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73)
* * *
“그게 그렇게 좋은가?”
화극(火克 : 최무선)이 선실에 나란히 앉아 묻자, 탁기가 입가에 씨익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자루의 장검을 고운 천으로 닦고 있었으니, 짙은 표면 중에 파리한 윤기가 흐르는 게 딱 봐도 예사 검이 아닌 듯 보였다.
“관강(灌鋼 : 강철 생산법의 일종)하여 만든 숙철(宿鐵)을 스무 명의 대장장이들이 쉼 없이 일 년 동안이나 냉단(冷鍛 : 불에 달굼 없이 두드려 펴는 단련법)해서 만든 검입죠. 이 검이라면 가히 산을 베고, 바다를 가를 수 있을 겁니다.”
새로 얻은 검에 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묵직한 말투로 말하는 탁기를 보며 화극이 감탄하더니, 문득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근데 어쩌나. 이제 검은 퇴보해야 할 병기인데…….”
“…….”
탁기가 그를 말없이 바라보니, 특별히 인상을 쓰지 않았음에도 탐탁지 않은 기운이 물씬 흘렀다.
검을 무시하는 태도에 분기를 뿜은 것이나, 화극 또한 전직 무관으로서 잔뼈가 굵은 몸이라, 그 정도 투기에 움츠러들 인물이 아니었다.
“자네가 산을 베고, 바다를 가른다면, 나는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태워 버릴 걸세. 내 화포로. 하하하!”
“허언이 심하십니다.”
“어차피 자네도 허언이지 않나. 아무리 좋은 검이고, 자네의 무술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하더라도 진짜 산을 베고, 바다를 가를 수는 없지. 게다가 내 화포는 수십 년 공을 들여야 하는 무예와 달리,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그 위력을 십분 백분 발휘할 것이니, 어찌 비교할 수 있겠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화포가 천하무적은 아닐 겁니다.”
“뭐야?”
탁기의 말에 화극이 그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에 상관없이 탁기는 그 노려봄을 외면한 채 검을 들어 그 예리함을 견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화포가 그 위력이 뛰어나다 하나, 흩어져 몸을 은폐한 무인들까지 일격에 사살할 수는 없는 법. 한 번의 방포 후에 재차 방포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니, 그사이에 무인들이 말을 달려 습격하면 포(砲)와 탄(彈)을 나르는 인부 수준에 불과한 화포 군병들이 목숨을 잃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어허, 화포를 방호할 군병들이 있을 것임을 모르는 겐가.”
“거 보십시오. 화포를 쓴다 하더라도 결국 검과 창을 든 군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그거야…… 아닐세! 그 군병들도 작은 화포를 지니고 그것을 쓸 것이야!”
“허언이 정말 심하십니다. 그럼 그 작은 화포를 방호하는 자들은 무얼 씁니까?”
“더 작은 화포……! 아니지! 작은 화포는 재빨리 재장전할 수 있을 것이니, 방호할 군병은 필요치 않네!”
“퍽이나 그렇겠습니다.”
‘놀고들 있네.’
반대쪽 선실에 누워 있던 몽주는 속으로 실소하였다.
그가 태자의 눈에 들어 바쁠 때, 화극과 탁기는 결탁하여 각자의 목표를 향해 움직였었다.
화극이야 당연히 그가 알고 있는 화약 제조법을 한층 더 개선하기 위해 움직였고, 탁기는 본래는 딱히 목표가 없었으나, 고려정에서 명의 무관들과 대련을 하다가 그들이 가진 검이 질이 무척 좋은 걸 알고, 그걸 얻고자 하였다.
목표 달성률을 따지면 탁기가 좋았다. 몽주가 태자와 친해진 덕에 명의 장군급 무관들이나 들 수 있는 검을 한 자루 얻은 것이었다.
물론, 탁기의 뛰어난 무예에 감탄한 태자가 선물을 한 셈이기도 했다.
반면, 화극 어른도 태자를 통해 명의 화약 제조법을 얻고자 하였으나, 결론적으로 실패하였다.
이미 명은 건국 전, 오국(吳國)이던 시절부터 배에 화포를 실어 함포전까지 했을 정도로 화포 및 화약 제조에 능했는데, 그만큼 화약의 위험성 또한 잘 알고 있어, 그 제조법을 엄격히 관리했던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태자가 호구처럼 굴었을지라도 화약 제조법만큼은 조금의 실마리조차도 보이는 데에 난색을 표하였다.
대신, 화포 제조에 관하여 약간의 기술을 얻을 수 있었는데, 따로 관련된 서책을 잠시 훑어볼 기회를 준 것이었다.
몽주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뒤가 막힌 관형(管形)의 철물에 불과한 화포 제조법 따위로 생색을 내는 명이 우스웠으나, 화극의 입장에서는 그것만 해도 어디냐며, 고려가 화포를 소유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몇 년은 줄였다고 좋아라 하였다.
어쨌거나 바쁜 몽주를 두고, 두 사람이 붙어 다니며 저마다 얻을 것을 얻으면서 제법 친해졌는지, 농담도 주고받고, 지금처럼 유치한 입씨름마저 할 정도였다.
“화극 어른, 이만 주무시죠. 밤이 한참 전에 깊었습니다.”
탁기와 화극 사이의 대화가 좀처럼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몽주는 기어코 말문을 열어 잠을 권하였다. 선실의 호롱에 담긴 기름도 다 되었는지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늦은 탓이었다.
“아이고, 미안허이. 나이를 먹으니 이상하게 수다가 많아졌군.”
쑥스러워하며 화극이 침상에 눕자, 탁기가 몽주의 침상과 화극의 침상 사이에 망상(網床 : 해먹)을 걸고 불을 껐다.
선실이 비인간적일 정도로 좁은 건 아니었으나, 사내 셋이 머물기에는 좁은 편이라, 탁기는 그렇게 그물 침상에서 잠을 자야 했다.
본래 탁기는 다른 무관들과 함께 선실을 쓸 상황이었는데, 그들에게 배정된 곳은 사실 선실도 아닌, 선창(船倉 : 짐칸)이라 몽주가 화극의 동의하에 탁기를 그곳에 함께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대장선이니 뭐니 하더라도, 목재 누선의 사이즈로는, 마흔 명에 이르는 사신단 인원과 명 수군 인원 모두에게 넉넉하게 공간을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삼사만이 일인실을 얻을 수 있었고, 정식 수행원들도 두어 명씩 한 방을 썼지만, 그 외 따라온 잡인들과 무관들은 짐짝 취급을 받아야 했으니…….
문득 어둠 속에서 다시 소곤소곤 화극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탁기. 아까 그 수병이 어디를 지나면 백해라 하였지?”
백해(白海)라 함은 황해의 중심부로, 황하와 양자강에서 흘러들어간 누런 물빛이 사라져 푸른 바다를 이루는 해역을 의미했다.
고려와 중국 사이에 있어 백해에 들어섰다는 건 근해를 벗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 하산…… 아니, 허산이었습니다.”
“맞아, 허산이었지. 근데 이상하군. 밤이 깊었으니 허산을 지났을 터, 백해에 들면 파도가 높아서 바람 없는 날에도 배가 상당히 흔들린다 했는데,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지 않은가.”
“음, 과연 그렇습니다. 적응이 되었나 싶기도 하지만, 어째 배가 나아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화극과 탁기 사이에, 제 딴에는 조용히 말한 그 짧은 대화의 내용은 몽주의 귀에 정확히 들어왔다.
“……!”
그 순간, 잠이 화들짝 달아났으니, 그것은 허산(許山)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으며, 이어 화극 어른이 말한 잠잠한 너울 때문이었다.
역사에 남기로, 포은 정몽주가 조난을 당한 곳이 허산이라고 했으니 한 번 놀라고, 그가 느끼기에도 배의 움직임이 없는 듯하여 두 번 놀랐다.
앞선 것은 역사와 같이 조난을 당할 것이라는 징조로 느껴졌기에 놀란 것이고, 뒤의 것은 연왕을 만난 이래 뇌리에 남아 있던 ‘설마…….’하는 생각이 실현될 수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기에 놀란 것이었다.
몽주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서둘러 꺼진 호롱불을 다시 붙이려 하였으나 서툰 솜씨로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새 탁기가 망상에서 일어나, 몽주로부터 대신 수석(燧石 : 부싯돌)을 받아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얼른 자자더니, 어찌 이러는 겐가.”
“화극 어른, 뭔가 이상합니다. 어서 제가 꾸려 두라 했던 봇짐을 드십시오. 탁기, 자네도.”
“네!”
탁기가 명을 받자마자 바로 작은 봇짐을 들었고, 화극 또한 의아해하면서도 미리 꾸린 봇짐을 손에 쥐었다.
바로 그 순간, 분명 체감할 수 있었다. 배가 한쪽으로 스윽 기우는 것을.
“……!”
‘젠장!’
몽주는 속으로 소리치며 선실을 뛰쳐나갔다. 실제로 목소리도 크게 내었다.
“모두 깨시오! 당장 일어나시오!”
그렇게 소리치며 갑판으로 오르는 계단을 막 밟는데, 갑판문이 닫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또 설마 하는 마음을 이어 가지며 손으로 문짝을 밀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소인이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몽주가 자리를 피하자, 탁기가 손과 발로 문짝을 거세게 밀었다. 하나, 문이 앞으로 난 것이 아니라 위쪽으로 난 터라 힘이 붙지 않아 열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밖에서 걸어 잠근 것이 분명했다.
하여, 탁기는 애지중지하던 검을 뽑아 검 끝으로 문짝을 찍기 시작하였다.
퍽, 퍽, 퍽!
십수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검 끝이 문짝을 꿰뚫자, 검을 이리저리 돌리며 지렛대처럼 이용하여 문짝을 이루는 판자 하나를 뜯어내었다.
그사이에 몽주는 연신 소리쳐,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자들을 불렀는데, 어느새 배가 제법 기울어진 것이 눈으로도 확인되었고, 심지어 물기가 아래쪽에서 점점 올라오는 게 보였다.
“석 승 나리, 나리의 체구가 작으니 먼저 나가셔서 선원들의 도움을 청해 주십시오!”
몽주의 키는 컸으나 몸이 마른 탓에 탁기의 말이 옳다고 여겨, 그가 봇짐을 든 채 뜯긴 문틈으로 몸을 놀려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애초에 그런 소란이 있음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을 때부터, 아니 처음 뭔가 이상하다 싶었을 때부터 짐작했던 바였지만, 갑판 위에서 볼 수 있는 명의 선원들은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어!”
안타깝게 몽주가 소리치자, 문 안에서도 난리가 벌어졌다.
“나리, 이 검을 받으십시오. 그 검으로 문틈을 벌리시면, 제가 안에서 밀어 보겠습니다!”
탁기의 말대로 몽주는 검을 받아 자물쇠가 걸린 문짝에 걸고 힘껏 용을 썼고, 안에서 탁기도 함께 밀어붙였다.
우지끈! 또 하나의 판자다 뜯기자 겨우 튼실한 사내도 나올 만한 크기가 되었다.
먼저 탁기가 나오고, 몽주와 더불어 사람들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삼사(三使)가 먼저 차례대로 나왔고, 화극 어른도 나왔고, 몇몇의 무관과 수행원들도 나왔다.
한데, 어느 순간 배가 너무 기울었다 싶을 때, 쿠구궁, 거목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배가 완전히 옆으로 쓰러졌다.
“절대 봇짐을 놓치지 마시오!”
바닷물에 빠지기 직전에 어딘가에 매달려 있던 몽주가 외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풍덩!
여름날이나, 아니 오히려 여름이라서 바닷물이 더욱 차게 느껴졌으니, 수면 아래로 깊이 빠졌다가 겨우 솟아오른 몽주는 쉽게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애써 놓치지 않은 봇짐을 끌어안고 바다 위에 떠서 사방을 둘러보자, 달빛이 이미 반이나 가라앉은 배은 배를 비추고 있었다.
일순 그 배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몽주는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일행들이 있음이 분명한데 쉬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 소리치며 여기저기를 살피는데, 일렁이는 물결 위 먼 곳에 불빛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깜빡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배임을 직감한 몽주는 힘껏 소리쳤다.
“도와주시오! 살려 주시오! 여기 난파당하였소!”
그렇게 목이 쉬도록 고함을 쳤으나, 불빛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보이지도 않았다.
몽주는 그 불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배에 구멍을 내고 옮겨 탄 명 수군의 배임에 틀림없었다.
“야, 이 개놈의 자식들아!”
명이 고려 사신에 해로로 귀로에 오를 것을 강권한 이유가 드러난 이유가 명명백백해진 순간이었다.
* * *
물 위의 하룻밤…… 도 아닌, 두 밤을 보내고 사흘째 낮.
황해(黃海)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푸른 바다 위에 몽주는 여전히 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위기에 대한 의심을 외면한 죄로, 그리고 명 황실의 권유를 넘어선 강요를 이겨 낼 수 없던 고려 사신단에 매인 죄로, 그렇게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이미 난파된 배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수면 아래로 사라졌고, 근처에 한참 떠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도 흘러갔는지, 가라앉았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진짜 대해(大海)는 아니지만, 몽주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망망대해 한복판에 있는 셈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난파된 밤에, 탁기가 그를 발견하였고, 둘이 헤매어 화극과 포은을 구하였다. 하나, 그게 전부였다. 마흔 명에 이르던 사신단들 중 네 명이 전부였던 것이다.
다른 이들 중에 살아서 수면에 떠 있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그 네 명이 살아남은 전부인 듯했다.
하기야 그들 넷이 아직 수장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몽주가 꾸려 나눠 준 봇짐 덕분이었으니, 몹시 가벼워 물에 잘 뜬다는 어떤 향나무에 돼지 오줌보 여럿을 묶어 만들어, 간이 ‘구명 튜브’의 역할을 해 준 것이었다.
다만, 몽주와 탁기만이 봇짐을 소지하였고, 화극은 물에 빠지는 중에 잃어버렸으며, 포은은 애초에 몽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 탈출할 때 방에 두고 나온 터라, 네 명이 두 개의 ‘구명 튜브’에 매달려 있었다.
‘구명 튜브’의 부력을 생각할 때, 네 사람은 겨우 매달려 떠 있을 수 있었으니, 탁기는 그가 애써 구한 검마저 눈물을 머금고 바다 아래로 포기해야 했었다.
지난 사흘간 날씨가 너무 좋아 다행이었지만, 그만큼 고되기도 했으니, 뙤약볕 아래서 갈증이 심하였다.
참다못한 화극이 해수를 마시다가 반 실신 상태에 이르렀고, 남은 셋도 기갈(飢渴)에 지쳐 점차 죽어 가고 있었다.
바다에 빠진 뒤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던 몽주였으나, 지금은 그저 멍한 상태였고, 오직 단 하나 원하는 게 있다면, 이만 잠에서 깨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냥 죽어서 천몽이 끝나도 좋고, 이번차 꿈이 깰 때도 되었으니, 그렇게 잠에서 깨어도 좋았다.
일단 현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시원하게 물을 마실 수 있을 터이니.
현대의 육신에는 갈증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 느끼는 갈증의 여운 때문에라도 1리터의 물도 ‘원 샷’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보게…….”
그때,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포은이 퀭한 눈빛으로 몽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품에…… 명 홍무제의 칙서가 있으니…… 혹여 내가 죽거든…… 자네들이 반드시 갈무리해야 할 것일세…….”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고, 충신의 아이콘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역사에서도, 조난당했음에도 칙서(勅書)를 잃지 않아, 주원장의 감탄을 샀다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때는 조난 후 바위섬에 표류하여 십여 일을 버틸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바다 위였으니, 여기서 포은이 죽는다면, 다른 이들도 살아남기 힘들 게 뻔했다.
“그런 소리 마십시오.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허황되다 싶었으나, 몽주의 내심에는 그런 기대가 있었다. 포은은 결코 이런 식으로 죽을 위인이 아니니, 반드시 구함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
그래서 지난 밤, 나무토막을 붙잡고 허우적대던 포은을 발견했을 때,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했었다. 포은을 살린다면 다 같이 살 수 있으리라.
“끌끌.”
허탈한 느낌이 강렬한, 마른 웃음이 포은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몽주는 문득 그가 바라보는 포은의 뒤로 무언가가 어른거림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허상이 아니라는 건 눈보다 귀가 먼저 깨달았으니, 조용한 가운데 물결이 찰랑이는 소리만 가득한 중에 먼 곳에서 첨벙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 것이다.
“저, 저기 보십시오. 배가 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말투로 몽주가 말하자, 다른 이들은 믿지 않는지 몽주가 보는 곳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이내 귀에 낯선 소리가 들림에 결국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좀 더 가까워져 확인할 수 있는 그 배의 모습은, 그들이 탔던 누선에 비해 약간 작지만, 대신 날렵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니, 양쪽 몇 개의 노를 저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자식들이…….”
힘없이 중얼거리는 몽주의 말 뒤로 ‘병 주고 약 주는구나.’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노를 젓고, 명의 깃발이 나부끼는 배가 어선일리는 없으니, 결국 명의 수군일 터.
배를 자침(自沈)시키고 도망칠 땐 언제고, 지금 다시 찾아오니 문자 그대로 ‘병 주고 약 주고’였다.
구원의 열망이 담긴 눈빛을 한 몽주 일행들이 그 배를 바라보기를 약 일다경이 지나자, 마침내 명 수군의 배가 가까이 다가왔다.
한데, 바로 구하려 하지 않고, 뱃전에 어느 장수가 나와 소리쳤다.
“어찌 된 일이오?”
“…….”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하는데, 옆에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으니, 화극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어찌 이리되었는지를…… 묻고 있네…….”
화약 연구를 위해 중원의 말을 제법 익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화극의 통역을 듣고 몽주는 속으로 발연대노하였다. 어찌 된지 몰라서 여기 온 것인가.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없어 찾으러 온 것이라면 삼 일 만에 여기까지 올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욕설이 목구멍에 치밀었으나, 몽주는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어, 애써 억누르고는 소리쳤다.
“항해 중에 급작스레 회오리를 만나 배가 난파당하였습니다. 이대로 죽나 했더니, 하늘이 보우하사 귀공의 구함을 받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 말을 화극이 애써 힘껏 통역하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는지 한참이나 걸렸다.
“정말 회오리를 만난 것이냐고 되묻네…….”
화극의 말하는 투나, 포은과 탁기가 그를 보는 시선에서나, 이유가 있어 거짓을 말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었다.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배를 가라앉혀 수난을 입힌 것도 명국이요, 지금 구하러 온 것도 명국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명이든 혹은 두 사람이 따로 내린 명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건 명(命)이 번복되었다는 점이고, 번복이 있다는 건 앞선 명을 후의 명을 내린 자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구하기 전에 뻔히 알고 있는 조난의 이유를 물었으니, 그건 사실의 확인 이전에 일종의 시험임에 틀림없었다.
하여, 몽주는 거짓을 말한 것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사실을 말하면 익사하게 두고, 거짓을 말하여 다른 이유를 대면 구하라는 명이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설령 추측이 틀렸다 하더라도, 사실대로 고하여 그들을 죽이려 했던 이의 보복이나 재시도를 불러 올 가능성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분명히 사실이오! 내 말에 틀림이 없소!”
포은, 화극, 탁기를 한 차례씩 시선을 마주친 후, 몽주는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소리쳤으니, 뱃전의 장수가 문득 실소하곤 뒤의 수병들을 향해 무어라 명을 내렸다.
잠시 후, 병졸들 몇이 몸에 줄을 묶고 바다에 뛰어드니, 몽주의 일행을 거둬 배 위로 밀고 끌어올렸다.
그렇게 마침내 바다를 벗어나 배 위 갑판에 드러눕자, 몽주의 입에서 절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죽다 살았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요성에서 죽다 살았는데, 또 죽다 살았다.
정말이지, 첫 천몽과는 난이도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 아닌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괜한 억울함이 그렇게 허탈한 웃음으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피로가 마구 물려 들었다.
지난 약 삼 일간 꼼짝도 못하고 ‘구명 튜브’에 매달려 있었으니, 잠은커녕 단 한숨도 쉬지 못했다.
게다가 화극과 포은이 크게 지쳐, 탁기와 함께 두 사람마저 붙잡고 있어야 했기에 더욱 노곤함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어야 했다.
“무, 물을 주시오!”
* * *
텅!
쿵쿵쿵!
아침 댓바람부터 몽주가 방문을 부서져라 밀치고는 계단을 마구 내려와 주방으로 달리듯 향했다.
그러곤 컵을 들어 냉장고에 달린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가득 담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잔으로는 모자라, 또 한 잔. 그마저도 부족해서 한 잔 더 마셨다.
“얘, 왜 그러니? 일어나자마자 무슨 물을 그렇게 마셔?”
소란에 나온 어머니의 다그침에 몽주는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훑으며 웃었다.
“물이 너무 마시고 싶어서요.”
“그래도 그렇지…… 천천히 마셔라. 물도 체해.”
“예, 다 마셨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몽주는 물 한 잔을 더 받아 들고, 다시 그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꿈속에서 물을 받아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잠에서 깬 것이었으니, 그 갈증의 여운이 더욱 깊어져, 현대의 몽주마저 진짜 갈증이 난 것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간 몽주는 휴대폰을 들었다.
아침 7시도 안 된 이른 시간. 하나, 몽주는 지금 당장 전화해서 하고픈 말을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바다에 표류한 동안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를.
“……두신 씨? 네, 저 진몽주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른 시간에…….”
먼저 사과를 한 몽주는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전화를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혹시 배 만들 줄 아세요? 아뇨, 먹는 거 말고, 선박요, 목조선. 아니, 작은 어선 말고요. 아주 크고 아름다운 거로요.”
통화를 하는 몽주의 시선은 그가 푹 주저앉은 소파 맞은편 벽에 걸린 한 점의 유화에 꽂혀 있었다.
바람에 부푼 돛을 무수히 달고, 아름다운 푸른 바다 위를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나가는 서양 범선의 그림.
하나, 이제는 조금 달리 보였으니, 그 범선이 떠가는 바다는 아름답기 이전에 무시무시하고, 위험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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