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74)
회의실 내 분위기는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재상, 두신과 몽주 사이의 의견 차이가 만든 그 분위기는 따져 보면 재상과 두신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최근에 두 사람 사이에는 몽주가 자신들 외 다른 조언자 팀이 있어, 두 팀 사이를 오가며 ‘놀이’를 하고 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몽주가 가져오는 설정의 질과 그 개연성이 매우 높아, 동양사와 한국사에 해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대학 휴학생에 불과한 몽주가 자체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상상하여 그런 설정을 구상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 다른 조언 팀의 존재를 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몽주에게 다른 조언 팀이 있는지 묻진 않았다.
고용주인 몽주가 먼저 밝히지 않는 걸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임무만 철두철미하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런 오해는 몽주가 가져오는 설정을 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조언 팀과의 승부에 임하는 식으로 착각하게 되었으니, 몽주가 새로운 설정을 놓고 요구하는 것에 두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만들었다.
때문에 몽주가 배를 만드는 설정을 가져왔을 때, 그리고 그가 원하는 배의 성능을 폭풍을 만나도 끄떡없을 정도로 크고, 튼튼하고, 속도도 빠르고, 해상전에서도 무적에 가까운 걸 원한다고 했을 때, 재상과 두신은 정체 모를 또 다른 조언 팀이 ‘독이 든 성배’류의 공격을 한다 싶었던 것이다.
현대의 지식을 고려에서 최대한 구현한다 했을 때, 적절히 시간을 두고 도전한다면, 14세기 말에 근대 군함 수준의 선박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놀이’이니 그렇게 되었다 설정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박으로 해상 제패에 도전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해상 패권의 ‘성배’일 것임에 틀림없다.
언뜻 생각하기에 충분히 통할 수 있을 듯하지만, 재상과 두신 둘 다 그것이 단 하나의 설정만으로도 ‘독’을 들이켜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기술 유출’ 혹은 ‘기술 모방’의 설정이 그것이었다.
발달된 기술로 만든 선박을 사용한다고 했을 때, 그 위력과 성능이 외부에 선보여지는 건 당연하였고, 자연히 당대 권력들이 그 배에 대한 탐욕을 가질 것이며, 배를 빼앗거나, 기술을 빼돌리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보고 베끼려고 시도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싸워서 배를 지키고, 아무리 기술을 철저히 감춘다고 해도, 모방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동등하거나 엇비슷한 배를 만들었다는 설정이 나오면 이 ‘놀이’는 끝장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모방을 절대 못한다고 우길 수도 없다.
실제 역사에서 서세동점의 시기에 청국과 일본은 서양식 기범선과 증기선을 모방하여 선박을 제조하려 시도했었고, 일정 부분 성과도 있었다.
서양의 방해와 침략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연구와 제작에 투자할 시간과 자금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제법 유사한 성능의 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는 ‘놀이’ 속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니, 갑자기 석유를 원료로 하는 내연 기관의 철골 구조 선박을 등장시키지 않는 이상, 기존의 권력자들이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압도적인 인력과 자금력을 갖춘 명나라가 시도한다면, 제주에서 아시아판 대항해 시대를 여는 건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이다.
하여, 재상과 두신은 몽주의 선박 제조 도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적당한 수준에서의 소소한 기술적 진보라면 모를까, 몽주가 처음 원하는 식의 급격한 기술적 발전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주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경험한 그 시대의 바다는 정말이지 두렵고 막막한 미지의 세계이자, 공포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도 그 스스로 뱉은 것대로, 엄청난 선박을 당장에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현대의 기술로도 해상에서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바다이지 않은가.
다만, 제주로 갈 때, 아니 적어도 제주에서 바다로의 진출을 시도할 때, 길이 20미터도 안 되는 가냘픈 목조선으로 상시적인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로 나가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몽주가 재상, 두신으로부터 그들이 또 다른 ‘놀이’ 참가 팀을 가정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연신 티격태격하다가, 재상과 두신이 너무 강경한 것이 이상해서 그 이유를 캐묻다가 결국 실토(?)를 받아 낸 것이었다.
“다른 조언 팀 따위는 없는데요.”
“……그러면, 지금껏 가져온 가정들이 전부 몽주 씨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겁니까?”
몽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만든’ 건 아니지만, 고려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재상이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며, 그러니까 여기저기 잔뜩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주로 역사 서적-을 보며 대단하다는 듯, 그리고 못 믿겠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 건 알고 있지만, 단지 지식이 많은 것과 그 지식으로 고려와 주변국의 사회와 사건을 구성하여 설정을 만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일 텐데요, 참 대단하시네요.”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가져오는 설정에 다른 이의 개입은 전혀 없었습니다.”
“…….”
몽주가 재차 강조하자, 재상과 두신도 더는 다른 조언 팀의 존재를 두고 의심하기 어려웠다.
“자, 그럼, 이제 제 설정을 받아들이시는 거죠? 정말이지, 고려 시대 수준의 목조선으로 대항해 시대를 연다는 건 그냥 죽자고 덤비는 꼴이라니까요. 뭐, 위험한 도전은 제가 직접 할 생각은 없지만, 다른 사람을 시킨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인명이 무수히 희생될 게 뻔하고, 자칫 뭐 하나 이루기도 전에 망할 수도 있다고요.”
몽주는 강변했지만, 재상은 두신과 한 차례 시선을 마주하곤 그에 반하는 말문을 열었다.
“이 놀이가 놀이이긴 하지만, 엄연히 진짜로 몽주 씨가 고려에 있는 걸 가정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지하게 대답하는 건데, 시대에 앞선 기술을 성급하게 구현하지 마십시오. 이건 다른 조언 팀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기술이란 개발하긴 어려워도 따라 하긴 쉽습니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은 여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발전된 기술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851년을 기점으로 따라잡히고, 나아가 역전당했죠. 상황이 그렇게 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박람회입니다.”
기억을 가다듬는 듯 재상이 턱을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열린 박람회를 통해 영국은 자신들의 앞선 기술을 자랑했었던 것이죠. 당시 박람회 열풍이 불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 결과 독일과 미국에 기술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술의 실체 중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었고, 덕분에 따라가기 한결 쉬워졌으니까요.”
“그건 이 놀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현대의 산물을 곧바로 구현한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컴퓨터나 전자기기 같은 게 아니라면,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에서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들은 과거인들도 얼마든지 그 원리를 파악하고, 구현하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성공률이 꽤 높을 겁니다. 이미 가능하다는 걸 눈으로 봤으니까요.”
이어 재상은 선박 제조로 말을 옮겼다.
“특히 배를 건조하는 문제로 좁혀볼 때, 현대의 지식을 동원하면 비록 기반 산업이 없어도 주먹구구식이라도 철갑선 하나쯤 만들어 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걸 만들고 그냥 숨겨 놓을 게 아니면, 어떻게든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 성능이 확인되면, 세상이 달려들 겁니다. 빼앗으려고, 제조법을 훔치려고, 하다못해 따라해 보려고 할 겁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러면 정말 끝이죠.”
몽주는 발끈하듯 반발하였다.
“따라한다고 해서, 곧바로 비슷한 배를 만들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물량이 다르잖아요.”
“…….”
“설정상 몽주 씨가 상당한 재산가이고, 제주로 이전해서 기반을 잡는 것에 성공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래 봐야 국가적인 단위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고려만 해도 그렇고, 명나라 같은 제국에는 비교하는 게 우스울 정도죠. 뭐, 명나라야 육군 위주에 해금령으로 바다를 멀리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 놀이에서는 얼마든지 상황이 변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만약 명의 황제가 작심하고 명령을 내리면, 몽주 씨가 두어 척 겨우 만들어 유지할 수 있을 때, 모르긴 몰라도, 명나라는 백 척 단위를 찍어 낼 겁니다. 배 성능이 몽주 씨의 것에 절반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렇게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다면 경쟁이 될 리가 없죠. 배를 운영할 인력 육성 면에서는 비교하기가 더 처참할 거고요. 당시에 숙달된 선원을 만드는 건 오늘날의 항공기 파일럿을 하나 육성하는 것에 해당하니까요.”
몽주의 표정은 상당히 불퉁해져 있었다. 과거인이라고 해서 과학적 합리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었지만, 둘의 추정이 너무 비관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량에 대한 것도 그랬다. 현대의 기술과 지식을 통해 자금과 인원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지 않나. 저질의 철이 아닌 강철을 만들고, 대장간에서 주먹구구로 생산하는 철이 아닌, 대형 고로를 통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 때, 중국을 털어먹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들은 어디 중국보다 인구와 자금이 많아서 그랬던가.
그것을 토대로 다시 반론을 펼치자, 재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교가 적절치 않습니다. 당시 청나라와 예컨대, 영국의 전체 국력을 수치로 비교하자면, 대충 백 대 오십은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놀이 속에서 명나라와 몽주 씨는, 제주에서 정착하는 데에 성공한다고 해도, 백 대 일도 안 될 겁니다. 백 대 일이 뭡니까, 천 대 일은 될까요. 게다가 시스템도 없습니다. 영국이 중국을 털 수 있었던 건 앞선 기술 이전에 근대 국가로서의 시스템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전근대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되어 있었으니까요. 강철 생산을 말씀하셨으니까, 그에 대해서 좁혀 말하자면, 몽주 씨가 현대의 지식을 통해 대형 고로를 만드는 건 가능하겠죠. 산화알루미늄 계열의 내열재를 구하고 만드는 시간이 좀 들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되긴 될 겁니다. 거기에 투입할 선철 그러니까, 무쇠야 고려에서도 생산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에 관한 기술도 문제없겠죠. 하나, 고로를 만들었고, 재료 기술이 있다고 해도, 역시나 물량이 문제입니다. 고로만 있다고 강철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거기에 투입할 많은 선철은 어디서 구하고, 어떻게 운반하며, 어떻게 그에 따른 권력의 견제를 피할 것이며, 무엇보다 코크스는 어디서 구합니까. 코크스는 역청탄이 재료고, 그건 고려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역청탄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하니까요. 아, 목탄으로 시도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정말 강철을 대량 생산하고, 또 철도 어떻게 구한다고 해도, 목탄으로 만들었다간 제주는 물론이고, 고려천지의 산들을 모조리 벌거숭이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한참이나 설득조의 말을 잇던 재상이 자세를 달리하며 말을 이었다.
“결론은 이겁니다. 지식이 있고, 과학을 아는 만큼, 새로운 기술을 통해 다른 부족한 점을 메울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 기술의 발전 수준은 외부에 전파됩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따라해도 크게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만, 딱 그 정도만 구현하시라는 거죠.”
재상의 말에 몽주도 일리가 있다고, 맞는 말이라고 이성적으로 동의하는 바이긴 했지만, 표정에 드러난 불퉁함은 한결 더해져 입술마저 쀼루퉁하게 나와 있었다.
맘 같아서는 ‘아, 몰라, 바다 진짜 무섭단 말이야!’라고 떼쓰고 고집을 피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몽주의 심정이 느껴졌는지, 잠자코 있던 두신이 위로하듯 말문을 열었다.
“이 놀이를 시작하면서, 저희도 다시 공부를 좀 하게 되었는데요, 얼마 전에 본 기술사 서적을 보니까 기술의 진보를 몇 단계로 나누더군요. 개술이 개발되고, 그 기술에 여러 변화가 생기면서 그중 일부의 변화가 선택되고, 생존하여 혁신이 되고, 그 혁신들 중 고르고 골라 생존한 극소수가 후에 기술적 진보로 자리 잡는다는 식이었죠. 예를 들어 자동차의 경우, 우리는 단선적인 발전 과정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자동차의 태동기에는 증기 자동차, 전기 자동차, 가솔린 자동차의 삼파전이었죠. 인공 동력으로 추진되는 차량이란 기술이 각각 개발되고, 변화하면서 결국 가솔린 자동차가 혁신으로 선택, 생존하면서 자동차 기술 진보의 역사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거죠.”
몽주는 두신의 말이 품은 의도가 궁금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요, 기술의 변화와 혁신이라는 게 당대에는 선택과 생존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머지는 대부분 낙오된다는 점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가 첫 번째 이유고요. 더 중요한 건, 후대에서 돌이켜보면 얼마든지 과거의 여러 기술적 변화들을 한데 융합시켜 더 큰 진보로 완성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고려 말 시기를 기준으로 세상은 전부 목조선을 만들어 쓰고 있지만, 목조선이라고 해서 다 같은 목조선이 아니에요. 서양에는 대표적으로 코그와 갤리가 있죠. 코그는 북해식 범선이고, 갤리는 지중해식 노선인데, 아마 지금쯤 코그의 영향을 받아 지중해에서도 캐러벨이라는 범선이 등장할 시점일 거예요. 그리고 역사대로라면 15세기에 들어서 북해 와 지중해의 기술이 합해진, 그 유명한 캐랙(카락)이 나오죠. 동양의 경우엔 대표적으로 수밀격벽(水密隔壁)과 개공타(開孔舵)로 이름난 중국의 정크선이 있고, 한반도에는 내구도와 안정성이 뛰어난 한선(韓船)이 있죠. 일본도 첨저선식 왜선을 나름 발전시켰고요. 인도에도, 중동에도, 또 다른 지역에도 저마다 특성에 맞게 발전시킨 목조선들이 있단 말이죠. 이런 목조선들 중에는 의외로 현대 조선 기술에서도 사용하는, 당대에서 보자면 일종의 오버테크놀로지적인 기술들이 있어요. 만약에 그 시기에 세상 범선의 모든 기술을 알고 있고, 그 기술들을 조합, 융합하여 구현할 수 있는 인물, 혹은 세력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일 것이고, 모르긴 몰라도, 아마 후기 범선 급 성능과 안정성을, 아니 그 이상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동시에 당대의 권력들의 시선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고, 마치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비슷해 보이기에 기술적 진보를 알아차리기는 더 어려울 수도 있을 거고요.”
“음…….”
대충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린 몽주에게 있어 두신의 설명은 보다 설득적이었다.
눈에 띠는 기술 발전이 독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재상의 주장에 느꼈던 반발심이, 기술 발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 두신의 설명으로 누그러진 것이었다.
“아 놔, 나도 저렇게 설명할걸.”
괜히 미움 받았다는 양 재상이 투덜거렸다.
그런 면이 없진 않았지만, 일단 마음이 누그러지자, 몽주도 재상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비단 선박만이 아니라, 모든 기술은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증기 기관을 만들어 쓴다면, 과연 그걸 얼마나 독점할 수 있을까.
빼앗기지 않고, 직접적인 기술 유출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증기 기관을 본다면, 물을 끓여 발생되는 팽창 압력을 이용하는 거라는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물을 끓이면 냄비의 뚜껑이 들썩인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게 기계를 돌릴 정도의 힘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할 뿐이지, 그게 되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기술은 복제되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규모다.
고려가, 고려 안의 몽주라는 세력이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어설픈 기술 모방만으로도 거대 권력이나 대국의 물량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거대한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이 시기에는 이미 한반도의 사이즈를 넘어섰다.
군사 방면 기술은 더할 것이다. 강선을 파고, 후장식 소총을 만들어, 적과의 전투에 사용한다면, 초기 전투 몇 번은 그 소총의 위력으로 승리를 얻겠지만, 그 과정에서 적에 소총이 노획당하거나, 유출되거나, 혹은 적이 소총을 모방하는 일이 분명 벌어질 것이다.
만약 그 적이 대국이고, 거대한 세력이라서 단시일에 정복하거나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기술을 습득한 적의 물량 공세를 이길 수 없어, 오히려 당하고 말 것이다.
그사이에 더 발전된 소총을 만들면 될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없음은 몽주도 예상할 수 있었다.
산업 혁명에 성공한 영국이 전근대식 수공업의 청나라가 가진 생산력을 이기지 못해 결국 아편을 뿌리고, 그로 인해 전쟁까지 일으킨 것을 생각하면 대국의, 특히 중국의 물량은 정말이지 조심해야 한다.
“그렇죠. 무기라면 특히 조심해야죠.”
몽주가 무기 기술에 대해 언급하자, 재상이 말 잘했다는 식으로 받았다.
“그 시대에 만약 몽주 씨로 인해 중국이 후장식 소총을 얻는다면, 몇 가지 조건만 충족되는 순간, 명나라는 유라시아 정복도 가능할 겁니다. 몽골 제국 이상으로요.”
전쟁이라는 게, 특히 정복 전쟁이라는 게 단지 병기의 성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수백 년을 앞선 무기가 등장한다면, 그밖에 필요한 조건들은 별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그쯤에서 두신이 끼어들었는데, 그는 실소하며 너무 겁먹지 말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은 다른 건 아무것도 없이, 기술 몇몇의 개발에 의존했을 때의 경우를 상정한 거예요. 국가 및 사회 시스템을 함께 발전시킨다면, 그 정도로 최악의 상황은 절대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또 영국을 예로 들면 14, 15세기에 대영 제국 시절의 영국이 가진 무기를 가졌다고 해서 대영 제국 같은 대제국을 건설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영국이라는 나라와 그 사회의 시스템에 필적하는 사회문화적 발전이 함께 있다면, 또 다른 대영제국을 건설할 수도 있겠죠. 체계적인 행정과 탁월한 재정 경영 능력을 갖춘 국가 시스템의 지원을 받으며, 대량 생산에 기반한 보급 체계를 이룬 상비군이 있고, 거기다 무기의 수준까지 높다면, 또 과학 혁명을 통해 영구적인 발전 동인(動因)까지 얻는다면, 그때는 인구가 많든 국토가 넓든, 그 어떤 상대도 별로 무섭지 않게 되는 거죠. 오히려 스스로의 폭주를 제어하는 게 문제일 거고요.”
“…….”
두신이 쉽게 말했지만,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무기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수준을 근대 수준으로 올리면 만사형통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고, 쉬운 일이 아닌 정도를 넘어, 백 년 안에 가능한 일인지 여부가 궁금할 정도의 목표였다.
“너무 거창했나요. 괜히 영국을 예로 들었나 보군요. 국가 내 모든 부분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을…….”
“그러니까, 두신이가 한 말은 스텟을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는 거예요. RPG 게임에서야 힘캐, 지능캐 뭐, 이런 식으로 한 스텟에 몰빵할 수도 있지만, 패권국 온라인 게임에서는 무력만 있다고 해서 이길 순 없다는 거죠.”
“하하, 재상이 비유가 맞네요. 군사력이라는 게 결국은 국력의 폭력적인 발현이죠. 국력이 특정 분야의 강세로만 완성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군사력 또한 병기 기술이나, 관련 몇몇 분야의 발전만으로는 강대하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이죠.”
그렇게 ‘배 만들자’는 몽주의 설정은 기술의 진보에 대한 개념과 사회 발전의 필요성, 그리고 군사력과 국력에 대한 소소한 이해에까지 이어졌다.
몽주는, 재상, 두신의 조언과 그간 책을 읽으며 생각해 두었던 것들, 그리고 고려에서 직간접적으로 얻은 경험들을 조합하여 ‘소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국가 시스템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어쩔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연구도 해 봐야 할 것 같고. 고려 내 조력자들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고. 다만, 기술의 개발에 있어서는 두 분의 조언을 받아들여 모방 가능성이 낮거나, 모방되어도 크게 위태롭지 않은 수준에서 시도하겠습니다. 선박도 두신 씨가 말씀하신대로, 목조선 기술의 종합 세트를 노려보죠.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강철 생산이에요. 강철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요. 당시에 강철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만 강철 생산하는 방식이 주먹구구식이고, 대장장이의 직감에 의존할 뿐이죠. 세상에 없던 걸 드러내는 게 아니니, 대량으로 생산한 티를 내지만 않으면, 그리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아요. 아, 물론 화약이야 이미 진행하고 있으니, 계속 조심히 이어 가고요.”
선박이든 강철이든 화약이든 결국 당대에 있는 수준이거나 약간 개선된 수준을 노린다는 의미였다.
그쯤이야 재상과 두신도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었다. 기술 유출에 대해 이토록 경고하고, 설득까지 하는 데 성공했으니, 나중에 몽주가 엉뚱한 설정을 가져오는 걸 거부할 수 있을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쯤에서 세 사람 모두 슬슬 ‘놀이’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재상과 두신은 정말 ‘놀이’가 놀이인지, 그저 지적 유희에 불과한 게 맞는 건지 스스로 납득하기가 어려워졌고, 몽주는 몽주대로 ‘놀이’를 핑계로 고려의 일을 두고 의논하기가 점차 힘들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놀이’라는 명분의 한계는, 이어 몽주가 꺼낸 말로 인해 좀 더 분명히 드러났다.
“그분과는 연락이 되셨나요?”
“아, 예. 후원자가 되어 주실 분이라고 하니, 당연히 오겠다고 하더군요. 다만, 집 주소를 알려 주는 대신에 근처 카페로 오라고 했습니다. 지난번 거기로요. 음,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두신이 대답하자, 옆에 재상이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 애를 왜 만나시려는 거죠?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저희도 목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 말씀드릴 수 있거든요. 어차피 설정인데, 진짜로 만들어 볼 거 아니면 …….”
“……진짜로 만들어 보려고요.”
“네?”
재상이나 두신이나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하였다.
“비누랑 로션도 직접 만들어 봤잖아요. 화약은 못하지만, 배랑 강철은 직접 해 봐야죠. 그리고 강철은 두신 씨가 도와주실 수 있지만, 배는 아니니까, 다른 분을 찾아봐 주신 거잖아요.”
“아니, 전 그저 조언을 얻자고 하신 거로 생각…….”
두신이 어리둥절해하는데, 몽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죠. 가면서 마저 이야기해요.”
* * *
약 한 시간 후, 재상과 두신을 처음 만났을 때 갔던 카페로 한 여성이 들어왔다.
쭉쭉빵빵한 체형을 자랑하듯 착 달라붙은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긴 생머리 위로 올려 둔, 마치 선탠이라도 한 듯 윤기 나는 갈색 피부가 돋보이는 미녀.
“안녕하세요. 황진주라고 합니다.”
“…….”
그녀를 바라보는 몽주의 머릿속에 한 여인이 떠올랐다.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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