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71)
* * *
후에 듣기로, 태자가 주최한 연회는 ‘파티’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사극에서 보듯 술을 나누고, 풍악을 울리는 흥청망청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저 조촐한 만찬을 나눌 뿐이었고, 오히려 회담에 가까웠던 것이다.
몽주가 태자전에 들어갔을 땐 음식마저 치워져 있었기에, 그가 본 모습은 큰 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태자의 탑위(榻位 : 좁고 긴 의자)가 있는 회담장이었다.
천만다행인 건, 몽주가 입시하였을 때, 태자가 부재중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를 기다리던 중에 잠시 나간 모양인데, 덕분에 몽주는 포은으로부터 만찬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 대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으니, 자연히 태자가 그를 찾은 연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본디 외교란, 시대에 상관없이 실무진이 대략적으로 합의한 후에 외교의 대표가 나서는 법이었으나, 고려와의 금번 외교에서는 태자가 직접 주도하였으니, 이는 협상 상대의 수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즉, 고려가 종 2품의 지밀직사사를 정사로 보냈으니, 명 또한 적어도 정 3품에 해당하는 직위로 상대해야 했다.
하나, 명의 천자가 태자에게 전적으로 위임했으므로, 조정의 대신들을 청할 수는 없었기에, 태자는 그의 스승들을 협상단으로 임명하되, 스스로 임하여 외교의 예를 갖춘 것이었다.
물론, 태자는 동석하는 대신, 따로 단을 놓아 그 위에 탑위를 두고 앉아 협상장을 내려다보는 식이었다.
하여, 고려의 삼사가 태자에게 예를 표하고, 협상에 임하니, 실질적인 상대는 태자의 유학제거(儒學提擧) 송렴이었다.
그에 비해 고려의 삼사 중 전면에 나서 주도한 이는 정사나 부사가 아니라 서장관인 포은이었다.
정사 홍사범은 예와 관련된 절차만을 챙겼을 뿐, 실무에 들어선 후에는 포은이 앞장섰으니, 이는 그의 실력과 명성 때문이었다.
명에 사신으로 와 본 경험이 있고, 뛰어난 외교 능력을 선보인 데다가, 동방 유학의 비조라는 명성에 걸맞은 뛰어난 학문으로 명 유학자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 적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리가 화기애애했던 건 아니었다.
송렴은 실무에 들어가자마자, 고려왕이 약속을 어기고 요동을 점유한 것을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하였으니, 포은이 그에 대해, 요동이 옛 고려의 영토라는 점과 북원에 대항하여 명을 돕기 위해서는 요동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맞서면서, 초반부터 불꽃이 튀었던 것이다.
잠시 그리 맞서다, 송렴이 문득 태자와 시선을 마주친 후, 대화의 흐름을 바꾸었다.
명이 아량을 베풀어 고려의 요동 점유를 인정하되, 대신 고려왕이 명의 번왕위(藩王位)를 받으라 주장하였다.
이는 당연히 고려 측에 의해 거부되었으니, 첫째로 번왕위를 받으면 고려왕의 자존심이 훼손되며, 둘째로 자주국을 포기하고 명의 제후국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로 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고려가 번국(藩國)을 자처하면 훗날 혹여 명이 고려를 치려 할 때, 번국을 다스린다는 좋은 명분을 내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참을 입씨름을 하다가, 송렴이 다시 말을 바꾸었는데, 이번에는 요동의 심왕위(瀋王位)를 부활하여, 심왕을 고려왕이 겸하되, 대신 심왕은 명의 번왕으로 둘 것을 요구하였다.
이 또한 고려 측이 거부하였으니, 고려왕에서 심왕으로 축소된 것일 뿐, 앞선 것과 별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묵묵히 협상장을 내려 보고 있던 태자가 끼어든 건 그렇게 송렴과 포은의 주도하에 한창 양측이 대립하던 참이었다.
“천자께서 선언하시길, 명의 천명은 잃어버린 전통중화의 회복으로서, 저주스러운 호인들로부터 중화의 것을 되찾는 것이라 하셨소. 하여 지난날 원의 것은 모조리 명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니, 이는 원의 것 모두가 본디 중화의 것이기 때문이오. 천자의 뜻한 바대로 요동 또한 지난날 원의 것이기에 명의 것이야 하니, 이는 요동 또한 중화의 품에 있던 땅이기 때문이오.”
태자가 처음 말문을 열어 늘어놓은 말의 흐름과 함께 고려 삼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말마따나 천자를 들먹이고, 중화의 것을 내세우면, 그 말만큼 명이 물러날 여지를 스스로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고려의 사신들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별하여 협상에 나섰으나, 그들의 임무는 엄연히 전쟁을 회피하면서 요동의 점유를 외교로써 인정받는 것이다.
한데 태자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앞서 짚자면 결국 고려로 하여금 요동을 내놓으라는 요구로 결론이 날 우려가 있었다.
그럼에도 고려가 성급하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태자의 성품이 온화하여 천자와 달리, 문치(文治)를 선호한다는 평 때문이었다.
과연, 태자의 강경한 말들이 지난 후,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번에는 고려의 삼사들도 제안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상호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하나, 당금에 이르러 북으로 도망친 북원의 요망한 호인들이 중화를 향해 호시탐탐하는데, 중화 밖 여러 이국(夷國 : 오랑캐 나라)들 중 오직 고려만이 예를 알고 북원에 대항하였으니, 손을 맞잡을 만하다 할 것이오. 하여,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나선 황사(皇嗣 : 황태자)로서 요동을 탐하지 않는 대명(大明)의 도량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여기는 바이오. 하나, 고려 또한 대명의 은혜를 감사히 여기는 마음을 표해야 할 것이니, 그로써 천자께서도 고려왕에게 마침내 흡족함을 느끼실 것이기 때문이오. 고려의 사신들은 과인의 뜻을 따르겠소?”
태자가 묻자, 고려의 삼사들이 일제히 읍하며 동의를 표현하였다.
말이야 길었지만, 결국 고려에 요동을 양보하겠으니, 대신 다른 걸 내놓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고려 사신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원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당장 요동을 지킬 수 있다는 최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기에 마땅히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
다만, 무엇으로 감사를 표해야 요동과 견줄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감히 먼저 그것을 말할 수 없어, 삼사가 저마다 눈치를 볼 때, 태자가 다시 말문을 열었으니, 고려의 사신들로서는 예기치 못한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난 사신으로 고려로부터 들어온 물건들 중에 고려비노와 고려선로는, 대명의 높고 낮은 이들이 모두 쓰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었소. 과인은 비록 두 물목이 하찮다 하나, 새로이 난 그것들을 취하여 고려가 보이는 신의의 징표로 삼고자 하오.”
……라면서, 고려가 매년 1만 근의 비노와 선로를 바칠 것을 요구하자, 삼사들의 표정이 다시 어둑해졌다. 비노와 선로를 바쳐 요동을 얻는다면 나쁘지 않지만, 그 양이 너무 과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오가는 시세대로 환산하면, 도당의 재정이 휘청거릴 것이고, 재정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 많은 양을 생산해 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명에 공물로 바친 비노와 선로는 오직 일가(一家)에서만 만드니, 그 제조법을 알아내는 것이 문제였다.
국가지대사를 명분으로 강탈할 수도 있겠으나, 그 일가가 영공 신돈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하기에 쉬이 그럴 수 있다 장담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고려의 사신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태자가 문득 웃음을 흘리며 다시 말하였다.
“대명이 넓고 커 사람 또한 많고 많으니, 비록 두 물목에 불과하나, 고려와 같은 소국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하여, 과인이 아량을 다시 보이겠으니, 고려비노와 고려선로를 만든 장인들을 명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소? 듣기로, 고려 또한 그 두 물목을 생산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니, 그 두 가지를 처음 만든 자를 보내시오. 그리한다면 고려 또한 많은 공물을 매년 보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을 것이오.”
점점 더 솔깃해지는 태자의 제안에 고려의 사신들은 곧바로 동의하며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그에 대해 곧바로 그리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즈음에 삼사의 머릿속이 석몽린이라는 이름과 그가 사신단의 일행으로 함께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중 정사 홍사범이 석몽린의 정체를 밝히며, 그를 불러 보라는 말을 끝내 내뱉었다.
그에 태자가 크게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응하니, 태감(太監 : 내시)으로 하여금 석 모를 데려오라 명한 것이다.
* * *
포은으로부터 대략의 상황을 전해 들은 후, 몽주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애써 감추어야 했다.
비노와 선로가 왜 논의의 중심에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려의 요동 점유를 인정받는 대가라 치면, 비노와 선로의 제조법을 알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태자가 원하는 건, 그리고 고려의 삼사들이 은근히 몽주에게 강요하는 건, 그로 하여금 명에 투신하는 것이었으니, 그것이 너무나 어이없었던 것이다.
“영공 저하께서 반대하실지라도 자네가 그리하겠노라 한다면 어쩌실 수 없을 것일세.”
포은 또한 몽주가 명으로 가는 것 자체를 문제에 두기보다는 그가 신돈의 당여라는 점을 두고 걱정하는 편이었다.
하기야 전근대 시대의 중화제국은 현대의 미국 이상의 입지를 가지고 있다 봐야 할 것이고, 고려에게는 그야말로 세상의 중심일 것이다.
그러니 비록 명이 신생(新生)하였다고는 하나, 전통 중화제국으로서 이국(夷國)의 백성을 받아 준다 하니, 분명 대단한 유혹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포은을 포함한 고려의 사신들은 몽주가 그에 혹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고, 그건 몽주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마음에 품은 유자 출신이 아닌 장사치로서, 충심(忠心)을 가진 고려의 신하라 여기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아주 복덩이를 걷어차려고 하는구나.’
몽주의 진면목을 모르는 고려 사신들로서는 몽주를 포함한 백성 몇을 명으로 보내는 대가로 요동을 얻을 수 있다면 크게 남는 거래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몽주는 표정을 굳히며 포은과 다른 사신들의 말에 대답을 삼갔다.
고려에서의 천몽은 단지 그가 편히 살거나 출세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누가 뒤에서 떠민다 하더라도 고려를 벗어날 수 없었다.
‘꽝’이더라도, 고려민으로서 죽어야 하는 게 몽주의 철칙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 즈음에 태자전 내 시립하던 태감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으니, 통역이 아니더라도 태자가 다시 돌아옴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어수선한 마음을 서둘러 정리한 몽주가 사신들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태자의 입시를 기다렸다.
태자가 들어와 탑위(榻位)에 앉으니, 그의 음성과 더불어 통역이 목소리를 내었다.
“석 승은 앞으로 나서시오.”
마침내 부름이 있으니, 몽주가 고려 사신들을 돌아 태자의 아래에 섰다.
잠시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고민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 여겼다.
아무리 명 태자가 지고한 자라고는 하나, 몽주는 명의 백성이 아닌 고려의 백성이자, 신하이며, 지금 고려의 사신단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아까 연왕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으나 그거야 강요된 것이었고.
실제로 정작 태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으라 강요하거나, 그를 두고 비난하는 소리는 없었다.
“고개를 들라.”
깊이 읍하고 있던 몽주가 고개를 들어 마침내 태자의 얼굴을 슬쩍 확인할 수 있었다.
‘예쁘장하네.’
첫 인상은 그러했다. 태자의 보령이 아마도 17살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체구도 작고 얼굴에 어린 티가 많이 남아 있었다.
피부도 하얗다 못해 창백한 쪽에 가까웠으며, 많이 말라서 그런지 눈이 쏟아질 듯 컸으니, 차라리 공주였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라면, 병약 미소년 소리 좀 들었을까.
“그대가 석몽린이라는 자이며, 고려비노와 고려선로를 처음 만든 자인가.”
“그러합니다.”
“과인이 그대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겠는가.”
“귀띔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하면 곧바로 묻겠다. 그대는 대명의 백성이요, 신하가 되겠느냐. 그리한다면 고려는 요동을 얻을 것이니, 그대 또한 고려의 백성으로서 마지막으로 충성을 바칠 것이며, 명의 품에서 크게 쓰여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이다.”
몽주는 속내로 실소하였다. 문득 든 생각 탓인데, 태자가 입에 발린 말로 쉽게 비노와 선로를 취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명이 후에 요동을 취한 것은 사실이나, 당금의 사정에서 명이 요동을 얻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명이 철령위(鐵嶺衛)를 세워 요동을 취한 건 앞으로도 15년 이상이 지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으니, 그 전까지는 북원과 다투느라 감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단지 명의 위세가 크고 성장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요동을 이미 맡아 놓은 양 행동하며, 고려에게 요동을 주니 마니 하는 건 속된 말로 ‘뻥카’에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
몽주의 생각은 그러하나, 태자전의 분위기는 태자의 제안이 몹시도 너그러운 것이라 여기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찬물을 좀 끼얹어야겠네.’
마음으로 작정을 한 몽주가 말문을 여니, 금세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는 비단 명의 태자와 관리들뿐만 아니라, 몽주를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고려의 사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자 전하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리나, 소인은 고려를 등질 마음이 없습니다.”
공손한 자세와 말투였으나, 태자의 제안을 일언지하거절한 후, 일말의 변명조차도 붙이지 않는 몽주의 모습에 태자전 내 모든 이들이 당황하였고, 다음 순간 냉기 어린 시선을 던졌다.
태자 또한 딱딱한 표정으로 잠시 몽주를 내려다보다 다시 말문을 여니, 목소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대가 지금 어떤 결정을 한 것인지 아는 것인가? 그대가 고려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음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만약 소신으로 인해 나라에 우환이 생긴다면, 이는 불충한 일임에 틀림없으나, 소신에게 있어 충보다 중한 것이 효이니, 태자 전하의 너그러우신 제안을 따를 수 없습니다.”
“충보다 효라?”
“소신은 남양 석가의 삼대독자로, 8대에 걸친 조상님들의 묘를 가꾸어야 할 의무가 있으나, 만약 명에 투신하여 고려를 떠난다면, 묘를 가꾸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몽주의 말이 있자, 문득 명의 관리들 중에서 탄식이 있었고, 태자 또한 선뜻 대꾸하기 어려워하였다.
고려의 풍습이 아직 채 유학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명 또한 신생하여 유자(儒者)들이 이제 막 세력을 얻은 시기였기에, 유학의 향이 가득한 몽주의 대답이 대세에 의지하는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는 감히 몽주를 어리석다 탓할 수 없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송렴을 비롯한 태자의 스승들은 모두 유자였으며, 태자 또한 유학을 기반으로 후계를 준비한 덕이었다. 이는 고려의 사신들도 마찬가지로, 명망 높은 포은이 낮게 탄식함에 정사와 부사 또한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사실 고려의 장례풍습은 매장(埋葬)과 화장(火葬)이 뒤섞여 있고, 풍장(風葬)도 드물지 않았기에, 조상의 묘를 보살피는 것과 효를 실행하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는 바는 아니었다.
또, 왕실을 제외한 고려의 지배층은 오히려 사원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아직 주류였고, 오히려 일반 백성들이 매장하거나 풍장을 하는 편이었다.
하나, 남양 석가가 대대로 선산에 조상들을 모신 것은 사실이며, 그 묘소를 관리해 오는 것도 틀림이 없으니, 유자의 가문은 아닐지언정, 부유한 가문으로서 조상의 은덕에 대한 감사를 그렇게 표현해 온 것이었다.
태자의 제안을 거부한 이유로서 효를 내세운 덕에 그를 향한 가시 돋친 분위기는 일단 피할 수 있었다.
하나, 몽주가 그렇게 뒤를 불사한 거부의 대답을 한 덕에 지금껏 조성한 타협의 여지는 사라졌으니, 풀이 죽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태자도 기분이 저하되었는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이어 팔걸이는 툭툭 치며 허탈함을 표현하였다.
그로써 오늘의 협상은 없던 일로 마무리되는 중이었으나, 고개를 숙인 몽주만이 뜻을 품은 안광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남은 방책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앞서 태자가 입시할 때, 고개를 숙인 시야를 스쳐 지나간 것을 두고 착안한 것이었다.
비록 임시방편임에 틀림없고, 상황의 위중함을 볼 때, 섣불리 감행하기 두려운 것이나, 몽주는 자신이 본 것이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태자가 ‘힌트’를 준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여, 태자가 말문을 열어, 아마도 오늘은 이만 파하자는 말을 하고 있을 때, 몽주가 감히 끼어들었다.
“관자께서 이르길…….”
당연히도 그 순간, 여기저기에서 노한 음성이 터졌으니, 이국(夷國)의 하찮은 자가 태자의 말을 끊은 탓이었다.
하나, 몽주가 예의를 모르는 양 꺼낸 말에 대한 흥미가 자신의 말을 끊은 노여움보다 앞선 태자가 그 말을 전하게 하였다.
“곳간이 넉넉해야 예절을 알 것이요(倉庫實則知禮節), 의식에 부족함이 없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知榮辱) 하였습니다.”
“……!”
몽주의 뜬금없는 말에 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으니, 그건 분명 반갑고 놀라움에 대한 표현이었다.
하여, 태자가 소란스러움을 손을 저어 가라앉게 하자, 그곳의 모든 이들이 연유를 몰라 하였다.
그 자리의 벼슬아치들 대부분이, 몽주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것이 상황의 문맥상 뚱딴지같은 말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너무도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 관안열전(管晏列傳 : 관중, 포숙, 안영에 대한 장)에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인들의 어리둥절한 반응과 달리, 몽주는 태자가 보이는 반응을 눈치채고 내심 쾌재를 불렀으니, 그의 짐작이 맞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앞서, 태자가 입시할 때, 몽주는 그가 들고 있는 서책이 ‘관자(管子)’임을 알아보았고, 어쩌면 태자가 그 서책을 지니고 나타난 것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여겼다.
그리고 태자가 요동을 두고, 비록 요동이 명의 것이 아니나 쉬이 포기하지 못할 그 땅을 두고, 비노와 선로의 장인들을 탐하는 것을 보며, 태자가 진정 원하는 것이 관자 안에 담겼음을 거의 확신했다.
사실 이는 몽주에게 운이 따른 것이었는데, 지난번 현대에서 재상, 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관중(管仲)에 대한 것도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서의 ‘놀이’는 대개 그 시기에 가장 관건인 문제에 집중하나, 그렇다고 다른 부수적인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지난 ‘놀이’ 때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경제 발전을 두고 그 제도의 밑바탕을 받쳐야 할 사상이 동양에 너무 미비하다며 안타까워하였는데, 그에 대해 두신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관중으로 알려진 관이오의 사상을 언급하며, 기원전 7세기에 이미 유물론적 경제 사상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게 동양이고, 중국이라는 점을 알려 준 것이었다.
하여, 흥미가 생겨 다시 꿈을 꾸기 전에 관중과 그의 사상에 대해 짧게나마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이렇게 ‘관자’를 든 태자 앞에 당당히 말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태자가 관자의 사상에 감탄한 자라면, 애초의 포커스는 비노와 선로를 취하는 것이 아닌, 그로써 명의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나라의 부를 증진시키는 것이니, 만약 몽주와 장인들을 명으로 보내지 않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할 방법이 있다면, 태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대는 지금 한 말의 의미를 아는가.”
하여, 태자가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하문하니, 몽주 또한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자 한 자에 집중하여 대답했다.
“소인, 미천한 장사치이나, 운 좋게 관자의 뜻을 귀에 새긴 바 있습니다. 지난날 춘추오패의 제환공(齊桓公)을 우뚝 세운 명재상의 깨달음은 하늘에 닿았으니, 이천 년이 흐른 오늘에도 마땅히 따라야 한다 여기고 있습니다.”
태자의 대답은 없었으나, 숙인 시야의 위로 태자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게 보였다.
마치 ‘옳거니!’를 외치는 듯하였다.
몽주는 자신감을 가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태자 전하께서 관자의 뜻에 감명하시어 오늘 비노와 선로의 장인들을 원하신 것이라면, 관자(서책을 가리킴)에 담긴 ‘천하의 모든 것들은 사람의 힘씀에서 비롯된다.’의 의미를 마땅히 따르셔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람의 힘씀에서 비롯된다. 과연 그러하다. 하면 그대는 그 진의를 알고 있는 것인가.”
“사람이 힘쓰는 것이 재부(財富)의 부(父)이며, 토지가 재부의 모(母)가 아니겠나이까. 대저 드넓은 토지를 가진 명국이며, 그 땅의 주인이신 천자와 그의 후계이신 태자 전하께서 그 땅 위에서 명의 백성들이 힘껏 일하게 하신다면, 명이 재부를 쌓아 감이 하늘마저 낮다 하지 않겠습니까.”
몽주의 설명은 고전 경제학의 흔한 비유를 달리 표현한 것이었다.
생산의 3요소, 토지, 노동, 자본.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와 자본은 사실상 거의 하나이기에 노동과 토지로 부의 원천을 설명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현대의 지식이 과거에 너무 월등하여 오히려 쓰기 어렵다 하나, 현대의 지식을 담아 낼 과거의 ‘그릇’이 있다면 능히 쓰일 수 있으니, 과연 관자의 사상을 익힌 태자는 크게 감명한 양 탑위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면, 그대는 명의 백성들이 힘껏 일하게 할 방도를 아는가!”
“이미 관자께서 제(齊)나라를 부국으로 만드신 길을 따르시면 될 것입니다.”
이어, 몽주가 비노와 선로를 두고 고려와 명이 함께 물산을 일으켜 백성들로 하여금 상공업에 힘쓰는 방책을 전하니, 태자가 크게 동의하며 그의 생각도 밝혔다.
명 태자와 석몽린 사이에 오가는 말들이 열띠어, 태자전의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 분위기는 밤이 매우 깊을 때까지도 식을 줄 몰랐다.
관자의 사상에서 불꽃이 튄 논의는, 비노와 선로를 다루는 식을 거쳐, 경제 전반에 대한 토론에 이르렀고, 급기야 정치적인 모색과 심계까지 더해졌으니, 송렴을 비롯한 태자의 스승들은 태자가 이국의 무리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밝힌다고 속으로 우려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태자가 무척이나 후련한 표정으로, 다른 이야기는 다음 날에 하자는 말을 하며 떠나고 나서야, 몽주와 고려의 사신들도 태자전을 물러날 수 있었다.
‘어쩌면 감합 체제가 역사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내겠구나. 잘하면 조공 무역의 한계를 벗어날 수도 있겠어.’
몽주가 얻은 것 중 하나가 그것이었으니, 태자와의 대화 중 ‘감합(勘合)’이라는 말까지 구체적으로 나오기도 하였는데, 그 의미가 역사와 분명히 달랐다.
하나, 몽주가 얻은 가장 큰 것은, 그의 기준에 아주 고루한 경제 개념으로 똘똘 뭉친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상공업과 무역을 제도화, 공고화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실마리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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