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81)
* * *
미사리의 어느 카페. 몽주는 공태수를 앞에 두고 있었다.
카페 안에는 그 두 사람과 그들의 일행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카페 주인이야 어딘가에 있겠지만, 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반나절 늦게 카페를 여는 대가로 하루치 매출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했던 것이다.
몽주는 이왕이면 서울 도심 한복판의 개방형 카페 아니, 카페든 아니든 사방이 트인 곳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공태수 쪽이 그것을 거부하여 미사리까지 나온 것이었다. 여기 카페도 충분히 트여 있긴 한데, 주변에 다른 건물도, 사람도 없는 곳이었다.
물론, 아무 준비도 없이 오진 않았다.
“조심성이 많군.”
인사도 없이, 마주 보고만 있던 공태수가 몽주의 뒤에 서 있는, 카메라를 든 경호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앉은 몽주와 공태수의 뒤로 각각 몇 명의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 물론 경호원들은 그게 전부가 아니어서, 카페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들까지 합하면 십여 명에 이르렀다.
“경호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카메라를 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둘 다겠지.”
“뭐, 경호원이야 회장님도 많이 데려오셨는데요. 전 그보다는 카메라를 믿고 있죠. 저게 저래 봬도 인터넷으로 연결해서 원거리로 녹화되는 중이거든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인터넷에다 확 풀어 버리려고요. 어차피 경찰에 고발해 봐야 솜방망이 처벌로 끝날 테니, 망신시키기라도 해야죠. 좀스럽다고 여기진 마십시오. 아시겠지만, 제가 좀 얻어맞은 적이 있어서요. 근데, 절 때린 놈들은 안 데리고 오셨네요. 안 보이네…….”
몽주가 이야기하고 괜히 두리번거리며 콧수염 패거리를 찾는 동안, 공태수의 입가에는 내내 비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마치 하룻강아지를 보는 범인 양.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해.”
“그러죠.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도청하신 겁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아실 텐데요. 뭐, 발뺌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용건은 도청 때문은 아니니까요. 이미 제가 발견했으니 이젠 소용도 없을 테고요.”
몽주는 잔을 들어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곤 다시 말하였다.
“저한테 관심을 끊어 주십시오. 그러면 상당히 가치 있는 고미술품을 드리죠. 회장님의 안목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한 걸로요. 어떻습니까?”
“그리 말하는 걸 보니, 뭘 가지고 있긴 한 모양이군.”
“어차피 제가 뭘 가지고 있다고 믿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도청까지 하신 것이고요.”
“도청은 모른다니까.”
“예예, 어쨌든 제 제안에 대해서나 말씀해 보십시오.”
몽주가 채근하자, 공태수가 끌끌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럴까. 얼마나 좋은 게 있는지나 말해 봐. 좋은 거래를 한다면야 나야 귀찮은 일 안 해도 되니까 좋지.”
“…….”
사갈(蛇蝎) 같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몽주는 비로소 깨달았다. 공태수의 입은 뱀의 아가리 같았고, 눈빛은 전갈의 독침 같았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눈치가 제법이군.”
“그냥 한번 찔러 본 건데…….”
“잘 찔러 봤어. 난 이제 네놈이 가진 건 별로 관심이 없거든.”
공태수는 문득 기대고 있던 의자 등받이에서 상체를 떼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몽주의 뒤쪽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반걸음 앞으로 나오며 기습에 대비하였고, 그에 맞춰 공태수의 뒤쪽에 시립한 경호원들도 몸을 앞으로 기울여 기세를 올렸다.
“이번에는 내가 제안을 하지.”
“뭡니까.”
“그만둬.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
“제가 뭘 하고 있다는 거죠?”
몽주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러자 몽주를 쏘아보던 공태수의 입술이 꿈틀거리며 바로 앞의 몽주에게도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을 바꾸려는 짓 말이야.”
솔직히 말해, 몽주는 그 순간 속으로 경악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태수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몽주는 회의실에서 오간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그 ‘놀이’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몽주의 속내는 복잡했지만, 물론 겉으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죠.”
“……거짓말을 하는군.”
“그럴 수도요. 일단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먹겠으니까요.”
“그것도 거짓말이고.”
“원래 그렇게 단정 짓기를 잘하십니까?”
“그보다는 소싯적에 예리하다는 말을 좀 들었지.”
“많이 무뎌지셨군요.”
“끌끌…….”
공태수로부터 다시 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협상은 결렬이군. 자네도 어차피 이리될 줄 예상하지 않았나. 왜 굳이 만나자고 한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몽주를 내려다보며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떠나려 하였다.
몽주는 그런 그를 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
몸을 멈춰 다시 고개를 돌린 공태수에게로 몽주가 다가갔다. 그의 경호원 중 하나가 몽주가 다가가는 걸 막으려는 듯 나섰지만, 공태수가 손짓하여 그를 물러나게 하였다.
몽주는 그의 바로 앞에서 일순 머뭇거렸다. 하나, 지금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기어이 말문을 열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
몽주는 공태수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보며 말을 이었다.
“이미…… 변했고, 머지않아…… 변할 겁니다.”
아주 조그맣게 말하여 공태수에게도 들릴지 모를 말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앞의 것은 ‘과거는’, 뒤의 것은 ‘현재도’였다.
공태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거무스레하게 변하는 게 보였다.
‘이 자, 진심으로 믿고 있……!’
“이 개자식……!”
노령의 몸임에도 엄청난 기세로 공태수가 몽주에게 덤벼들었다.
몽주의 경호원들이 그를 막으며 공태수를 밀치려 하였고, 공태수의 경호원들이 다시 공태수를 감싸며 몽주의 경호원들을 밀어내었다.
카페 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 * *
도로 위를 달리는 세 대의 모하비 차량 중 한 차에 몽주가 앉아 있었다.
공태수의 ‘선제 공격’으로 일어난 소란은 다행히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되었다.
하나, 몽주의 머릿속에는 공태수의 표정과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세, 아마도 살기라고 해야 할 것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최근에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요성에서 수문낭장 노을준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그랬던 것이다.
“기가 막히는군.”
몽주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좌우에 앉은 경호원들이 슬쩍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하나, 몽주는 그들의 시선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공태수와의 만남을 청한 건,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고미술품 몇 점으로 그를 달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그가 자신의 겸양을 겸양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애초부터 큰 기대는 없었기에 파투 날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나, 공태수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 어떻게 자신이 세상을 바꾸려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몽주로서는 공태수가 그런 결론을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공태수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자체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겼다.
그것도 작은 도발에도 발끈하여 성정을 참지 못할 정도로 그의 판단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큰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저 예전처럼 쓰레기 같은 작자들을 동원해서 보물이나 빼앗으려 할 거라고 여기는 걸로 그쳤을 것이다.
하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공태수는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러려고 할 것이다. 그 정도로 분노하고 있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몽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앞자리의 경호팀장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따라오는 수상한 차는 없습니까.”
“네? 예. 애초에 통행량이 별로 없습니다.”
평일 오전이라서인지 오가는 차량이 드물긴 했다.
“서울 진입하면 대로로만 이동하고, 가능한 멈추지 말아주세요. 멈춰야 한다면 가급적 중앙 차선에 서고요.”
팀장은 몽주의 요구에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내 알겠노라 대답하며, 무전기로 앞뒤 차량에게 연락하였다.
망상일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당장 어디선가 그 콧수염의 무리들이 들이닥쳐 자신을 죽이려 들 것만 같았다.
몽주는 경호 인력을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삼일 후에 실행해 주십시오.]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공태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해야 한다.
* * *
한양부 별시의 판관(判官)이 되니, 이전 승(丞)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업무량이 많아졌다.
시전이 고려 내 모든 상업량을 감당하는 걸 결코 아니지만, 공식적인 물동(物動)의 대부분을 처리하기에, 한양 별시에도 관련된 업무가 쏟아진 것이었다.
개경의 시전이 가장 큰 규모이긴 하나, 한양부 별시도 결코 작지 않았으니, 삼남(三南)지역 중 동경(경주)이 중심이 된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물류 중 적지 않은 양이 한양부로 집결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몽주는 별시청(別市廳)에 앉아 무수히도 많은 결재를 감당하였으니, 피곤한 중에도 최선을 다하여 일했다.
그렇게 일에 열중한 이유는 이 시대의 물류 체계를 이보다 더 확실하게 파악하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명이 안정세를 되찾을수록 한중일 간의 물동량이 증가하는군.”
들어오는 녹계(錄啓)를 보며, 아라비아 숫자와 한글로 된, 그러니까 다른 이들이 보면 암어(暗語)로 보일 요약을 정리하니, 고려 내의 물동량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교역 또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원명 교체기에 급격히 줄어들어, 사실상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역이 근래에 점점 증가하고 있었는데, 재밌는 것은 그와 동시에 왜국과의 교역도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대에서 중국이 발전함에 따라, 범동아시아의 경제 규모가 함께 커지고 물류도 활발하게 변한 것과 일맥상통한 일이라 여겨졌다.
다만, 그 활발한 무역은 모두 사무역(私貿易)이고, 동시에 위법한 밀무역(密貿易)이었다.
그러니까 전라에서 느닷없이 유통되어 한양부에도 일부 올라온 중국산 비단은, 분명 전라도의 누군가가 몰래 배를 띄어 중국에서 들여온 것임에 틀림없고, 충청도에서 갑자기 등장한 중국산 약재와 향료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육로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는 왜국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동경(경주)의 별시 때문에 한양부에 전해지는 건 많지 않았으나, 엄연히 황과 수은이 유통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으니, 왜국과도 사무역이 있음이 분명했다.
뭐랄까, 교과서에서 조공 체제하의 공무역을 배우면서, 사무역도 활발하였다는 서술의 실체를 목격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아마 고려의 조정에서도 분명 인지하고 있는 부분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고작 별시 판관에 임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임에도, 몽주가 이만큼이나 알아볼 수 있었으니, 이전 판관은 물론이고, 경시감이 확대되기 이전의 고위 관리들 중 이를 알아볼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교역을 멀리하고 내수 중심의 자급 경제 체제를 구축하려 한 명나라든, 남북조 시대의 혼란 속에, 과거 여몽 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반발로, 공식적으로 고려와의 관계를 무시한 왜국이든, 결국 이문을 노리는 상인들의 욕망을 모조리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또한 자본주의의 씨앗이랄까. 후후,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직은 너무 멀지.”
재밌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으로 중얼거렸으니, 비록 자본주의의 씨앗이라기에는 너무 부족하지만, 이기(利己)하는 마음은 시대와 체제의 구분 없이 사람을 움직이고, 도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 동시에 그런 활발한 무역이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몽주는 예견하고 있었다.
“감합 무역 체제가 본격화되면 점차 감소하겠지.”
조공 체제의 일환으로서 감합 무역이 시작되면 사무역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나라가 교역 이익을 미끼로, 동아시아에서 정치 외교적 위상을 크게 높이기 위해 감합 무역을 유도하면, 주변국들은 감합부(勘合符)를 늘이기 위해, 그리고 확보한 감합부를 잃지 않기 위해, 사무역을 보다 철저히 탄압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 고려 사신과의 협상에서 감합 체계의 시발(始發)이 있었으니, 비록 지금은 명나라 내부에 갈등이 있어, 시행 시기를 늦추고는 있지만, 그래 봐야 시간문제임에 틀림없었다.
주원장이 크게 숙청 작업을 실행하는 바람에, 명의 관료 체계에 빈틈이 많아, 새로운 제도가 출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명에서의 곤경과 행운은 모두 주원장이 요동보다 권신들을 척결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 여긴 덕이었군.”
지난 사신행에서, 태자를 앞세워 요동에 대한 논의를 하게 한 연유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명에서 시행된 숙청의 명분은 황실을 모멸한 자들을 벌한다는 것이었으니, 태자가 협상에서 실패하여 요동을 고려에 내준 것에 대해 비판한 신료들이 그 대상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태자 외 황자들을 끼고 돌던 자들이 중심인 것을 보면 확실하게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동아시아의 상황에 대해 재밌다며 요약문을 정리하던 몽주였지만, 이내 또 쏟아져 들어오는 녹계 앞에 그 재미도 뒤로 미뤄야 했다.
하나, 추가로 들어온 문건을 받자, 몽주는 별시와 관련된 업무도 제쳐 두고 그 문건에 집중하였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확보했군.”
문서의 내용은 청주로 보낸 가복들이 철당간(鐵幢竿)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폐허가 된 용두사(龍頭寺)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며 며칠에 걸쳐 철당간을 이루는 원통들 중 흩어져 남아 있는 20여 개와 당간지주(鐵幢砥柱)를 빼돌리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현대에서는 청주의 중심가에 서 있는 국보 41호 용두사지 철당간(龍頭寺址 鐵幢竿)은 고려에서는 더욱 외로웠으니, 몇 번의 전화(戰火)와 난리로 완전히 폐허가 된 용두사 터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 ‘보물’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용두사에 귀신이 나온다 하여 사람들이 발길을 좀처럼 두지 않은 덕이었다.
물론, 그 덕에 몽주가 가복을 시켜 철당간을 회수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이로써 최소한의 준비는 되었다 하겠군. 열흘 안에 한두 점만 더 들어오면 좋겠지만 말이야.”
얼마 전에, 포은으로부터 귀갑함(龜甲函)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그 귀갑함은 방 실장이 말해 준, 중국에서 사라진 바로 그 보석함이었다.
거북 모양의 상자인 귀갑함은, 정말 현대 중국에서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화려했으니, 귀갑의 무늬마다 색이 다른 자개가 새겨 있었고, 살짝 나온 거북의 발에는 청홍백흑의 깨알 같은 보석이 발톱처럼 박혀 있었으며, 머리에는 금칠이 되어 있었다.
보석함이기 전에 그것 자체가 보석으로 보일 정도였다.
사실 포은으로부터 귀갑함을 얻는 건 쉽지 않았다. 그 함이 포은의 정실부인 이씨에게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주에게 구명(求命)의 은혜가 있다 여겨 가능한 부탁을 다 들어 주겠노라 하였던 포은도 아내에게 준 것을 도로 빼앗을 수 없다며 난처해했다.
하여, 몽주가 이씨 부인에게 고하여 직접 부탁하였으니, 며칠을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내주었다. 물론, 공으로 얻은 건 절대 아니었고, 비싼 장신구들을 바친 것에 더해, 비노와 선로를 바리바리 안겨 주어 상실감을 어느 정도 채워 줘야 했다.
그렇게 중국의 국보급 보물 귀갑함과 한국의 국보 용두사지 철당간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공태수를 곤경에 빠뜨릴 최소한의 준비는 마련된 셈이었다.
국보가 사라져 난리인 통에 공태수에게서 그 국보가 발견된다면 그는 그것 또한 무마할 수 있을 것인가.
심지어 중국의 보물마저 있다면, 중국 당국마저도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그럴 리가…….’
별시청의 내실에 앉아 몽주는 씨익 웃음을 흘렸다.
다시 훗날의 국보와 관련된 파발이 도착한 것은 이틀 후 그리고 칠일 후였으니, 각각 혜심고신제서, 금동삼존불감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국보 42호 혜심고신제서(慧諶告身制書)는 이것을 가지고 있던 전라도 송광사(松廣寺)의 주지승이 금욕에 물든 ‘땡중’임을 알았기에 금은보화를 대가로 하면 얻을 수 있을 리라 일견 예상할 수 있었지만, 국보 73호인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은 정말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전주(全州)의 한 상인이, 몽주가 여러 공예품을 찾는 것을 전해 듣고 비노와 선로의 거래를 늘리기를 청하며 바쳐 왔던 것이었다.
현대 한국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들 중 3점이나 획득한 것은 몽주의 기대치를 넘었다 할 만했다.
사실상 국보들 중 15세기 이후의 것, 건물을 비롯하여 옮기지 못할 것, 또 무덤의 부장물 등등 얻거나 옮기기 어려운 것을 빼고 나면 실제로 노려볼 만한 것은 수십여 점에 불과했고, 게다가 훗날에 국보이긴 하나 고려 당대에는 흔하여(?) 어느 것이 국보라 특정하기 어려운 것 또한 제외하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건 몇 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국의 국보 3점과 중국의 보물 1점을 얻은 몽주는 양양군(襄陽郡)으로 향하였으니, 그 중에서도 현대에서 속초시 외곽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청대산 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찾았는데, 거송골(巨松)이라는 곳이었다.
십여 호에 불과한 그 작은 마을 한편에, 소문에는 천 년을 살았다는 큰 노송(老松)이 있어 거송골이라 불렸는데, 몽주는 그곳에 들러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열고 양곡을 베풀었다.
그렇게 인심을 사던 중에 노송의 장수를 비는 탑을 세우겠노라 하였으니, 마을 사람들이 오히려 기꺼워하여, 몽주는 곧바로 양양군내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복들을 불렀으니, 탑을 세울 목장(木匠)인양 꾸몄던 것이다.
그렇게 목탑(木塔)을 세우면서 그 아래 보물들을 묻었으니 겉보기엔 감쪽같았다.
“목탑이야 썩겠지.”
탑을 세우고 그 앞에서 불공을 드리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몽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말세야, 말세. 어떤 놈이 국보를 다 훔쳐 가고 지랄이야?”
속초 내 위치한 어느 대형 별장 안에서, 주인이 있을 때는 엄두도 못할 자세로, 그러니까 천만 원이 넘는다는 소파에 주저앉아 수백만 원짜리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은 자세로 아침 뉴스를 보고 있던 별장지기 장씨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간밤에 국보가 세 개나 사라졌다 하여 뉴스에서 난리였던 것이다. 가만히 있던 물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실로 미스터리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국보 도난 사건과 관련된 뉴스를 보던 장씨는 별장채를 나섰다. 장작을 패기 위함이었는데, 겨울이면, 별장 주인인 공 회장이 아들, 손자와 함께 근처의 스키장을 이용할 겸하여 이 별장을 찾으니, 그때 쓸 것들이었다.
물론, 별장의 난방으로 가스를 쓰긴 했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장작도 함께 쓰곤 했던 것이다.
한데, 도끼를 가지러 창고로 가던 장씨의 눈에 무언가 낯선 것이 보였다.
“저게 뭐댜?”
장씨는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았으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별장의 자랑거리인 천 년 묵은 노송 옆에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가까이 가자, 굵은 나무토막들이 땅에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주변은 마치 무언가에 파헤쳐진 듯 잔디바닥이 뒤집어져 있기도 했다.
“희한하네…….”
장씨는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창고에서 삽을 들고 돌아왔다.
“산짐승이라도 내려왔었나 보네. 근데 어찌 들어왔을꼬?”
장씨는 삽날을 땅에 박으며 중얼거렸고, 뒤집어진 바닥을 고르게 만들기 시작했다.
뭔 진 모르겠지만, 도로 원상복귀시키면 그만이었다.
“아, 근데 저 큰 각목들은 파내야겠네. 그냥 묻으면 불쑥 튀어나오겠어. 근데 전에는 왜 저게 눈에 안 띄었을꼬?”
약 반 시간 후, 장씨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땅을 파던 도중 무언가 발견했는데, 주인댁에 연락하는 대신, 혼자 차지할 욕심이 생긴 것이었다.
그건 공태수에게는 나쁜 일이었고, 몽주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니, 만약 그가 공 회장 측에 연락하였더라면, 공태수는 상황을 모면할 최후의 기회는 얻었을 것이며, 몽주도 공태수를 고발하기 위한 추가적인 작업을 진행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일개 별장지기가 처리하기엔 너무 ‘큰 물건들’이었으니, 불과 이틀도 안 되어 뉴스 속보가 새로 떴다.
사라졌던 국보들이 속초에서 모두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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