대쪽은 댓조각 그러니까, 대나무를 쪼갠 걸 의미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다지 충격과 고통이 크지 않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절대 아니다.
대쪽을 한 움큼 모은 다발로 때렸으니까.
두 장을 맞을 때 벌써 볼기의 살이 터져 피가 튀었다. 대쪽이 볼기의 살을 파고 들고, 다른 대쪽과 이가 맞물리며 그 살을 찢어 낸 탓이다.
태형 수십 장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게 결코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태 열 장을 맞은 몽주는 정신을 잃은 채 옥에 가두어졌다.
잠깐 정신을 차릴 때도 있었지만, 절망과 온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에 이내 다시 기절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물로 범벅이 된 아버지 즉, 몽린의 아비 해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무어라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저 윙윙 귓가를 울릴 뿐이었다.
다만, 그래도 해민의 얼굴을 보니 마음은 놓였는지, 몽주는 드디어 기절하는 대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몽주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추대현의 호장댁, 그의 방안이었다.
볼기 쪽에서 두툼함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의원이 와서 치료도 마친 모양이었다.
솔직히 이 시대의 의원이 무슨 짓을 해 놓았을까 걱정스럽긴 했지만, 일단 통증이 크게 느껴지진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대신 체온이 많이 올랐는지 갈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생각 같아서는 물을 달라 바로 말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바로 근처에서 몽린의 부모님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진작 몽린이에게 사정을 알렸어야 했네. 그랬다면 몽린이도 더 조심했겠지.”
“그렇긴 하지만, 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네요. 차라리 계속 기방이나 다닐 것이지, 어찌 금오위 중랑장을 만나고, 심지어 개경까지 쫓아간 건지! 도무지 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게 다 우리가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운 탓입니다.”
“난 꼭 나쁘게만은 보지 않네. 이번 일로 몽린이도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지 않나.”
“아이고, 빼앗긴 토지가 백이십여 결이에요. 자내는 그게 아깝지도 않아요? 게다가 내가 보기엔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생각이 있다면 나랏일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자체가 죽을 짓이라는 걸 눈치챘겠지요.”
“허, 그야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으니 그런 게지. 그리고 개경 쪽의 땅들은 기어코 언젠가는 돌아가게 되리란 것을 짐작하지 않았나. 때가 왔을 뿐인 게야. 그리고 마냥 빼앗긴 것도 아니고, 판 거 아니오.”
“네에, 팔았죠. 그리고 곧바로 공명첩을 사야 했죠. 공명첩 몇 장을 토지 백이십 결에 산 셈이니, 참으로 큰 이문이군요.”
“그 공명첩도 좋게 보면, 몽린이 역을 빼는 데 쓸 수 있지 않았나. 우리 아들을 위해 썼다고 생각하시게.”
“그 공명첩이 아니라도, 이미 비싼 효자문을 받아 세워 놨잖아요! 그거로도 요역은 충분히 면한다는 걸 몰라요?”
“자내, 너무 목소리가 크네. 그러다 몽린이 깨겠어.”
몽린의 부모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몽주는 애써 자는 척을 해야 했다. 지금 잠을 깬 걸 들키기엔 너무 미안했다.
잠시 후,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어쨌든 난 몽린이가 이번에 크게 깨달았으리라 보네. 물정이 어떠한지 느낀 바가 있을 걸세.”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허어, 어찌 아직까지도 역정이 남았나. 몽린이도 선조께서 왕실의 공전을 사는 바람에 우리 집안이 몸을 사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일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야. 그러니 그걸 알리지 않은 우리 잘못도 있는 것 아니겠나.”
“에휴.”
몽린의 어머니 주이의 한숨이 무겁게 들렸다.
“무엇보다 몽린이가 살아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 토지야 다른 곳에도 많이 있지 않나.”
* * *
“간밤에 무슨 일 있었니? 표정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어젯밤엔 얼굴이 좋더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버지는 이미 가게 열러 가셨고, 어머니와 단 둘이 마주한 아침 밥상머리에서 몽주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억지로 미소를 짓긴 했지만, 지난 밤 꿈에서 저지른 짓을 생각하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심지어 엉덩이도 아픈 느낌이었다.
어제 잠들기 전에 잘해 보겠노라 다짐씩이나 한 게 쪽팔릴 일이었다.
꿈속에서 첫 두 달의 시간 동안 그가 한 짓이라곤, 그나마 이번 꿈속 인생의 장점이랄 수 있는 집안의 재산을 일부 날려 버린 것이었으니…….
몽린의 부모 간 대화를 들으니, 빼앗긴 토지가 제법 큰 모양이었다.
120결.
아까 일어나자마자 확인해 봤는데, 1결이 대략 최대 1만 5천 제곱미터 즉, 4천 6백 평 정도에 이르렀다.
물론, 그 시대의 1결이라는 게 넓이의 개념이라기보다는 토지의 생산력과 관련된 것이라, 상급 생산력을 가진 토지는 그보다 훨씬 작은 면적이 1결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최대 수십만 평의 토지가 그의 말 한 마디 실수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토지를 잃은 것도 잃은 거지만, 사실 몽주가 쪽팔려 하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신돈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어리바리하던 자신의 모습이 그것이었다.
확실히 준비가 덜 되긴 했었다.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면…… 이라는 상상은 무수히 많이 하긴 했지만, 그가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상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첫 꿈속의 삶이 부족장이었고, 사실상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전제 군주였기에 응당 다른 꿈속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거나, 비슷한 지위의 인물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삶만 생각하다가 별것 없는 지위의 인물이 되었으니, 준비가 덜 되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 그래도 신돈과의 대화를 생각하면, 그를 설득하는 것이 실패하여 큰 손해를 입은 걸 생각하면, 정말 몽린의 부모에게 미안했고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무리 준비가 안 되었다고는 하지만, 꿈속 시간으로 몇 주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고, 실제로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한데, 막상 신돈 앞에서는…….’
분명 권력자 앞에서 절로 움츠러들고, 경외하는 몽린의 육체에 영향을 받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14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차이와 고려라는 공간적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않고, 자신이 현대인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보다 더 나은 지식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으니, 자신이 한마디만 하면 당대인들이 감탄하며 따를 것이라 믿고 자만했다는 것이었다.
그 자만으로 인해, 정작 입을 열고 나서야 신돈을 설득할 때, 해도 될 말, 해서는 안 될 말을 거르고 있었으니, 설명과 설득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내 주장 따위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응? 뭐라고?”
무심코 중얼거린 몽주에게 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얘는, 싱겁긴…….”
그러고 보면 머릿속 준비만 부족한 게 아니었다. 가장 기본적인 배경인 그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생각도 부족, 마음가짐도 부족, 그리고 정보도 부족, 모든 면에서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던 신돈에게 옴짝달싹할 새도 없이 당한 것이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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