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82)
눈을 감고 있으니, 마음이 다소 편안해졌다. 적어도 서울지검으로 들어오면서 기자들의 질문 공세와 카메라 플래시 세례 앞에 섰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나, 공태수는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임을 알고 있었다.
“허허…….”
허탈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자신이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 수많은 범죄자들을, 특히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을 잡아들였던 그가 이처럼 용의자라는 굴레를 쓰고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소환당할 줄은 몰랐다.
억울했다.
그 억울함 중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혐의를 뒤집어쓴 것은 사실 큰 비중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외면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더 컸다.
많은 이들이 그를 외면했다.
힘이 센 자들의 외면이었으니, 경찰 고위직, 대검 부장검사, 정부 장차관급 인사, 중견 정치인, 언론사 사장 등등 이제껏 공태수의 덕을 보고, 그에게 빚을 진 자들이기도 했다.
처음 경찰 내 후배의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웃기는 일이라 여겼다.
속초 별장의 별장지기가, 실종되었다 하여 난리가 난 국보들을 처분하려다 체포되었고, 그가 별장 안뜰에서 그 국보들을 발견했다는 진술을 했다는 걸 들었을 때,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하나, 사태는 금세 웃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적당히 연락을 돌려 무마하려고 했고, 실제로 연락 받은 이들 모두가 걱정 말라는 대답도 해 주었다.
그런데 TV 화면에 그의 이름이 떴다. 정확히 이름은 아니었지만, 국내 최대 대부업체 F 캐피탈의 K 회장이라고 했으니, 이름을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이름 뒤로, 국보 도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 방송국의 사장은, 공태수가 연락하여 걱정 말라는 장담을 받았던 자들 중 하나였다. 다시 연락을 취했을 때, 그 사장 놈은 통화를 거부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들 공태수를 외면하거나 자기 사정을 들먹이며 곤란을 표하였다.
모든 언론들이 그를 용의자로 보도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경찰이 영장을 들고 찾아왔다.
본래라면 경찰 내 지인들이 먼저 연락하여 조사에 대비하라고 귀띔을 해 주었을 터인데, 느닷없이 당하고 만 것이었다.
모든 것을 보여야 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증거가 되었다.
그가 지금껏 수집한 고미술품들이 그 대상이었고, 다시 언론에 그 사실이 흘러 나가, 그가 국보를 훔치려 한 자라는 이미지 메이킹용으로 사용되었다.
정당한 방법으로 수집한 것임을 증명하려 하였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건만, 그에게 그 고미술품들을 판 자들이 비겁하게 이제 와 강탈당했다고 언론에서 나댄 탓에 통하지 않았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정식 조사를 받음에도 언론에서는, 그리고 그 언론을 보고 믿는 대중들에게는 이미 국보 도둑 내지는 장물아비쯤으로 낙인찍힌 상황이었다.
대체 사태가 어찌 이리 험하게 돌아가게 된 건지 어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그 국보들 중에 중국 보물이 하나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하필 최근에 중국에서 도난당한 것이었다.
공태수로서는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심정이었으나, 상황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중국 공안 당국은 물론, 중국 공산당이 직접 나서 한국 정부를 압박한 모양이었다.
그건 단지 잃어버렸던 보물을 회수하는 걸 넘어, 일종의 자존심 회복의 문제였고, 중국 정부의 체면과 관련된 문제였으니, 그들은 범인을 반드시 색출하여야 했다.
그럼으로써 귀중한 중화의 문화재를 분실하여, 잃어버린 인민의 지지를 되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알음알음 겨우 알아낸 바로는, 중국 공산당 측이 한국이 중국 보물을 훔쳐 간 식으로 중국 내부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한중 간 외교 문제화하여 경제적인 압박까지 동원하려고 한다니, 한국 정부가 화들짝 놀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공태수가 범인이 아니면 안 되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그가 훔쳤다는 물적 증거가 없다거나 시간적 모순이나 알리바이가 있다는 것 따위는 제쳐 두고, 사방에서 그에게 자백을 강요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착칵.
눈을 감고 생각에 열중하던 공태수의 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니 비교적 젊은 검사가 두툼한 파일을 들고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공태수를 본 척도 않고 잠시 파일을 훑어보더니, 잠시 후 문득 시선을 올려 공태수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반갑습니다. 과거 공안 경찰계의 살아 있는 전설을 이렇게라도 뵙게 되니 참 영광입니다. 정말 명성이 대단하시더군요. 물론 대부분 악명이긴 합니다만.”
“…….”
나이로 보나, 말투로 보나 그 젊은 검사는 공태수와 관련이 없는 자였고, 그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공태수에게는 또 하나의 악재였다.
“이런 자리가 어색하시겠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죄가 있으면 고생도 좀 하고 그래야죠. 뭐,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다고 하시니, 좋은 변호사도 구하실 테고, 여기저기 힘도 좀 쓰실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죄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약한 벌로 갈음하실 것 같은데…… 그러니까 쉽게 쉽게 가시죠?”
“…….”
검사는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는 공태수를 바라보며 싱긋 웃고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 기본부터 시작하죠. 이름.”
“…….”
“이름.”
“…….”
“이름!”
“……공태수.”
“좋습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빨리 말씀해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주소.”
“…….”
“주소!”
그렇게 신상 명세에 대해 공태수는 대답해야 했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과정은 사실 꽤 의미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다 아는 신상 명세를 다시 물으며 검사의 질문에 고분하게 답하도록 만든다는 건, 검찰이 절대 봐줄 생각이 없다는 신호라는 걸 공태수가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분한 마음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마땅히 향해야 할 곳으로 향했으니, 공태수가 이를 가는 소리 사이로 한 사람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진몽주……!”
“……지금 뭐라 하신 겁니까. 누구 이름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무언가를 적고 있던 검사가 공태수가 뱉은 소리를 듣곤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공태수가 남기는 그 어떤 말에도 집중해야 했다.
이번 사건은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했다.
언론이 주목하는 것도 그렇지만 정부 내 고위층, 그러니까 검찰의 인사권에 영향을 줄만한 높은 분들이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공태수를 잘 엮어서 그가 국보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서 유죄 판결을 받도록 해야 했다.
물론, 관건은 국보보다는 중국의 보물이었다.
이미 수집한 증거들로도 공태수를 감옥에 보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 증거들이 국보 도난 사건의 죄를 증명할 증거가 아닌, 이전에 공태수가 고미술품을 여러 사람들에게 강탈한 증거일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확히 국보 도난 사건의 증거를 확보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중국 보물을 훔친 증거를 얻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하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조사를 해 보고, 추리를 해 봐도 도저히 공태수가 국보와 중국 보물을 얻은 과정을 추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공태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가 범행을 자백하는 거라면 최고겠지만, 아니라고 해도, 무어라 한 마디 나오는 것도 소중한 정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자가 날 이 지경으로 만든 게야.”
“그 말은 혹시 공 회장님에게 누명을 씌운 자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누명! 진몽주가 내게 누명을 씌우고 있어!”
공태수의 으르렁거리는 말에 검사가 눈빛을 빛냈다. 그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지도 않았는데, 기어이 이번 일과 관련하여 그가 무언가 단서를 내뱉은 것이었다.
검사는 공태수가 진범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누구라도 이번 사태의 범인으로 유죄를 끌어 낼 수 있으면 된다.
기대감이 폭발한 가운데, 검사가 공태수로부터 진몽주에 대한 고발(?)을 이끌었다.
그렇게 십 분 정도 흘렀을 때, 검사는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허탈하게 툭 던지면서 심드렁하게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진몽주라는 사람이 과거로 가서, 역사 같은 걸 바꾸고 있다는 겁니까? 그래서 현대도 바꿔 버리려고요?”
“그렇다니까! 내 말이 허황되게 들리는 건 알지만, 이건 분명 사실이야. 믿어, 믿어 달라고! 내가 그걸 알고 놈을 처리하려고 하니까, 그놈이 국보로 날 곤경에 빠뜨린 거야!”
“어떻게요?”
“어떻게 하긴…… 과거에서 그 국보를 구해서 옮겨 놓은 거지! 맞아, 그거야! 그러니까 내 별장 정원에서 그것들이 튀어나온 거고!”
말을 하면서 점점 생각이 정리된 공태수는 마침내 상황이 돌아간 정황을 제대로 짚을 수 있었지만, 그건 그만의 생각일 뿐, 검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용의자 파일을 펼쳐 보았고, 공태수에 대한 설명 중 ‘미신에 관심이 많음.’이라는 서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어디 그냥 관심이 많은 수준인가. 미신에 푹 빠져 미친 거지.’
그사이에도 공태수는 여전히 진몽주가 과거를 바꾸고 있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었고, 새롭게 그의 조부가 꿈에 나타나 경고해 주었다는 말도 남겼다.
물론, 그러면 그럴수록 검사의 뇌리에는 공태수가 노망난 늙은이라는 이미지가 강렬해질 뿐이었다.
“잠깐 쉬시죠.”
검사가 조사실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검찰 사무관이 다가왔다.
“검사님, 세무 쪽에서 준비 끝났다면서 도와줄 거 없냐고 물었습니다.”
“아이고, 웬일이래요? 그쪽에서 먼저 도와주겠다고 그러고? 이번 일이 급하긴 급해요, 그렇죠?”
“아무래도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모양입니다.”
“주판알이나 굴리는 양반들이 시나리오는 무슨 …….”
장난스레 대꾸한 검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시나리오는 우리 쪽에서 쓸 테니, 그쪽에서는 조사나 철저히 하라고 그러세요. 거기 소스도 많을 테니, 회사 탈탈 터는 거야 문제도 아닐 테고, 그냥 겁이나 확실하게 주라고 하고요. 그래야 나중에 시나리오가 잘 나오지.”
“알겠습니다. 근데, 저 노인네는 어떻습니까.”
그 물음에 검사는 손가락을 들어 머리 옆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제정신이 아니에요. 완전히 맛이 갔어요. 아, 근데, 사람 하나 조사 좀 해 줘요. 진몽주라는 사람인데, 최근에 고미술품 경매로 큰돈을 번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저 미친 노친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긴 했는데, 혹시 다른 일로 엮였을 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사무관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몽주라면…… 주 검사님 쪽에서도 나온 이름입니다. 저 노친네가 부리는 똘마니들 중 우두머리가 말했죠. 노친네가 진몽주를 죽이고 싶어 했다고요.”
“그래요? 아, 뭐야, 저 노친네…… 갈 때 가더라도 원수도 같이 데려가겠다는 거야? 이거, 환장하겠네. 검찰이 아주 만만한가 봐요.”
“진몽주, 조사해 봅니까?”
“뭐, 두 군데서 이름이 나왔으니, 한번 알아보긴 해야겠죠.”
* * *
남부지검을 나오자마자 휑한 바람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몽주는 절로 코트의 깃을 올리며 몸을 움츠렸다.
“춥네요. 어디 가서 따뜻한 육개장이나 한 그릇씩 하죠.”
점심때가 살짝 지난 시간이라 다들 출출했기에 몽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 사람, 몽주, 재상, 그리고 두신은 차를 타고 조금 달리다가 발견한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주문 후 세 그릇의 육개장이 테이블 위에 놓이고, 다시 다들 몇 숟가락씩 떠먹을 때까지 세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 문득 몽주가 말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검찰 조사까지 받으시고…….”
“참고인 조사에 불과한데요. 뭐, 그리고 얘는 경험도 있었으니까요.”
두신이 피식거리며 재상을 가리키며 말하자, 재상이 어이없어 하였다.
“인마, 그거야 대학 신입생 때, 선배따라 노동절 행사에 갔다가 얼결에 잡힌 거였잖아. 그냥 훈방이었다고. 게다가 검찰이 아니라 경찰서에 갔다 온 거에 불과했고. 아니, 잠깐. 너도 그때 그 행사에 같이 갔었잖아?”
“나야 안 붙잡혔지.”
“잘났다, 야. 아이고…….”
몽주는 털털하게 웃어 주었다.
국보 도난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 가까이 지났다. 그사이 몽주는 고려에 한 번 다녀오기도 했고, 현대에서도 여러 일을 처리하느라 무척 바빴다.
검찰에서 서면 조사를 요청한 게 삼 일 전이었고, 오늘 참고인으로 소환되었다. 서면 조사와 다른 게 있었다면 눈앞의 두 사람, 즉 재상과 두신도 함께 와야 했다는 점이었다.
공태수가 연신 진몽주라는 이름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그리고 그의 똘마니들 중에서도 진몽주라는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엮일 일은 없었다. 아니, 고미술품을 강탈당했고, 도청도 당한 데다, 미사리 카페에서 한 번 공태수를 만났다가 드잡이까지 당했으니, 그냥 피해자일 뿐이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물론 천몽에 관한 건 빼고 다 말해도, 몽주가 검찰의 주시를 더 이상 받을 일은 없었다.
실제로 지금 재단 설립 일을 맡고 있는 변호사가 연수원 동기들을 통해 알아 와 전한 말에 따르면, 검찰은 이미 공태수를 주범으로 확정했고, 그의 똘마니들을 공범 내지 청부원으로 삼아, 유죄 판결을 얻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고 전했다.
물적 증거가 부족하긴 하나, 포춘(Fortune) 캐피탈 측을 압박해서 공태수의 범행 가능성을 지지하는 증언들을 캐내었다고 하니, 이번 일에 있어 조사 과정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고, 이제 지난한 법정 다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몽주는 새삼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중국이란 현대의 중국이기도 하고, 동시에 고려 시대에서의 명나라이기도 했다.
몽주가 공태수를 곤경에 빠뜨린 건 사실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순탄하게 흘러갈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
공태수가 그가 가진 것들, 재산과 인맥을 통해 거세게 저항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나, 실제는 공태수가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 그가 가진 재산과 인맥은 이번 일 앞에서 그를 모두 배신했다.
인맥이야, 상황이 안 좋다 싶으니 모두 등을 돌렸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재산은 의외였다.
세무 조사 한 번 털어 주자, 포춘 캐피탈 측이 단번에 항복하고 검찰에 협조하고 있는데, 따져 보면 결국 공태수의 아들과 친인척, 그리고 가신이라 할 만한 자들이 그러한 것이었다.
그게 다 재산 때문이었다. 세무 조사로 털려 망하느니 아버지이자 가문의 기둥을 버리는 비정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재산이 공태수를 배신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된 배경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다.
지난날 낙후된 나라에서 급성장하여 20여 년 새에 미국을 바짝 뒤따르는 규모의 강대국이 된 중국은 마치 과거 아시아 중화 질서를 다시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실 이번 국보 도난 사건에 끼어 있는 중국 보물을 두고 중국이 한국에 으름장을 놓고 있는 건, 그들의 위신과 체면에 관한 문제가 크긴 했지만, 그건 중국 국내적인 문제였고, 한국과 관련해서는 한국을 한번 시험해 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아주 말을 잘 듣고 있었다.
국내 기업들의 최대 생산지이자 주요 소비지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아시아 금융 질서를 구축하는 중국 앞에서, 한국은 중국의 헛기침에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 덕에 공태수가 희생양쯤 되는 대접을 받게 되었다.
어쨌든 그런 중국의 위세는 몽주가 석몽린으로 살고 있는 시기에는 더 심할 것이다.
14, 15세기 중국은 그야말로 세계 원 톱.
물론 그 시대에 세계는 하나의 덩어리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볼 수도 있어, 큰 의미 없는 원 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많은 힘을 소모하긴 하지만, 결국 그 시대에도 세계는 서로 통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의 위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고 해야 한다.
고려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
‘아니지, 꼭 그런 건 아니야.’
정말 다행인 건, 역사적으로 고려 말에 해당하는 시기는 원명 교체기이고, 고려에서 익히 경험한 바지만, 원나라가 몰락했다 하나 저항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으므로 아직 명나라가 중국을 석권한 건 아니었다.
덕분에 고려가 움직일 여지가 있었으니, 요동을 점유하고 인정받은 것도 크게 보면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현대의 중국과 고려 말의 명나라가.
세계 2인자에까지 솟구쳐 과거의 영광에 도전하는 현대의 중국.
오랜 전란과 혼란에서 서서히 벗어나 다시 전통 중화 질서를 재건하려는 명나라.
그리고 대한민국과 고려.
재미있는 건 아니, 재미있다기보다는 아이러니한 건, 현대에서는 한국이 중국을 상대로 무언가를 획책하기가 불가능하다 생각되는 것에 비해, 고려에서는 명나라를 두고 대계를 세워 실행하는 게 가능할 것처럼 생각된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있으니까? 후후.’
뭔가 오만한 생각 끝에 몽주는 피식 실소하고 말았다.
웃음을 보이고 나니, 문득 두 시선이 그에게 꽂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몽주가 긴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세 사람 사이에는 말이 거의 없었으니, 그저 육개장을 먹는 쩝쩝거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건 분명 어색함이었다.
‘놀이’를 시작한 지 세 달에 이르러, 제법 친해졌다 할 만 했건만, 최근에 이르러, 아니 특히 오늘 그 어색함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심해진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자신에게 시선을 두는 걸 느낀 몽주는 그들을 바라보았고, 그중 재상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 도난당했던 국보들 중에 철당간 말입니다.”
“……?”
“학계에 있는 선배가 알려 준 건데, 철당간을 이루는 원통의 수가 두 개 더 늘었다고 합니다. 원래 서른 개 정도의 원통으로 이뤄진 철당간인데, 전해오는 중 분실되어 스물다섯 개만 남아 있었거든요. 한데, 이번에 회수한 철당간 원통이 스물일곱 개라는 겁니다.”
“…….”
“뿐만 아니라, 혜심고신제서와 금동삼존불감도 상태가 전과 다르다고 하더군요. 다르다는 게 도난당하고 땅에 묻혀 더 손상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더 상태가 좋아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특히 혜심고신제서는 원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회수한 건 내용을 거의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고요.”
“…….”
“그 선배가 그러더군요. 그 국보들은 분명 진품이고, 도난당했던 국보들과 같은 게 분명한데도, 자꾸 정말 같은 건지 의심이 든다고요. 물론, 돌아가는 상황에 눈치가 보여, 다들 쉬쉬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나중에 분명 말이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재상은 말을 일단 마무리하며, 몽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두신 또한 같은 시선이었다.
몽주는 말이 없었다.
당황한 건 아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없던 보물을 새로 세상에 내놓는 것도 아니고, 원래 있던, 그러니까 비교할 자료가 남아 있는 보물이었으니, 그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몽주가 경험하고 있는 일을 누구도 상상할 수 있을 리가 없기에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미처 생각 못한 게 있다면, 재상과 두신에게 그 국보들의 차이점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놀이’에 대한 위화감을 한층 증폭시킬 수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몽주는 수저를 내려놓고 살짝 호흡을 고른 후 말문을 열었다.
“혹시 공태수가 검찰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게…….”
재상이 얼결에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더니, 문득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곤, 입술을 움찔거렸다.
대충 ‘하아, 미치겠네.’쯤 되는 말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감돈 듯했다.
이성과 육감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몽주는 두 사람과의 인연에 중대한 기로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꼈다.
“저는 부정하겠습니다. 두 분이 무슨 추측을 하시든지요.”
몽주는 잔을 들어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재미 삼아 한번 묻죠. 만약 우리가 하는 ‘놀이’의 전제 조건이 사실이라면, 즉 제가 진짜 고려에 가서 역사를 바꾸고, 그래서 현대도 바꾸려고 한다면,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면, 두 분께서는 어쩌실 겁니까?”
“…….”
재상과 두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들에게는 별로 재밌는 질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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