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77)
정전(正殿) 앞에 잔치상이 펼쳐지니, 임금이 정전을 등 뒤로 하여 큰 상 앞에 앉았고, 좌우로 당상관들이 갈라져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망극하게도 몽주 또한 그 자리에 함께하였는데, 포은과 더불어 임금의 우측 가장 가까운 상(床) 중에 자리하였다.
본디 사신이 귀국하면, 임무를 수행한 정도에 따라 임금이 치하하며 여정의 고됨을 위무하긴 하나, 고작 정7품에 불과한 자가 끼어들 자리는 아니었다.
하나, 정사와 부사 모두 횡액(橫厄)을 당한 상황에서, 관례대로 따르면 오직 포은만이 참석할 수 있는 터라,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몽주도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몽주도 금상, 그러니까 훗날 공민왕으로 불리는 임금을 가까운 곳에서 배알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금상의 외모는 기대치에 많이 모자랐다. 시대를 보정하더라도 작은 체구였고, 거기에 마른 몸매라 더 왜소해 보였다.
게다가 움푹 꺼져 거무스레한 눈매는 병약함을 넘어 뭔가 불안한 느낌마저 전하고 있었고, 아직 사십 대 초반임에도 겉보기에는 노인이 다 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현대에서 고려의 왕 중 가장 잘 알려진 왕인 데다, 개혁군주로서의 면모가 각광받은 면이 있어, 외모 또한 그에 걸맞은 품위를 기대하게 하였던 모양이었다.
뭐, 외모야 그리 중요한 건 아니었으나, 몽주가 내내 지켜본 왕의 면모 또한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그가 죽은 사신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거의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북문 안에서 포은이 부복한 채 울먹이는 어조로, 죽은 사신들에 대한 애도의 말을 전함에도, 그는 말로만 ‘안타깝도다.’ 한 마디 하였을 뿐이고, 그마저도 표정에는 그저 명으로부터 요동을 인정받은 기쁨만이 서려 있었다.
그건 자리를 옮겨 대전(大殿)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지금 연신 술잔을 기울이고,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여악들이 춤을 선보이는 것을 즐길 뿐, 죽은 사신들은 이미 잊힌 듯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한숨을 내쉬게 하는 것은 금상의 양 옆에 젊은 청년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그 모습은 마치 룸싸롱에서 흥청거리는 졸부가 양옆에 아가씨를 끼고 희롱하는 것을 연상케 하였다.
물론, 그 자리에서 볼썽사나운 짓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애당초 임금의 자리에 그저 위사(衛士)에 불과한 자들이 동석한 것 자체가 예에 크게 어긋난다 할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잔치에 참석한 당상관들이 틈틈이 임금을 힐끔거리며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속내는 몽주의 속보다 더 어이없었을 것이니, 몽주야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동성애라는 것에 조금 더 열린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비해, 당금의 고려에서는 그저 남색에 불과하고, 추태 중에 추태였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왕이 남자를 가까이 두고 즐거워하는 것이 못마땅한 수준을 넘어 혐오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임금은 대취하였다. 술에 취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취한 것이 분명했다.
대저 사방에서 날아오는 따가운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양 하고 있으니, 아무리 봐도 그건 일부러 모른 척하는 연기가 아니었다.
마치 뭔가 크게 이루어 스스로 대단한 위인이라도 된 듯 착각하는 것 같았고, 고려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들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가.
고려의 땅에서 원을 밀어내었고, 요동을 점령하였다 하나, 원은 이미 몰락하던 중이었고, 요동을 점령한 것 또한 여러모로 요행에 가까웠다.
게다가 국내를 돌아보면 여전히 엉망진창이었으니, 왜적에 당하고, 세족에 토지를 빼앗겨 유랑하는 백성들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었다.
몽주는 문득 경시감이 임금에게 독이 된 것이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경시감이 기어이 쥐어짜 낸 재보에 눈이 멀어, 임금이 세상에 널려 있는 빈궁함을 미처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신돈이 가져다주는 돈이, 그가 만든 태평성대 덕에 생긴 것이라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정치적으로도 임금은 왕으로서의 권력을 채 갖추지 못하고 있었으니, 신돈은 여전히 ‘권왕’이요, 신하들이 일거에 반대하면 왕이 원하는 건 이룰 수 없는 구도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임금을 두고 한심하다는 비평을 속내로 늘어놓던 몽주는 시선을 조금 돌려 맞은편 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영공 신돈과 병상에서 복귀한 수시중 이인임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경시감을 생각하다가 신돈이 떠올라 바라본 것인데, 그 두 사람의 구도가 자못 의미심장했다.
임금을 보며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가로젓던 신돈이 이인임과 시선을 마주치자, 슬쩍 비소(誹笑)를 보이곤 서둘러 시선을 돌리는 것이 몽주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아닌 모습이기도 했다. 상사의 추태를 보고 동료(?)와 일순 비웃음을 보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까.
하나, 왕과 신돈은 상사와 부하 직원의 사이가 아니며, 신돈과 이인임은 동료가 아니었다.
이인임이 왕의 심복으로서 신돈을 따르면서 세간에 이인임을 신돈의 무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곤 하나, 두 사람은 분명 가깝고도 먼 사이였으니, 둘 사이에 논의가 필요할 때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 두 사람이, 비록 임금 앞에서 한자리에 나란히 앉은 상태라 하나, 친분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니, 몽주의 눈에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약일 수 있고, 아마도 그렇겠지만, 몽주가 명국에 다녀오는 사이에 신돈과 이인임 사이의 관계에 모종의 변화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변화가 연대(連帶)라면…….
명국으로 가기 전에, 신돈과 나누었던 대화가 몽주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니,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임금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인임이 더 이상 왕의 심복이 되길 거부한다면, 그래서 신돈과 손을 잡고, 신돈이 자신에게 밝혔던 노선(路線)을 이인임과 함께한다면, 지금 저 위에서 향긋한 술을 마시고, 대소를 터뜨리고 있는 임금은 무얼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얼 하기 이전에, 설 자리는 있을 것인가.
몽주는 문득 임금을 향해 안쓰러운 감정을 보내야 했다. 세상에 기세 좋게 등장하고서 제 업을 이겨 내지 못해 폐인이 된 자가 어디 한둘인가.
하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높은 곳에 올랐다가 뚝 떨어진 자를 직접 보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솟았던 것이다.
물론, 임금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술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휘청거리고 있었고, 이어 위사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내려와서는 신하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어찌 그대들은 이리 놀 줄 모르는 것인가. 세상이 이토록 평안하고 나라의 운이 하늘에 뻗어 있거늘, 지금 웃고 즐기지 못한다면 언제 그럴 수 있겠는가. 여봐라, 여악들은 당장 신료들을 일으켜 함께 춤을 추게 하여라. 이대로 새벽까지 이 밤을 밝힐 것이니, 내일 묘시에 범종이 울리거든, 모두와 더불어 만세를 외칠 것이다!”
* * *
잔치는 새벽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술주정을 부리던 왕은 얼마 후 대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였고, 위사들이 왕을 침전으로 모시자, 신료들도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흩어져 자리를 파한 것이었다.
익일 오시(11-1시)에 이르러, 몽주는 영당각을 찾아갔다. 전날 자리를 떠나기 전에 신돈이 그에게 다가와 찾아오라고 명한 탓이었다.
영당각에 들러 신돈을 마주하자, 몽주는 무엇보다 이인임과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었다. 혹시 그와 손을 잡았느냐고.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신돈과 그는 평등한 ‘동업자’ 관계가 아니니까.
그는 차를 대령케 하곤 잠시 찻물을 들이켜다가 문득 물어 왔으니, 먼저 한공의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죽었기에 무의미한 물음이고, 또 상황이 바뀌어 그의 임무 또한 더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묻도록 하지. 그가 임무를 수행하였던가.”
“소인은 알지 못하나이다. 한 부사는 소인에게 한 점의 논의도 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명국에서의 사정에 있어, 저들이 요성에 대한 처분을 태자의 시험으로 삼았으니, 한 부사가 임무를 수행하였든 아니하였든 결과에 큰 달라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알겠다.”
간단하게 한공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신돈이었으니, 어찌 보면 스스로 반역을 획책했음에도 그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몽주는 신돈이 권왕의 명성을 넘어 실제를 노리는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기야, 이미 지난날 ‘홀로서기’의 의중을 밝혔으니, 왕의 허락 아래 권세를 지녔던 그가 홀로 선다 함은, 형식이야 어떠하든 이미 왕을 반(反)하는 자가 되어야 할 수밖에 없다.
신돈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문득 실소하며 또 물어 왔다.
“듣자 하니, 그대도 명 황제로부터 많은 재물을 받았더군. 무얼 받았는가. 포은은 천자의 시첩을 받았다고 벌써부터 자랑하고 다닌다 하던데…….”
“…….”
‘아 놔, 안빈하고 낙도하는 유자라더니, 뭔 입이 그리 가벼워?’
몽주는 일순 고민했다. 그에게는 시첩이 세 점이 있고, 그것은 포은도 모르는 일이니, 신돈에게도 하나만 밝혀도 괜찮을 듯싶었다. 다만, 어느 것을 내주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아무래도 말하는 폼이 주원장의 시첩을 탐하는 것 같았다.
“소인은 그저 무명자(無名子)의 시첩을 받았을 따름입니다.”
“무명자의 시첩? 설마 황실의 위신이 있지, 아무씨의 것을 주었겠느냐.”
“하기야, 소인이 시예에 무지하여, 이름을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니…….”
일소와 신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무래도 무명 무인에 불과한 탁기보다는 무관직이라도 경험한 화극에게 준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시첩에 작자로 일소라 적혀 있었사옵니다.”
“일소? 설마하니 서성을 일컬음이더냐?”
‘서성(書聖)?’
일소라는 말 뒤에 곧바로 서성이 따라오니, 몽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중국 역사에 많은 명필들이 있으나, 서성이라는 칭호는 단 한 사람만의 것이고, 몽주가 유일하게 하는 중국 명필가였으니, 왕희지(王羲之)가 바로 그였다.
몽주의 안색이 아연해지자, 신돈의 얼굴에 탐욕이 서렸다.
“내 구경 좀 하고 싶군.”
“……가져오라 하겠나이다.”
울상이 나는 걸 겨우 막은 몽주는 별채에서 쉬고 있던 탁기를 불러, 일소(逸少)의 시첩을 가져오라 하였다. 다행히 세 첩 다 가져오느냐 따위의 쓸데없는 물음은 하지 않았다.
몽주의 짐은 처가댁에 있으니,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에 신돈이 그 시첩이 기대가 된다는 말을 하다가, 문득 표정을 일변하고 말문을 열었다.
“서성의 글은 이따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고. 내 자네를 부른 것은 한 가지 논의를 할 게 있기 때문일세.”
친근한 어조로 말을 시작하니, 또 무슨 명을 내리려 그러나 싶어 몽주는 불안하기 시작했다.
“요사이 도당이 시끄러운 것을 자네도 알 것이야. 왜구가 침범한 탓이지.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나, 올해 들어 왜구의 도적질이 더욱 대범해졌으니, 예성강 하구의 수군진이 크게 당하기까지 하였네. 하여 무관들이 거세게 건의하여 수군을 크게 키우라 하고 있네. 이에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몽주의 생각이야 필요 없었다. 이미 정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하나, 중요한 건 몽주의 생각이나 역사적으로 확인된 정답이 아니라, 신돈의 의중이었다.
과연 그는 수군을 양성하는 것을 바라고 있을까, 아닐까. 일단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어찌 도당의 논의에 소인 따위가 말을 늘어놓을 수 있겠나이까. 수군을 늘리자는 주장이든, 백성들의 곤궁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든 저마다 명분이 옳고,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니, 큰 안목을 가지신 분들께서 결정하셔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큰 안목? 혹여 지위가 높은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더냐. 허어, 어디 지위가 높다 하여 안목마저 높다 하겠는가. 소인배들이 들끓는 곳이 도당이니, 두 패로 나뉘어 저마다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우나, 실제로 바라는 건 따로 있을 것이야.”
“그렇사옵니까?”
몽주는 실제로도 몰랐기에 그렇게 되물었다.
“쯧쯧, 자네가 명국에 가 있던 터라 고려의 정국에 많이 어두워졌군. 수군을 양성하자는 신료들은 무려 이천 척의 크고 작은 군함을 요구하고 있네. 이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 이천 척씩이나 말입니까.”
“그러네. 설마하니, 그들도 그렇게 많은 함선을 실제로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그리 주장하고 있지.”
“앞서 많이 요구한 뒤, 가급적 많은 수준에서 타협점을 잡고자 함이 아니겠나이까.”
“일면 그럴 것일세. 하나, 난 그것만이 전부라고 믿지 않네.”
또 뭔가 수작이 있다는 뉘앙스인데, 신돈은 그에 대해 바로 언급하진 않았다. 다만, 적어도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신돈이 수군 양성책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물론, 반대하는 신료들도 따로 꿍꿍이속이 있으니, 백성들의 고혈을 운운하나, 실제로는 자기들 가산을 내놔야 할까 두려운 것이지. 더불어 임금에게 달라붙은 무관들이 득세할까 두렵기도 하고…….”
“……!”
넌지시 흘리듯 하는 말에, 몽주는 신돈이 어느 편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로서는 다소 아쉬운 순간이었다.
수군을 양성하고 화포를 개발하여 왜구를 섬멸하는 것만이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침략을 막을 길임을 알기에 아쉽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수군 양성을 위한 전함 건조를 기회 삼아 선소 바치들을 육성하여 훗날에 대비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동시에 고려에도 좋은 선택을 권하기 위해서라도 몽주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소인의 짧은 생각에도, 수군 양성책은 그 바라는 바가 너무 과할 뿐만 아니라, 군이 너무 비대해져 나라에 좋을 것도 없을 듯하옵니다. 하나, 저들의 주장을 원천봉쇄하면 불만이 크게 커질 것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여 최영을 그만 놓아줄까 생각 중이네.”
“네?”
문득 흘러나온 이름에 몽주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내 보기에 무관들이 저토록 강경하게 나오는 건 배를 많이 얻고자 함이기도 하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최영을 유배에서 풀기 위함이기도 하네. 고려의 무관들에게 있어 최영이 그 정도의 인물은 되지 않나.”
“하나, 그것이 오히려 영공 저하께 폐가 되지 않겠나이까.”
몽주가 알기에 최영을 유배케 한 것이 신돈이었다. 그러니 최영을 복직시킨다면, 신돈에게 실이 되면 실이 되지, 득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
몽주의 지적을 인정하면서도 신돈은 웃음을 지으니, 나름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생각이 무엇인지 추리해 보니, 몽주의 머릿속에 이인임의 이름이 떠올랐다.
최영 장군은 몹시 청빈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음에도, 의외로 이인임과 친분이 있기도 한데, 그것은 고려에서도 확인한 바, 최영의 유배지에 이인임이 식량과 의복을 전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신돈이 이어 밝힌 그의 속내에는 이인임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최영이 다루기 힘든 자이긴 하나, 그간 이 난국에 종군하지 못한 것에 애가 닳았다 하니, 이제 내가 복권시킨다면 어찌 감히 대서겠는가. 또, 요성에서 많은 장수와 군병들이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대신 요성을 지킬 장수가 필요한 법. 최영이 깐깐하나 오히려 그렇기에 요성을 지킴에 적합하지 않겠나? 게다가 그자의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성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먼 곳에 두고 변방을 지키게 함에 가장 적임이라 할 것이야.”
거기다가 정말 신돈과 이인임이 손을 잡고 있다면, 이인임과 최영의 친분을 이용하여, 혹시 모를 우환마저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신돈과 이인임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마음속에서 도졌으나, 몽주는 그를 애써 억제하고, 지금 해야 할 것에 집중하였다.
“참으로 현명하시나이다. 다만, 최영이 중하다고는 하나, 그의 방면(放免)만으로 모든 무관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겠나이까. 이미 훼손된 군함과 병졸들이 많고 많으니, 적게나마 보충을 해 주어야 저들도 입을 다물고 맡은 바 소임에 충실하지 않겠나이까.”
그에 신돈이 흐뭇하게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내가 알던 자네다운 모습을 보이는군. 맞네. 최영으로 다 해결될 일이 아니지. 다만 문제는 역시 재원(財源)이 아니겠는가.”
신돈이 지그시 몽주를 바라보니, 그는 올 것이라 예상했던 일이 왔구나 싶어,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바라던 일이었다.
“소인에게 명하신다면, 잃은 군선의 수만큼 새로 만들어 바치겠나이다.”
“오호, 정녕 그리하겠느냐.”
“나라의 안위 앞에서 어찌 재물을 아끼겠나이까. 제 처에 딸린 재산 중 선소가 하나 있으니, 그를 십분 이용하여 건조에 박차를 가하겠나이다.”
“과연, 요즘 같은 시기에 석 승 자네만큼 우국충정이 깊은 자를 만나다니, 부처께서 따로 살펴 주신 게 아닌가 싶군. 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대소선(大小船) 쉰 척만 만들어 주게. 그 정도면 무관들도 더는 입을 벙긋하지 못할 것이야.”
신돈이 흡족하여 껄껄 웃으니, 애초에 몽주를 불러들여 그것을 시킬 요량이었음이 틀림없었다.
“…….”
이미 예상했던 바이기는 하나, 몽주는 웃다가 강탈당한 기분을 아주 버리기 힘들었다.
그 즈음에 탁기가 돌아왔으니, 신돈이 서둘러 서성의 시첩을 들이게 하였다.
마침내 궤가 열리고 시첩이 모습을 드러내자, 신돈이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시첩을 들어 유심히 보기 시작하였다.
신돈이 서예에 도통한 것인지 몽주가 궁금해하는 동안, 한참이나 내용을 살피던 그는 손으로 시첩 구석의 종이를 문지르며 질감을 느끼기도 하였는데, 그 직후 문득 탄식을 내뱉었다.
“아쉽군.”
“네? 하면, 왕희지의 필적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서성의 필적이라면 필적이겠지. 하나, 이는 친필이 아닌 탁본으로, 본디 법첩(法帖)을 위해 만든 목판 중 시 한 수를 골라 시첩으로 따로 만든 것이야.”
잘은 모르겠으나, 탁본이라는 건 알아들었으니, 몽주로서는 안도감과 실망감이 동시에 들었다.
탁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신돈이 도로 궤에 시첩을 넣으며 얼굴에 탐욕이 사라진 것을 보니, 시첩을 빼앗기지 않을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고, 빼앗기지 않는다고는 하나 결국 탁본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별로 가치가 높지 않을 것이니 실망감이 든 것이었다.
“하기야, 그 귀한 서성의 진필이라면 어찌 고려의 신하에게 주었겠는가? 그래도 근래에 만든 것이 아니라 대략 송대에 만든 듯하니, 나름 귀한 것을 준 것일세.”
2, 300년 된 것이라고는 하나, 결국 탁본은 탁본. 몽주의 실망감은 여전하였다.
그렇게 일소의 시첩을 다시 챙긴 몽주는 그쯤에서 물러나려 하였다.
“아 참, 중요한 걸 빼먹었군. 금상이 요동 점령에 크게 기뻐하시어, 이에 공신을 책봉하시려 하시니, 자네도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일세.”
“예? 소인이 어찌……?”
“어찌 그리 놀라는 겐가. 자네는 요성에서 외적과 싸움에 있어서도 일공(一功)을 세웠고, 금번 사신단의 일원으로서도 공이 있으니, 충분히 공신록에 이름을 넣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사신단의 정사와 부사가 모두 죽은 덕에 사신단의 공을 자네가 크게 얻어 가질 수 있는 덕이기도 하지. 다만, 안타까운 건 자네의 직위가 좀 더 높았더라면 일등 공신은 아니더라도, 이등 공신은 가능했을 터인데, 당하관 중 하급이라 삼등 공신으로 만족해야 할 것일세.”
몇 등이 문제가 아니었다. 공신이 된다면 작위도 내린다는 게 중요했다.
비록 당대의 고려에서 작위(爵位)란 초기의 고려와 달리, 그저 명예의 칭호에 가까웠으나, 몽주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제주의 작위를 얻고 싶다!’
고려 8작위 중 말석이라도 좋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니, 제주 현남(縣男)의 작위를 얻고 싶었다.
그렇게 된다면, 훗날 제주로 건너갈 아주 좋은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몽주는 곧바로 그것을 청하고픈 마음이었으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겨우 억눌렀다.
여기서 제주를 언급하면 자칫 신돈의 경계나 의심, 아니 하다못해 왜 몽주가 제주를 원하는지 호기심이라도 얻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언가 적당한 이유라도 만들어야 했는데, 지금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기에 말을 아껴야 했던 것이다.
“허허, 그렇게나 좋은가.”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나이다.”
몽주의 안색이 다변하는 것을 본 신돈이 그렇게 착각하였기에 대충 맞춰 주었다.
“그리 좋다니, 내 힘껏 자네에게 큰 상이 내리도록 노력하지. 그리고…….”
문득 말을 멈춘 신돈이 몽주를 잠시 바라보더니, 징그럽게 따뜻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살아 돌아와서 다행일세.”
“심려하심에 망극하여이다.”
하마터면 신돈에게 정이 붙을 뻔했다. 하나, 신돈은 그를 호구로 삼고, 몽주는 기꺼이 호구가 되어 그의 권세를 빌리는 사이니, 그저 서로에게 이득이 될 뿐인 것이다.
* * *
영공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마침내 한양부로 발걸음을 옮기니, 떠난 지 넉 달이 넘은 때였다.
꿈이 깨기 전에 명에서 가져온 많은 보물들을 현대로 옮길 방도를 마련할 생각에 마음이 급했는데, 정작 추대현에 닿자, 그 문제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몹시 기쁘면서도 동시에 황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니, 기쁜 것은 앵도가 회임(懷妊)을 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황당한 것은 앵도만 회임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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