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79)
* * *
아주 한산한 거리였다. 아니, 한산하다는 표현이 과장일만큼 인기척이 없는 거리였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공태수는 온몸에 털이 곤두설 정도로 긴장과 아마도 공포라고 해야 할 만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거리를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본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놀라움을 담은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만큼 놀란 탓이었으니, 그의 바로 뒤에 어느 노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져 노인을 올려다보니, 공태수는 그제야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 할애비요, 할애비 맞습니까?”
두려움 속에 반가움이 있었으니, 두려운 것은 그의 조부는 죽은 지 40년이 훨씬 지났기 때문이고, 반가운 것은 그에게 있어 조부는 그 어떤 가족과 친척들보다도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그는 사실상 조부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그의 품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가 조부와의 갈등 끝에 집을 나가 버린 탓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그가 성장한 후에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서 그만큼 아버지를 한심하게 여기고, 조부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조부가 아니었다면, 그의 집안은 비렁뱅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 속에서 기회를 얻고, 그 기회를 잡아 출세한 조부는, 누가 뭐래도 공태수에게 영웅이었다.
“할애비요, 여긴 어디고, 할애비는 어째서 돌아오셨습니까. 할애비요, 말 좀 해 보십시오.”
조금은 어린 말투로, 앉은 채 조부의 바지를 붙잡고 애원하듯 말하였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조부의 시선은 어쩐지 사납고 냉정했다.
그 눈빛에 공태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조부의 압박감.
어릴 적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공태수로서는, 조부가 죽은 지 40여 년이 흘렀음에도 그의 눈빛 한 번에 두려움이 생생하게 되살아난 것이었다.
“할애비요,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저와 우리 가문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할애비도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 애원했지만, 조부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리를 털어 공태수를 떨어뜨리기까지 하니, 그로서는 눈물이 핑 돌만큼 서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조부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였다.
“할애비요, 안 들립니다. 뭐라시는 겁니까?”
그의 말마따나, 조부는 분명 말을 하였건만, 심지어 그의 표정과 목에 솟은 핏줄을 보면, 고함이라도 치는 양 훈계하는 것이 분명했건만, 정작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가의 물기를 서둘러 훔쳐 낸 공태수는 조부의 입모양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입술을 읽으려 애를 썼다.
“……무너지고 있다. 무엇이 무너지고 있다는 겁니까? 모든 것? 우리의 모든 것?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집안도, 회사도 아무런 문제가……. 그놈이 무너뜨리고 있다고요? 대체 그놈이 누굽니까. 제대로 말씀을 해 보세요!”
공태수는 조바심과 궁금함이 점점 심해져 조부를 향해 소리쳤다.
그로서는 이 이상한 만남이 예사롭지 않았다. 조부께서 분명 뭔가 위기를 예견해 주기 위해 이렇게 오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이미 늦었다고요? 아, 제발 분명히 좀 말씀을……! 더 늦기 전에? 늦은 게 무엇이고, 더 늦기 전에 무얼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답답함에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지만, 다음 순간 공태수의 눈에 보인 것은 흐릿해져 가는 조부의 형상이었다.
“할애비요, 할애비요!”
조부를 잡기 위해 급하게 달려들어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흐릿해진 형상 너머로 허무하게 스칠 뿐이었고, 동시에 조부의 모습도 완전히 사라졌다.
“할애비요!”
* * *
“헉!”
벌떡 일어나 눈을 뜨니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방 한가운데였다.
공태수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를 훔치곤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살짝 일어 잠시 비틀거렸는데, 나이에 비해 건강이 매우 좋은 그로서는 이조차도 기분이 상할 일이었다.
꿈이라는 걸 꿈속에서 알았고, 그 순간 깨어났다.
하나, 조부의 그 성난 눈빛은 여전히 생생했고, 그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 또한 머리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벌써 80년이 넘게 살아온 그였지만 그렇게 선명한 꿈은 처음이었다.
공태수가 방 한쪽에 놓인 정수기에서 찬물을 한 컵 담아 마셨다. 냉수가 가슴을 차갑게 식히자, 그제야 꿈의 여파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차츰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꿈은 꿈일 뿐인 게지.”
그렇게 읊조리며, 얼마 전에 상담했던 심리 상담사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했던가.
조부가 꿈에 나와 무언가를 말하려 했던 건, 그저 그의 심상 속 무의식이 스스로를 향해 무언가를 일깨우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니까 정말로 조부의 혼이 그에게 내려와 가르침을 전하려 한 건 아닐 것이다.
공태수는 그렇게 단단히 마음먹었다. 마음속 구석에서 도사나 무당을 불러 꿈에 대해 묻고 싶은 욕망이 일렁거렸지만,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번 도사 놈의 건방진 짓거리 이후, 더 이상 미신 따위에 마음 한편을 내주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은 덕이었다.
어차피 진짜로 미신을 맹신하여 그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닌데, 비싼 돈을 들여 그런 말을 귀에 담을 이유가 없었다.
마음의 위안이야 다른 것에서 얻으면 그만이었다. 심리 상담사와의 상담도 제법 맘에 들었다.
공태수는 그렇게 자신의 결정을 대견하게 여기며 방을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한데, 다음 순간 문득 시야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있음을 깨달았고, 급히 몸을 돌려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
없다. 없어졌다.
공태수는 벌벌 떨리는 몸으로 창가에 외롭게 서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그곳에 있어야 할 게 사라졌고, 그저 받침만이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채 남아 있었다.
“윤 비서!”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으니, 그의 집에 입주 비서로 있는 이를 부르기 위함이었다.
몇 번 더 소리치자, 그제야 우당탕 소리와 함께, 채 잠에서 깨지 못한 얼굴로 젊은 남자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회, 회장님, 부르…….”
“여기 있던 내 청자 어디 갔어?! 내 사자향로!”
마치 비서가 가져가기로도 한 양, 공태수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소리쳤다.
그가 소유한 많고 많은 고미술품들 중에서도 가장 애정이 있어 침실에 놓아두고, 즐겨 보며 틈틈이 손수 닦기도 했던 사자형 향로 청자(獅子形 香爐 靑瓷)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이었다.
“이이……!”
어리바리하며 괜히 청자가 놓여 있던 탁자 주변만 두리번거리는 비서를 노려보다가 공태수는 결국 참을 수 없어 분통을 터뜨렸다.
“대체 어떤 놈이 날 무너뜨리는 게야!”
* * *
“음, 그건 거기다 두게.”
번잡한 상황 속에서 몽주는 뒷짐을 지고 이리저리 사람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새로 한양부 시전 점포를 확충하면서 ‘인테리어 공사’ 중이었는데, 영공이 보내온 청자가 있어, 그걸 점포 내실 중앙에 놓게 한 것이었다.
그 청자는 향로로 보였는데, 뚜껑에 사자 한 마리가 포효하고 있어,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절로 웅심(雄心)이 솟구치게 하였다.
그렇게 한참 사자 향로(獅子 香爐)를 보며 흐뭇해하는데, 어디선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화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하, 이거 조카사위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더니, 이제 한양 시전에서도 가장 큰 상주(商主)가 되었구만.”
“오셨습니까, 어르신.”
“축하하이. 보니까, 여기저기서 선물도 많이 도착한 듯하던데, 이 고려 상계에서 자네 눈치를 보지 않는 이가 없는 모양일세.”
“감사합니다. 그래 봐야 호시절도 잠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이놈저놈들이 비노며 선로랍시고 내놓고 있지만, 어디 자네의 비노와 선로에 비할 수 있던가.”
“그야 시간이 지나면 모를 일이지요. 가다랑어포는 이미 제법 비슷한 것이 나왔지 않습니까.”
“끄응, 그도 그렇군. 거, 어떤 놈이 감히 내 조카사위의 것을 훔쳐다 만드는 게야!”
괜히 목소리를 높이며, 마치 범인이 앞에 있는 양 소리치는 화극의 모습에 몽주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가 한양부의 시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가 거처를 한양부로 옮겼기 때문이었으니, 그도 이제 한양별시의 승이었다.
그가 비록 비공식적인 수행원으로 몽주를 따라간 것이기는 하나, 엄연히 사신단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구하여 온 네 명 중 한 사람이었기에, 그만큼 공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여, 그 공을 기회 삼아, 도당에 화약 제조와 관련된 상소에 힘을 쏟았는데, 결론적으로는 잘되지 않았다.
화약이라는 걸 고려의 신료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소문으로 들은 화포의 위력을 감안할 때, 나라에서 그것을 관장해야 함이 마땅하니, 그리하면 자연히 임금의 무력에 크게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 짐작한 도당의 권력들이 화극의 제안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하나, 몽주가 개입하여 영공을 통해 달리 청하였으니, 화약 제조가 아닌 폭죽 제조로 말을 바꾸었다.
물론, 폭죽의 재료가 화약과 다름없다는 건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엄연히 무기가 아닌 사품(私品)으로서의 폭죽은 나라가 아닌 사인에 의해 제조될 수 있었으니, 도당의 권력가들도 가납하기 쉬웠던 것이다.
그들 또한 왕의 위세가 높아지는 일만 아니라면, 화약이 난국의 고려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신돈과 몇몇 대신들이 임금에게 고하여, 폭죽의 제조를 허하라 주청하였으니, 금상도 비록 그것을 자신의 손에 완벽히 넣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마침내 허락하였다.
사실 왕이 그것을 허한 것은, 폭죽의 제조를 경시감의 예하에 위임하여, 그의 심복 중 심복인 영공 신돈과 경시감의 상시(常侍)이기도 한 수시중 이인임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리하고자 하는 심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영공 신돈이 껄껄거리며 말하길, 왕이 그를 불러 폭죽을 제조하면서 화포를 위한 화약 제조에도 힘을 쏟으라 명하였다 밝히기도 하였다. 물론 신돈이 껄껄거린 건, 금상이 돌아가는 사정을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함을 보고 비웃은 것이었다.
어쨌거나 화극 최무선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는 경시감 한양별시의 임시 승(丞)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폭죽 제조를 위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니, 그가 가진 목적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았으나, 조금 돌아가는 길만큼은 얻은 셈이었다.
몽주 또한 나쁘지 않았으니, 고려가 화약에 보다 빨리 눈을 뜨게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가 화극에 협조하기에 따라서, 그리고 화극에 영향을 주기에 따라서, 고려의 화약 확보 시기를 어느 정도 조율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근데 조카사위, 잠깐 한적한 곳에서 말을 좀 나누세.”
하여, 번잡한 점(店) 안을 나와 뒤뜰로 자리를 옮기니, 화극이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지난번에 자네가 말했던 그 주강법(鑄鋼法) 말일세. 진정 소용이 있겠는가.”
“저희 집안에 내려오는 비서에는 분명 실효하다 나와 있었습니다. 물론, 해 봐야 알겠지요.”
오래전 중국과 교역하였던 남양 석가의 선조가 얻었다는 중국의 비서(秘書)를 가장하여 대답하니, 화극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내 지난번 명에서 보길, 화포의 성능을 받치기 위해서는 강철이거나 청동이어야 한다고 했네. 강철이 청동보다 강한 것이야 다 아는 바이나, 강철은 주물로 다루기 불가하니, 마땅히 청동만이 그 해법이라 여겼네. 실제로 명이 가진 화포도 모두 청동이지 않은가. 하나, 만약 자네말대로 주강을 얻을 방법이 있다면, 이는 고려가 명보다 더 튼튼한 화포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며, 또 튼튼한 만큼 위력을 높일 수 있을 터이니, 더 강한 화포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네.”
“하신 말씀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여, 주강법을 얻기에 노력해야 마땅하나, 이를 공공연히 도당에 알렸다가는 자칫 명에 그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고, 당연히 명이 그를 문제시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네.”
“맞습니다. 그래서 주강법을 시험하기 저어하다 말씀드렸었지요.”
“하면, 이리하면 어떻겠는가.”
“어찌 말입니까.”
몽주가 모르쇠하며 묻는데, 속내로는 화극이 과연 미끼를 물었다 싶었다.
“우리 가문이 경상도에서 나름 위세가 있어, 철소 또한 가지고 있네. 그곳에서 철을 빼와 사사로이 주강법을 익혀 봄이 어떠한가.”
“철소야 저희도…… 근데 사사로이요? 도당에는 알리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그것으로 바로 화포만 만들지 않는다면 설령 후에 들통이 난다 하더라도, 어디 큰 죄가 되겠는가.”
“그야 뒤집어씌울 수도 있는 문제지요. 게다가 철의 유통은 나라에서 모를 수가 없으니, 들통 나는 거야 시간문제일 뿐이고요.”
“하면, 들통 나지만 않는다면 해 볼 의향이 있다는 겐가?”
화극이 눈에서 열기를 뿜으며 물으니, 몽주는 그 기세에 밀리는 양 연기하면서도, 속으로 최무선이 제대로 걸려 들었구나 싶었다.
“들통 나지 않을 수가 없…….”
“방도가 있으니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정녕 방도가 있습니까?”
“내 아비께서는 지난날 영주의 광흥창사(廣興倉使)이셨으니, 근방 신료들의 녹봉을 관리하심은 물론, 경상도에서 나서 개경으로 옮기는 수많은 물목을 관장하셨네. 이제 비록 부친께서는 아니 계시나, 덕분에 광흥창(廣興倉)에 많은 이들이 우리 가문의 족속이거나 관련된 이이니, 광흥창의 행사에 나 또한 어느 정도 손을 뻗을 만 하다네.”
“하면…….”
“개경으로 물목을 옮기는 데에 조운(漕運)을 따르니, 조운 중에 배가 침몰하여 손실을 입는 건 아주 드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말인즉슨, 광흥창에서 철을 조운으로 옮기다가 바다에서 잃은 척하며 철을 빼돌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되겠습니까. 괜히 일을 벌였다가 그 수작이 드러나면 크게 경을 칠 수 있습니다.”
“걱정 말게. 사, 사실 이미 아주 없는 일도 아니니…… 흠흠, 어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무안함을 무마하려는 듯하니, 영주 최가에서 그간 개경으로 보내는 물목에 종종 손을 대곤 한 모양이었다.
“저런…… 사정이 그러하다면, 철 한 줌이 더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겠군요.”
그렇게 너스레를 떠니, 화극도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새로 꿈에 온 뒤 한 달 만에 강철 연구를 위한 철을 몰래 마련할 방도가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 * *
추분(9월 말)을 막 지났을 때, 몽주는 말을 타고 천천히 개경으로 오르고 있었다.
다만, 한양부에서 개경으로 행차하는 것이 아닌, 그보다 훨씬 아래인 전라도 고부현(古阜縣)으로부터 오르는 것이었다.
이미 보름 전에 집을 나서, 양근군(楊根郡)을 거쳐 고부현에 속한 검모포를 돌아보고, 다시 개경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양근군이 현대의 양평군 서부로 그곳에 ‘보물 상자’를 묻기 위함이었고, 이어 검모포에 들린 건 그곳에 위치한 선소(船所)에 들러 영공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현대에서 양평에 구입한 야산 부지를 고려의 양근군에서 찾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근처에 오래전부터 이름을 가진 산이 있고, 그가 산 야산 또한 정상에 큰 바위를 가지고 있어, 이리저리 비교하여 확실한 야산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 일에 걸쳐 그 야산을 찾고, 가복들만 이끌어 다섯 군데에 분산하여 보물을 매장한 후, 다시 검모포로 향했으니, 가는 데에만 사흘 가까이 걸렸다.
이미 한 달 전에 미리 연통을 넣어, 선소지기로 하여금 배를 만들 준비를 하게 하였는데, 막상 가 보니 그 꼴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내내 쇠락한 선소에 속한 바치들은 선소 문권에 적힌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 수가 겨우 절반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경험이 많은 이들은 많이 죽어 나가, 그 아들이나 손자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선소의 일을 내팽개치고, 농사를 지으며 야금야금 선소에서 나오는 세경만 축내는 자들도 있었다.
하여, 기강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선소지기와 선소의 자금을 좀 먹은 자들을 혼쭐내고, 곤궁한 가운데에도 성실히 일한 장인들을 우대하여 위로한 뒤, 새로 크게 조선(造船)을 시작할 것을 알리며 받은 임무를 완수하면 크게 보상할 것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사기가 높아진 선소에 새로 체계를 만들어, 배바치들이 그들의 기능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으니, 그에 들인 시간이 엿새였다.
그렇게 본래 열흘을 생각하고 시작한 순방은 닷새를 더 넘겼고, 이제 한양부에 들릴 새도 없이 바로 개경으로 향해야 했다.
넓은 논이 펼쳐진 사이로, 이제는 제법 열기가 약해진 태양 볕을 평량자(平凉子)로 가리며, 터벅터벅 말이 걸음하면서 흔들리는 대로 시선을 두니, 이제 추수 때가 머지않아 논 안에 가득히 솟은 누런 벼가 탐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나, 몽주의 머릿속은 시야에 보이는 황금빛 들녘이 없었으니, 뜻밖에도 현대의 사정만이 가득했다.
“공태수라…….”
바로 뒤따르는 탁기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충분히 컸다.
그의 이름을 읊조릴 수 있었던 건 방 실장의 고백 덕이었다.
그녀를 매수하여, 그가 자신이 또 다른 경매품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니, 회의실에 도청 장치를 둔 자 또한 공태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도청 장치와 관련해서, 경호 업체에서 나름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도청 장치의 출력으로 볼 때, 그리 먼 곳에 수신 장치를 둘 수 없었으니, 몽주의 집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었다.
실제로 하루 만에 대략 위치를 얻을 수 있었으니, 바로 옆집이었다.
물론 그 주택 단지의 특성상 붙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가까운 집이 비어 있고, 최근에 그 집을 잠시 빌린 자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다시 잠에서 깨면, 금방 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 몽주는 이미 공태수로 내심 확정하고 있었다.
다만, 의아한 것은 단지 경매 때문이라면 굳이 도청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었다.
이미 방 실장을 매수한 셈이었고, 또 다른 경로로 경매를 할까 걱정했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영향력이라면 충분히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한데, 굳이 도청을, 그것도 몽주의 전화를 도청하는 것도 아닌, 그저 회의실을 도청한 이유가 짚이지 않았다.
참고로 도청을 발견하고, 경호 업체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몽주의 휴대폰과 집 전화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것이었고, 탐지기로 집 전체를 샅샅이 훑기도 하였는데, 오직 회의실에서만 도청 장치가 발견되었다.
사실 회의실에서 오고간 이야기가 새어 나간 것 자체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도청한 기간을 몰라, 어디부터 어디까지 얼마나 들었을지는 몰라도, 들어 봤자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인가.’ 싶은 게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고, 좀 주의 깊게 들었다면, ‘놀이’를 놀이라 칭하는 것도 들었을 터이니, 그냥 ‘별 희한하게 놀기도 하네.’정도의 감상만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만약 도청을 한 것이 그저 경매 때문에 좀 과한 짓을 한 것에 불과하다면, 안 빼앗기면 그만이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미 경호 인력도 세 배로 늘리기로 하여, 예전처럼 엄한 놈들이 강탈하려 해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처럼 저열한 짓거리를 한다면 오히려 증거를 거둬 법 앞에 던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방 실장이 걱정이었는데, 그녀도 몽주의 다음 경매만 진행한 후에는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외국으로 나가 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공태수 일당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아 안타까워, 그녀를 재단 쪽으로 거두고 보호해 줄까 생각 중인데, 아직은 밝히지 않았고, 차기 경매에서 그녀가 하는 모습을 본 뒤에 결정하기로 하였다.
애초에 방 실장도, 몽주가 내놓으려는 보물에 대해 어느 정도 확인이 있은 후에야 공태수의 제안에 대해 고백한 걸로 보아, 몽주와 공태수 사이를 저울질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몽주의 경매를 도와 얻는 것이 공태수의 제안을 따라 얻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리라.
그러니, 몽주도 방 실장이 끝까지 신뢰를 지킬지를 본 연후에 결정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속내의 고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나자, 그제야 시야에 보이는 것들이 머릿속에도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냐?”
“한밭이라고 합니다. 길 따라가면 공주목이 나오지요.”
역사에서 훗날 대전이라는 대도시로 성장한 그곳은 고려시대에는, 당대의 시선에서 봐도 그저 농촌에 불과했다.
넓은 평야에 가득한 벼들이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흔들리며 반짝반짝 빛났다.
하나, 몽주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흘러넘치고 있었으니, 저토록 벼가 빽빽하게 들어선 논이 현대에 비하면 십분지일에 불과한 소출량만 가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서두르자. 이틀 내에 개경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 * *
개경에 도착한 지 하루가 지나, 몽주가 녹빛 관복을 입고, 머리에 어사화(御史花)와 비슷한 수술을 단 관모를 쓴 채 조정 앞에 나아갔으니, 들어갈 때는 정7품의 승에 불과하였으나, 공신 책봉례(功臣 冊封禮)를 마치고 나올 때는 푸른 관복을 입은 종5품의 한양별시 판관(判官)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제주현남(濟州縣男)이기도 하였다.
“정녕 제주현남으로 만족하는 겐가?”
행사 후에 신돈이, 몇 번이나 했던 질문을 재차 하였다.
몽주는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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