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ormer Tyrant's Resignation RAW novel - Chapter (83)
* * *
몽주의 한 손에 작은 부처가 쥐어져 있었다.
높이 25센티미터의 목조(木造) 약사불(藥師佛)로 입상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었으나, 뒷면이 잘려 평평한 면이 있는 불상이었다.
바로 그 평평한 면에 몽주는 다른 손으로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 내 모든 광영을 바쳐 대의왕께 기원하나이다. 내 자식이 두신(痘神)과 재상(災傷)을 피하게 하시옵소서.
글귀를 완성한 몽주는 쓴 걸 확인하며 미소를 지은 후, 작은 칼을 들어 쓰인 글자 위를 파내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뒤에서 앵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얼 하시는 거예요?”
“아, 이런, 소리 때문에 깨었나 보군.”
앵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몽주가 얼른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9개월이 다 차 이제 만삭에 이른 몸이라, 그녀가 비록 수련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제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몸만 가누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숨 쉬기도 어렵다 하고, 밥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데다가 압박감에 잠도 편히 자기 어려워하였다.
지금도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곤 몽주의 다독임을 받으며 겨우 잠들었다가 채 한 시진도 안 되어 다시 깨어난 것이었다.
깨어났음을 알리고는, 막상 부스스한 꼴이 잠시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돌려 머리를 매만지던 앵도는 몽주의 손에 든 것을 바라보며 다시 무얼 하고 있었는지를 물었다.
몽주는, 몸이 부은 것에 반해 오히려 조금 마른 얼굴이 된 앵도를 안쓰러이 보다가 그녀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약사불께 불공을 드리고 있었소. 우리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것이오.”
이에, 몽주가 약사불의 글귀를 보이자, 앵도가 그걸 보곤 배시시 웃었다.
“손수 글자를 새기시려는 거예요?”
“흠, 좀 서툴기는 하지만, 다른 이를 시켜서야 되겠소?”
“이리 주세요. 다른 이는 아니 되어도, 어미는 되지 않겠어요?”
“그 몸으로 하실 수 있겠소?”
“이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앵도는 몽주로부터 약사불과 조각칼을 빼앗듯 들었고, 몽주는 얼른 여분의 이불을 끌어모아 그녀가 등받이로 기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사각사각.
등을 기대고, 가슴과 배 위에 천을 놓은 위로 약사불에 조각칼을 박아 새기는 소리는 마치 사과라도 깎는 양 부드러웠다.
누가 보면, 일생을 조각술에 바치며 산 여인이라 오해할 법한 능숙함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쯤 지나자 열여덟 자의 글귀가 약사불의 등판에 새겨졌다.
“후우. 잘했나요?”
“대단하시오. 큰칼만 아니라 작은 칼도 잘 다루시는구료.”
“지금 흉보시는 거예요?”
“어찌 그러겠소.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몽주는 앵도의 곁에 같이 비스듬이 누워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맞추었다.
앵도가 부끄러워하면서도, 이어 있을 또 다른 애정 표현을 기대하는 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나, 눈을 감고 있어도 아무런 추가적인 ‘조치’가 없었다.
“저기…….”
대신 지아비의 머뭇거리는 음성만이 들렸으니, 앵도가 눈을 도로 뜨자, 몽주가 어색하게 약사불상을 들어 보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그걸……?’이라며 의아해하던 앵도는 곧 지아비가 들고 있는 약사불이 아까 그녀가 글을 새긴 약사불과 비슷하나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더 있었어요?”
“그렇소.”
“어째서 둘이나 만드시려는 거예요?”
“하나는 집에 모셔 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수와 지리가 좋은 곳에 묻어 두어 약사불의 축원이 크게 번성하길 기원하기 위함이오.”
“아…… 하면, 이것도 지금 새겨야 하는 거예요?”
“하는 김에…… 피곤하시오?”
“못할 건 없지만…… 만삭의 부인을 너무 부려 먹으시려는 거 아니에요?”
“미안하구려.”
그러면서도 몽주가 앵도의 손에 새 약사불을 쥐어 주니, 앵도가 새치름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자못 귀여워 몽주가 앵도의 얼굴을 감싸 쥐며 입을 맞추었으니, 이내 두 사람이 활활 타오…… 를 뻔했으나, 앵도가 문득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아이가 놀랐나 봐요.”
“응?”
보니, 속치마 아래 남산만 하게 나온 앵도의 배가 살짝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날 잊은 건 아니겠지 라며 존재감을 시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어, 이 녀석. 아비와 어미가 정다운 것도 참지 못하느냐.”
괜히 앵도의 배 가까이서 호통을 치는 척하니, 앵도의 배 안에서 아이가 다시 발길질이라도 하는지 배가 크게 꿈틀거렸다.
“하하하.”
깊어 가는 밤, 추대현의 현남댁 안방에서 한참이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
날짜를 따져 보면, 두 여인이 회임한 날이 하루 이틀 정도만 차이가 있었으나, 산기(産氣)가 온 것은 어머니 엄주이가 훨씬 먼저였다.
의원이 맥을 짚어, 아무래도 아이가 일찍 나올 듯하다 말하자, 해민이 미리 크게 사례해 둔 개경의 산파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 산파는 개경의 고관댁에 있는 생산(生産)만을 봐준다는 ‘엘리트’ 산파들 중 하나였는데, 산기 전에 미리 데려오기 위해서는 많은 은병을 건네주어야 했다.
그래도 기대만큼 능력(?)을 보여 주었으니, 추대현에 오자마자 집안 청소를 명하였던 것이다.
단지 청소하라 시키고 만 것이 아니라, 직접 가복들을 부려 철두철미하게, 바닥부터 천장까지 깔끔하게 쓸고 닦게 만들었다.
특히 생산이 있을 안방은 끓는 물로 적신 명주로 손수 닦아 내고, 출산 시에 쓰일 이부자리도 모두 삶았으니, 몽주가 보기에 멸균의 개념을 아는 듯 보였다.
하나, 그다음에 한 것이 생닭을 죽여 받아 낸 핏물에 하얀 비단을 물들여 안방문에 걸어 두고, 남은 핏물을 주변에 뿌려 액을 막는다 하니, 소독이나 멸균처리의 개념이 아닌 무속적인 의식임을 알 수 있었다.
뭐, 어쨌든 닭 피가 묻은 손으로 무얼 하지 않는 이상, 몽주는 그냥 두고 보았다. 적어도 안방의 내부만큼은 전보다 더 깨끗해진 것은 분명했으니.
엄주이의 산통이 시작된 건, 산파가 온 지 이틀 만이었다.
늦은 저녁부터 시작된 산통(産痛)은 새벽까지 이어졌으니, 그 밤새 안방 밖 마당에서 서성거린 해민의 안색도 파리해졌다.
입동(立冬)이 지난 지 오래전이라, 추운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고통스러운 신음을 들으며 안절부절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처음 산통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고통을 이겨 내려는 주이의 목소리가 분명히 흘러나왔건만, 새벽에 이르러서는 앓는 소리마저 희미해졌으니, 이러다 무슨 일이 나는가 싶어 해민도 같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몽주도 해민의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에게 있어 엄주이는 어머니이면서 어머니가 아니었다. 하나, 산통을 겪는 어머니를 두 발 떨어져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몹시도 무거웠다.
몽린의 몸이 어머니의 고생에 같이 힘겨워한 탓이기도 했고, 몽주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앵도 또한 저런 힘든 상황을 겪을 것임을 알기에 걱정이 되기도 한 탓이었다.
그렇게 지아비와 아들이 뜬 눈으로 걱정에 파묻히고, 석 호장 집안 전체가 밤을 지새운 새벽녘에 문득 산파가 크게 호령하여 엄주이가 마지막 힘을 쏟아 내게 하였으니, 마침내 그 끝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그 소리에 몸이 경직된 해민이 안방문이 열리기만을 고대하는데, 잠시 후 초췌한 산파가 모습을 드러내곤 웃음을 보였다.
“득남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오……! 하, 하면, 부인은 어떠시오?”
그러자 산파가 살짝 안색을 어둡게 하여, 해민과 몽주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많이 상하셨습니다. 차후에 몸조리에 힘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저, 저런…… 내 들어가 봐도 되겠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산파가 도로 들어가니, 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파가 도로 나오며 문 앞에서 비켜서자, 미리 신을 반쯤 벗어 두고 있던 해민이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갔다.
몽주도 따라 들어가니, 얼굴이 반쪽이 된 어머니 주이가 힘없이 누워 있었고, 그 곁에 하얀 천에 쌓인 핏덩이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방 안에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해민은 아기에는 시선을 두지 않고 곧바로 주이 곁에 바짝 앉아 그녀의 젖은 이마를 쓰다듬었다.
“힘드셨소. 몸은 괜찮으시오?”
“……괜찮습니다.”
괜찮다 하나, 말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거의 감기듯 내려와 있으니, 적어도 체력이 다하여 말할 힘도 없음이 보였다.
“우리 아기를 봐주세요. 사경을 이기고 태어난 아이입니다.”
하며 주이가 곁에 포대에 싸인 채 누워 있는 아기를 바라보니, 해민도 그제야 자신의 둘째 아들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몽주도 함께 보니, 정말 주먹만 하다 싶을 정도로 작은 녀석이, 한번 씻기기는 했으나 핏기가 남아 불그스레한 모습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해민이 그 핏덩이를 들어 가슴에 안으니, 그의 눈가가 촉촉해짐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어여쁘구나. 참으로 세상에 잘 왔다. 정말 잘 왔어.”
기어이 굵은 눈물이 해민의 뺨을 적시니, 몽주도 문득 가슴속에서 솟는 감동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추운 새벽이나 그 방의 온기만큼은 추위도 범하지 못하였다.
* * *
앵도는 좀처럼 산기가 없었다. 음력으로 열 달이 꽉 찼음이 분명한데도 그러했으니, 의원이 맥을 짚어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름 전에 태어난 아우는 이미 어미젖을 힘껏 빨며 성장하느라 바쁜데, 비슷한 시기에 뱃속에 들어선 자신의 아이는 여전히 어미 뱃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니, 몽주는 공연히 걱정이 심하여 가슴마저 두근거렸다.
개경에서 온 산파는 며칠 기다리다가 도로 상경하였으니, 산기가 있거든 다시 부르라 하였다.
하여, 몽주가 대신 가복을 부려, 안방을 중심으로 몹시 청결하게 하면서 앵도가 산기가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나, 함박눈이 내리던 날에, 자고 있던 앵도가 몽주를 깨웠다.
“배가 아파요.”
“……음?”
잠에서 막 깨어나 정신이 없던 참에 몽주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하나, 전날에도 의원이 아직 때가 안 되었다고 한 게 떠올랐다.
“저녁 먹은 것이 체한 듯하오?”
“아뇨, 그 배가 아니에요. 금방이라도…….”
앵도는 자신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말하니, 몽주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산파를 부르도록 하겠소.”
밖으로 뛰어나가 석삼이를 불러 깨우니, 요사이 시전에서 일하느라 피곤한 그도 놀란 모습으로 뛰어나왔다.
“당장 산파를 모셔 오너라. 아무래도 산통이 시작된 듯해.”
“알겠습니다요, 곧바로 개경…… 은 안 될 것 같습니다요?”
“누가 그 산파를 뫼시라더냐, 추대현에도 산파가 있을 것 아니냐. 당장 떠나라!”
“네!”
석삼이가 급하게 옷을 챙겨들고는 채 입지도 못한 채 수북히 쌓인 눈길을 헤쳐 달려가니, 몽주의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뭘 해야 되지? 아, 물을 끓여라!”
어머니 주이라도 부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주이는 여전히 이부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크게 아픈 건 아니었지만, 체력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몹시 쇠약한 상태였다.
새벽에 현남(縣男)댁이 크게 술렁이며 난리를 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사이에 안방에서는 앵도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고통을 표하는 음성이기 전에, 마치 무언가를 참는 듯한 신음이었다. 그쯤에 방에 들어갔던 점녀가 나와 몽주에게 다가오니, 평소 무표정한 그녀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주인님, 마님께서 곧 아기를 생산하실 듯합니다.”
“알고 있다. 하여 산파를 부르러 간 게 아니냐.”
“저…… 그것이…… 벌써 아기씨의 머리가 보이고…….”
“알았다니…… 뭐야?!”
몽주가 놀란 눈을 크게 뜨는데, 점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산파를 기다릴 겨를이 없을 듯합니다. 날도 몹시 궂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요.”
점녀가 손바닥을 펼치며 말을 하니, 굵은 눈이 그녀의 손에 점점이 박혀들어 이내 녹고 있었다.
“하면, 하면…… 어찌하면 좋을까. 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산파를 미리 모셔다 놓을 것을! 내 이 망할 돌팔이 의원 놈을 믿은 게 바보지.”
그렇게 난감함을 주절대는데, 점녀가 다시 끼어들었다.
“소녀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네가? 너 또한 경험이 없지 않느냐?”
아이를 낳거나 아이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여인이 있다면 좋겠건만, 현남댁의 가복들은 대부분 시커먼 남정네였고, 계집도 몇 있으나 대부분 시전에서 거하는 터라, 지금 집에는 앵도가 데려온 종옥과 점녀가 전부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 종옥도 어제 탁기를 비롯하여 몇몇 사냥꾼과 더불어 떠났으니, 아기씨에게 입힐 털가죽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잘은 모르나, 들은 것은 있습니다. 어차피 저뿐이지 않습니까.”
“하는 수 없구나.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라. 굳이 힘써 낳게 할 필요는 없으니, 최대한 늦추는 데에 열중하여라.”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점녀가 들어갔으나, 불과 차 두 잔 마실 시간 만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말았으니, 대문 앞에서 바깥을 보며 이제나저제나 산파를 기다리고 있던 몽주는 크게 놀라 뛰어들어 왔다.
곧바로 방문이 열려 점녀가 나왔다.
“서, 설마 벌써 낳은 것이냐?”
“마님께서 따님을 생산하셨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축하한다는 말을 하며 점녀가 몽주의 눈치를 보니, 혹여나 계집이라고 해서 실망할까 싶었던 것이다.
하나, 몽주에게는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앵도는? 앵도는 건강한 것이냐?”
“아기씨와 마님 모두 무탈하신 듯합니다.”
몽주는 그 말에 기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이 환호하였다.
잠시 후, 생산의 흔적을 점녀가 치우자 몽주는 방으로 들어갔다.
앵도가 벌써 앉아 포대에 싸인 아기를 끌어안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시오?”
“걱정하였는데, 금세 낳았습니다. 아기가 많이 도와줬어요.”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어머니 주이와 달리, 앵도는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모습에 한 줄기 남은 걱정마저 떨쳐 낸 몽주가 그제야 아기를 보았다. 역시나 핏덩이라 주글주글하였지만, 몽주의 눈에는 보석처럼 곱게만 보였다.
“한번 안아 보세요.”
내어 주는 아기를 받아 든 몽주는 가만히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아기가 어미 품을 떠난 것을 알았는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채 뜨지 못한 눈을 하곤 고개를 마구 움직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몽주는 절로 웃음을 터뜨렸다.
“강아(康兒)야, 내가 네 애비다. 옳지. 그래, 내 목소리가 귀에 익으냐.”
몽주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기가 불안한 듯 뒤척이다가 목소리가 난 방향 곳으로 정확히 고개를 가늠하더니, 입술을 뻐끔거렸다.
몽주의 귀에는 ‘아빠!’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얼마 후 뒤늦게 도착한 산파가 그보다 조금 일찍 온 몽주의 부모와 몽주에게 앵도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고 알리니, 현남댁 분위기가 크게 환해졌다.
그렇게 석 호장댁에 고추가 달리 금줄이 매달리고, 현남댁에 솔가지가 달린 금줄이 걸리니, 강이가 태어난 후 삼 일 동안 추대현에 잔치가 열렸다.
그렇게 기쁜 날 속에서 몽주가 문득 속으로 다짐하였다.
‘비단 현대의 한국만이 아니라, 태어난 강이와 또 태어날 아이, 그리고 그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을 위해서……!’
* * *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재상과 두신이 차에 올라탔다.
모교 역사연구소에서, 정확히는 연구소 부속 측정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이 지금 향하는 곳은 몽주의 재단이었다.
오늘이 ‘놀이’를 하는 날이긴 했다. 다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놀이’가 놀이가 아니라는 예감, 아니 확신에 가깝다 해야 할 정도의 강렬한 예감이 두 사람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엊그제 아침에 몽주가 두 사람을 불렀고, 함께 양평에 위치한 몽주의 사유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야산의 어느 바위아래 몽주와 함께 땅을 팠으니, 그곳에서 튼튼한 목갑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그 목갑 안에는 다시 작은 함이 있었고, 그 함 안에 작은 불상이 있었다.
몽주는 그것이 ‘놀이’가 놀이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파헤쳐진 흔적도 없는 곳에서 곧바로 오래된 목갑이 나온 것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그 허황된 추측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싶었다. 하나, 그 작은 목제 불상의 뒷면에 쓰인 글귀를 보다가 이내 알 수 있었다.
두신과 재상.
물론, 한글로 쓰인 건 아니었다. 한자로 ‘痘神’, ‘災傷’이었으며, 각각 천연두를 퍼뜨리는 귀신과 자연재해로 입는 피해를 의미할 뿐이었다.
하나, 의미야 어떻든 두신과 재상이 나란히 쓰인 건 예사롭지 않았고, 분명 작위적이었다.
몽주는 그것이 고려에서 자신이 새겨 넣은 것임을 알리면서 알아볼 만한 건 알아보라며 그 불상을 넘겨주었다.
하여 두 사람이 모교 역사 연구소에 들렀으니, 특별한 감정 없이도, 그 불상이 고려 후기의 것임을 확인받을 수 있었고, 오늘 연대 측정 결과마저 확인하였으니 여지없었다.
연구소 측에서 고려 후기의 목조불상 연구를 위해 그것을 빌릴 수 있겠느냐며 물어 올 정도였던 것이다.
불상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기에 연구소에 그것을 맡겨 두고 나온 두 사람의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무표정하게 운전을 하던 두신이 문득 큰 한숨을 내쉬었고, 그에 반응하듯 재상이 물어 왔다.
“어떻게 할 거야?”
“넌 어찌할 건데?”
“…….”
두 사람 모두 말이 더는 없었다. 그 사이에도 차는 달려 재단이 입주한 건물에 닿았다.
아직 재단이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그 사무실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바당보름의 구성원들로, 사무실 내부 공사를 마쳐 작업실, 그러니까 범선 설계를 위한 컴퓨터 설비와 축소 모형 제작을 위한 3D 프린터 설비가 갖춰지자, 그곳에 와서 몽주의 요청에 따른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재상과 두신이, 바당보름원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옮겨 재단 이사장실이자 ‘놀이’ 회의실에 다가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후에 노크하였다.
“들어오세요.”
안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몽주가 있었다.
* * *
이십여 분 후, 이사장실 안 분위기가 급변하였다.
“이 자식!”
두신이 그의 두꺼운 팔을 뻗어 몽주의 멱살을 잡고 그를 들어 올리면서, 다른 손으로 주먹을 들어 금방이라도 한 방 날릴 듯하였다.
곁에 재상이 움찔하였지만, 두신을 말리지는 않았다. 아니, 말릴 수 없었다. 두신이라면 분노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신이 그렇게 분노한 건, 그가 세상이 바뀌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로 지금의 가정, 아내와 아들을 잃을까 두렵다고 밝히자, 몽주가 이미 늦었다는 말을 남긴 탓이었다.
이미 역사가 변했기에, 현대도 변화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구라 치지 마! 그냥 변하는 게 어디 있어! 분명 트리거가 있을 거 아냐! 아니지! 너 이 자식, 지금 무슨 사기를 치고 있는 거야! 세상에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꾼다는 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해. 그치? 내 말이 맞지?! 말해, 이 자식아!”
멱살이 잡혀 흔들리는 가운데에도 몽주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런 반응도 그가 예상한 것 중에 있었던 터였다.
아버지가 유기 장인으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하였고, 지금도 좋은 아내와 더불어 귀여운 아들까지 얻은 그가 세상이 바뀌길 바랄 리가 없었다.
그건 반대로 잠잠한 재상을 봐도 그랬다.
홀어머니 아래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며 큰 그는 아무래도 지금의 세상이 바뀐다 해도, 크게 잃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인생을 ‘리부팅’해 보고 싶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재상은 두신의 분노를 보면서, 그의 어머니를 떠올렸으니, 불행한 그녀를 위해서라도 주사위를 굴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몽주는 두신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미 한 번 변한 세상입니다.”
“뭐?! 이 자식이 자꾸 무슨 헛소리야!”
“이번이 두 번째 천몽이라는 겁니다. 7년 전에 한 번 변한 게 지금 이 세상이죠.”
“……!”
“정말입니다.”
멱살을 잡은 두신의 손아귀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고, 이내 두신은 소파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게 좌절하는 두신이 연신 ‘말도 안 돼.’를 중얼거릴 때,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몽주가 잠시 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이미 말씀드렸듯 천몽이라는 책의 신기 덕에 저는 고려에서 석몽린이라는 자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첫 천몽이 아닙니다. 중학교 시절에 처음 천몽을 접했고, 고등학교 이 학년 때까지 천몽을 꾸었죠.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두통 신드롬. 그게 제가 첫 천몽을 끝마친 날 벌어진 일이었죠. 물론, 그날 세상은 변했고요.”
몽주의 설명을 한참이나 이어졌다. 첫 천몽 전의 한국과 세계의 역사에 대해서, 첫 천몽 속에서 그저 꿈이라고만 여기며 그가 행했던 일에 대해서, 그리고 첫 천몽 후 변한 세상에 대해서.
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도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 중에서 부모의 연이 바뀐 자는 없었다고.
다만, 솔직하게 고백하였으니, 그의 집이 평양에서 서울로 바뀌면서 이전에 알던 이들 모두를, 바뀐 세상에서 다시 확인할 수는 없었기에 장담하지는 못한다는 말도 하였다.
“고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세상에 묻힌 채 살았다면, 어쩌면 현대가 변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변한 게 없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두 분 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한 놀이는 결국 제가 고려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딱 그 놀이만큼 고려도 변한 상태고, 적잖이 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맘대로 저질러서요. 하나 제가 알고 있던 본래의 역사를 생각하면 지금의 한국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두 분을 속인 셈이 된 것에 대해서도 사과드립니다. 처음부터 밝힐 수 없었던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몽주가 말을 일단락하며 고개 숙이며 사과하자, 그제야 재상이 말문을 열었다.
“저는 믿고 싶습니다. 아니, 믿습니다. 한데, 한 가지 의아한 게 있습니다.”
“뭐죠?”
“말씀을 들어 보니, 천몽이라는 그 책에 대해서 그다지 고민해 보시지 않은 것 같군요.”
“고민이라면, 첫 천몽 후에 많이…….”
“아뇨, 천몽의 결과에 대한 고민 말고, 천몽 자체에 대한 고민을 말하는 겁니다.”
“그야 첫 천몽 때는 그냥 꿈인 줄만 알았고, 이번에도 고려에서의 일에 열중하느라 바빴으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천몽 자체에 대해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그저 꿈을 통해 과거로 보내 준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에 재상이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드러난 것만 해도 훨씬 규칙이 복잡해요. 조상 살해의 패러독스마저 무시하고 있잖아요. 뭔가 인위적이라는 느낌마저 들 만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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